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없는 삶이란 이런 것인가?

2009. 12. 14. 21:1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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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경전에 들어있는 부처님의 가르침보다 더 가슴에 와 닿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지금 들려드리는 이야기는 실가람 보살님이 읽어보고 너무나 가슴 아파서 제 카페에 올리셨는데 저 또한 읽고선 무자식 상팔자라고들 하는 제 가슴마저도 억장이 무너지는지라 지금 읽어드리는 글을 가슴을 열고 마음으로 받아들여 무릎 아래 우리 집과 비교해 보시길 바랍니다.


          ===== 어느 시어머니의 고백====

  (이글은 MBC라디오 여성시대에서 스크랩한 글입니다.)

얼마 전 뉴스를 듣는데 90살 노부부가 치매에 걸려서 동반자살을 했다는 기사를 들었습니다.

지금 내 나이보다 30여년을 더 사시면서 얼마나 힘들고 고달팠겠는가 싶더군요.


저는 얼마 전까지는 그래도 하루하루 사는 기대를 가졌었답니다.  차마 제 주위에 아는 사람들에겐 부끄러워 말할 수 없었던 한 달 여 동안의 내 가슴속 멍을 털어 보고자 이렇게 어렵게 글을 적어 봅니다.


내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고등학교 때 남편을 잃고 혼자 몸으로 대학 보내고 집장만해서 장가를 보냈죠.

이만큼이 부모로써 할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아들놈 장가보내 놓았으니 효도 한 번 받아보자 싶은 욕심에 아들놈 내외를 끼고 살고 있습니다.


집 장만 따로 해줄 형편이 안 되어 내 명의로 있던 집을 아들명의로 바꿔 놓고는 함께 살고 있지요. 남편 먼저 세상 떠난 후 아들 대학까지 공부 가르치느라 공장일이며 때밀이며 파출부며, 안 해 본 일이 없이 고생을 해서인지 몸이 성한 데가 없어도 어쩐지 아들 내외한테는 쉽게 어디 아프다란 말하기가 왜 그렇게 눈치가 보이는지.....

무릎관절이 안 좋아서 매번 며느리한테 병원비 타서 병원다니는 내 신세가 왜 그렇게 한스럽던지.....

참, 모든 시어머니들이 이렇게 며느리랑 함께 살면서 눈치 보면서 알게 모르게 병들고 있을겁니다.

어디 식당에 일이라도 다니고 싶어도 다리가 아파서 서서 일을 할 수가 없으니 아들한테 짐만 된 거 같은 생각마저 듭니다.

며느리가 용돈을 처음엔 꼬박 잘 챙겨 주더니 이년 전 다리가 아파서 병원을 다니면서부터는 제 병원비 탓인지 용돈도 뜸해지더라구요.

그래도 이따금씩 아들놈이 지 용돈 쪼개서 꼬깃꼬깃 주는 만 원짜리 서너 장에 내가 아들놈은 잘 키웠지 하며 스스로를 달래며 살았지요.


그런데 이따금씩 만나는 초등학교 친구들한테 밥 한끼 사주지 못하고 얻어만 먹는게 너무 미안해서 용돈을 조금씩 모았는데 간혹 며느리한테 미안해서 병원비 달라 소리 못할 때마다 그 모아둔 용돈 다 들어 쓰고 또 빈털터리가 되더라구요.


그래서 정말 친구들한테 맘먹고 밥 한번 사야겠단 생각에 아들놈 퇴근 길목을 지키고 서 있다가 “야야, 용돈 좀 다오. 엄마 친구들한테 매번 밥 얻어먹기 미안해서 조만간 밥 한끼 꼭 좀 사야 안 되겠나.” 어렵게 말을 꺼냈더니만 아들놈 하는 말이 “엄마, 집사람한테 이야기 할께요.” 그러곤 들어가지 뭐예요.

내가 괜히 말을 꺼냈는가 싶기도 하고 며느리 눈치 볼 일이 또 까마득했어요.

