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를 이겨나가는 한 마음의 활용

2010. 1. 4. 16:4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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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에서는 세계경제가 어렵다고 해대지만 7%성장을 시켜주겠다던 선거공약의 메아리를 둘러대기 위함이 아닌가 싶으면서도 실물경제가 어려워지다 보니 걱정만 앞서고 있습니다.

 

이 모든 어려움들이 인간들의 교만함과 방종함으로 인한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을 해보면서도 가장 먼저 힘든 사람들은 없이 사는 서민들이라는 생각에 안타깝기만 할 뿐이지 전지전능한 재주가 없어서 애만 타더란 말입니다.

 

근대 한국불교의 선맥을 되찾으신 선승이신 경허스님에 대해서는 잘들 아시리라 여깁니다.

경허(鏡虛 1849〜1912)스님에 대한 기록은 생략하고 지금부터 경허스님의 행장에서 사람중생이 얼마나 무한한 능력을 지닌 만물의 영장이자 스스로가 주인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부처님 당시부터 지금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비롯해서 생명이 있는 모든 생물들은 태로 태어나고, 알로 태어나고, 습해서 태어나고, 생명이 다해 중음의 세계에 태어나는 사생 사유의 현상을 거쳐서 지금 이 자리에 우리는 존재하고 있습니다만, 몇 가지의 분별능력 외에는 본능으로 살아가는 축생계는 재껴두고 온갖 분별과 욕구와 착심이라는 오욕과 칠정으로 뭉쳐진 사람중생들은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정신이상자가 아닌 한에는 정상인이던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이든 간에 모두가 공통적으로 무한한 능력들을 가지고 있고 그렇기에 모두에게 자기발전의 무한한 기회는 온갖 방향으로 열려있지만, 사람중생들은 자기 것을 써먹지도 못하는 무명에 떨어져 있기에 마음이 부처라고 하면서도, 내 안에 성령이 있다고 하면서도 스스로 자기의 주인공이 되고 있질 못하는 것입니다.

 

경허스님은 전라북도 전주 자동리 사람인데 속명은 송 동욱(宋東旭), 법명은 성우(惺牛)라고 하셨는데 23세 때 동학사에서 학인들을 가르치던 중, 볼일이 있어 마을에 내려갔다가 지금의 악성콜레라가 만연되어 온 마을에 시신이 널려있는 참혹한 현장을 보고선 그동안 당신이 알고 있던 경전의 그 모든 알음알이들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느끼고는 절로 돌아와 날이 밝자 마자 학인들을 해산시키고선 혼자서 생사를 깨치는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시더니 견성을 하신 후, 참선과 무애행으로 살다가 1912년 64세로 입적하셨던 분이 바로 경허스님이십니다.

 

제가 지금 경허스님의 말씀을 드리는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 한마음이라는 체(體)는 이미 서로들 가지고 있는 것이니 있다 없다 할 것도 없는 것이고 다만 어떻게 쓸 것인가 그 사용방법인 용심(用心)에 대해서 경허스님의 행장을 통해서 일러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만공(滿空)스님이 경허스님께 볼 일이 있어 스님 방으로 헛기침을 하고선 불쑥 들어갔는데 방에 누워 있는 경허선사의 배위에 시커먼 뱀 한 마리가 걸쳐 있더란 말입니다. 깜짝 놀란 만공스님이 “스님 그거 뱀 아닙니까?” 하고 놀란 채 말하자, 경허스님이 말하시길 “가만두어라 내 배위에서 실컷 놀다가게.” 했더란 말입니다. 천지동근(天地同根)이라 천지자연의 일체를 하나의 같은 뿌리로 보는 열려버린 안목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다만, 경허스님께서 하루는 천장사(天藏寺)에 그 날 49제 막 재가 있어 법문초청을 받아 오셨는데 젯 상에 온갖 과일과 떡을 푸짐하게 진설해 놓은 것을 보신 경허스님은 재가 끝나면 얻어먹으려고 절 문 앞에서 안을 들여다보며 기웃거리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이들을 불러들여 전부 나눠 줘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지스님이 경허스님에게 노발대발해가며 “주더라도 재를 지내고 난 뒤에 주어야지 어째서 재 지낼 것을 주었냐고” 나무라자 경허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지내는 재가 진짜 재입니다.” 했다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만해 한용운 스님의 제자로 도봉산 망월사에 주석하셨던 춘성스님 역시나 망월사에 큰 재가 들어왔는데 원주스님에게 당신이 시내에 내려가는 길에 시장을 봐다 준다면서 장 볼 돈을 달라 해서 시장 가는 길에 만난 거지에게 다 털어주고 당신은 거나하게 취해서 그 다음날 올라오셔서 안절부절 못하는 원주스님에 걱정을 마라시더니 밥 한 그릇 떠 놓고 재를 지내주고는 상주들에게 내가 당신 아버님의 생전의 빚을 다 갚아주고 왔으니 재는 이보다 더 훌륭한 재가 없을 터이니 그리 알고들 내려가라고 하시자 평소에 춘성스님의 도력을 익히 알고 있던 상주들은 흔쾌히 하산을 했는데 그 이후로부터 그 자손들이 하는 일마다 그리도 잘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제가 오늘 법문의 양념으로 삼고자 하는 대목은 여기가 아니고 바로 이 대목입니다.

