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을 마감하는 임종 시에 정토를 향하는 가르침

2010. 1. 18. 20:2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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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도 춥던 겨울이 가고 밤낮의 길이가 같고 봄이 무르익는다는 춘분을 지나 다음 달부터는 날이 청명해진다는 청명절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법문은 살아가면서 쉼 없이 생겨나는 번뇌 속에서 한 마음 잘 다스려 일상에서 주처정토를 이루어 가는 실천수행과 유한한 이 몸들이 다겁생의 숙업들을 금생에 해결해보기는 커녕, 또다시 금생에 알게 모르게 지어온 업조차도 감당을 못하고 살아가고 있음이 대부분의 중생들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지중한 선근이 있어 다겁생의 업보중생이었을지라도 현세에 부처님 법을 만나 아미타불의 48대원에 의지해 일심으로 자기 안에서 잠자는 자성미타를 일깨워 업보가 있다해도 육도윤회에 들지 않고 왕생정토를 할 수 있음을 여실히 전해드렸습니다.

 

며칠 전, 국내 스님들의 독경테입은 모두가 이 분의 손을 거쳐 제작되는 불음을 전하시는 인지당이라는 ID를 쓰시는 거사님이 오셨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내드린 숙제를 다 하시고 점검도 받으실 겸, 안부 차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부처님 법이 이렇게 신묘한 줄은 정말 몰랐다고 하시면서 그동안 스님들의 독경테잎을 제작만 했지 당신이 기도라는 것을 해보지는 않았는데 절친했던 친구의 사업에 보증을 서주었다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중생들의 속성은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허겁지겁 神佛을 찾게 되듯이 그런 인연으로 오셨던 거사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라니 주력을 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고 중간중간에 점검을 해드리면서 지나왔는데 불쑥 찾아뵙겠노라는 연락을 받고 오셨는데 첨에 뵐 때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첨엔 다급한 상황에서 극도로 긴장됐던 심신이셨던 지라 관상이 참 복잡하셨었는데 이번에 차 한 잔을 마시면서 건너보이는 거사님의 용안은 수행을 잘하시는 수행자 한분을 뵙고 있는 듯 했습니다.

 

원효스님께서 남기신 “발심수행장”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수유재지에 거읍가자는 제불시인이 생비우심이요.(雖有才智 居邑家者, 諸佛是人 生悲憂心) 비록 재주와 지혜가 있더라도 수행자가 마을에 나와서 살면 모든 부처님께서 이 사람을 슬퍼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되고,

 

설무도행에 주산실자는 중성시인이 생 환희심이라.(設無道行 住山室者 衆聖是人 生歡喜心) 설령, 도(道)의 수행이 없더라도 산 속에서 머무는 자는 많은 성인들이 그 사람으로 인해 기뻐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된다.

 

하지만, 이제 이런 글귀는 시대에 맞게 재 해석돼야 할 것입니다.

술을 마시기보다는 술에 빠지면 안 되듯이, 비록 마을에 내려와 산다해도 속세의 오욕락에 빠져들면 제불시인이 생비우심이라는 대목으로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수유재학에 무계행자는 여보소도에 이부기행이요.(雖有才學 無戒行者 如寶所導 而不起行) 비록 재주와 배운 것이 있더라도 계행이 없는 자는 마치 보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를 하려해도 일어나 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

 

수유근행에 무지혜자는 욕왕동방에 이향서행이라.(雖有勤行 無智慧者 欲往東方而向西行) 비록 부지런히 행하기는 하나 지혜 없는 사람은 동쪽으로 가려 하면서도 서쪽으로 가는 것과 같다.

 

유지인소행은 증미작반이요, 무지인소행은 증사작반이라 (有智人所行 蒸米作飯 無智人所行 蒸沙作飯)  지혜 있는 사람의 수행은 쌀로 밥을 하는 것이며 지혜가 없는 사람의 수행은 모래로 밥을 하는 것과 같다.

 

공지끽식에 이위기장이나 부지학법 이개치심이라,(共知喫食 而慰飢腸 不知學法 而改癡心) 모두가 밥을 먹어서 주린 배를 위로할 줄은 알면서도 불법을 배워서 어리석은 마음을 고칠 줄은 알지 못하더라.

 

행지구비는 여거이륜이요, 자리이타 여조양익이라.(行智俱備 如車二輪 自利利他 如鳥兩翼)  수행과 지혜를 갖추는 것은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나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은 마치 새의 양 날개와 같느니라. 하셨던 대목이 생각 날 정도였습니다.

 

중생의 속성은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예수고 부처고 다 필요치 않기에 우리네 살아가는 데는 어쩔 수 없이 오르고 내리고 번갈아 가며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교만심과 해태심이 생겼다가도 정신들 차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거사님께서 그동안 대다라니 주력을 앉고 서고 눕고 운전하고 일과 중에도 오로지 일념으로 하시다가 얼마 전, 거주하시는 분당에서 갈마터널 지나는 중간에 7 만송을 막 마치시는 순간에 부동산을 하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는데 그런저런 사유로 내 놓았던 집이 그 동안에 아무도 거들떠도 보지도 않더니 한 단지 안에 사시는 부부가 두 말도 없이 매입의사를 내놓고 원하는 가격을 깍지도 않고 매매가 이루어지더니 급기야 자신들은 쌍령동 주변의 아파트 큰 평수를 시가보다도 훨씬 저렴하게 구입하게 되어 가족들이 다 좋아했지만, 대학생 아들의 등하교시 교통이 불편해서 걱정했더니 학교에서 운영하는 기숙사가 한 달 12만 원에 세끼를 다 먹여주고 재워주는지라 입사경쟁이 그리도 센데 입사하게 되고, 딸은 전공을 바꿔 교대 편입을 하게 돼서 한 걱정을 했더니 진주교대 편입시험에 합격을 해서 지방이라 걱정을 했는데 다시 경인대학교 교대 편입시험에 재차 합격을 해서 지금 다니고 있노라고 기도의 힘이 이렇게 신묘한 줄을 몰랐다고 제게 그동안의 이야기를 해주고 자신이 기도하는 동안 스님께서 당부하신대로 부처님께 알게 모르게 지은 업보를 참회하는 마음 외에는 다른 마음을 가져 보지 않았고 운전하다가도 길에 치어 죽은 축생을 보면 차를 멈추고 염불하면서 축생의 몸을 치워주거나 묻어주고 했노라며 이리하다보니 자신의 마음에서도 변화가 일어나 이렇게 힘들게 만든 친구에게도 원망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도 없어지고 그 친구 덕분에 저를 만나게 되고 불법을 알게 되어 되려 고맙기도 하다는 말을 하시기에, 기독교인들 같으면 이런 상황을 간증하러 다니기 바쁠건데 지금부터 거사님은 다라니 7만 독에 만족하시지 말고 다라니 백만독의 원력을 세워보시라고 말씀드렸던 만남이었습니다.

 

오늘 법문을 그 거사님께서도 접하시겠지만 제가 이런 실사례를 전해드리는 것은 비록 초심자일지라도 일념으로 염불을 한다면 기도의 가피는 누구에게나 오는 것입니다.

 

다만, 기도를 시작함에 있어 소원과 소망을 이루고자 하는 중생심에서 시작하신다면 그 기도는 삿된 기도가 되기 십상이지만, 부처님과 거래를 하는 기도가 아닌 진실로 지극하게 자기 자신과 더불어 한 지붕 밑에 인연되어 살아가는 가족들의 업력을 소멸하고자 한 마음으로 발심참회의 기도를 하신다면 소소한 성취는 절로절로 이루어지기에 술은 술술 넘어간다고 술이라 하고 부처님계신 곳에서 지극하게 기도를 하면 절로절로 이루어진다고 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시겠지요.

 

이제 이번 주 부터는 법문에 있어 정말 모두에게 필요한 법문일 것입니다.

어떤 법문이냐 하면, 그 동안은 살아가는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주처정토에 대해서도 말씀드렸고, 왕생정토를 가시는 방법도 일러드렸지만, 이 한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 겪게 되는 四有중에서도 死有가 왔을 때 왔을 때 대처하는 방법을 전해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전에도 제가 지나가듯 말씀드렸던 사람중생인 우리들만이 아닌 태란습화의 사생으로 태어나는 생명이 있는 모든 중생들이 윤회 전생하는 한 생을 1기로 정해서 한 생을 네 가지 현상으로 나누어 중유(中有), 생유(生有), 본유(本有), 사유(死有)라고 하는데 여기서 유(有)란 공(空)과 무(無) 사이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먼저 중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중유는 소위, 전생과 금생 간의 중간사이, 또는 금생과 내생의 중간에 있는 화생의 업식으로 후음을 받지 못하고 중음식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생유로 영계의 식신으로 업연에 따라 부모가 될 남녀가 탁태를 이룰 때, 탁태된 그 몸에 자리하여 맨 처음 받게 되는 몸을 말합니다.

 

세 번째의 본유는 출산을 하자마자 첫 울음을 터트리기도 전에서부터 이 세상에 빛을 본 이 한 몸이 현재의 이 순간까지의 육신을 말합니다.

 

네 번째의 사유는 금생을 살다 목숨이 끊어지는 1 찰나를 말합니다만, 오늘부터 제가 전해드리고자 하는 법문의 핵심은 바로 요 대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짚어드리고자 해서입니다.

 

이 대목 때문에 요즘 중국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티벳에서는 “바르도쉐돌”이라 하여 일명 “사자의 서(死者의 書)”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탄트라의 대가로 8세기에 인도 나란다 대학의 교수였던 파드마 삼바바에 의해 씌여진 책인데

“바르도”란 말은 “사람이 죽은 다음에 다음 생을 받기까지 머무는 중간상태”라는 뜻이고 “쉐돌”의 뜻은 “듣는 것만으로도 영원한 자유에 이른다는 뜻”니다.

