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를 지내는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2010. 1. 21. 22:0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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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를 지내는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법문은 참 중요한 법문일 것입니다.

다른 종교인들이 이런 질문을 하면 확실히 들으셨다가 막힘없이 답해줄 수 있는 우리절 신도 분들이 되어주시고 정법을 배우시는 불자라는 긍지를 가지시길 바랍니다.

 

이제 정초 명절도 다가오고 새해 차례도 지내야 하는데 차례를 왜 지내는가? 또 기제사는 왜 지내는가?

제사는 몇 가지가 있는가?

또 차례 상이나 제사상을 차리는 방법은 어떻게 되는가?

속가에서 지내는 기제사와 사찰에서 지내는 기제사는 뭐가 다른가? 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제사방법은 각 지방마다 다를 뿐 아니라 집안마다 차이가 있는 것이니 오늘 법문을 참고로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차례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차례의 원래 뜻은 茶禮였습니다.

 

여러분들이 KBS TV에서 6부작인가로 방영되었던 차마고도를 보셨다면 옛날에는 차가 금값보다도 귀했기에 매월 음력 초하루, 보름, 조상의 생신, 명절 등에 간단히 지내는 제사에는 금보다 귀한 차를 다려서 조상님께 정성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다례라 했으나, 요즘은 차례라고 풀어 칭합니다만,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모든 제례행사가 불교식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주자학이 국가(國家)정교(政敎)의 기본(基本)강령이 되어 유교가 정치의 기본이 되면서 명(明)나라 때, 구준(丘濬)이 가례에 관한 주자의 학설(學說)을 수집(蒐集)해서 만든 주자가례라는 책을 교본삼아 관(冠)혼(婚),상(喪),제(祭)의 사례(四禮)에 관한 예제(禮制)삼아, 유교적인 제례법이 차차 보편화되었는데, 조선 태조 3년 10월(1394) 조선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된, 종묘에 태조의 4대조인 목조,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셔와 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총 83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정전 뜰 앞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는 곳이 바로 종로에 있는 종묘입니다.

 

이렇듯 조선시대에는 왕실은 역대 선왕의 위패를 모시고 봉공을 했었고, 철저한 계급사회였던 당시에 벼슬의 직급에 따라 조상의 제사봉공도 구별이 있어 일반 평민은 자신의 부모만을 위한 일대봉공이 원칙이다시피 했으나, 해방이 되면서 뽀대나는 문중임을 내세우기 위해 너도나도 많은 조상을 위한 봉공을 하다보니 허례허식이 많아지고 가정경제가 흔들려 박 정희 대통령 때, 범국가적인 의례규범으로 혼례, 상례, 제례, 회갑 등의 가정의례에 있어서 허례허식을 일소하고자 서민들의 생활정서에도 맞지도 않고 형식에 매여 오히려 허례허식을 조장했던 주자가례의 사례편람에 따른 제례행사의 비현실적인 제례의식들을 간소화시키고 합리화함으로써 낭비를 억제하고 건전한 사회기풍을 진작하기 위해서 1969년 3월 5일을 기하여 가정의례준칙이 전문 71조와 부칙으로 시행됐던 것입니다.

 

형식에 치우친 제례의 지나친 가사노동의 부작용이 지금껏 내려와 명절에 며느리 병을 만드는 원인이 되고 명절 끝에 부부싸움의 원인도 되는데다 심지어 종교까지도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되는 종교를 택하는 주부들도 생겨나게 된 것 입니다.

 

하지만, 그런 자기도 죽으면 배고픈 귀신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하고 죽은 귀신이 밥을 먹기나 하냐고 까지 해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귀신은 몸이 없는지라, 입은 더더구나 없어 우리처럼 숟가락으로 퍼먹어 밥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식향(食香)이라 해서 냄새를 먹고 후손들의 정성을 선열미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란 자신의 형편에 맞게, 정성을 다해 조상들을 위한 제례의식을 봉행하게 되면 그것이 자식들에게는 좋은 교육이 되고 정체성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리를 모르기에 온갖 작태를 저지르고 사는 게 현대인들의 얄팍한 어리석음일 것입니다.

 

신년에 드리는 차례는 연시제(年始祭)라 해서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조상님 전에 세배를 드리게 되는데, 봉사 대상은 보통 일반인은 제주로부터 2대조까지 입니다.

 

차례를 드리는 방법은 봉사대상이 되는 여러 조상 분들의 신위를 함께 모시고 제사를 올리지만, 제수의 진설에 조부모 내외분, 부모 내외분의 제상을 각각 구분하여 마련해도 무방합니다.

