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은 간절히 일념으로 - 화살도 오다가 비껴간다/무여스님

2009. 12. 24. 20:0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728x90

¶ 염불은 간절히 일념으로 - 화살도 오다가 비껴간다
                                                                       / 무여 큰스님








며칠 전
"염불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기운도 침범하지 못합니다."
도반에게 말했습니다.

염불은
어떠한 어려움도,
어떠한 괴로움도,
어떠한 근심 걱정도 모두 녹아내릴 수 있는
무한한 공덕 있습니다.

호법신장들이 지켜주며,
몸이 청정법신으로 맑아지며,
염불공덕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일념(一念)으로,
일심(一心)으로,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옵니다.

나무아미타불
 

조선시대 희귀자료 사진

홍지문은 한북문이라고도 하는데,
인왕산 뒷 편 끝자락에 있는
탕춘대성의 성문이다.
홍지문 문루와 오른쪽의 홍지문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풍속 사진.
‘조선 풍속’엽서에 실린 사진 중 상당수는
스튜디오에서 조선인 모델을 고용해
찍은 것으로 추측된다.

무대 배경에는 서구식 장식물이 등장하고
조선인 모델들은 촬영자의 의도에 맞게
연출되어 풍속 이미지로 팔려나갔다.

회식(우편엽서)


숭실학교 학생들


서광범


국민소학독본


이 사진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풍속 사진엽서다.
'죄인들'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엽서는
관광 기념용 사진엽서 가운데 한 장이며,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널리 유통되었던 '상품'이다.
죄인들(우편엽서)


혜화문과 성곽


서울 60리 둘레를 현무도의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져
호위하고 있는 한양의 도성은 애초 남산과 북악산을
제외하고는 흙으로 성곽을 쌓았다.
이것을 세종이 모두 돌로 쌓았으니,
연 인원 32만 2,400명이 동원되어

98일만에 완성을 보았다.
대규모 인력 동원을 통한 단기의 공사였다.

옛 법도대로 따르자면 성곽은

사각형 모양이 되어야 하겠지만
한양의 산세를 거스르지 않고 짓다보니
굽이굽이 산성이 되어 물결쳤다.
성곽의 기본 출입문은 동,서,남,북의 4대문이었으나,
이외에도 4소문과 그 밖의 여러 문이 있었다.
4소문은 혜화문,창의문,소의문,광희문이다.

그 가운데 광희문은 수구문(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 : 시체가 나가는 문)으로 불려졌다.
조선시대에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는 반드시

서쪽은 서소문으로,
동쪽은 광희문으로 나가게 하고,
다른 문으로는 통과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시구문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도성(인왕산 곡성)


1890년대 보신각




박영효와 윤치호


마패


남대문(숭례문)

숭례문(남대문)



궁녀


경복궁과 육조거리



흥선 대원군 이하응 (18250~1898)

고종의 아버지



왼쪽부터 영친왕.순종.고종.귀비엄씨.덕혜옹주.
이 사진은 한국 사진의 선각자이자 흥완군
 

(대원군의 형)의 손자인고 이해선

(순종의 육촌 형제, 민영환의 사위) 선생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

 구한말 고종,순종,영친왕..구한말 황실

左 귀인 장씨의子의친왕+순종+덕혜옹주+귀빈 엄씨의 영친왕+고종+순종의비+의친왕비의子

창덕궁 인정전에서 1915년 촬영으로 추정

 

 

 고종과 순종 홍룡포를 입은 모습 1890년, 국호가 대한제국 이전

 

 고종황제

 

명성황후



명성황후의 시신이 홍농 장지로 떠나기 전
절에서 불공을 드리고 기념촬영한 것이다.
1899 슬픔에 잠긴 고종황제

 

 

역사 최대의 논란거리 명성황후의 실제 얼굴!

지금까지 이게 진짜다! 아니다 저게 진짜다! 

지금까지도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여러장의 사진이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재기되고 있는데요~

 

 

1. 이승만의 <독립정신>에 실린 명성황후 초상으로

얼굴이 일그러들어 변조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사진.

 

2. 장도빈의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명성황후 사진.

 

3. <조선일보> 1935년 신년 특별호에 실린 사진.
이승만 및 장도빈의 명성황후 사진과 옷맵시는 물론
주름의 음영까지 같은 점은 아직까지 미스터리 라고 합니다. 

 

아래  사진들은 추가로 명성황후라는 의혹을 품으며

제기된 그림과 사진들입니다...

 

 

 

 사실 위 사진들도 명성황후인지 아닌지를 확정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없지만 다만 하나 확실한 것은

명성황후는 사진 모델로 나서기를 좋아하지는 않았으며,

그렇기에 생전에 아예 사진을 찍은 적이 없거나,

있었다 해도 몇 번 되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확실하다고 합니다.

