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 21:20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오늘 법문은 시달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금월 한 달을 천도의식에 관련하여 말씀드렸습니다만, 사실은 맨 먼저 오늘 법문의 주제인 시달림이 법문의 서두로 설해드렸어야 했는데 이제사 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부처님의 정법에 의지하여 설해지는 천도제와 장례의식에 대해서 마무리가 될 것입니다.
그럼, 시달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른 종교와는 다르게 불교에는 아주 수승하고 독특한 장례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드릴 시다림(尸陀林)이란, 망자를 위해 장례 전에 행하는 의식으로 원래 인도의 시타림(sitavana 寒林)에서 연유된 말로 말 그대로 추운 숲, 시체를 버리는 곳이란 뜻입니다.
시타림(尸陀林)이란 본래 부처님 당시 인도 마갈타국의 도성인 왕사성에서 조금 떨어진 숲의 이름으로 왕사성과 인근 사람들이 죽은 이의 시신을 버리던 곳이었습니다.
당시, 마갈타국의 빈천한 사람들의 장례풍습으로 사람이 죽으면 이 숲에 시신을 갖다 놓았고 영축산의 독수리들이 떼 지어 날아와서 시신을 먹어치우는 형태의 조장(鳥葬)이 널리 행해졌다 합니다.
그래서 이 숲에는 항상 죽은 이의 시신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기 때문에 숲 속에 감도는 공기가 항상 음습하고 칙칙하고 찬바람이 돌았으므로 한림(寒林)이라고도 불렸답니다.
그런데 뜻이 바뀌어 우리나라에서는 망자를 위하여 설법하는 것을 시다림이라고 하고 이를 시다림법문이라고합니다.
신라시대 이후부터 관습화되어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성행했고 오늘날에도 불자와 스님들은 장의의식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시신을 버리던 숲의 이름이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스님들이 상을 당한 신도의 집에 가서 죽은 이를 위해 염불하고 설법하고 여러가지 의식을 집전하는 것을 이르는 말로 바뀌었고 망자를 위한 의식은 신라시대 이후로 관습화되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성행하였고 오늘날에는 불교의 장례법으로 일반화 되었던 것입니다.
그럼 어디에 근거해서 시다림이란 의식이 행해지게 됬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귀찮거나 성가신 사람에게 시달린다는 표현을 하는데 그 말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주변에서 흔히 쓰는 이 ‘시달림’이라는 말은 바로 불교의 ‘시타림(尸陀林)’에서 나온 것입니다.
시다림은 범어의 시타바나(Sitavana)를 음역한 것으로 시타는 “차가운(寒)”이라는 뜻이고 바나는 “숲(林)”이라는 뜻이기에 한림(寒林)이라고 했고 시타림은 요즘 말로는 공동묘지인 것입니다.
사분율에 보면 시타바나는 중인도의 마갈타국 왕사성 북쪽에 있는 숲으로 시타림은 당시에 공포의 장소였으며 질병이 무성한 곳이었고, 후일 나라에서 이 시다림에 죄인들을 추방시켜 살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고행의 장소로 이 시다림을 이용했다고 합니다.(저도 공동묘지 관리실을 빌어 살아본 적이 있었습니다.)
열 두가지 두타행 가운데 오정심관이라 하여 무상관(無常觀)을 닦기 위해 무덤 곁에서 산다는 총간주(塚間住)는 바로 이 시다림에서 생활한다는 뜻으로, 새의 먹이가 되도록 버려진 시체 더미에서 사는 것을 수행의 한 방법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 살도록 한 이유는 육체의 허망함을 깨닫고 욕망을 없애기 위한 극단적인 수행방법이었지만, 시신들 사이에서 지내야 하는 수행자들은 극심한 공포에 시달려야 했을 것입니다.
