해체해서 보기 /각묵스님

2009. 11. 29. 22:3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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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해서 보기


논설위원ㆍ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각묵스님 

초기불교 교학과 수행의 핵심을 한 마디로 말해보라면 필자는 주저 없이 ‘해체해서 보기’라고 말한다. 해체라는 용어는 이미 초기경전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부처님 제자들 가운데 영감이 가장 뛰어난 분으로 칭송되는
왕기사 존자는 부처님을 “부분들로 해체해서 설하시는 분”(S8:8)이라고 찬탄하고 있다. 여기서 해체는 위밧자(vibhajja)를 옮긴 것이다. 그리고 이 위밧자라는 술어는 빠알리 삼장을 2600년 동안
고스란히 전승해온 상좌부 불교를 특징짓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위밧자와딘(해체를 설하는 자들)이라 불렀다. 게다가 초기불교의 기본 수행용어인 위빳사나야 말로 해체해서(vi) 보기(passanaa)이다.

무상·고·무아 드러나

그러면 무엇을 해체하는가? 개념(施設, pan$n$atti)을 해체한다.
나라는 개념, 세상이라는 개념,
돈이라는 개념,
권력이라는 개념,
신이라는 개념을 해체한다.
 
이런 것들에 속으면 그게 바로 생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칭이나 언어 즉 개념에 속게 되면
죽음의 굴레에 매이게 된다고 부처님께서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강조하셨다.
 
나라는 개념적 존재는 5온으로 해체해서 보고,
일체 존재는 12처로 해체해서 보고,
세계는 18계로 해체해서 보고,
생사문제는 12연기로 해체해서 보게 되면,
온.처.계.연 등으로 설해지는 조건 지어진 법들의 무상.고.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처럼 존재를 법들로 해체해서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통찰하여,
염오(厭惡, 넌더리, 역겨움, 구토)하고 탐욕이 빛바래고(離慾) 그래서
해탈.열반.깨달음을 실현한다는 것이 초기경전들의 일관된 흐름이다.

한국불교에는 초기경전에서 가장 절실하게 말씀하시는
이 해체해서 보기가 빠져버린 듯하여 실로 유감이다.
 
우리불교는 법으로 해체해서 보라는 부처님의 명령(saasana)은 분별망상으로 치부하면서도,
초기경전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 불성과 여래장을 세우기에 급급하고,
본성자리를 상정한 뒤 그것과 하나 되려고 생짜배기로 용을 쓰고 있다.
 
해체하지 않고 무엇을 세우는 것은 비불교적인 발상이라 할 수밖에 없다.
설혹 해체해서 보지 않고 직관만으로 나와 세상을 공이라 보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결국 해체를 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외도의 자아이론(아상)이나 진인이론(인상)이나
영혼이론(수자상)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는 그
토록 해체를 강조하신 것이다.

해체해야 깨닫는다

그러므로
아비담마.아비달마와 유식처럼 분석을 강조하던,
반야중관처럼 직관을 강조하던,
화엄처럼 종합을 강조하던,
 
그것은 불교적 방법론인 해체에 토대해야 할 것이다.
해체의 토대를 튼튼히 한 뒤에 직관과 종합을 해도 늦지 않다.
해체의 기본기에는 아예 무지한 채 법계장엄부터 하려드는 것은
아직 아이도 낳지 않았는데 장가부터 보내려는 조급하고도
어처구니없는 발상 아닌가.
 
필자는 직관을 강조하는 반야부의 여러 경들조차 해체 끝에 드러나는 법의 자성을
강조하는 것을 보았다.
이런 토대위에 그들은 법의 무자성과 공의 직관을 다그치는 것이다.
어느 대통령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했다.
 
부처님 말씀의 핵심은 “뭉쳐두면 속고 해체해야 깨닫는다.
법들로 해체해서 보라”이다.
 

불공부도 이제는 하나하나 파악하고 그 뜻을 가름하는

이 해체작업이 필요한듯 싶습니다

 

한때는 여래장이 어떻고 저떻고

내안의 불성을 녹아있는것을 깨치면 부처고 어떻고

 

생주이멸하는 일체 현상계 는 마음의 환이요

생멸하는 현상계는 체대를 근원으로 일어나고

진여는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상대와 용대만 작용하여

 

이것은 여래의 본성이 숨어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치를 여래장 이라 한다라고 백번을 들어도

 

확실히는 먼소리인지도 잘모르겠고

아무튼 부처님설하신 초전불법을 잘읽고 그가름을 잘하며

 

우리 실상에서의 흐름에 좌우지 되지않는삶을

살아야 할것같습니다

 

각자의 근기데로 편하게 하십시요 우리가 불공부를 하는것이

 

괴독교인들이 천국가기를 바라는 마음같이

어디 극락가고 안가고의 문제라고 생각하시는

 

법우님들은 이제는 안계시리라는 생각입니다

 

내 앉은자리에서 성실하게 흔들림없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바르다고 생각하는것에 일념한다면

 

어느정도 내안에 옳바른 정립이 서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편안하십시요

 

 

 

내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가둬 놓고 살고 있습니다
쉽게 믿지를 못하고 마음의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스스로 감옥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사랑의 눈으로 마음의 문을 열면 세상은 더욱 넓어 보입니다.
내가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면 세상은 나를 가두고 세상을 닫아버립니다
내가 마음의 문을 열고 세상으로 향하면 세상은 내게로 다가와 나를 열고 넓게 펼쳐 집니다

내가 있으면 세상이 있고 내가 없으면 세상이 없으므로
분명 세상의 주인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입니다

무엇보다 소중한 건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우리의 몸 속에 영혼이 숨쉬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강한 사람에게 나보다 더 나은 사람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나요?
나보다 약하고 나보다 보잘것 없고 나보다 더 배운 게 없는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진정한 마음으로 그들을 대할수 있는마음을 가져 보십시요

표면적인 조건으로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 만나고 마음으로 사귀고 보이지 않는 부분을 사랑할수 있었으면 합니다

내가 더 마음의 상처를 입었어도 먼저 용서하고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따뜻한 화해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여는 작은 창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생각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