 

그래서 이 둘의 의미를 합하면 “죽음과 환생의 중간상태에서 듣는 영원한 자유의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파드마 삼바바라는 이름의 뜻은 “연꽃 위에서 태어난 순수한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유한한 생을 살아가고 있기에 死有의 순간이 우리에게 언제 들이닥칠지 아무도 모르지만 이런 법문을 듣고 사유의 순간이 온다 해도 어떻게 대비하고 대처하면 된다는 지혜를 받아 지녀 항상 준비를 하고 쉼 없이 자기의 내면을 수행으로 닦아간다면 바로 사유의 순간이 온다 해도 가족이나 도반이나 법사스님이 들려주는 단 몇 마디의 말로 인해 영원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정등각의 가르침에 대해서 지금부터 전해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요.

망자와 가족들이 임종 시에 갖추어야할 지혜로움

음력 삼월에는 청명과 곡우가 있는데 청명은 보통 한식과 겹치거나(6년에 한번씩) 하루 전이 되기도 합니다.

 

그저께는 봄밭갈이가 시작되는 청명에, 어제는 한식인지라, 일요법회에 참석인원이 저조하리라 생각을 해보았던 어젯밤이었습니다.

 

한식은 동지를 지나 105째 되는 날을 말하는데, 한식날에는 더운밥을 안 먹고 찬밥을 먹는 날로 알고들 계시지만 그 유래는 잘 모르실거 같아 오늘 법회 때 법문에 앞서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한식에는 건조하고 바람이 자주로 많이 불어 불이 잘나기 때문에 불을 조심하기위해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지 않는다고들 알고 있지만, 사실은 이 한식날의 유래를 생각해 보면서 요즘 한국의 정치인들 가운데 한식날 유래의 주인공이 된 “개자추” 같은 인물이 과연 있겠는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중국 진나라(秦 기원전 221년∼ 206년)때, 문공(文公)이 국란을 당하자 개자추와 여러 신하를 데리고 자기 나라를 탈출해서 방랑할 때, 배가 고파서 거의 죽게 된 문공을 살리고자 개자추가 토끼의 고기라고 속이고 자기 넓적다리 살을 베어 구워 먹여 살린 일이 있었답니다.

후일, 왕위에 오른 문공이 개자추의 은덕을 생각하여 높은벼슬을 주고자 했으나, 개자추는 문왕을 위한 충성심이 벼슬을 얻기 위한 행위였다는 세인의 오해를 살까봐 문왕의 부름을 사양하고 산에 숨어 들어가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으므로 개자추를 나오게 할 목적으로 문공은 산에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헌데도 개자추는 끝까지 나오지 않고 홀어머니와 함께 버드나무 밑에서 불에 타죽고 말았고, 그 후 문공은 개자추를 애도하는 뜻에서 그 날을 개자추의 제일로 정하고 불에 타서 죽은 사람에게 더운밥을 올리는 것은 도의에 어긋난다 하여 불을 금하고 찬 음식을 먹는 풍속이 그때부터 생겼다고 하지만, 청명과 한식을 전후로 바람이 심하게 불어 화재위험이 있기에 불을 다루지 않고 식은 밥을 자주 먹는 때라고 해서 그렇답니다.

 

24절기에는 들지 않지만 한식날에는 나라에서 종묘(역대 제왕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와 각 능원에 제향하고, 민간에서는 여러 가지 술과 과일을 마련하여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지내면서 무덤이 헐었으면 “개사초”라 해서 잔디를 다시 손질하면서 죽은 이를 생각하고 추모하는 날이기 때문에 특별한 놀이는 없었지만, 무덤을 손보고, 함께 음식을 나눔으로써 형제간의 우의를 다졌다고 합니다.

 

오늘부터는 살아있는 누구나 겪어내야 할 임종시에 우리가 주의해야할 사항을 당사자의 마음 자세와 임종을 맞이하는 가족들의 마음자세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이 법회가 끝나고 영단에 시식을 할 때 의상대사의 법성게송을 해주게 되는데 법성게의 내용을 보더라도 현대의 물리학이나 양자역학 같은 그런 첨단의 과학에서 불교를 접근한다 해도 불교는 모순점이 없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법성게를 하시다보면 “일미진중함시방, 일즉일체다즉일,”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한 티끌이 시방의 세계를 다 포함하고 머금고 있고, 하나가 바로 전체이고 전체는 이 하나로부터 존재한다.”대목은 바로 나가 있기 때문에 시방세계가 존재가치와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이고 그렇게 존재하는 나 역시도 시방세계를 이루고 있는 존재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만 들여다보더라도 피부에 무수한 생명체의 박테리아와 세균들이 기생하면서 생멸을 거듭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몸 안팎에서 그것들이 생멸을 거듭하고 있듯이 그렇게 하고 있는 이 몸도 생멸을 벗어나지 못해 육도윤회를 하고 있지만, 세균과 박테리아는 분별식이라는 정식이 없이 생멸을 거듭하지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정식이 있어 육도윤회 자체가 업연으로 인해 업보중생으로 태어나 금생에 살다가 간다 하지만, 각 세포로 구성된 이 육체는 허물어진다 해도 미세한 업식은 그대로 남는단 말입니다.

 

이 업식은 그대로 남아서 죽자마자 다시 생을 받아서 거기에 걸맞은 생을 사는 것이고 또 과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과거전생에 생명의 존재로 있다가 죽은 순간에 업식이 남아 업력을 따라 금생에 몸을 받듯이, 업식이라 하는 미세의식은 죽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라고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불생불멸한다는 주인공이 살아생전에 뿌리고 인연 지은 업종자의 지향성에 따라 다음 생은 그곳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여기 오신 것도 일요법회를 가야한다는 생각이 일어나 몸은 생각의 지배를 받아 여기를 오셨듯이 인간 한평생의 역사는 모두가 이 한 생각의 지배를 받고 살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이 생각이라는 것이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고 이 마음은 그 동안 자라오면서 길들여진 습관이나 버릇이나 생각하는 사고에 의해 성품이라는 포장에 쌓여있단 말입니다.

이 날 이 때까지 살아오면서 마음이 동하면 생각으로 나타나고 이 몸뚱어리는 그 생각의 지배를 받아서 지금 이 순간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생이 끝나게 되면 살아생전에 생각과 말과 행동을 어떻게 하고 살았던가에 따라 다음 생을 향하게 되는 지향성은 그쪽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임종의 순간 곁에서 “망자의 마지막 의식에게 그 쪽으로는 가지 마시고 이쪽으로 가십시요.”하고 알려주고 안내해주는 것이 진정한 효도이자 보살심인 것입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했다 해도 아직도 죽음의 세계를 알지 못하고 있고, 그 세계 자체를 모르고 있는 현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이 다가올 때 무서워하고 두려워 하고 심지어 공포를 느끼기도 합니다만, 불법을 아시는 여러분들은 전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왜냐? 지금 이 순간까지의 세 가지 업으로 인해 어디를 향하 줄은 아는데 무엇이 무서울 것이고 또 생전의 업장을 짊어진 채로 아미타불의 48대원에 의지하면 윤회를 벗어나는 극락을 향할 수 있기에 무엇이 두렵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오게 되면 두려운 나머지 무의식이 되기 쉽고 누구나 의식을 잃어버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죽음이 어떤 것인지 죽음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저번 주에 “바르도쉐돌”이라고 말씀드렸다시피 “바르도”“둘 사이란 뜻으로 사람이 죽어서 다시 환생할 때까지의 중간 사이” 또는 “사람이 죽은 다음에 다음 생을 받기까지 머무는 중간상태”를 말한다고 했지요.?

 

이 상태에 머무는 기간은 사람에 따라 달라 착심이 많은 사람과 일체로부터 착심을 끊어진 사람이 있듯이 다르지만 대개 49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쉐돌”이라는 뜻은 “듣는 것을 통한 영원한 해탈” 또는 “듣는 것만으로도 영원한 자유에 이른다는 뜻”이라는 뜻입니다.

죽음의 순간 오직 한번 듣는 것만으로도 애착과 집착을 끊어버리고 삶과 죽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 영원한 해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으로 “죽음과 환생의 중간상태에서 듣는 영원한 자유의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죽음의 순간이나 육체적인 죽음 후에도 한동안 (49일)떠나지 않은 의식을 향해 경전을 독송해주거나 무상의 설법을 해주게 되면 영식은 다 섭수한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자(死者)는 죽음을 맞이한 순간부터 3일 반이나 4일 동안 자신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기절 혹은 수면상태에 빠진다고 합니다.

 

이 기간을 “차카이 바르도”, 즉 첫번째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라고 합니다. 이 기간 동안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나오는 최초의 투명한 빛과 두 번째의 투명한 빛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사자는 세 번째 빛의 단계인 “초에니 바르도”, 즉 두 번째 존재의 본래 모습을 체험하는 바르도로 들어가게 된다고 합니다.

 

망자의 영식이 기절상태에서 깨어날 때, 그의 영혼 앞에 상징적인 빛들과 소리, 그가 살아있을 때 행한 세 가지 업으로 인한 행위에 따라 카르마의 환영들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자는 그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과 뼈가 있는 육체를 갖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공포와 두려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 육체를 찾아 환생의 길로 향하는 “시드파 바르도”, 즉 세 번째 환생으로 향하는 바르도로 들어가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카르마의 결정에 따라 이세상이나 다른 어떤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49일 동안의 바르도의 상태는 망자에게는 일종의 꿈의 상태로 인식되어지며,만 사자가 이것을 꿈의 상태인 것을 모르고 실제하는 체험이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르도의 과정에서 망자에게 보여지는 모든 빛과 색채, 소리와 환영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존재의 본래 모습이라는 것을 인식시켜 영원한 해탈에 이르게 해주는 것이 바로 49일 간의 기도기간이 되는 것이고 이것을 49재라 부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사람에게 여덟 가지 인식(八識)이 있다고씀하셨으니, 곧 지식(知識:지각)이 있고, 앞의 다섯 인식(前五識)은 눈, 귀, 코, 혀, 몸이고 제 6식은 의식(意:뜻)인 것입니다.