시다림이 “시달린다는 뜻”으로 전환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죽은 사람은 수행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무소유를 생명으로 삼는 수행자들에게 의복을 제공하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비구들은 버려진 시체더미를 뒤져 죽은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을 의복으로 삼았기에 스님들의 옷을 분소의(糞掃衣)라고 불렀던 것이며 해탈도론 2권에서 말하기를 “무덤사이나 쓰레기더미나 시장이나 도로에 있는 것을 주워서 자르고 빨아 염색하고 가리고 이어서 재봉하여 입고 수지하는 것을 주인이 없는 것이라 하여 잘라내고 남은 것이거나 소나 쥐가 물어버린 것, 혹은 불에 타버린 것이거나, 사람이 던져버린 것, 시신을 덮은 옷이나 혹은 외도의 옷등을 세상 사람들이 버린 것이라고 한다.”고 했고, 보시를 받기도 했지만 죽은 사람의 옷은 임자가 없기 때문에 무소유 정신에 어긋남 없이 부처님 당시 수행자들은 시신과 함께 살면서 온몸으로 생과 사의 구분 없음을 배웠다고 합니다.
당시 인도의 장의법은 부자들이 하는 시신을 화장하는 다비와 더불어 조장(鳥葬), 풍장(風葬)이 있었고, 다비는 부처님 이후 불교 고유의 장의법으로 정착됐으나, 현재 인도에는 갠지스 강물에 던지는 수장(水葬)이 일반적인 장의법으로 정착되어있습니다만,
티벳에서는 여전히 풍장과 조장이 존재하고 있는데 시신을 태우거나 새의 먹이로 던지는 풍습은 인도나 티벳은 지금도 화장을 할 나무를 구하기도 힘들었거니와 경제력 없는 하층민들은 이러한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으며 또, 그들의 사상에는 이미 죽은 시신에게는 윤회를 하게 되는 자아였던 영혼이 중요한 것이지, 지수화풍의 사대로 환귀본처하는 이 육신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기에 이러한 장례법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몸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 4대로 구성되어 있어 인연이 다하면 원래의 모습대로 흩어진다는 사상에 근거하여, 인간의 몸은 일시적으로 뭉쳤다 흩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몸에 집착하는 것은 헛된 망상일 뿐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자 했던 것이며 하지만 인식과 달리 몸에 대한 애착, 죽음에 대한 공포는 쉽게 버리기 힘들기에서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묘지에서 살도록 한 것입니다.
시신이 썩어서 흉측하게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육체를 탐하는 애욕을 끊고 결국은 사라져 한 점도 남지 않는 과정을 지켜보며 죽음의 무상함을 느끼도록 했던 것이며 부처님 당신도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묘지에서 시체를 보면서 수행하는 방법을 부정관(不淨觀)이라고 하는데 부정관에는 9가지의 단계가 있는데, 대념처경에 보면 그 수행법이 묘지로 가서 시신의 모습을 보면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관찰하는데 모발, 손톱, 간, 폐, 위장, 비장, 콩팥, 오장, 땀 뼈, 골수, 뇌, 소변, 대변, 눈물, 숨 쉬는 것 등 인간 육체의 전반에 걸쳐 하나 하나의 부분을 관찰하고 시신이 점차 부풀어 오르면서 뼈만 남고 그 뼈마저 사라져가는 것을 보고 육체의 허망함을 관찰하도록 합니다.
오정심관 중에서 부정관은 수행의 초기 단계에 들어선 사람에게 주로 하도록 했으며, 부정관은 또 탐욕과 애욕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무상함을 깨우쳐 탐욕과 애욕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행법으로, 평소에 가지고 있던 탐욕과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지게 되며 싸우고자 하는 마음과 도적질을 하고자 하는 마음과 안으로 자신만을 높이는 아만심과 이기심 등이 없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정관을 잘못 닦게 되면 염세관을 갖거나 심지어 자살하는 부작용도 있을 수 있으므로 부정관의 참뜻을 잘 알고 행해야 합니다.
부정관은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등 남방불교 권에서는 지금도 수행의 중요한 방법으로 이용되고 있지만, 고대 인도에서처럼 시체를 그대로 묘지에 버리는 장례법이 없어졌기 때문에 묘지에서의 관찰은 불가능하기에 대신 태국에서는 스님들에게 의과대학의 인체 해부시간에 견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합니다.
시체의 썩어 가는 과정을 직접 관찰하면서 수행을 할 수는 없으나, 전신의 해골을 전시해 놓아 백골관을 할 수 있게 준비해 놓은 수행처가 태국에서는 일반화 돼있습니다.
