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종공구 육바라밀

2009. 11. 30. 19:5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728x90

 

그동안 1월과 2월은 49재나 천도제 등에 대한 법문으로 일관하여 대순진리나 다른 종교의 사람들에게 혹세무민 당하시는 일들이 없도록 자세히 일러드린 바이니 족하다 여깁니다.


이제 정해년 신년을 맞이하여 정초기도를 회향하는 마당에 진실로 불자로서 지혜로운 신행생활을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가장 기초적인 마음자세이건만, 사실은 가장 취약한 지라 모두들 살아가시다 어려운 환경에서 벌어지는 경계나 상황에서 주저앉고 마시기에 오늘 이 법문으로 일상의 신행기도를 왜 하는가? 일상의 기도를 하게 되면 어떠한 가피력이 있는가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얼마 못가 잊혀지고 말겠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한 고 윤장호 하사를 추모하는 애도의 뜻이 매스컴에 연일 보도되고 있습니다.


헌데, 제가 보는 관점이 달라서인지는 모르나 인터넷에 올라온 윤하사의 나이를 보니 27살 신유생 닭띄였고, 아버지는 65세 계미생 이었지만, 어머니는 59세 기축생 소띄였습니다.


한 집에 삼재가 둘이란 말입니다.

윤하사의 집안이 어떤 종교인지는 모르지만, 우연의 일치라고 해야 할까요?

여러분들께서 생각하시고 판단해보시길 바랍니다.


이렇듯 경제적으로 가진 것 넉넉하고 우리는 배부르고 등 따뜻하고 편안하면 세상에서 자기가 젤 잘났고 예수고, 부처고 다 별 볼일 없겠지만, 세상은 천지자연의 순행의 이치에 따라 다만 순리일 뿐이고 인간이라는 중생은 아무리 잘났다고 자기가 제일 잘난 것처럼 폼 잡아도 시시각각 다가오는 늙음과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질병과 죽음을 뱃 속에 담고 다니면서도 지 잘난 착각 속에서 온갖 교만과 아집과 편견으로 자기만의 울타리를 쳐놓고 그 안에서 안주하면서 자기와 뜻이 맞으면 희희낙락거리고 생각이 다르고 뜻이 다르면 웬수처럼 여기며 온갖 구업들을 지어대는 것이 요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일 것입니다.


전사한 윤하사의 집에서도 자식을 전장에 보내놓고 어찌 가진 종교가 없었을 것이며 어찌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에 지극하고 간절하게 기도를 했건만, 이런 일들이 현실로 벌어진 다음에는 가슴이 찢어지고 가슴에 못이 박혀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유비무환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일상에서 인과법과 인연소치의 도리를 겸허하게 수용하여 자신과 더불어 가족 모두의 업장소멸을 위한 기도를 끊임없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생에게 업이 남아있는데 어찌 그 업으로 인한 장애가 없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말씀대로 “구하라 얻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라.”입니다.


하지만, 머리 위에 안경을 올려둔 채, 두리번거리며 안경을 찾는 어리석음처럼 무조건 두드린다고, 무조건 구한다고 다 얻어지고 열리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적어도 기도를 한다면 기도를 하겠다면 우선 먼저 마음이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은 꽉 닫혀진 채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면서, 주변의 조그만 대소사에 금방 짜증내고 화를 내면서 입으로는 기도를 한답시고 기도문을 중얼거리고, 마음 찾는다고 몸은 돌부처처럼 앉아있고, 무릎이 닳도록 절을 한다고 기도가 성취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기도는 자기의 지구력과 끈기를 길러주는 것 외엔 아무런 기도의 가피도 생기지 않을뿐더러 머리 위에 안경 올려둔 채, 세월만 보내고 마는 것입니다.


천수경을 보십시오. 맨 처음 나오는 진언이 바로 정구업진언입니다.


바로 입으로 지은 모든 죄업들을 깨끗하게 씻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만이 성스러운 기도문을 입에 올릴 수 있는 것이고 자신과 더불어 가족들의 모든 업장을 소멸한다는 기도문을 외울 자격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전에 교통이 좋지 않을 때는 제가 70년도에 살던 산중의 절에서는 기도 때가 되면 저 멀리 2~30리 되는 산 아래 마을의 보살님들과 처사님들이 머리에 향, 초 사들고 쌀 한 되, 콩 한 되들을 머리에 이고 지고 절에 올라와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렸습니다.