 

제 7식은 말나식(末那識)으로 전송식(傳送識)이라고도 하고, 제 8식은 아뢰야식(阿賴耶識)으로 또한 함장식(含藏識)이라고도 합니다.

사람이 태중에 생유라 하여 생겨날 때는 제8식이 가장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제 7, 6, 5식이 차례로 뒤따라 생기게 되고, 그리고 죽을 때는 이 제 8식이 가장 뒤늦게 떠나고 나머지 인식은 역순으로 차례대로 떠나간다고 합니다.

 

제 8식은 곧 사람의 영적 인식(靈識)으로 세속에서 흔히 말하는 영혼(靈魂)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 8식은 신령스러워 소위 생유의 현상인지라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수태(受胎)될 때에 인연따라 맨 먼저 찾아와 어머니 뱃속에 자리잡은 태아가 살아 꿈틀거리게 되고 사람이 숨이 끊어져 죽은 다음에는 곧장 떠나가지 않고, 반드시 온몸이 다 차갑게 식기를 기다려 따뜻한 기운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뒤 비로소 이 제 8식이 떠나간다고 합니다.

 

제 8식 마저도 떠나간 다음에는 터럭 끝만큼도 지각(知覺)이 없게 되는 것이기에 만약 몸에 한 곳이라도 따뜻한 기운이 조금만 있다면, 제 8식은 아직 떠나가지 않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8식이 완전히 떠나가지 않은 상태에서 몸을 만지고 움직이면 그 고통을 알아 느끼기 때문에, 옷을 갈아 입히거나 손발을 펴고 굽히거나 몸을 옮기는 따위의 일을 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만지고 손댄다면 그 때 고통은 참으로 참기 어려운데, 입으로 말할 수 없고 몸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합니다.

 

경전에 보면, 목숨(壽)과 따뜻한 기운(煖)과 인식(識)이라는 이 세 가지는 항상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 몸에 아직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다면 인식도 존재한다는 뜻이고, 인식이 존재하면 목숨도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기에 옛 부터 죽었다가 사흘 또는 닷새나 지나 다시 살아나는 경우들도 있는 것입니다.

 

아기달왕(阿耆達王)은 양무제처럼 불사의 공덕이 매우 크고 높았는데, 왕의 임종 시에 시중들던 신하가 부채를 들고 있다가 왕의 얼굴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왕이 고통스러워 성질을 낸 까닭에 죽어서 그만 뱀의 몸으로 떨어지고 말았는데 생전의 공덕으로 인해 나중에 숲에서 사문을 만나 자신에게 들려주는 설법을 듣고 뱀의 몸을 벗어나 천상에 올라갔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기달왕의 이야기로 비춰볼 때, 우리가 죽었다고 하는 사람의 인식이 완전히 떠나가지 않은 상태에서 옷을 갈아 입히거나 옮기거나 화장을 하게 되면, 그로 하여금 고통스러워 성질을 내게 함으로써 악도에 인연 짓도록 조장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모르면 용감하고 어리석으면 맘대로 저지르지 못하는 일이 없듯이 선량한 마음으로 어리석은 효행을 하는 것은 아닌지 잘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산 사람들이 죽은 이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단지 신속하게 일을 끝마치려는 생각에서 몸의 따뜻한 기운이 다 사라졌는지를 살펴볼 여유조차 갖지 않는 것이 요즘의 장례 풍습이기에 숨 끊어지면 바로 119를 부르던지 병원에 전화해서 냉동실로 들어가 버리고 마는 것이 요즘 장례문화의 세태인지라 모두가 다 편리라는 것 때문에 불효막심한 일들을 저지르고 있지만 이러한 관례들이 일반화 되어 일상이 되었기 때문에, 제가 지금 전해드리는 이러한 이치도 저를 보고 번거롭게 어리석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원력을 세우고 이 날 이때까지 해보겠다는 것이 바로 “임종원”인 것입니다.

그리고 스님들이 대 수술을 하고도 편안히 몸조리할 곳이 없는 것이 바로 이 조계종단이기에 민간요법을 이용한 자기 자신에게 내재된 자연치유능력을 활성화 시켜주는 “간병원”을 “임종원”과 함께 해보고 싶은 것이 원력인 것입니다.

오늘 법문은 여기서 맺겠습니다.

 

성불하십시요.

임종을 지혜롭게 이끌어 주는 지혜

저번 주 법문에는 망자와 그 가족들이 지혜롭게 임종을 맞이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번 주에는 그 나머지 법문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법문에 앞서 제가 방송은 보질 못했지만, 인터넷에서 잠시 포르쉐를 타는 스님이란 제목이 보여 그곳엘 들여다 봤더니 MBC방송국 뉴스 후, 라는 프로그램에서 전번에는 싯가 2억 원이 넘는 벤틀리라는 고급외제차를 타는 목사님 이야기와 기독교 단체의 온갖 비리를 고발하는 취재를 하더니 형평의 원칙에선지 기독교 달래기를 위해선지 불교계의 문화재 관람료부터 시작해서 고급차를 타는 스님들까지 골고루 다뤄놓은 기사를 읽어보고 잠시 생각에 잠겼었습니다.

 

과연 이 시대에 부처님께서 와계신다면 물질에 노예가 될대로 되어버린 지금 이 시대를 어떻게 진단하시고 이 시대의 중생들을 어떻게 치료하실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면서 현재 중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티벳에 대한 폭압의 한 정점에 서계시며 이 시대의 환생불로 여겨지시는 달라이라마가 계셨던 티벳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생불이요, 환생불이라고까지 존칭을 받는 분이 계시는 티벳의 운명은 저렇게 밖에 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혼자만의 의문도 들면서 역시나 티벳의 운명도 그 나라의 업이 이렇게 되어 지도록 정해진 틀이다. 라는 것으로 결론짓고 말았습니다.

 

언젠가 지구의 자전과 같은 개개인의 별업에 대해 말씀드렸었고 지구의 공전과 같은 공업에 대해 말씀드렸었습니다만, 러시아의 소유즈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날아간 이소연씨가 한창 화제에 올라 있습니다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구촌도 역시나 지구 속에 존재하는 인간들에 의해 윤회의 업력을 따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140억 년 전 빅뱅을 시작으로 인류가 생겨나기 전부터 시작된 지구의 생성과정에서부터 끝없이 생성 소멸되어온 무수한 역사 속의 나라와 종교와 사상들이 모두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던 일체 삼라만상의 시종을 가장 단순명료하게 말씀하셨던 “성주괴공” 이 한 단어로 끝난다고 할 것입니다.

 

현 총무원장스님께서 결계와 포살을 해야 한다고 매년 소속된 교구본사에 포살에 참여하고 결계를 시행한다고 했지만, 그 어떤 노력보다도 고인들이 고구정녕하게 남기셨“기한이 발도심(飢寒發道心)”이라 “춥고 배가 고파야만 도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발심을 한다.”고 했던 말씀이 가장 절실한 때일 것입니다.

 

먹을것이 없는 데는 똥파리 쉬파리들은 기웃거리지를 않게되는 것이니 세상에 웃음거리 되는 소림무술도 못되는 조계무술 자랑은 없어질게 아니겠습니까?

 

작금의 기독교도 병들대로 병들어가고 있고, 불교 역시나 대동소이하고 있다고 세인들의 지탄을 받고 있으니 제가 더 드릴 말씀은 없고, 유한한 삶, 유한한 인생의 길에서 남들이야 뭘 하든 간에 누구나 겪어야할 임종 시에 우리는 제대로 된 신심을 가지고 제대로 자기 갈 길을 찾아나서는 바른 안목을 갖추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저번 주에 이어 이번 주에도 자신 만이 아니라 가족들의 임종 시에 눈 밝은 불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전 번 주에 말씀드렸지요?

사람에게는 여덟가지 식八識)이 있어 안이비설신이라는 여섯 감각기관인 육근이 여섯 대상을 접하면서 여섯가지의 분별식이 만들어진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여섯 가지 인식작용 외에 드러나지 않은 전송식(傳送識)이라고도 하는 제 7식인 말나식(末那識)이 있고, 아뢰야식(阿賴耶識), 함장식(含藏識)이라고도 하는 제 8식이 있다고 말씀드렸고 사람이 생겨날 때는 제 8식이 가장 먼저 오고 그 다음 순서대로 나머지식이 차례로 오지만 죽을 때는 이 아뢰야식이라는 8식이 가장 늦게 떠나가게 된다고 했지요?

 

이 제 8식이라 부르는 아뢰야식이 바로 세속에서 흔히 말하는 영혼(靈魂)인 것입니다.