 

하루는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이 탁발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스승님에게 쌀자루를 매라할 수 없는 제자인 만공스님의 등에 진 쌀자루에는 쌀이 가득했는데 되돌아 갈 길은 먼데 무겁기는 하고 경허스님은 나눠서 함께 지자는 말은 전혀 없는 눈치고 그래서 만공스님이 일부러 낑낑대자 경허스님이 만공스님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무거우냐?” “예” “그러면 내가 무겁지 않은 방법을 한 가지 가르쳐 줄 것이니 너도 따라서 하거라” 하자, 만공스님은 등짐을 안 무겁게 해준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져서 “예, 스님 그렇게 좀 해 주십쇼.” 하고선 등짐을 나눠지자고 할 줄 알았는데 경허스님이 휘적휘적 앞서 걷더니 물동이를 이고 다가오는 젊은 아낙네의 양귀를 잡고는 입을 쪽 맞춰버렸습니다. “에그머니나.” 아낙은 비명을 지르고 물동이가 떨어져 깨져버리자 가까운 들녘에서 일하던 마을 청년들이 그걸 보고는 손에 든 곡괭이에 호미에 농기구를 든 채로 “저 땡 중놈들 잡아라!” 하고 우르르 몰려오자 일 저지른 경허스님은 이미 저 멀리 도망가고 있고 어안이 벙벙하던 만공스님은 붙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에 놀라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는데 온 힘을 다해 죽기 살기로 도망가는 두 스님을 마을 사람들이 못 따라오자 만공스님이 죽기로 도망쳐 마을을 벗어난 언덕배기에 올라 서자 먼저 도망간 경허스님이 길가에 앉아계시자 만공스님은 차마 화를 낼 수도 없고 씩씩대고만 있자, 경허스님이 제자인 만공스님에게 묻기를 “아직도 무거우냐?” 하고 묻자 만공스님이 대답하기를 “그 먼 길을 어떻게 달려왔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자, “그래, 내 재주가 어떠냐? 무거움도 잊고 그 먼 길을 단숨에 달려왔으니 말이다.” 했더란 말입니다.

 

이게 바로 한 생각의 차이입니다.아들 딸 대학 입시가 목전에 다가오거나 사업이 풍전등화의 기로에 서듯, 발등에 불 떨어지면 죽기 살기로 힘든지도 모르고 부처님께 매달려 업장소멸기도를 무릎이 닳도록 기도에 매달리다가 발등에 불 꺼지고 속편해지면 어쩌다 부처님 문안인사나 드리는 게 중생의 속성일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아무리 해도 힘들다는 생각이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하게 되고 자기가 싫어하거나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 하는 일은 콧구멍 후비는 일도 지겹기만 한 이것이 바로 누구나 가지고 있는 한마음이 주는 오묘함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한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음을 여실히 인정하고 다만 어떻게 쓸 것인가에만 연구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유이십난”의 여덟 번째로 인격적인 모욕을 당하고도 화내지 않기 어려운 진심(嗔心)을 다스리는 수행방법인 피욕부진난(被辱不瞋難)에 대해서 한번 쯤 생각을 해봐야 할 것입니다. (금강경14 이상적멸분 인욕선인의 사상과 가리왕) 아홉 번째는 힘이 있고 세력이 있는 사람이 그 세력을 써먹지 않기도 어렵다는 것이 유세불림난(有勢不臨難)입니다.

이 대목은 꼭 권력으로만 이해하시지 마시고 자신이 경제적인 부가 있거나 학력이 높다고 해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깔보는 경계까지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열 번째로는 매사에 가정에서건 직장에서건 대중이 모여 사는 곳에서 벌어지는 서로 간에 마음 상하는 일에 있어 마음에 아무런 흔들림 없이 무심하기 어렵다는 것촉사무심난(觸事無心難)입니다.

 

촉사무심난에서 말하듯 주변의 모든 상황에서 아무런 동요가 없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주변의 모든 상황에서도 탐심이나 진심이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과 같습니다만, 경허스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우리는 자기 안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한마음의 주인이 된다면 눈뜨면 현실속에서 아무리 어려운 일이거나 견디기 힘든 일이 있다 해도 한 생각 돌려 이겨나가실 거라 여깁니다.

 

성불하십시요.

 


눈(雪) 祝祭 (삿뽀로)

 

 

 

 

 

 

 

 

 

 

 

 

 

 

 

 

 

 

 

 

 

 

 

 

 

 

 

 

 

 

 

 

 

 

 

 

 

 

 

 

 

 

 

 

 

 

 

 

 

 

 

 

 

 

 

 

 

 

 

 

 

 

 
-해는 저물어도-

 

카툴루스~`

 

그래요

 새해엔 우리 멋지게 살아 볼게요 .

서로 사랑하면서 남들이 무슨 말을  하건 말건 신경 쓰지 말고

그저 묵살해 버리면서,

태양은 매일같이 우리를 위하여  다시 떠 오르고 있거든요.

우리는 밝을 줄모르는 깊은 밤은 절대로 사양하렵니다,

오늘도 날 위하여 떠오르는 오~나의 태양~당신을 바라보며 행복하게 살아 갈 것입니다.

눈이 많이 오시고 있네요.

 

 

 

  철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