그렇게 아들놈한테 용돈 이야길 한지 일주일이 넘도록 아무런 답이 없길래 직접 며느리한테 “아가야, 내 용돈 쫌만다오. 친구들한테 하도 밥을 얻어먹었더니 미안해서 밥 한끼 살라한다.” 했더니 며느리 아무 표정도 없이 4만원을 챙겨 들고 와서는 내밀더라구요.

4만원 가지고는 15명이나 되는 모임친구들 5000원짜리 국밥 한 그릇도 못 먹이겠다 싶어서 다음날 또 며느리를 붙들고 용돈 좀 다오, 했더니 2만원을 챙겨 주었어요.


그렇게 세 차례나 용돈 이야길 꺼내서 받은 돈이 채 10만원이 안되었지요.

그래서 어차피 내가 밥 사긴 틀렸다 싶어서 괜한 짓을 했나 후회도 되고 가만 생각해 보니깐 괜히 돈을 달랬나 싶어지길래 며느리한테 세 번에 거쳐 받은 10만원 안 되는 돈을 들고 며느리 방으로 가서 화장대 서랍에 돈을 넣어 뒀지요.

그런데 그 서랍 속에 며느리 가계부가 있더라구요.

난 그냥 우리 며느리가 알뜰살뜰 가계부도 다 쓰는구나 싶은 대견한 생각에 가계부를 열어 읽어 나가기 시작을 했는데, 그 순간이 지금까지 평생 후회할 순간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글쎄, 9월14일 왠수 40000원. 9월15일 왠수 20000원. 9월17일 또 왠수 20000원.  처음엔 이 글이 뭔가 한참을 들여다봤는데 날짜며 금액이 내가 며느리한테 용돈을 달래서 받아 간 걸 적어 둔 거였어요.


나는 그 순간 하늘이 노랗고 숨이 탁 막혀서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남편 생각에..... 아니, 인생 헛살았구나, 싶은 생각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들고 들어갔던 돈을 다시 집어 들고 나와서 이걸 아들한테 이야기해야 하나 말아야 하는가 생각을 했는데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 이야길 하면 난 다시는 며느리랑 아들 얼굴을 보고 함께 한집에서 살 수가 없을 거 같았으니까요. 그런 생각에 더 비참해지더라구요.

그렇게 한 달 전, 내 가슴속에 멍이 들어 한10년은 더 늙은 듯 하내요.

얼마 전 들은 그 90대 노부부의 기사를 듣고 나니깐 그 노부부의 심정이 이해가 가더군요.

아마도 자식들 짐 덜어 주고자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나 싶어요.

며느리랑 아들한테 평생의 짐이 된 단 생각이 들 때면 가끔 더 추해지기 전에 죽어야 할텐데 싶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도 이제 곧 손자녀석도 태어 날텐데 자꾸 그때 그 며느리의 가계부 한마디 때문에 이렇게 멍들어서 더 늙어가면 안되지 싶은 생각에 오늘도 수십 번도 더 마음을 달래며 고치며 그 가계부의 “왠수란” 두 글자를 잊어보려 합니다.

차라리 우리 며느리가 이 방송을 들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이젠 자식 뒷바라지에 다 늙고 몸 어디 성한데도 없고 일거리도 없이 이렇게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지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과인지 모르시죠?

이 세상 부모로서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자식한테 받는 소외감은 사는 의미뿐만 아니라 지금껏 살아 왔던 의미까지도 무의미해진다. 라고 말입니다. 


이제라도 이렇게 방송을 통해서 가슴 아팠던 심정을 털어 놓았느니 며느리 눈치 안보고 곧 태어날 손자 녀석만 생각하렵니다.

요즘은 내가 혹시 치매에 걸리지나 않을까 싶은 두려움에 책도 읽고 인터넷 고스톱도 치면서 그렇게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이글은 MBC라디오 여성시대에서 스크랩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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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읽어드린 이 글을 지금 들으시는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하지만, 내 자식이 부모인 나에게 이럴 때 과거의 나는 내 부모에게 어땠던가를 생각해 보시면서 우리 모두 가슴 아픈 물질 만능시대의 축생만도 못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바로 봐야 할 것입니다.  