 

또, 영정사진이 없으면 지방을 사용하되 지방은 합사하는 경우에는 나란히 쓰고, 술을 올리는 헌작은 1번 하고 축문은 생략합니다.

 

제물로는 새해에는 떡국을 올리고, 한식차례는 청명 다음날로, 이날은 묘역을 손질하는 정성을 들이고, 추석차례흩어졌던 가족들이 오랜만에 모여서 1년 농사로 거두어들인 햇곡식으로 차례를 지내게 되는데, 추석차례도 지내는 봉사대상과 제수 절차는 다른 명절 차례와 동일합니다.

 

추석차례에는 여름에 웃자란 풀을 벌초를 하게 되고 장마로 인한 묘지를 보수하고 10월 시제를 지내는 경우에는 직계 어른의 묘를 찾아서 묘제차례를 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제사의 종류로는 묘제, 시제라 해서 한식이나 10월에 5대 이상 선조의 묘소에서 올리는 제사가 있고, 기제사해서 4대 이하 조상의 돌아가신 날에 모시는 방안제사가 있습니다.

기제사를 지내는 시간은 별세한 날의 전날 자시(23시 30분에서 다음날 01시30 분 사이)에 지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시에 천문이 열리고 축시에 지옥의 문이 열린다 해서 자시가 끝나기 전에 제사를 마치고 한지로 만든 축문을 두 손에 들고 살라서 천문이 열린 하늘로 올려드리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기제사의 장소는 안방이나 거실 등 정갈한 곳의 북쪽에 병풍을 쳐서 영좌를 마련합니다.

제주는 고인의 장자 또는 장손이 되며, 없는 경우에는 차손이 제주가 되어 제사를 주관하고, 상처한 경우에는 남편이하되, 출타중이면 그의 자손이 제주가 되고 아들의 경에는 손자가 있어도 아버지가 제주가 되며, 자손이 없이 남편이 죽은 경우에는 아내가 제주가 되는 것입니다.

또, 참사자는 제사에 참여하는 자로서 보통 고인의 직계 자손과 가까운 친척들만 참석하게 되는데, 직계 가족으로서 불가피한 사정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먼 곳에 있더라도 기제 시간대에 묵념으로라도 고인을 추모하면 됩니다.

 

제상에는 합설을 원칙으로 하는데, 한 제상에 메(밥)와 잔만 두 분 것을 따로 올리면 되고 여(女)동 남(男)서가 됩니다.

제사복장은 깨끗한 옷으로 입되 양복은 검은색에 반드시 넥타이를 매도록 하고 한복을 입은 경우에는 두루마기를 꼭 입어야 하는 것 입니다.

 

모사 띠풀 한 줌을 잘라서 실로 중간을 묶은 뒤, 정결한 모래(없을 때는 팥으로 대신)를 담은 대접에 세운 것으로 묘소를 상징하는 것 입니다.

제상차림의 원칙은 상 앞에 섰을 때 병풍을 친 쪽이 북쪽이고 좌측이 서쪽이며, 우측이 동이 되지만, 이 또한 형편에 따라서 하게 됩니다.

상차림을 방위를 간단히 말씀드리면,

어동육서 : 물고기는 동쪽, 고기는 서쪽에 놓고,

홍동백서 :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생동숙서 : 날 채소는 동쪽, 익힌 것은 서쪽에 놓고,

두동미서 : 머리는 동쪽으로 꼬리는 서쪽방향으로,

조율이시 : 동쪽에서 서쪽의 순서로 조(대추), 율(밤), 이(배), 시(감)의 순서로 놓고, 삼치, 갈치, 꽁치 등, 치로 끝나는 생선과 복숭아는 제사상에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전부터 동쪽으로 난 복숭아 가지를 꺽어서 퇴마를 하는데 사용했다는데서 유래가 된 것입니다.)

좌포우혜 : 포는 서쪽, 식혜는 동쪽에 놓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찰에서 기제사를 모실 때는 이러한 원칙에서 과일과 떡을 주로 사용하되 향로와 촛대 가까이는 키가 작은 과일과 떡으로 배열을 해서 점점 키가 큰 것으로 배열을 하게 됩니다.

금년 2월 법문에 제사지내는 유교적인 절차법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렸으나 재차 제례의식의 순서를 다시 말씀드리자면,

1.영신(迎神): 대문 열기, 북쪽에 병풍 설치, 지방 붙이기.