 

다음 주 법회 때에는 3혼 7백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사람이 숨이 끊어져 운명한 다음에는 곧장 떠나가지 않고, 반드시 온몸이 다 차갑게 식은 다음 따뜻한 기운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뒤에야 아뢰야식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만약 몸의 어느 곳에든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다면, 제 8식은 아직 떠나지 않은 것이기에 이 때 몸을 만지고 움직이면 말은 못해도 그 고통을 느끼게 되므로 떠나가는 가족이 안타까워 붙잡고 울거나 흔들거나 망자를 위한답시고 옷을 갈아입힌다거나 손발을 펴고 굽히거나 몸을 옮겨준다고 조금이라도 만지고 손댄다면 그 때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으나 이미 몸은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전번 법회 때, 살아 생전에 이 몸은 기와 혈이 함께 다니듯 목숨과 따뜻한 기운과 인식이라는 세 가지는 항상 함께 하기에 운명 후에도 몸에 따뜻한 기운이 남아있다면 인식도 존재하는 것이고, 인식이 존재하면 목숨도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산 사람들이 망자의 혼이 육신에서 채 빠져 나오지 못한 상태에서 당하는 고통을 모르기에 신속하게 일을 끝마치려는 생각에서 망자의 몸에서 따뜻한 기운이 식어감을 자세히 살펴볼 여유도 갖지 않고 또 어디에 마지막 온기가 남아있는가를 살펴보지도 않는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임종을 목전에 둔 사람의 곁에 있는 사람은 쓸데없이 떠나는 사람의 흔들리는 마음을 어지럽게 흩어 놓아서도 안 되고 아쉬움을 표현한다고 슬픔과 안타까운 심기를 들어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임종자에게 몸과 마음을 다 놓아버리고 한 마음으로 염불에 집중하여 왕생정토를 발원하도록 권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 스님들을 초청하여 번갈아 염불해 주도록 안배하여 염불 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게 하면 더욱 좋고, 그도 형편이 않되면 간병하는 친지와 가족들이 염불을 해서 환자는 그 염불 소리를 들으며 마음속으로라도 따라서 염송하도록 해주어야 하는 것이 최후의 인연을 지어주는 효도가 되는 것입니다.

 

환자가 귀로 염불 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속으로도 부처님의 성호를 늘 염송하기만 한다면, 틀림없이 부처님의 자비원력의 가피를 받아 극락왕생한다는 이유는 우리의 일상은 생각이 일어나 지향성을 갖게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는 못한다 해도 환자를 앞에 두고서 환자가 의식이 없는 줄로 알고 사후에 처리할 일들을 환자 앞에서 발설하거나 장례문제를 논의 하거나 가족 간에 유산 분배 문제 따위를 논의하는 짓은 절대로 금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임종염불을 할 때는 목탁이나 요령의 박자에 맞춰 큰 소리로 염불하여 뚜렷하게 환자가 듣도록 해주어 환자 생각과 마음이 염불소리에서 흩어지지 않도록 해주어야 하고 환자의 몸은 앉든지 눕든지 자연스럽게 편안하게 해주고 절대로 움직이거나 옮기지 말고 모두 염불에만 전심전력하며, 숨이 끊어지고 온몸이 싸늘히 식어 초기 시체현상을 지나 정신의식(神識)이 완전히 떠나가기를 기다린 후에도 대여섯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경직된 몸을 씻기고 옷을 갈아 입혀야 하는 것입니다.

 

몸이 싸늘해져 딱딱하게 굳은 경우에는 뜨거운 물로 씻기고 뜨거운 수건을 팔이나 무릎 관절에 덮어씌우면 잠시 지나면 다시 부드러워지게 되니 그 때 안치해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임종 전에 모든 것에 대한 마음 정리를 다했거나 종교가 무멋이었던 간에 지극하고 간절하게 기도를 했던 사람의 몸은 의외로 부드럽더란 사실입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 최후의 온기가 어디에 남아 있느냐에 따라 좋은 곳에 나는 사람은 몸의 열기가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고, 악도에 떨어지는 사람은 열기가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간다고 합니다.

 

온몸이 다 식은 뒤 마지막 온기가 정수리(頂)에 남으면 극락세계에 태어나게 되고, 눈에 남으면 천상(天道)에 태어나며, 심장에 모이면 인도에 환생하고, 배에 남으면 아귀도에 떨어지며, 무릎에 남으면 축생로 태어나고, 발바닥에 몰리면 지옥도에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집경(大集經)의 임종징험게(臨終徵驗偈)에서는 “頂聖眼天生, 人心餓鬼腹, 畜生膝蓋離, 地獄脚板出”라 “정수리는 성인에 눈은 천상에 생겨나고 사람은 심장에 아귀는 배에 모여들고 축생은 무릎을 통해 떠나가고 지옥은 발바닥으로 빠져나간다.”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 법문은 여기까지 맺겠습니다.

 

성불하십시요.

삼혼칠백과 업식의 흐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안양 초등학생 유괴사건의 뉴스를 보면서 앞으로 아이들의 교육을 어떻게 해야만 할 것인가를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아이들에 대한 부모들의 관심과 보호가 더 절실해지고 심지어 사설경호업체들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소식도 있습니다만, 모 방송국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낯모르는 사람이 아이들에게 접근하는 실험을 했더니 열에 다섯은 스스럼없이 따라나섰고 첨엔 경계하던 아이들도 낯모르는 사람이 강아지를 끌고 접근했더니 열이면 열이 다 경계심 없이 따라 나서더라는 방송이 있었습니다.

 

예전엔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고 가는 게 아이들에게 해주던 인성교육이었건만, 이제는 경계부터 시켜야하는 각박해지는 오탁악세를 과연 어찌해야 할 것인가를 혼자서 자문자답으로 고민했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종교시설과 일요일 마다 성스럽게 종교행위를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탁해지기는 더욱 탁해지고 있으니 이 문제점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인과법의 가치관이 허물어져버려 세상을 무서워하고 자기의 그릇된 행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어버린 이 시대의 황금만능의 편리주의가 만들어낸 현대인들의 자업자득이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입니다.

 

세 딸이 부모를 필리핀에 고려장했다는 뉴스를 들어서 알고 계실 것입니다.

 

가졌다는 것은 편리할 뿐이지 행복 자체는 아니지만,질 가치에 짓밟혀진 채, 겨우 이름만 유지하고 있는 정신가치가 존재하는 이 시대를 불쌍하게 살아가는 중생들에게는 가진 게 없는 불편함에서 시작된 티격태격이 불행까지 가는 경우들이 다반사인 것이 우리들의 현주소일 것입니다.

 

수렵사회에서 발생된 서양종교에서는 인간 이외의 모든 생명체들은 신이 인간을 위해 내려준 일용할 양식으로 밖에 치부하지 않는 생명경외 가치관이 사람의 심성과 인성을 마비시켜왔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해드린 윤회에 대한 법문과 부처님께서 남기신 경전 속의 가르침인 대집경(大集經)의 임종징험게(臨終徵驗偈)를 보면, 사람이 죽은 다음에 온기가 마지막까지 어디에 남아 있는가를 보아 윤회세상을 헤아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頂聖眼天生, 人心餓鬼腹, 畜生膝蓋離, 地獄脚板出”라, “정수리는 성인에 눈은 천상에 생겨나고 사람은 가슴에 아귀는 복부에 모여들고 축생은 무릎을 통해 떠나가고 지옥은 발바닥으로 빠져나간다.” 고 했던 구절을 들려드렸듯이, 사생으로 태어나는 모든 생명체들이 분별식의 많고 적음은 있었을지라도 생명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동일성은 부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저 하고 많은 축생들의 죽음 뒤에 살아서는 생명이라 부르지만 죽고 나면 미물이라 부르는 것들의 주인공은 과연 어디로 갈 것이고, 사람중생은 죽으면 영혼이 어디로 갈 것인가를 한 번쯤 생각들 해보셨는지요.

 

저번 주 법문에 사람중생이 운명을 달리해서 완전히 차갑게 몸이 식지 않으면 영혼이라는 제 8식인 아뢰야식이 그때까지는  떠나가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드렸기에 약속드린 대로 3혼 7백에 대해 말씀드리고, 사람이 죽고 나서 제 8식인 아뢰야식까지 몸에서 떠나가고 난 다음에 그 영혼은 과연 어디를 향하는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의 몸에 의지하여 함께하는 세 가지의 정신작용을 혼(魂. 얼)이라고 부르고 몸의 형체에 의지한 영(靈)을 백(魄. 넋)이라 하지만, 혼도 세 가지가 있어 태광(台光), 상령(爽靈), 유정(幽精) 등의 세 가지 정혼(精魂)을 삼혼(三魂)이라 부르고 칠백(七魄)이란 육체라고 하는 몸의 형체에 의지하여 깃들어 있는 작음(雀陰), 탄적(呑賊), 비독(非毒), 시구(尸垢), 취폐(臭肺), 제예(除穢), 복시(伏尸)라고 하는 일곱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지장보살발심인연시왕경”을 보게 되면 3혼은 태광업혼신식(台光業魂神識). 유정전혼신식(幽精轉魂神識). 상령현혼신식(爽靈現魂神識)이고 7백은 작음백신식(雀陰魄神識) 탄적백신식(呑賊魄神識), 비독백신식(非毒魄神識), 시구백신식(尸垢魄神識), 취폐백신식(臭肺魄神識), 제예백신식(除穢魄神識), 복시백신식(伏尸魄神識)의 일곱가지가 있는데 사실은 이런 명칭들은 도교에서 나온 말들로 불교의 이름을 이용한 도교의 짝퉁위경인 것입니다.

 

전번에 제가 말씀드렸었지요.

불설과 비불설이 있고 진경과 위경이 있다고 말입니다.