요즘엔 자가용이 마당까지, 법당 앞까지 쑥 쑥 들어옵니다.

그런데, 기도 영험은 예전 분들이 더 많았습니다.


왜냐? 그 분들은 절까지 이고지고 오시면서 힘들면 냇가에 쉬었다가 오시다 혼자서 중얼거리며 오는 길에 온갖 발원과 기도를 혼자서 다 해버리고 막상 절에 오면 할게 없었습니다.


그저 부처님 전에 두 손바닥 비비며 절만하다가 기도 끝에 밥만 먹고 내려갔지만, 이미 기도 성취는 오는 도중에 다 이루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이토록 편하게 오고가면서도 기도성취는 더디고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 기도를 하려는 마음이 열리지 않고서 욕심의 기도만 앞서기 때문입니다.


육종공구(六種供具)라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리는 여섯가지 공양물이 있으니 물과 도향(塗香)이라 하여 바르는 향과 꽃, 소향(燒香)이라 하여 사루는 향과 음식과 등불이 있으니 이 여섯가지 공양물은 생사의 고해를 건너 열반의 언덕에 이르도록 해주는 여섯가지의 방편인 육바라밀을 뜻하는 것으로 차례대로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양물인 초를 공양하면서 밝은 촛불이 어둠을 물리치고 밝음이 오듯이 지금 어두운 내 마음 안에 밝음이 오기를 발원하면서 촛불을 켜야 하는 것이지, 촛불은 열심히도 켜대면서도 자기 내면에서 부정이 물러가고 긍정의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없다면 그것은 그냥 작은 공덕에 머물고 마는 것이지 촛불공양을 통해 수행의 세계에 다가가지 못하고 마는 중생으로 머물고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천수물을 올리면서 내 마음의 세계가 거울처럼 맑아지기를 발원해야하고, 불전에 향을 사루면서 내가 가는 곳마다, 내가 있는 곳마다 그곳이 가정이 되었던지, 직장이 되었던지, 계모임에 갔던지 고스톱 판에 있던지 그 어디에 있던지 향기로운 향처럼 주변을 편안하게 해주는 아로마 향처럼 자신의 분위기에서 자기만의 향이 나오기를발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계모임에는 혼자 쏘는 것이 젤이고, 고스톱 판에서는 도시락이 되어 주는 것이 주변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생활 속에서 기도를 생활화했을 때, 그러한 향이 나오는 것이고 그러한 일상을 행으로 실천할 때 마음은 열리고 자기만의 향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기도 날 만을 채우는 것은 지구력과 끈기의 훈련일 뿐으로 정작 달은 쳐다볼 생각도 못해보고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만 쳐다볼 뿐이란 말입니다.


그제 아침 일찍 전화를 먼저 하시고 노보살님이 다녀가셨습니다.

전번엔 아들이 술독에 빠져 중독자라면서 어찌 부적이라도 해달라고 하셔서 “이건 비법입니다” 하고 술 끓는 부적을 하나 해주고 어떻게 사용하시라고 해서 보냈더니 며느리에게 시켜서 했더니 아들이 병원에서 나왔는데 한 동안 술을 안 먹더니 또다시 술을 먹는다고 속상하다기에 왜 또 술을 먹게 됬느냐 물었더니 제 아들 하고 다투다 아들이 집나간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젠 며느리까지 내외간에 다투고 집에 안 들어 오다보니 술을 먹게 됬다며 손자란 놈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전화도 없고 불안한 생각만 든다고 아침 일찍부터 와서 부적을 내 놓으라니 별 수 있습니까?


헌데, 제가 아까 비법이라고 말한 것은 무슨 신통한 부적쓰는 도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에는 없는 비법(非法)을 말하는 것입니다.

잘들 새겨들으세요.


그리고 보내드렸는데, 어제 오후에 노보살님이 전화가 왔어요. 