2.강신(降神): 영혼 강림을 청함, 모든 자손이 제상 앞에 늘어서서 주인이 초에 불을 붙이고, 향을 피운 후 재배한 뒤 꿇어앉고 술 반잔을 향불에 돌려 모사그릇에 3번 붓고 절 올리고

3.참신(參神): 동참자 모두가 절로서 고인에게 인사를 하고

4. 초헌(初獻): 첫째 술잔으로 제주 분향, 술을 가득 따라 잔을 향불에 좌에서 우로 3번 돌리고 모사 그릇에 3번에 나누어 부은 후 빈 잔을 밥과 국 사이의 앞쪽에 두고, 밥뚜껑을 연 후 저를 올리고 제주는 절을 올립니다.

5. 독축(讀祝): 독축 후 동참자 모두 절을 합니다.

6. 아헌: 주부가 둘째 잔을 올리고 초헌과 같으나 모사에 술을 붓지는 않습니다.

7. 종헌(終獻): 셋째 잔은 아헌자 다음의 근친자가 아헌과 같이 하되, 술은 7부로 나누어서 합니다.

8. 첨작(添酌): 제주가 종헌 때의 7부 잔에 3번 첨작하여 채웁니다.

9. 삽시정저(揷匙正箸): 주부가 숫가락의 안쪽이 동으로 향

하도록 메 그릇 중앙에 꽂고, 젓가락을 고른 뒤 어적이나 육적 위에 놓습니다. 이때, 제주는 절, 주부는 4번 절을 합니다.

10. 합문(合門): 모두 나가고 문을 닫습니다.

11. 계문(啓門): 헛기침을 3번후 다시 모두 방에 들어가고,

12. 헌다(獻茶): 국을 내리고, 숭늉을 올려 메 3 술을 말아 수반을 만들어 놓고, 저를 옮긴 후 묵념을 합니다.

13. 철시복반(徹匙覆飯): 수저를 원 위치로 거두고, 밥뚜껑을 덮고,

14. 사신(辭神): 영혼전송이라 해서 모두 신위 앞에 절을합니다.

15. 철상 : 제주는 지방과 축문을 불사르고 상을 물리고,

16. 음복 : 참사자들이 제사 음식을 나누어 먹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주자가례의 사례편람을 기본으로 해서 세속에서는 제사를 지냅니다만,

 

불교식 차례식순을 찾아보게 되면,

먼저, 입정(入定)이라는 묵념을 합니다.

죽비를 치거나 죽비가 없으면 “입정 하겠습니다”하고 제주

가 가족들에게 말한 다음, 마음을 고요히 하고 편안한 자세로 마음생각으로 조상의 덕을 흠모하고 기립니다.

 

두 번 째로. 불보살님을 청하는 거불(擧佛)을 합니다.

영가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것인 만큼 아미타부처님을 청하는 미타거불을 하는데, “나무 극락도사 아미타불, 나무좌보처 관세음보살, 나무 우보처 대세지보살”을 3번씩 염송하면서 절을 올립니다.

세 번째 다게(茶偈)는 차를 올리는 염송으로, 제주가 “이제 저희 가족들이 정성으로 감로의 차를 올리오니 부디 오셔서 이 차를 받으소서” 합니다.

 

네 번째로 조상님을 청하여 모시는 청혼(請魂)을 하는데 청혼의식은 “금일 지극정성 설향봉청 제자(주소)거주 가족 등 복위, 선망 000영가시여, 저희들이 모시는 추석 차례에 감응하여 정성으로 올리는 다과를 흠향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제주가 선창할 때, 가족들은 모두 합창합니다.

다섯 번째로. 공양(供養)은 차(茶)와 반(飯)을 올리는 것으로 제주(祭主)가 밥그릇 뚜껑을 연 후 가족이 돌아가며 차례로 차를 올리는 것입니다.

제주는 공양을 올리기 전에 공양게를 외우는데 “오늘 조상님 영가께 올린 모든 진수는 저희들이 작은 정성을 모아 올린 것이오니 부디 이 자리에 오셔서 흠향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낭독하고, 차를 올린 후에는 절을 3번합니다.

여섯 번째로 다시 입정에 들어 묵념(默念)을 하는데 가부좌 또는 편안한 자세로 앉아 죽비에 맞춰 잠시 입정을 한 채, 선망 조상영가님들의 감사와 고마움을 떠올리는 것을 말합니다.