미래의 내 자식은, 내 며느리는 안 그럴거야! 하는 안심은 모르는 일입니다.

아는게 병이될 수 있고, 모르는게 약이 될 수 있는게 세상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극하고 간절하게 선연을 짓고 살아가야하고 선업을 지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고 이렇게 업장소멸 기도를 하고 또 하고 평생을 걸쳐서 해야 하는 것이 업장소멸 참회기도인 것입니다.


이 몸, 지금 누구라는 이 이름 갖기 전의 돌고 도는 윤회전생의 길에서 부처님 법을 몰라 참으로 어리석게 살아온 우리들인지라 자작자수요, 자업자득이라 지금 살아가면서 삶 속에서 벌어지는 온갖 꼴들이나 온갖 행, 불행들이 사실은 손에 쥐고 갈 것 하나 없는 뜬 구름 같은 허망한 것들을 쫓아 자작자수라, 과거 전생에 뿌려두고 심어두었던 온갖 업들을 이생에 자업자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법회 때 마다 항상 말씀드리는 것이 자식이 시험에 합격하기를 원하고 남편의 사업이 이루어지길 원하고, 가족들이 병마에서 쾌차하기를 원한다면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기도하질 말고 기도의 대상이 되는 가족들의 과거 전생의 원결과 업장이 녹아지고 소멸되도록 하는 기도를 하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업이 녹아내리고 원결이 소멸된 사람에게 무슨 장애가 나타날 것이며 무슨 악연이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여러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떤 기도를 해야 할 것인가를 아시겠지요.

하지만 기도도 제대로 된 기도를 하고 살아가야합니다.

이제 두 번째로 읽어드릴 글은 실제로 있었던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은 복이 많으신 분들입니다.

왜냐? “맹구우목”이라 절집 많이 드나드신 분들은 척,알아들으실 겁니다.

큰 절의 법회에 가보면 큰 스님들이 주장자 집고 매냥 하시는 말씀이 이 말씀은 감초인지라 “인생난득이요 불법난봉” 이라 금생에 사람 몸 받기도 어렵지만 불법 만나기는 더 어렵다고 하면서 단골법문 메뉴의 한 대목입니다. 


어느 때, 부처님이 베살리의 원숭이 연못 옆 중각강당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연못 주변을 산책하시던 부처님이 문득 아난다에게 이런 것을 물었습니다.

“아난아, 큰 바다에 눈먼 거북이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이 거북이는 백 년에 한번 씩 물 위로 머리를 내놓는데 그때 바다 한가운데 떠다니는 구멍 뚫린 나무판자를 만나면 잠시 거기에 목을 넣고 쉴 수 있단다.

그러나 판자를 만나지 못하면 그냥 물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때 눈먼 거북이가 때가 되어 물 위로 나왔을 때, 과연 나무판자를 만날 수 있겠느냐?” 하고 묻자, 아난은 “그럴 수 없다” 고 대답했습니다.

눈까지 먼 거북이가 백 년 만에 떠올라 넓은 바다에 떠다니는 머리를 내밀 구멍 뚫린 나무판자를 만난다는 것은 도저히 확률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눈먼 거북이는 넓은 바다를 떠다니다 보면 서로 어긋나더라도 혹시 구멍 뚫린 나무판자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리석고 미련한 중생들은 육도윤회를 돌고 돌면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란 저 거북이가 나무판자를 만나기 보다 더 어렵단다.


왜냐하면 저 중생들은 선을 행하지 않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서로서로 죽이거나 해치며, 강한 자는 약한 자를 해쳐서 한량없는 악업을 짓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사람으로 태어났을 때, 내가 가르친 “네 가지 진리”를 부지런히 닦아가라.