불설은 부처님의 말씀들이고 비불설은 외도들의 경전이나 말들이고, 진경은 부처님께서 남기셨던 말씀을 아난이 결집을 통하여 남겨지게 된 아함경을 비롯한 방등경 등을 말하는 것이고 위경은 불교적인 이름을 빌려 위조한 경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삼혼을 부르기를 첫째는 업식(業識), 둘째는 전식(轉識), 셋째는 상속식(相續識)이라고 말하는데 업식이란 진여의 마음이 무명의 힘에 의해서 처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전식이란, 태중에 맨 처음 찾아들어온 8식인 아뢰야식으로 비롯해서 전해지는 안,이,비,설,신,의, 6식에 7식인 말라야식 까지를 합해서 전식이라고도 하지만, 무명에서 시작된 업식이 계속해서 능견초동(能見初動)의 상을 이루어 여러 가지 경계에 반연하서 작용하므로 전식(轉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상속식이란 객관의 대상에 대해서 일어나는 망념의 집착들이 과거생 부터 계속해서 이어져와 집착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게 하는 거칠게 분별하고 집착하는 업식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삼혼설의 근원은 도교의 삼정설에서 따온 것으로 업식(태광업혼식신)은 홀연히 무명을 일으켜 중생이 되었을 때에 생겨난 업혼을 말하고, 전식(유정전혼식신)은 홀연히 무명을 일으켜 중생계에 떨어진 후, 지금까지 윤회하면서 지은 업으로 된 혼을 말합니다.

 

상속식(상령현혼신식)은 현재까지의 과보를 바탕으로 미래의 과보를 초래하는 혼을 말하는데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세 가지의 작용인 근본적인 마음과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는 의지를 일으키는 작위(作爲)적인 마음인 의(意)와 모든 대상을 의지하고 분별하고 인식하는 분별식을 3가지 혼이라고 여기시면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칠백(七魄)은 무엇인가 하면 안이비설신의(眼耳卑舌身意) 6식(識)에다 제 7말나식을 합해서 일곱가지의 신식(神識)을 말한다고 말씀드렸지요.

 

아함경에는 인간은 육근가운데 오근(五根-안이비설신)이 인식한 것을 제6의 의근(意根)이 통합작용으로 종합적으로 인식하고 판단을 내리게 되고 이 육근의 아뢰야식이 항상 아집을 일으켜 윤회를 발생시키는 제 7말나식을 포함하여 칠백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바로 상속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3혼은 정신적인 부분으로서 물질을 갖고 있지 않고 7백은 육체적인 요소를 가진 3혼이 깃드는 장소를 의미하는데, 인간이 살아 있을 때 3혼은 7백에 의지하여 있지만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 제각각 분리되어 흩어지게 되는데 보통 혼백이라고 말할 때 혼은 가벼워 위로 뜨는 것으로 표현하고 백은 무거워 밑으로 가라앉는 것으로 이해하여 혼식이 위로 떠서 빠져나가고 현실에 남은 시신을 체백이라고 세간에서는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가천도를 위해 49재를 진행하는 이유는 생전의 업식 보다 아홉 배나 맑아진 식신의 영가를 청하여, 혼신은 떠난 지 이미 오래 되었고 혼신이 깃들어 살던 육신도 이미 화장을 하거나 땅에 묻혀서 지수화풍의 4대로 흩어졌으니, 집착하고 살던 삼혼과 칠백이 헛것이니 집착하지 말라는 무상의 도리를 깨우쳐주고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삼혼, 소위 아뢰야식이 다음생의 윤회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부처님의 방등경의 공 도리를 일러주어 일체의 집착과 애착으로부터 대 자유를 누리도록 해주고 마지막 아뢰야식이 떠나가는 순간까지 업식이 정토를 향한 지향성을 갖도록 해주기 위해서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주는 조념염불을 해주라는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요.

요즘 세상은 참 재밌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저런게 바로 인과로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노무현 정권 때에 반대를 위한 반대들을 하던 한나라당에서 자기들이 노무현 정권을 향해 FTA협정과 수입소고기에 문제 있다고 했던 내질렀던 지적들이 이제는 부메랑이 되어 자신들이 내뱉은 오물들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말입니다.

 

부처님 말씀이 하늘을 향해 침을 뱉으면 도로 자기 얼굴로 돌아오게 되고, 남에게 욕을 하게 되면 그 욕의 더러움은 자신의 입이 먼저 더러워진다고 하셨던 말씀을 요즘 집권 여당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각설하고, 4월이 가는 마지막 주에는 현실적으로 우리 일상에서 일어날 광우병에 대한 경각심을 말씀드렸지만 오늘 법문은 당사자인 우리가 광우병에 걸려 죽게 되던 세월이 흘러 죽음을 맞이하게 됐던 12연기법에 의해서有의 과정을 바로 지나 中有에 들어가는 순간까지와 中有에 들어가서 다시 그 어떤 모습으로 환생을 하여 生有의 순간을 맞이하던 간에 겪게 될 과정으로 쉽게 말해서 사람이 죽어서 다시 환생할 때까지의 중간 사이에서 영혼이 겪게 될 상황들을 티벳의 고전인 "사자의 서"에 나오는 내용을 예를 들어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를 뒤덮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인해 자신의 의식을 잃어버리고 무의식이 된다고 했는데, 의식을 잃어버린 채, 중유에 머무르는 기간이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49일로 알려져 있어 우리가 49재를 지내는 것은 잘들 아실 것입니다.

 

이 기간을 “바르도의 기간”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듣는 것을 통해 영원한 해탈을 얻도록 해준다는 것이 “쉐돌”라 한다고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르도 쉐돌”이란 죽음의 순간이나 49일 동안에 오직 한번 듣는 것만으로도 삶과 죽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 영원한 해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죽은 자에게 들려주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티벳 사람들은 죽음의 순간이 찾아오거나 육체적인 죽음 후에도 한 동안 스님들이나 영적인 스승이 그와 함께 하도록 한다고 합니다.

마치 우리가 49재를 지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들은 죽은 자의 유체가 의식적으로 남아있기에 죽은 자의 아뢰야식이 더 낮은 단계의 통로에 이끌리지 않고 본듸 청정한 자성이라는 존재의 밝고 투명한 빛을 향하여 갈 수 있도록 살아있는 동안 들어온 이 가르침들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준다고 합니다.

바로 우리가 영가의 위패를 모셔두고 조석으로 영가축원을 해드리고 7일 마다 시식 재를 지내드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의식체는 사자(死者)가 죽음을 맞이한 순간부터 3일 반이나 4일 동안 나라는 의식체가 육체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기절 혹은 수면상태에 빠진다고 합니다.

 

이 기간을 “차카이 바르도”, 즉 “첫 번째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라고 한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이 차카이 바르도의 기간 동안에 망자가 자성이라는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나오는 최초의 투명한 빛과 두 번째의 투명한 빛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망자는 세 번째 빛의 단계인 “초에니 바르도”, 즉 “두 번째 존재의 본래 모습을 체험하는 바르도”에 들어가게 된다고 합니다.

 

이때서야 잃어버린 의식이 돌아와 기절상태에서 깨어날 때는 망자는 살아있을 때, 행한 신구의 삼업의 행위에 따른 잠재의식보다도 더 깊은 아뢰야식 속의 카르마의 환영들이 망자의 눈앞에서 상징적인 빛들과 소리와 환영들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하지만, 망자는 자기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과 뼈가 있는 육체를 갖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망자는 살아생전의 신구의 삼업의 카르마를 벗어나질 못하고 자신의 업에 따른 지향성에 끌려 그런 육체를 찾아 환생의 길로 향하는 “시드파 바르도”, 즉 “세 번째 환생으로 향하는 바르도”로 들어가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의 살아생전의 카르마의 지향성에 따라 이 세상이나 다른 어떤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윤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바르도의 상태는 말 그대로 바르도로써, 망자의 의식체인 혼백이 머무르는 중간단계의 상태이기 때문에 실재로는 살아생전의 꿈과 같지만 망자의 의식체는 현실로 인식하듯 겪게되는 상태로 망자는 이것이 꿈의 상태인 것을 모르고 실재하는 체험이라고 믿는 것인데 이러바르도의 과정에서 깨어난 망자의 의식에 보여지는 모든 빛과 색채, 소리와 환영들은 모두 망자의 살아생전의 자신의 업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에 법사나 조념염불자들은 망자가 살아생전의 업력에 집착하거나 애착하지 못하도록 업력을 끊어주고 망자가 존재의 본래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경전을 들려주고 무상을 인식시켜주어 생전의 일체의 업식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어 영원한 해탈에 이르게 해주는 것이 바로 망자의 업식이 머무르는 49일 동안의 바르도 기간이 49재 천도재인 것입니다.

 

그동안 제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49일이라는 바르도의 기간일지라도 살아생전에 불법을 알고 애착과 집착의 무서움을 항상 생각하며 일상을 살아온 망자는 법사가 무상게 한 편만을 독경해주어도 바로 착심을 끊고 단 며칠 만에도 쉐돌의 해탈세계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영가들은 살아생전에 온갖 것에 끄달리고 집착하고 애착했던 의업이 끈질기게 남아있어 일체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무상법문을 여러 번 해주어도 악업의 영향 때문에 알아차리거나 착심으로 부터 벗어나질 못하는 어려운 영가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티벳에서는 다시 여러 차례 반복해서 임종자나 망자의 이름을 부르고 망자를 향해 다음의 말을 해준다고 합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만일 당신에게 지금까지 말해 준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이제 당신이 과거의 삶에서 가졌던 몸은 점점 희미해지고 미래의 몸은 더욱 선명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슬픔에 잠겨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나는 이처럼 고통 받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어떤 종류의 몸이라도 나타난다면 찾아가리라.

그리고 당신 영혼은 어떤 것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향하여 이리저리 돌아다닐 것입니다.

 

이때, 존재의 여섯 세계로부터 여섯 개의 빛이 비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업에 의해 당신이 태어날 예정인 세계의 빛이 가장 밝게 비칠 것입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잘 들으십시오.