 

일곱 번째로 공양을 올려 드시게 하는 염송인 보공양진언(옴 아아나 삼바바 바아라 훔)을 가족이 함께 3번 외우고 공양이 순서가 끝나면, 여덟 번째로 부처님의 은덕으로 광명을 찾는 염송인 광명진언(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 무드라 마니파드마 즈바라 프라바틀 타야 훔)을 3번 외우고 숭늉을 올린 후, 밥을 조금 떠서 세 번 숭늉에 덜어 수반(물밥)을 말아 놓게 됩니다.

 

아홉 번째로 마지막으로 발원(發願)을 하는데 제주가 “오늘 저희들이 올린 공양을 받으시고 부처님의 진리를 깨달으시어 아미타 부처님의 국토, 극락세계에 태어나시어 저희 후손들이 건강한 몸과 건강한 정신으로 올바른 삶을 영위하여 깨달음을 얻는 길로 이끌어 주시기를 발원하옵니다.”라고 발원하고 난 후, 모두 함께 대승경전인 반야심경이나 금강경, 아미타경 등의 경전 중 하나의 택해 독송합니다.

 

이렇게 발원이 끝나고 나면 가족 모두가 3번의 절을 하고 위패(지방)를 사루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열 번째는 음복이라 해서 가족들이 함께 모여 차를 마시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으로 추석 차례는 끝이 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차례를 지내던 기제사를 지내든 이런 제례행위를 하는 것은 속세에서는 다섯가지의 의미를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종묘에서 행하는 종묘제는 충성스런 마음을 기리고자 하는 것이며, 일반 가정에서는 자기를 이 세상에 낳아준 부모와 조상님들께 효성스런 마음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정체성을 심어주고자 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

 

두 번째로는 직업에 따라 각지에 흩어졌던 문중이나 핏줄들이 서로 모여 그 동안의 안부를 묻고 단합을 하고 화합을 해서 서로 대동단결하는 단결력을 갖는 의미가 큰 것이고,

(역사적으로 종중의 단결된 위력이 세력을 이루었고)

 

세 번째로는 초헌과 아헌 종헌의 잔을 올리면서 초헌부모님, 조상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잘 살았습니다 하는 보고의 의미가 있습니다.

 

두 번 아헌의 잔에는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보아 주십사하는 바램의 의미가 있는 것이며,

세 번째 종헌에는 제 자식들도 그렇게 교육을 시키겠습니다. 하는 다짐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세속의 제사에는 이렇게 다섯가지의 의미가 있지만, 사찰에서 기제를 모시게 되는 경우에는 여기에 두 가지가 더 겸해지는 것입니다.

 

첫째는 생전에 가족들을 건사하기에 바빠 살아생전에 변변한 공덕도 짓지 못한 영가들을 대신해서 후손들이 종종의 진수로 부처님 전에 공양물을 올려 불전에 공덕을 지어 드리고 제사가 끝난 다음에 음식들을 사하촌에 나누어 주어 공덕을 대신 지어드리기 위해서였고, 자신의 조상님들은 잔치의 주인공이 되어 원근의 여러 영가님들을 청해다가 공양대접을 해드리게 되는 것이며,

 

두 번째로는 살아생전에 후손에 대한 애착심으로 인연을 끊지 못했거나 재물에 대한 집착심을 끊지 못한 영가님들에게 부처님의 무상법문을 들려주어 일체의 애착심과 집착심이 끊어지도록 해드리기 위함의 두가지 의미가 더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교식 차례법을 가정에서 실천해 자녀들에게 전통을 바로 알리고 부처님의 가르침도 되새기는 불교제례법을 가족들과 실천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새 생명을 탄생시켰다고 기뻐하면서 자신의 건강을 회복한다고 새끼 딸린 가축을 제물로 삼거나, 죽은 조상님을 위한 제례를 봉행한다면서 가축의 생명을 제물로 삼는 어리석음은 도리어 조상님들에게 악업의 짐만 지워드리는 행위가 됨을 알아 술과 육류로 제물을 삼는 악업을 선업으로 바꿔가는 것이 불자의 지혜로움일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

 

이 시대 며느리 교육의 지혜로운 지침

세월은 나이 먹은 숫자만큼의 속도로 흘러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아마 다들 바쁘실 겁니다.

엊그제 권투챔피언이었던 최 요삼씨가 시합이 끝나고 뇌출혈로 뇌사판정을 받고 생전의 자신의 유언과 가족들의 합의 하에 건강한 장기를 아홉 분의 환자들에게 새 생명을 주고 떠났습니다.