아직도 알지 못했다면 천리를 마다하고 찾아가 듣고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하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축생이나 미물들은 주어진 본능으로 살다 가지만 윤회를 몇 백겁, 몇 천겁 거듭거듭 하다가 다겁생을 돌고 돌아 이렇게 소중한 사람 몸 받은 지금의 우리는 마치 백 년에 한 번씩 머리를 내밀어 구멍 뚫린 판자를 만나 목을 넣고 쉬고 있는 거북이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귀한 부처님의 품안에 안겨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이제 두 번째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이 두 번째 이야기를 통해서 이성적인 올바른 신앙과 종교적인 믿음을 통해 지혜로운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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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도사를 어머니로 둔 어떤 이의 절규..”

(영안실에 문상을 가서 곁에서 지켜본 친구가 쓴 글입니다.)

평생을 간절한 기도와 지독한 신앙생활로 열심히 교회에 다니던 지인의 어머님께서 중풍과 치매로 갑자기 쓰러지셨다.

그 어머님은 80인 나이까지 개신교 교회의 전도사로 예수의 말씀을 전파했고, 기도와 찬양과 전도 등등으로 평생을 살아 온 분이었다.

그런데, 중풍과 치매로 쓰러져 입원한 병원에는 환갑에 가까운 자식 혼자 쓸쓸히 쓰러진 어미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 어머니는 평생을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뿐인 자식을 돌보질 않아 자식은 국민학교(초등학교)때는 친척집의 수양자식으로 보내졌고, 중학교 때부터는 눈치 밥 먹는 것이 힘들어 스스로 힘들게 일을 하고 벌어가며 야간고등학교에 대학까지 갔었고 그 어미의 자식은 지금 저명한 예술인으로 현재 활동 중이다.

지인의 어머니는 자식에게 낳아준 은혜 외에는 아무 은혜도 베풀어 준 것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먹고살기가 힘들었던 것도 아니었다.

지니고 있던 집 두채를 독실한 신앙생활과 품위유지비등으로 다 날려먹었고 늘그막에 홀로되어 나라로부터 받는 몇 십만 원씩 다달이 나오는 돈을 받고 나라에서 홀로된 노인들을 위한 임대아파트를 내어주어 그 곳에서 생활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그 병원에는 그토록 믿어왔던 그 분의 형제자매님들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머니는 교회해서 모든 것을 다 해줄 거라고  철저하게 믿고 있었다.

지인이 병상의 잠깐 정신이 돌아온 모친께 그동안 한 서린 속내를 조금 이야기하며 결국에는 자신을 버린 모친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듣길 기대하며 한마디 했다.

“내겐 베풀어준 것이 없지만 가시는 길엔 죽음을 앞둔 많은 자식들에게 좋은 일 하시라”며 임종 시 신체를 연구용으로 기증하거나 장기기증을 하는 것을 권유하자, 그 믿음과 예수님사랑으로 똘똘 뭉친 지인의 모친은 단칼에 거절했다. 

지인 왈, “어머니가 안된다 거절했지만 돌아가시면 대학병원에 시신을 기증할 것이고, 나 또한 훗날에 그렇게 할 것이다. 연구용이든 사람을 구하는 용도이든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 보다 더 값진 일이 뭐가 있겠는가.

어머님이 평생을 입으로 믿으시던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 왜 닥치니까 실천은 하지 않으려 하는지, 도대체 평생동안 재산과 인생을 다 바쳐서 무엇을 하셨는지, 자기 자식 하나 돌보지 않고 열심히 교회 활동하고 살다가 다 죽게되니 뻔뻔하게 그제서야 자식을 찾은 사람이 뭘 하겠다고 그러고 다녔는지 한심하다.”고 친구인 내게 한 맺힌 속내를 털어놓고 얘기를 하는 환갑을 앞 둔 친구의 소리 없는 절규가 잊혀지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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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아주 어려운 일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한 가지가 사람으로 태어나는 일이고, 다른 한 가지는 부처님의 진리와 만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생명이 있습니까? 수많은 생명 가운데 사람의 몸을 받고 태어나는 일이란 참으로 희유한 일이지만, 수십억의 인구 중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날 수 있는 인연 또한 희유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탈레반으로 태어나지 않기를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나 부처님의 진리를 만날 수 있는 일은 이처럼 대단하고 희유한 일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부처님 말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것도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인연인 것입니다.