태국의 동북지역의 한 수행처에는 백골과 함께 생전의 사진이 걸려 있으며 또, 방콕에 있는 한 수행처에는 죽은 시체 네 구를 백골이 아닌 미라로 만들어서 수행자들이 관찰할 수 있게 해 놓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시다림은 공동묘지의 공포와 죽음 직후의 슬픔을 중생의 생사초월을 위한 큰 법문으로 승화시킨 숭고한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극락세계가 일정한 장소 한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방세계 어느 곳이나 부처님이 안 계신 곳이 없으나, 특히 동서남북의 사방세계의 관념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오방 부처님을 안내해 주고 어느 곳으로 가든지 걱정하지 말고 그곳의 부처님께 귀의하도록 일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방례(五方禮)란 상당히 동양의 역학사상을 불교에 접목시켰다고 볼 수 있는 동·서·남·북·중앙에 있는 부처님들께 예배드리고 영가를 대신하여 예를 올리는 것입니다.
불교는 하늘에 있는 천국만을 향하는 서양종교와 달리 소위 시방세계라 하여 동서남북의 사방과 그 사이인 간방과 하늘과 땅의 상하를 다 가리켜 광대무변이라 극락세계가 일정한 장소인 한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방세계 어느곳이나 계시기에 부처님 안 계시는 곳이 없다는 오방세계의 관념 속에 망자에게 오방의 부처님(중앙의 화장세계(華藏世界)인 노사나불(盧舍那佛), 동방만월세계(滿月世界)의 약사불(藥師佛), 서방극락세계(極樂世界)의 아미타불(阿彌陀佛), 남방환희세계(歡喜世界)의 보생불(寶生佛), 북방무우세계(無憂世界)의 부동존불(不動尊佛))을 안내해주고 어느 곳으로 가든지 걱정하지 말고 그곳의 부처님께 귀의하도록 일러주는 의미로 오방례를 하는 것입니다.
그 의식의 내용을 보게 되면 먼저 무상의 원인과 결과를 밝혀 영가로 하여금 착심을 초월하도록 일러주는 법문으로 화엄의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 법화(法華)의 보문품(普門品)과 원각경의 보안보살장의 내용이 들어있는 무상계를 독송하여 무상의 원리를 깨닫도록 법문을 일러주고 삭발과 목욕에 이어 세수와 세족으로 유체를 청결히 하고 속옷과 겉옷을 입혀주는 착군(着裙)과 착의·복건을 쓰는 착관(着冠)을 행하고 정와나 정좌를 칭하여 기도문을 하게됩니다.
모든 의식을 집행할 때에는 거기에 알맞은 법문이 있게 되는데 정좌나 정와 편에서는 영단에 기도할 때 마다 들어보셨던 “영명성각묘난사 월타추담계영한~ 云云 했던 “영가시여! 신령스러운 빛이 홀로 드러나 근진(根塵)을 벗고 또렷하게 나타나 있으니 문자와 언어에 구애될 것이 없도다 참다운 성품은 물듦이 없이 본래부터 원만하니 단지 망념만을 여의면 곧 부처님의 경지이로다.”하는 법문을 해주게 되고 그리고 안좌게를 한 다음 상황에 따라 다음 날 입관하게 될 때까지 영단에 여러 독경을 독송해드리게 됩니다.
염습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영정 앞에 상식만을 올려드리고 독경 만을 해드리는 것입니다.
다음날, 망자의 염습이 끝나면 정식으로 망자를 위한 간단한 제(祭)를 올려드리고 영결식을 한 뒤 화장이나 매장에 이르는 의식을 더함으로써 시다림이라는 의식이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망자를 위해 전번에 말씀드렸던 49재를 지내드리고자 하게 되면, 장지에서 망자의 영정을 집으로 모셔가는 것이 아니고 사찰로 모시게 되는데 그 때의 의식을 반혼(返魂)이라 하여 이때 반혼재를 하게 됩니다.
불교신자들은 가족 중에 망자가 생기면 평소 잘 아는 스님이나 사찰에 연락하게 되고, 스님은 상가(喪家)를 방문하게 되는데, 이 때 “시다림을 간다고” 합니다.
즉, 망자를 위한 의식을 행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언제든지 불러만 주신다면 불문곡직하고 가겠습니다만, 실제로 부유한 신자들이 아니면 스님들의 시다림 법문을 청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스님을 부르지 못하는 집에서는 금강경 독경 테이프로 대신하기도 하지만, 생전에 독실했던 불교신자인 가족을 떠나보내면서 스님의 법문을 들려주지 못하면 가족들의 마음은 아플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우리절의 신도들끼리 상조회를 결성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신도들끼리 상조회를 조직해서 시다림을 하는 법을 배워 서로 돌아가며 장의봉사를 베푸는 것입니다.