 

한 기업이 총수가 되었던,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든, 장관이 되었던, 뭔가 한자리 꿰차고 살았던 사람들이나, 시골무지랭이로 살다갔거나, 사람이 살다 마지막 가는 길에 뒤돌아보면 보람지게 살다 남부끄럽지 않게 가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차에 치인 채, 앞바퀴에 깔려, 뒷바퀴에 깔려 뒷 차에 또 수백 번을 깔려 형체도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축생이 있는가 하면, 축생의 몸을 받았다 해도 자의든 타의든 음식의 재료가 되어준 공덕으로 몇 생의 윤회를 거듭하다 다시 삼선도 가운데 인간계에 온다한들, 바로 전생의 축생업력과 업식이 남아 천층만층의 살아가는 바가 다르고 저지르는 인과가 다르지만, 생전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던 젊은 삶이 마지막에 다 주고 갈 수 있을 때, 살아생전의 모든 인과는 다 소멸되고 육신보살의 공덕을 실천했다고 할 것입니다.

 

태어나 알게 모르게 지은 죄와 간간히 건강을 위한답시고 피치 못 하고 먹어 왔던 축생의 주인공들과 악연이 되질 않고 인과를 벗어나기 위해선 우리 모두 최요삼 씨처럼 다 주고 갈 수 있는 그런 마음세계를 가져보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기도하며 자신의 업을 정화시켜가야 할 것입니다.

 

저 팔공산 갓 바위나, 강화도 보문사나 오대보궁에 가서 무릎 닳게 기도하는 신행들이 다 복을 구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나, 대부분은 그렇게들 생각합니다.

 

요즘 기독교를 보게되면 소망이 지나쳐 기복에 빠져들면서 죽은 부처 믿어서 뭐 하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어라, 교회 나오면 사업도 잘되고 복 받는다고 갈비집 호객 차원이 아니라 서울역, 용산역 앞에서 군인들 삐끼를 하는 아줌마들보다도 지독하게 길거리 전도를 한다고 인터넷에선 비난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이나 예수님은 그런다고 복을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일 그런다고 복을 준다고 하면 그것이야 말로 종교사기극일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탐욕이 가득한 이기적인 중생들에게 지혜로운 생각을 일으켜 탐욕스런 자기를 바로 보도록 해주어 스스로 복을 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줄 뿐인 것입니다.

이기심으로 가득한 중생들이 행복을 바란다고 행복이 주어 지지는 않습니다.

 

전생의 인연업에 따라 삶 속에서 작은 행복을 누리고 살면서도 자기의 복력은 생각치도 않고 형제간에, 이웃 간에, 동료 간에, 자기네를 비교해가며 시기와 질투라는 오욕에 찌들어 살아가는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줄 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선근 인연이 있어야 불법을 만날 수 있기에 인생은 난득이요 불법은 난봉이라고 하잖습니까?

그런데 무자년 첫 법회를 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복덩어리들입니까?

 

헌데도 이 법회가 끝나고 문 밖을 나서면서 핸드폰으로 이런저런 집안의 대소사와 업무관계로 김밥 옆구리 터지듯, 속 터지는 일상으로 방금 전까지 선업을 지은 선근공덕은 입으로 다 까먹어버리고, 마음으로 짓 뭉개버리는 것 또한 중생들일 것입니다.

 

오즉하야, 금강경 선현기청분에서 수보리가 부처님께 묻기를 스승님 말씀을 들을 때는 아! 나도 저렇게 해야지 싶다가도 막상 경계에 부딪치면 않되 버리니, 그런 때 어지러운 마음을 어떻게 항복을 받고 또 그 선한 마음을 어디에 머무르도록 해야 합니까? 하고 묻는 대목이 나오지 않습니까? 바로 이 대목 때문에 금강경이라는 가르침이 시작되는 첫 출발인 것입니다.

그래서 “선현이 일어나 법을 청하는 대목”이라 해서 “선현기청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보리는 기원정사를 기증한 대부호 수달장자(기수급고독원장자)의 동생인 스마나의 아들로 사위국의 바라문 자제로서 기원정사의 준공식에서 부처님의 설법에 감격하고 출가해서 “무쟁제일, 공양제일, 색상제일, 해공제일 등으로 불리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로, 10대 제자에 들어가는 장로 비구인 수보리가 (장로는 덕행이 높고 나이가 많은 출가 수행자를 통칭하는 말) 일체의 번뇌를 벗어나는 “아뇩다라샴먁삼보리”, 무상정등정각이라는 가르침에 대해서 그 경계를 어떻게 하면 변함없이 지닐 수 있습니까? 하고 묻는 대목이란 말입니다. 금강경의 시작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부처님의 답은 금강경 전체에 걸쳐 시작되고 있지만 사실은 수보리의“어떻게”에 대한 답은 간단합니다.