만일 당신이 여섯 세계의 빛에 대해서 묻는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천상 세계로부터는 흐릿한 하얀빛이 비칠 것입니다.

아수라 세계로부터는 흐릿한 붉은빛이 비칠 것입니다.

인간 세계로부터는 흐릿한 푸른빛이 비칠 것입니다.

축생 세계로부터는 흐릿한 초록빛이 비칠 것입니다.

아귀 세계로부터는 흐릿한 노란빛이 비칠 것입니다.

또, 지옥세계로부터는 흐릿한 회색빛이 비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섯 세계의 빛입니다.

그 순간 당신의 몸 또한 당신이 태어날 예정인 세계의 빛깔을 띨 것입니다.

 

저번 4월 법문에 임종시의 마지막 온기에 대해서 말씀드리길, 대집경(大集經)의 임종징험게(臨終徵驗偈)에를 보게 되면, “頂聖眼天生, 人心餓鬼腹, 畜生膝蓋離, 地獄脚板出”라, “정수리는 성인에 눈은 천상에 생겨나고 사람은 심장에 아귀는 배에 모여들고 축생은 무릎을 통해 떠나가고 지옥은 발바닥으로 빠져나간다.”고 말씀드렸지만, 여기서는 이미 바르도의 상태인 중유에 들어가 다음 생의 환생을 겪게되는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때, 임종자에게 전해주는 가르침의 본질적인 요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어떠한 빛이 비치더라도 대비주 관세음보살님으로 여기고 그것에 대해 떠올리며 생각을 집중하여 명상하십시오.

어떠한 빛이 나타나던 간에 그것이 대비주 관세음보살님이라는 생각으로 여기고 명상하십시오.

이것이 가장 심오하고 본질적인 요점입니다.

 

그것은 지극히 중요하며 당신이 악도에 태어남을 막아줍니다.

당신의 원불이 그 어떤 불보살님이던지 간에 그 자신의 실체가 없는 환상과 같은 환영으로 여기고 오래 명상하십시오. 이것을 “순수한 환영의 몸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명상하는 원불을 가장자리로부터 안쪽을 향하여 사라지게 하고, 비어있음과 빛이 나는 광휘라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잠시 머무십시오.

이 상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입니다.라고 말해주고, 다시 임종자가 원불에 대해 명상을 하고 그 다음에 다시 광휘에 대해 명상하도록 해주고 이와 같이 교대로 명상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임종자의 마음 또한 가장자리로부터 안쪽으로 사라지게 하십시오.

 

“공간이 있는 곳은 어느 곳이든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는 곳은 어느 곳이든 “다르마 카야(법신)”는 존재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을 해주어 다르마 카야를 향한 단순하고 무아의 상태에 임종자의 업식이 청정자성에 머무르도록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과 관련되거나 관계되는 것을 다들 싫어합니다.

죽는다는 것은 두려움과 이생에서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은 물론이고 그 가족들마저도 아무도 죽어가는 사람이 일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마지막 마음상태를 도와주려 하지는 않고 망자에게는 전혀 도움이 안되는 착심만을 불러일으키는 안타까움만으로 표현하고 마는 것이 대부분의 현실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혼수상태이거나 의사전달을 할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본인에게 이생이 끝나가고 있음을 알려주고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라 또 다른 생이 있음을 전해주고 지금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 가를 알려주어 서방정토를 향하는 마음을 갖도록 옆에서 도와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조념염불을 하는 목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현실적이나 실제로는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오늘 이 법문을 들으시는 여러분들은 항상 마음에 새기셔야 합니다.

 

그래서 죽음을 목전에 둔 가족이나 도반이 있다면 이렇게 말을 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이름을 불러주며 “당신에게 죽음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의 가족(친구)이고 우리는 당신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죽어 가고 있는 것을 알고 당신도 자신이 죽어 가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이 순간 진정으로 함께 만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임종자에게 말을 해주어야 하는 것이고, 이 말은 우정과 의사 전달의 가장 좋은 최상의 표현이며,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대단히 풍족한 영감을 일으켜준다고 합니다.

 

또, 조념염불을 하는 사람은 임종자의 신체적 감각, 의사 전달 감각, 청각, 얼굴 표정 등, 미묘하게 악화되는 상황을 감지해서 서방정토를 향하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조념염불을 한다고 단순하게 독경만을 해주는 것으로는 교감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단순히 독경만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독경 도중에도 임종자의 미묘한 상황변화를 관찰하며 자주로 대화를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화의 내용은 “당신은 죽어 가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가고 있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던 주위환경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제 우리에게서 떠날 예정입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곳에는 연속되는 것이 있습니다.

당신의 가족과 친구들과 가르침과의 긍정적인 관계에 따른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근본적인 연속성에 매이지 마시고 오로지 아미타부처님의 명호인 “아미타불”만을 소리를 낼 수 없거들랑, 마음만이거나, 생각만이라도 집중하시고 들려오는 염불소리에 귀를 기우리셔야합니다.

이것은 에고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임종자도 목숨을 마칠 때, 그는 육체를 떠나는 모든 종류의 외부상처의 체험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임종자의 오래된 기억들은 임종자에게 환각으로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환영과 환각이 어떻게 나타나든 매이거나 도망가려 하지 말고 들려오는 염불소리에 오로지 집중하십시요.”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조념염불자가 이 모든 것을 행하고 있는 동안 죽어 가는 사람의 지성과 의식은 점점 약해지지만, 동시에 임종자는 주위의 느낌에 대한 더 높은 의식 또한 발달시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념염불자가 임종자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기 위해서 말을 해온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근본적인 따스함과 신뢰를 줄 수 있는 진실이라면 임종자에게는 더없이 큰 힘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임종자에게 12인연연기의 무상의 이치를 설명해주며 “당신의 가족과 친구들은 당신이 죽어 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여기에 있으며 당신에게 당신이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감추고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고 이생에 대한 모든 것들에 대한 안도와 안심을 줄 수 있을 때 임종자는 편안함을 가지고 조념염불과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그 자리에서 지켜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체와 두뇌는 분해되지만 그 순간 그곳에는 몸과 마음 사이의 불확실성이 있기 때문에 조념염불자는 임종자의 마지막 의식에 절대적인 편안함을 줄 수 있는 견고한 바탕을 제공하며 그 상황과 일치시켜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살아생전에 온갖 것에 일으켰던 진심과 사랑 등으로 평화와 분노의 환영에 매여진 일체의 업식을 자유롭게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조념염불자와 임종자가 서로 편안하게 일체의 애, 집착심을 끊을 수 있도록 교감을 갖기 위해서는 조념염불자는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듯 임종자의 마음과 일치시켜 서로가 마음을 열고 두 마음의 만남을 지극하게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조념염불자가 심적으로 안정되어 있다면 바르도 상태의 임종자도 조념염불자의 진심어린 안정에 끌리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임종을 맞이하지 못하고 살아생전에 온갖 것에 끄달리며 진심과 착심으로 뭉쳐진 채, 떠나가는 임종자는 삼악도에 휘둘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법문을 인연삼아 부디 부디 성불하십시요.

우리 영혼이라는 주인공들이 윤회 속에서 다겁생을 살아오는 동안 알게 모르게 지어왔던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업 중에 첫 번째인 망어참회 기도회향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리도 빨리 가고 있는 하루하루 동안 우리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뉴스를 들어 잘 아시다시피 그동안 진통을 겪어오던 한미 FTA가 4월 19일 캠프데이비드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부시와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고 왔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미국인들은 자국 내에서 도축되는 소고기는 먹지 않고 호주산 소고기를 먹고 있다는데 우리나라는 광우병이 예상되는게 아니라 실제로 발생되고 있는 미국산 젖소 고기를 마구잡이로 아무런 검역절차도 없이 수입되어 가뜩이나 살기 어려운 서민들은 비싼 소고기 구경도 못하다가 싼게 비지떡인데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 식으로 우리들의 식탁에 오르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부처님의 말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우리의 삶의 질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미국의 피터 싱어와 짐 메이슨이 지은 “죽음의 밥상”이라는 책 내용에는 우리가 자비참법 참회기도를 하는 도중에 지옥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이게 바로 그런 지옥이 아닐런가 싶기도 하고 과연 이렇게 죽어가는 저 축생들은 전생에 어떤 인과로 저 아귀도에서 허덕거려야 하고 저렇게 하는 미국의 축산업자들은 저 인과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지만 경제논리에 중독되어버린 그들에게는 이러는 제 말이 강아지 풀 뜯어 먹는 소리로만 들릴 것입니다.

 

하지만, 천지자연의 이치는 동 서양을 막론하고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의 신구의 삼업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중생들에게는 인과를 받는 시기가 이르고 늦을 뿐이지, 인과는 절대로 없음이 아님을 깨달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밥상이라는 책에 나오는 대강의 부분을 읽어드릴 것이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책이 주는 메세지는 “비윤리적인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주부들은 대형 마트나 시장에서 불그레한 조명발을 받으며 깔끔하게 포장된 고기와 쾌적한 온도에서 하얀 김이 내려오는 진열대에 놓여진 우유와 계란을 사서 먹으면서도, 그것들이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고민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내의 축산업자들이 동물을 기르고 도살하는 과정에서 오로지 경제 논리에 떨어져 다른 생명들에 대한 최소한의 연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의 잔혹함이 일어나고 있는데 “미국 아칸소 주 그래니스의 타이슨푸드社 도살장에서 여러 해 일해 온 버틀러 씨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켄터키 푸라이드 치킨용”으로 매일 밤마다 8만 마리의 닭들을 죽여 왔다는 그의 고백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버틀러씨의 말에 의하면 도살되는 닭의 셋 중 하나는 산 채로 끓는 물탱크에 들어가게 되는데 컨베어 벨트로 자동화된 기계가 닭의 목을 쳐야하는데 건너 뛰어 산채로 들어간 닭들은 튀겨지는 동안 퍼덕거리고 비명을 지르고 기계가 오작동을 해도 감독관은 라인을 멈추지 않는다.”