집나갔던 손자가 들어왔다고 며느리한테서 전화가 왔다면서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한동안 통화하고 끊었습니다만, 중생의 사는 삶은 이런 것입니다.


이 세상이 어찌 정도만 존재할 것이며, 어찌 맑음만 있고 밝음만 있겠습니까?


중생을 위해서라면 천수경에 나오는 대로 천수천안도 되어야하고 무수방편도 있어야 하는 것이고 관음경 보문품에도 있듯이 중생의 근기에 맞게 교화의 응신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정해년 정초 신중기도를 회향하는 날입니다.

전번 입춘에 삼재풀이라고 해서 삼재기도를 했습니다만,

정월 보름이 지나기 전까지는 세배를 하는 것이고 정초기도가 마무리되고 동안거가 끝나는 날입니다.


전번에 말씀드렸듯이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윤회에서 벗어나도록 가르침을 주시는 분이시지 중생들의 길흉화복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불보살님들 또한 중생들의 괴로움을 함께 겪으며 동사섭으로 중생들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욕구로 인한 번뇌에서 벗어나도록 해주는 지혜를 주고자 할 뿐이지 중생들의 길흉화복을 어찌 해주시는 분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중생들이 원하는 길흉화복을 피하고 얻어지도록 하는 것은 중단이나 하단의 선신들이 하는 역할인 것입니다.


그래서 정초기도에 가족 중에 삼재에 드신 분들이나 모든 분들이 금년을 아무런 탈들이 없이 보내시라고 정초 신중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삼재란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인도에서는 세월을 계산 할 적에 산수로 미칠 수 없는 긴 세월을 겁(劫)이라했고 그 겁말에 일어나는 세 가지의 재해를 대 삼재와 소삼재로 나누는데 소삼재는 도병재와 질병재 기근재를 말하고 대삼재는 화재와 수재와 풍재를 말합니다만, 삼재는 12년마다 누구에게나 한번 씩은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삼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삼재(三災)가 들면 삼재팔난(三災八難)이 생긴다고들 합니다. 

세간에서 말하는 삼재는 대부분 소삼재인 화재(火災), 수재(水災), 풍재(風災)를 말합니다.


하지만, 삼재에 드신 분들의 가정이나 본인의 주변에 일어나는 좋지 않은 일들은 삼재로 인해서가 아니라 팔난으로 인해서 일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럼 팔난은 무엇인가하면, 손재, 주색, 질병, 부모, 형제, 부부, 관재, 학업 등에 있어 파생하는 재난이나 난관을 말하는데 이것을 합쳐서 바로 삼재팔난(三災八難)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삼재로 인해서 안 좋은 일들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삼재인데도 잘 만 풀리고 어떤 사람은 죽을 쑨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사주의 운이 기신의 운으로 흐르는가, 용신의 운으로 흐르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IMF때 돈만 잘 번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이는 쫄딱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비오는 날은 우산장수가 수지맞고 갠 날은 짚신장수가 수지맞는 이치란 말입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의 운명은 바꿀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요, 지천명이라 했듯이 우리는 부처님의 제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비록 가족 중에 삼재든 이가 있다 해도 열린 마음으로 입부터 청정하게 하고 신업 또한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는 의업, 바로 일상의 생각들을 열린 마음으로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열린 마음이 되었을 때, 손금에 삼지창이 없다 해도 관상이 별 볼일 없다 해도, 사주가 시원치 않다 해도 자신의 마음의 상인 心想이 열려진다면 자신의 운명은 삼재에도 관계없고 팔난에도 흔들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배부르고 등 따뜻하고 아직은 여유롭다고 나태와 게으름과 방일과 안일함과 교만으로 조그만 일에도 분별심을 일으키고 주변을 불편하게 하는 일상을 만들어 간다면 항상 밑지는 장사에 주변에는 항상 힘들고 불편한 일들만 생기고 일마다 꼬이는 것입니다.


여기 삼재와 팔난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지가 짓고 지가 받는다는 자작자수라 스스로에게 달린 일입니다.


성불하십시오.

 

 

 

 

 

눈이 부시게 루르른 날은 / 서 정 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는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매일 시를 읽읍시다.

시를 읽으면 마음이 맑아지고 풍요로와져 흐믓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