 

 

특히, 이 사진은 명성황후가 생전에 외모에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어

사진찍기를 꺼려했다는 루머와 함께 실제 명성황후의 모습으로

가장 유력하게 떠올랐던 사진이죠 *.*

 

명성황후 소지의 총



어가 행렬


마지막 황제 순종과 대신들


1902 고종의 칙명

순종 황제
 

 

德壽宮  大漢門을 나서는 고종황제 붕하 崩下

(1919.01.21 덕수궁 함년전에서)의  국상 행렬

 

고종의 제사를 뫼시는 순종 1921年

純宗 (1926.4.25.06時15分,53世로 조선 마지막 王훙하 薨下.

6.10國葬

 


영친왕1900년영왕에 봉 (1907년 황태자에 책봉-이왕)+李方子

(나시모토 미사코 20세) 결혼



육상궁(毓祥宮)은 원래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를 봉사하는 사당이었다.
1908년에 저경궁, 대빈궁, 연우궁, 선희궁, 경우궁이
합사되어 6궁으로 불렸으며,
1929년에 덕안궁이 경내로 옮겨와 7궁이 되었다.
육상궁


조선 숙종의 비인 인현왕후 민씨가
폐서인이 된 후 거처하던 곳이다.
영조가 감고당 편액을 내렸고,
명성황후가 책봉되기 이전에 거처하기도 하였다.
감고당(感古堂, 현 안국동 덕성여고 자리)


전란 등 비상시 왕이 거처하기 위해 지은 행궁이다.
북한산성 행궁


사도세자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
현재의 서울대학교 병원자리
경모궁의 일부


창덕궁


경운궁(덕수궁)


1892 창경궁과 홍화문


서울 - 천변(川邊)마을


뒤에 보이는 다리가 수표교.
서울은 지형적으로 북쪽에 산이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도시 곳곳에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하천들이 흐르고 있었다.

그 하천들은 도심을 흘러서 한강으로 흘러 들어갔다.
도성 안을 흐르는 하천들은 청계천을 비롯하여

중학천 등이 있었다.
서울 - 청계천에서 빨래하는 여인들


1940.01.01 일장기를 제호 위에 올리고
일황 부부사진을 실은 조선일보 신년호




이토 히로부미(왼쪽)와 한국 주재 일본군 사령관(오른쪽)
1905.11.29 경성역

일본정부 칙사로 조선을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


포도청은 1895년 경무청이 설치될 때까지

조선왕조에 경찰기관이다.
1890 포도대장


한말 훈장과 학동들


한말 대구 - 서문시장


한말 서울 소공동 - 사진관


한말 서울 - 싸전거리


한말 인력거


1909 전주 - 신흥학교 수업 광경,
안창호가 설립한 평양대성학교 교사와 학생들


장춘단
장충단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순절한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과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 이하
왕실을 위해 충절을 바친 여러 군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제사단이다.
1908년 일제는 제사를 폐지시키고
이 일대를 공원으로 만들었다

 


융희 2년(1908) 장충단에서 거행되었다.
가운데 좌우로 서있는 사람은 조희연과 김윤식
1908 갑신정변 을미사변 관련 희생자 추도회



1876 전차에 오르는 승객들


원구단 일대


1910 짐꾼들


1910 지게로 옹기를 나르는 사람

1910 지게로 옹기를 나르는 사람


1904년경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정공

민영환의 컬러 유리원판 사진.
1904 민영환


1910 젖을 먹이고있는 여인들





1908 양반댁마님과 가마꾼


1908 서당의 서동들


1910 상류층 부인을 태운 가마


1908 상류부인과 규수


1910 빨래터에 가는 여인과 아이


1910 물지게꾼


목재를 파는 소


목재를 나르는 소


떡 만드는 사람들





오라버니에게 심신의 아픔을 절절히 적어 보낸

명성황후의 편지 두 통.
청나라제 예쁜 색지에는 대나무와 꽃이,
편지 봉투에는 나비가 그려져 있다.
1874 명성황후의 편지


돼지 팔러가는 사람들


돼지 팔러가는 사람


1908~10 평양부근 - 길 옆의 칠성당



1908~10 서울 신사들


1908~10 서울 - 짐꾼들


1908~10 서울 - 승려들


1908~10.  상여


1908~10 한양 - 주민들


1908~10 한양 - 짐꾼들


1908~10 빨래터


1907 원구단과 황궁우


1899년에 여러 신위를 모시기 위하여
원구단의 북쪽에 지은 8각 3층의 건축물이다.
지금은 소공동 조선호텔 뒤에 있으며,
사적 157호로 지정되어 있다.
황궁우


고종이 1897년에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던 원구단은
1913년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철도호텔(현 조선호텔)이 들어섰다.
원구단의 정자


조선여인(우편엽서)


1903 조선여인(우편엽서


광희문(시구문) 밖


도성 동남쪽에 위치한 4소문의 하나이다.
문의 좌우 성벽은 일제 때 헐렸다가
1975년 남쪽으로 15m 옮겨져 복원되었다.
1892 광희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