 

또, 대형 농장에서 사육되는 닭들은 참혹한 환경 속에 있었다.

“닭장 속으로 한 걸음을 옮겨놓으면, 별안간 눈과 폐가 확 타오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것은 닭똥 더미에서 풍기는 암모니아 냄새 때문이다.

닭똥은 바닥에 떨어져 무더기가 된 채 치워지지 않는다.”

가로 21.6cm, 세로 27.9cm 정도의 공간에서 사육되는 이런 비위생적인 환경은 닭을 병들게 한다.

공기 중 암모니 비율이 높아 닭들은 호흡기 질환에 걸리고 발과 무릎에 통증을 얻는다. 또 가슴에 물집이 생기고 눈에서는 진물이 나온다. 심한 경우 시력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양계업자는 치료에는 뒷전이다.

척추가 부러져 마비상태가 온 닭이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어나가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치료에 돈이 들기 때문이다.

양계업자는 “닭의 사망률이 높아도 이를 무시하고 무조건 체중을 불리는 편이 더 이득”이라고 여긴다.

 

여기서 운 좋게 살아남은 닭은 이제 도살장으로 넘어가기 전, 트럭에 타면서 또 한 차례 수난을 겪는다.

“닭의 다리를 잡아채서, 빨랫감을 쑤셔 넣듯 우리에 넣는다. 때로는 발로 콱콱 밟아서 밀어 넣기도 한다.” 이렇게 도살장으로 끌려간 닭들은 빠르게 죽음을 맞이한다.

닭 도살 라인은 분당 90마리를 죽이는 속도로 움직인다.

최고 속도는 1분에 120마리, 한 시간이면 7,200마리를 죽일 수 있는 속도다.

도살 방식은 우선 닭을 거꾸로 매달고 수조에 머리를 처박아 전기 충격을 가한다. 이때 닭의 몸은 마비 상태가 되지만 의식은 여전하다.

“곧바로 기절시키면 고기 맛이 떨어질 우려”가 있어 적정 수준의 전기만 흘려보내서다.

이렇게 정신이 말짱한 닭들은 다음 단계에서 목이 잘리고 마지막에는 펄펄 끓는 물에 삶아지지만, 도살 라인의 컨베어 속도가 너무 빨라 살아 있는 닭이 물에 들어가기도 한다.

 

버질 버틀러는 그 아수라와 같았던 현장을 이렇게 묘사한다.

산 채로 튀겨지면서 퍼덕거리고, 비명을 지르고, 발버둥치고, 눈알이 문자 그대로 머리에서 튀어나와 떨어집니다. 나중에 그런 닭을 꺼내 보면 뼈가 아스러지고, 몸의 부위가 군데군데 없어져 있습니다. 물탱크 속에서 얼마나 절망적으로 몸부림쳤으면 그럴까요?”

닭은 인간과 비슷한 신경계를 지니고 있을뿐더러 감수성도 예민한 동물인데도 말입니다.

 

어떤 아줌마가 명절이 되어 키우던 닭을 명절에 제수용으로 쓰고자 닭을 생포하려고 하는데 평소에는 구구구~~소리만 내도 달겨들던 닭이 뭔가를 눈치 챘는지 아무리 꼬셔도 다가오질 않아 서로 실랑이를 하다가 옆집 아저씨의 도움으로 닭을 잡아 배를 갈라보니 그 닭의 뱃속에 있어야 할 쓸개가 콩알보다도 작아진 것을 보고 그 이후로 그 아줌마는 죄책감에 평생을 닭고기를 안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산란용 닭들은 1년이 지나면 알 낳는 시간 간격이 길어지게 되는데 양계업자들은 그때부터 모이를 줄이거나 아예 주지 않고, 일부는 이 기간에 죽고 나머지는 털갈이를 시작하면서 체중이 30% 정도 줄어드는데, 양계업자들은 살아남는 닭들에게 다시 모이를 주기 시작하지만, 살아남은 닭들은 몇 달 정도 더 알을 낳다가 도살된다고 합니다.

 

스트레스로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닭들이 서로를 쪼지 못하도록 부리를 잘라낸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는데, 불에 달군 칼로 부리를 잘라내는데 이때도 돈이 아까워 마취제를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엊그제 우리나라에서 발병했던 조류독감(AI)도 2005년 캐나다 오타와대학의 바이러스 학자 얼 브라운이나 2005년 유엔 특별조사단에서도 조류인플루엔자(AI)가 확산되는 근본 원인 중의 하나가 “고밀도로 닭을 기르는 방식은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폭발적으로 발생하기 위한 이상적인 조건”이라고 경고했듯이 조류독감의 원인도 역시나 인간들의 욕심이 만든 질병인 것입니다.

 

“만약 AI가 사람 사이에 옮겨질 수 있는 형태로 변이하는 날이 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한번쯤 생각해보시고 우리가 윤리적인 음식을 먹어야하는 이유를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수렵사회에서 발생한 서양종교의 논리는 지극히 인간본위적인 사고로 인간이외의 모든 생명체들은 신이 인간에게 주신 일용할 양식으로 치부하는 인본적인 가치관과 이런 경제 논리와 합해져 비인간적인 공장형 축산업이 생겨나는 것이며 이러한 인간본위적인 가치관의 저변의식을 바탕으로 윤리적으로 사육되지 않은 축생들의 몸이 식재료로 변해서 우리들의 건강에 치명적인 병을 반대급부로 돌려주게 되고 생활환경에도 엄청난 해를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돼지들을 보게 되면 식육돼지의 대부분이 몸을 돌릴 수도 없는 좁은 축사에 갇혀 지내며, 암퇘지를 새끼들 쪽으로 젖꼭지를 내놓도록 눕히고 돌아누울 공간도 없게 만든 칸막이 사육장에서 사육되고 있었으며, 돼지는 사람보다 4배쯤 되는 배설물을 내놓는데, 5만 마리의 돼지를 기르는 축사에서는 날마다 227톤의 배설물이 쏟아져 나와 중간 규모의 도시 하나에서 배출되는 오물과 맞먹고 닭들과 마찬가지로 돼지들도 비좁은 축사에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낸다.

서있거나 드러눕기만 할 뿐인데다, 수퇘지들은 태어나자마자 고기 맛이 더 좋아지기 때문에 마취제도 쓰지 않고 고환을 잘라낸다고 합니다.

 

젖소들의 사육환경을 보게 되면 출산하자마자 송아지를 빼앗긴 어미 소는 6주간 새끼를 찾느라 아무 일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고, 젖소들의 먹이는 초원의 풀 대신 도살장에서 남은 고기 찌꺼기를 먹고 있는데, 현재 미국의 젖소들은 50년 전의 젖소들보다 세 배 이상의 우유를 만들어 내고 있는데 낙농업자들은 우유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BST라는 성장 호르몬을 주사해서 우유 생산량은 10% 정도 늘어나지만 많은 젖소들이 유선염에 걸리게 된다고 합니다.

 

보통의 젖소들 수명이 20년 정도지만 공장형 농장의 젖소들은 7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게 되고 더 끔찍한 것은 수송아지들의 운명이다.

대부분은 곧바로 도살되지만 송아지 고기로 쓰기 위해 조금 더 살려두는 경우도 있다.

살아남는 숫 송아지들은 16주일 동안 좁은 나무 칸막이에 갇혀 지내면서 먹는 것도 우유가 아니라 우유 분말에 녹말과 기름, 설탕, 항생제 따위를 섞은 것으로 고기를 더 맛있게 하기 위해 철분을 섭취하지 못하도록 바닥에는 밀짚조차 깔지 않는다.

소변을 핥지 못하도록 목에는 족쇄를 채워 고개도 돌리지 못하도록 한다.

소들이 들판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자란다고 알고 있다면 현대 축산업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것이다.

소들은 옥수숫대를 먹고 자란다. 섬유소 섭취가 부족한 소들은 유산 분비가 늘어나고 위확장증에 시달린다.

 

“소가 옥수숫대를 먹고 자라는 것은 사람이 사탕만 먹고 사는 것과 같다.” 수많은 소들이 병에 걸리지만 축산업자 입장에서는 병이 들었더라도 도살하기 전까지만 버텨주면 된다. 그래서 축산업자들은 소에게 항생제를 섞어서 먹인다.

송아지는 14개월 만 자라면 시장에 내다팔 수 있을 정도의 중량이 된다.

굳이 18개월이나 2년씩 먹여 살릴 이유가 없는 셈이다.

더 놀라운 것은 소들이 도살장의 찌꺼기를 먹고 자란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는 소들에게 젤라틴과 레스토랑 음식 쓰레기, 닭장 쓰레기를 먹이는 것이 합법이다.”

 

닭장 쓰레기에는 닭똥과 닭털, 먹다 남은 모이와 닭의 시체도 포함돼 있다. 2004년 1월, 미국 식품의약국은 닭장 쓰레기를 금지하는 방안을 발표했지만 아직까지 실행되지 않고 있다.

해마다 100만 톤의 닭장 쓰레기가 소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레스토랑 음식 쓰레기나 닭장에서 나온 먹다 남은 모이에는 소에게 직접 먹이지 못하는 성분의 무엇인가가 섞여 있을 수도 있다.