제가 앞장을 서겠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슬픔에 잠겨있는 유족들에게 큰 힘을 주게 되고, 경전을 듣고 망자가 극락왕생 했을 것이라는 편안함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독경은 유족들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줘 여유를 찾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주는 것이 참다운 신행생활이요, 불자로서의 든든한 의지처를 서로 나누는 것 일진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별의 별 소리들을 다하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는 자식의 탄생을 기뻐하며 새끼 딸린 축생을 보약삼아 보신하는 어리석음이나, 문상가면 귀신이 따라온다는 둥, 하는 그런 어리석음 말입니다.
이제 우리절의 신도 분들께서는 이러한 혹세무민하는 무명 중생들의 입방아에 놀아나지 마시고 진심으로 공덕행과 복덕행을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사람의 인연에는, 우연이란 없다고 합니다...^^
사람의 인연에는 우연이란 없다고 합니다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는 꼭 만난다는 말이 있듯이
그렇게 만나게 되어지는 것인가 봅니다.
사랑에 아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지만 볼 수 없고 얼굴 보며 웃어줄 수가 없는
그 말할 수 없는 험한 아픔을 느끼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현실, 운명, 인연과 같은 것은 모두 잊고,
마음에서 원하는대로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다할 때까지..
마음놓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정말로 행복한 일 인줄 알면서..
그렇게, 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웃으면서 사랑을 대하십시오
원치 않는 이별로 인해,
그 이별 전의 추억이 후에 만나
다시 이루어질 것을 바라면서도
눈물로 얼룩질 이별예감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이있습니다
마음속에서 사랑을 키워간다는것,
함께 할 수 없어 슬퍼하는 것보담
함께 지내며 다투기도 하고..
서로 눈을 바라봐주며,
웃어주고 힘이 되어주고
하면서 겪는 고통이라면..
아마도, 사랑에 아파하는 사람은
차라리 이 아름다운 고통을 택할 것입니다.
자꾸만 바라지도 않던 장애로 인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 생각하며
끙끙대고 정말 밤잠을 설치며 슬퍼하는 사람은..
야위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끝이 보이는 싫은 헤어짐이 보이는
그런 사랑속에서도, 늘 시선은
그 사랑 하나에 고정되어 있는 것을
문득 느낄 때 흘리는 쓴웃음..
영원을 약속하는 사랑을 두고도,
그 사랑을 애써 접어야 할 것 같은 그 사랑..
그러나, 언젠가는 이러한 아픔을
떨쳐낼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은,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흐른다는 것..
믿어볼만 하니깐요.
칼에 베어진 곳이 아물면 상처는 남지만,
후에 그 상처를 만지면 아프지는 않듯이
그렇게 칼에 베었던 것이 아프기는 했었지만,
그 아픔이 생각나지는 않듯이
그렇게, 아주 허탈하게 잊혀져 갈테니까요.
아주 허무하게,
사랑이 진행 중이시라면
성실한 모습으로 사랑하세요.
비록, 훗날 각자의 길을 따로 걷고 있더라도
후회 없도록 말이죠.
그 많은 사람 중에,
오직 그 사람만을 사랑하며 아껴준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 입니다.
지금, 사랑에 아파하는 그 사람을 위하여
작은 기도를 해봅니다
그 사랑 하나만을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딱히 무슨일이있어서..
아닌데..
그냥 그냥 우울할때가 있지요..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위로가 되지않을때..
그때가 있는듯...
누군가에게 서운하고..
따뜻한 말이라도 듣고픈데..
아무 반응이 없고 몰라주니..
혼자서 허허 거려지는 그런아침..
이러다 혼자 위안받고..
혼자 웃으며 보내기도 하지요..
모든 무슨일이든...
결론은 자신이 내려야 하기에..
벌써 12월의 첫 날 이네요
우리 서로...
미움보단 사랑을
시기보단 웃음을..
질투보단 따뜻함을..
그리고 서로 서로 보듬아 줄수있을 여유를 넉넉함을
함께 할 수 있음을 기뻐하는
불사방 홴님들 되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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