이렇게 귀중한 만남을 인연해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듣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문사수”(聞思修)의 세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는 듣는 지혜인 문혜입니다.

듣고 읽어서 이해하는 문혜는 단순히 이해 차원의 앎이라 고 할 수 있습니다.

문혜는 자기 속에서 내면화가 되어야 하고 그런 과정을 거친 후에야 깊은 차원의 이해가 가능하게 됩니다.

이것이 두 번째 생각하는 지혜인 사혜입니다.

이 사혜가 내 삶과 연결되어져 사색과 관찰을 통해 터득될 때 비로소 그 앎은 내 것이 되고 바로 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세 번째의 실천인 수혜의 차원으로 승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올바른 신앙은 이렇게 듣고 이해한 것이 내 삶을 변화시키는 수혜의 차원으로 정진되어가는 공부여야 합니다.


“신해행증(信解行證)”이라 부처님의 가르침은 거짓이 아닌  진리라는 그 사실을 믿고 알고 배우려고 노력하고 알았으면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그리하면 삶 속에서 생활 속에서 스스로 얻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 얻어지는 것은 스스로 찾으시길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 아버지의 목발 ♡ 어느 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딸이 함께 여행을 하다가 그만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자동차가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큰 사고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가벼운 상처를 입었으나 아버지와 딸은 모두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해야만 했습니다. 특히 딸의 상처가 깊어서 오랫동안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치료를 했으나 평생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할 신세가 되었습니다. 딸보다 먼저 퇴원한 아버지의 신세도 딸과 다름이 없다고 알려졌습니다. 사고 당시 사춘기에 있었던 딸은 무엇보다 마음의 상처가 깊었습니다. 학교가 파하면 다른 친구들이 조잘거리며 신나게 몰려다닐 때도 그 딸은 늘 혼자 목발을 짚고 외로이 집으로 와야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같은 목발 신세인 아버지가 말동무처럼 딸에게 다가와 다정하게 대해주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주어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딸은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투정을 부리는 딸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아버지가 나서서 말없이 그 투정을 받아 주었습니다. 딸에게는 아버지와 공원 벤치에 나란히 목발을 기대어놓고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유일한 행복이었습니다. 어려운 사춘기를 잘 넘기고 딸은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입학식 날 아버지가 학교에 같이 참석하여 딸을 껴안아 주며 말했습니다. “네가 내 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구나. 너는 나의 자랑이며 보람이란다.” 딸은 정말 행복을 느꼈습니다. 그 해 어느 날이었습니다. 세 식구가 나란히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아버지와 딸은 목발을 짚고 가야 했습니다. 길을 걷는 그들 앞에서는 작은 꼬마 하나가 공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공이 큰길로 굴러갔습니다. 꼬마는 앞뒤를 살피지도 않고 공을 주우러 큰길로 뛰어들었습니다. 길모퉁이에서 큰 트럭이 전 속력으로 달려 나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딸의 아버지가 목발을 내던지고는 길로 뛰어들어 꼬마를 안고 뒹굴어 위험의 순간을 넘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꼬마를 안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길을 건너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순간적인 행동은 너무나 날쌔고 자연스러웠습니다. 목발 집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동작이었습니다. 딸은 자기 눈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잠시 후 어머니가 다가와서 딸을 꼭 껴안고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애야, 이제 말할 때가 된 것 같구나. 사실 너의 아버지는 다리가 다 나았단다. 퇴원 후에 곧 정상이 되었거든. 그러나 네가 목발을 짚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아버지도 목발을 짚고 다니기로 작정하셨던 거야. 내가 말렸지만 너랑 아픔을 같이 해야 한다고 고집하셨던 거야. 그러니까 그게 벌써 5년이 되었구나. 이 사실을 아버지 회사원도, 우리 친척도 아무도 모르지. 나와 아버지밖에 모르는 비밀이었지.” 길 건너에서 손을 흔드는 아버지를 보며 딸은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가눌 수 없었습니다. -김 말암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