 

“이쯤해서 우리는 미국산 쇠고기가 왜 맛있고 싼가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고기의 육질을 좋게 하기 위해 무엇을 먹이고 있는지, 고기를 더 싼 값에 만들어 내기 위해 소에게 어떤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런 공장형 축산이 만들어 낼 드러나지 않은위험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조류 독감과 구제역, 광우병 등의 문제로 육식의 위험성이 드러나고 있는데, 그중 특히 광우병은 에이즈 못지않은 무서운 병으로 자칫 인류 멸종의 시초가 될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광우병이란,” 초식 동물인 소를 더 빨리 키우기 위해 동족인 소고기 등을 먹였더니 소가 미쳐서 죽어버리는 병으로, 그 소고기를 극소량이라도 섭취하게 되면 사람에게도 전염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바이러스로 전염되는 다른 동물성 질병들과 달리, 박테리아보다도 더 작은 단백질의 일종인 프리온을 통해 옮기기 때문에 끓이거나 압력을 가해도 막기 힘들고 백조 분에 하나라도 이 병에 걸리게 되면 뇌가 스펀지처럼 구멍이 뻥뻥 뚫려서 100%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잠복기간이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수십 년이라 지금 멀쩡하다고 누구도 안심할 수 없다고 합니다.

 

기존에는 광우병에 걸린 소의 뇌나 눈, 척수 등만 피하면 되는 것으로 알려졌었으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심지어 유제품을 통해서도 발병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한국인의 경우 서양인들보다 단백질 구조상 광우병에 걸릴 확률이 훨씬 높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유통되는 소고기는 크게 한우와 호주산으로, 실제 소고기를 소비하는 나라로서는 전 세계에서 거의 최초로 곧 아무런 규제없이 미국산 소고기를 대량 수입을 하게 됐습니다.

 

미국은 광우병 발생도가 낮으며 광우병을 통제하고 있다고 홍보하지만, 유럽에 비해 관리 체계가 매우 허술하다고 합니다.

유럽은 최근까지 도축 예정인 모든 소를 조사 해왔으나 미국은 고작 0.1% 남짓만 검사하는데 그쳤고, 또 광우병 환자의 증세가 알츠하이머병과 유사해, 소고기 시장이 줄어드는 것을 원치 않는 소고기 업계와 친족이 광우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꺼리는 가족의 이해관계가 맞아 대충 알츠하이머 병으로 분류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합니다.

 

현재, 미국의 알츠하이머병 환자는 500만 명에 달하고 그 증가추세도 폭발적이라고 합니다.

잠복기간을 감안하면 이제 시작일지도 모르는데, 그나마 미국인들은 광우병 우려가 덜한 살 부위를 먹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머리부터 꼬리까지 안 먹는 부위가 없을 정도니 그 위험이 훨씬 크다고 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라도 미국산 소고기를 먹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하지만, 친구나 친지 등 많은 소중한 사람들에게 이 정보를 알려야 합니다.

“값싼 미국산 소고기가 들어온다면 학교나 군대 급식으로 사용될 것이고 조미료나 라면, 과자 등의 식품에도 첨가될 것이고 각종 약품의 캡슐이나 화장품 등에도 사용될 것이다.” 원산지 표시가 부실한 현재의 유통 행태를 볼 때 설사 한우라고 되어 있어도 안심할 수 없고, 또 수혈을 통해 감염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이 말하기를 국가에서 국민의 건강을 지켜주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광우병 우려가 있는 미국산 소고기를 수입하지 않거나 규제를 엄격히 하는 것밖에 없다고 합니다.

 

광우병 자체도 위험하지만 근본적으로 왜 그런 병들이 생겼는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동물도 생명이고, 아픔을 느낀다고 하는데, 인간의 식욕을 위해 동물의 생명을 빼앗는 것 자체도 가혹하지만, 더욱 잔혹한 일은 효율성을 위해 인면수심의 생명경시행태가 자행되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죽음의 밥상이라는 책에 따르면, 공장식으로 운영되는 사육장에서는 동물의 신체를 일부러 손상하기도 하고, 운신할 공간조차 없게 만든다고 합니다.

거기다 방부제와 항생제 촉진제 등 각종 화학약품을 주입해서 동족의 고기를 먹도록 강요하니 축생들의 고통은 극심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거기다, 1kg의 고기를 얻기 위해 9kg의 곡류가 소요된다고 하는데 지금도 북한을 비롯해서 아프리카 지역을 비롯한 지구 곳곳에서는 가난으로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이 수없이 많은 현실인데 만일 사람들이 육식을 줄인다면 그 곡물만으로도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라도 현재와 같은 무분별한 육식은 중지되어야 하고, 제도 개선과 생명존중 교육을 통해 동물 복지를 고려한 양육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아울러 소비자 입장에서도 가급적 육식을 삼가는 자세가 요구된다할 것입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옥수수 가격이 이만큼 싼 이유는 미국 정부가 옥수수 재배업자들에게 주고 있는 수십억 달러의 보조금 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미국 소들이 먹는 옥수수는 1파운드(0.45kg)에 4센트 정도 밖에 안 하는데 이것은 농작물 생산비 보다 낮은 가격이라고 합니다.

 

옥수수는 또 화학비료를 먹고 자라는데 화학비료는 대부분 석유로 만들어지는데, 소 한 마리를 567kg으로 키우려면 1075리터의 석유가 필요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이 벌어지게 된 근본 원인은 소비자에게도 있다고 합니다.

싼 먹거리에 대한 소비자들의 수요가 식품업계를 비인도적인 길로 내몰고 있고, 그것은 환경 문제도 유발한다고 합니다.

“유전자 조작식품(GMO)”은 회복 불가능한 환경 피해의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하나의 종(種)이 다른 종의 본질을 간섭하는 오만함”이라는 철학적 문제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시는 오늘이 되시기를 바라며 이러한 문제들을 가족들과 함께 대화 속에 공유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깨어야 할 것입니다.

축생들의 몸뚱어리가 음식의 재료가 되어 식탁에 오르기까지 받는 고초가 바로 자비참법에 나오는 지옥고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지옥은 땅 속 깊이에 있질 않고 천상세계 또한 하늘 저 끝에 있지를 않을 것입니다. 바로 머리 위 발 아래로 석자를 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극하게 기도하며 명훈가피력에 의지하고 윤회의 몸을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요.

 

 

 

힘이 되는 이야기

 

 

사는 것이 힘이 들때가 있습니다.
어쩜 나 혼자 이런 시련을 당하고 있는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될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잠시 뒤를 돌아 본다면
우리는 참 많은 시련을 잘 이겨내어 왔답니다.

 

처음 우리가 세상을 볼때를 기억하나요.
아마 아무도 기억하는 이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큰 고통을 이기고 세상에 힘차게 나왔습니다.
한번 다시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많은 시련을 지금까지 잘 견뎌 왔는지요.
지금 당신이 생각하는 것 시간이 지나면 웃으며
그때는 그랬지라는 말이 나올겁니다.

 

가슴에 저 마다 담아둔 많은 사연과 아픔들
그리고 어딘가에서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함께
시련을 이겨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당장 얼굴이 굳어진 채로 지낸다고 해서
지금 상황이 달라 진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술을 다 마셔 지금 상황이 달라진다면
세상의 모든 술을 다 마시겠습니다.

 

지금 당장 어딘가에 화를 내고 누구와 싸워서
지금 상황이 달라 진다면 백만 대군과도
싸움을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당신이 가진 시련이
달라지거나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그런 상태일수록 그런 아픈 마음이 많을 수록
하늘을 보고 웃어보세요.

 

그렇게 웃으며 차근히 하나씩 그 매듭을 풀어보세요.
너무나도 엉커있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것 뿐이지
절대로 그 매듭을 못푸는 것은 아닙니다.
수없이 엉킨 매듭이 지금 당신의 앞에 있다면
그 매듭앞에 앉아 보세요,
마음은 많이 답답해질 겁니다

 

언제 그 많은 매듭을 다 풀지라고 생각을 한다면
더 답답할것입니다.
생각을 너무 앞질려 하지 마세요,
다만, 앉은 채로 하나씩 풀어보는 겁니다.
그렇게 문제와 당당히 마주 앉아 풀어보면
언젠가는 신기하게도 그 매듭이 다 풀려져 있을겁니다.
그때가 되면 찡그리거나 그 앞에 했던 고민들이
너무나 아무것도 아닌 일에 시련이라는
단어를 붙였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갈것 입니다.

 

당장 찡그리거나 가슴아파해서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그렇게 하세요.
그러나 그렇게 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면
힘차게 웃으며 달려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풀벌레 소리와 시원한 큰 나무
밑에서 편안하게 쉬며 웃고 있을 당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잘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되세요^^*

그럼 모든 분들 건안들 하십시요

당신을 좋아 하는 까닭으로
                 당신 곁으로 가는 중입니다.



                                 사진/ 글 : 성재 서상민




지난 날 당신과의 만남을 이루지 못한 것을
누구 누구의 탓으로 돌려 아픔으로 기억하지는 않습니다.
새날에는 당신을 꼭 만나고야  말겠습니다.

못난 모습에서 나온 모름들이 우리를 이루지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성숙의 단계를 급한 마음으로
앞 당겨 올 수도 없었습니다.

세월이 약이라는 옛 말에서 처럼
시간 흐름에서도
당신이 아니면 아니되는 까닭이 나타납니다.

저의 진실에서 처럼 당신께서
저를 반겨 주실 때는
꿈으로 여길 수 밖에는 없습니다.

저의 진실이 혹여 비껴 지나칠 때에도
당신을 더 많이 좋아 할 것을 다짐하고
더 가까이 다가 설 것을 약속합니다.

당신을 좋아 하는 까닭으로 당신 곁으로
가는 중입니다.
마중은 아니 나오셔도 좋습니다.





<2010. 01.02 시화전 -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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