그래 수보리야! 하고 부르면서 “이와 같이” 라고 하면서 금강경이 시작됩니다만 답은 “이와 같이” 라는 말 가운데서 이미 답은 끝난 것입니다.

 

중생의 마음에는 곤란을 겪고 있는 이웃을 측은하게 여기고 동정하는 자비한 마음이 있는가하면, 이웃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가족 간에도 증오하는 중생심도 있는 것입니다.

바로 자비심은 불심이요, 증오하는 마음은 중생심인 것입니다.

 

금강경 전체의 사상은 공사상입니다만, 금강경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멧세지는 바로 “무주상(無住相)”입니다.

내가 누구다 하는 아만의 我相, 생명의 본질은 똑 같건만 축생과 나는 다르다고 여기는 人相. 이 몸뚱어리에 대한 집착으로 나만이 옳다고 여기고 집착하는 소견인 衆生相. 나라는 아는 아직은 더 살 수 있다고 애착하는 壽者相라고 하는 네 가지의 상에서 벗어나 “응당 머무르는 바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는 육조 혜능대사에게 깨달음을 주었다고 전해지는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도리를 깨닫는 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주시는 답인 것입니다.

 

행함도 없이 복이 생기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간절히 바라는 바가 있다면 기복에 떨어져 그저 복을 갈구하기 위해 기도에 매달리는 이기적인 기도를 하기 보다는 다겁생래로 알게 모르게 지어온 온갖 업력과 업식들로부터, 대 자유 대 해탈을 얻을 수 있는 자기 마음을 닦는 공부가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토록 안 먹고 안 입고 아껴가며 가꿔온 가족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죽음 앞에선 아무도 대신 죽어줄 수 없고 함께 가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동반 자살을 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깜깜한 무명의 어둠에서 각자의 길을 갈 뿐인 것입니다.

 

때문에 스스로에 복은 스스로 복 밭을 일구고 가꾸어가야 하듯,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지나친 집착과 애착과 번뇌에 빠져 들지 않도록 우리는 무상의 도리를 철저하게 믿고서 지금 이 순간에 부처님께서 내 옆에 계신다면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저 사람에게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대했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행동할 때, 복은 저절로 굴러들어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요행수의 복을 주지 않습니다.

깨달음을 원하는 이에겐 깨달음에 가는 길을 알려주시고, 업장소멸을 원하는 사람에겐 업장소멸을 성취하는 방법만을 제시해 주실 뿐인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 세상부귀영화와 행복을 다 쥐어 주고 싶지만, 그 자식 또한, 부모가 그래왔듯이 다겁생래에 스스로 지어온 업력과 업식에 의해 살아갈 뿐인데도, 자식들에게 업력을 벗어나는 지혜로운 가르침을 전해주는 부모는 없는 것 같습니다.

 

행복을 찾는 건 자식의 몫이고, 부처님 또한 이와 다를게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일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지혜를 터득하고자 노력하고 실천할 때, 우리의 삶은 스스로 존귀해질 것입니다.

 

오늘 법문은 “옥야녀경”이라는 경을 전해드릴 것인데, 결혼을 하고 시집에 들어간 여자가 지켜야 할 법도에 대해서 남겨주신 지혜로운 말씀입니다.

 

이 법문은 젊은 며느리들이 와서 들어야 할 법문입니다만, 우리집안 며느리 만을 떠올리질 마시고 나는 며느리 였을 때 어땧는가를 생각해보시면서 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요즘 여성부가 막강해서 이런 법문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말씀드리자면, 한 가정의 며느리로 들어와 아내로서의 도리를 어떻게 다해야만 할 것인가, 어떠한 믿음을 갖고서 어떻게 인연 공덕을 쌓아야만 부덕(婦德)을 풍요롭게 간직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가르침으로 오탁악세에 가까운 요즘 세상에서 올바른 가정을 가꿀 수 있는 부녀자의 도리를 일곱 가지로 설명해주는 현실적인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이 경의 주인공은 금강경에 나오는 신심이 돈독했던 급고독(給孤獨) 장자의 며느리인 “옥야”라는 여자입니다.

 

요즘 드라마에 잘나오는 잘사는 집 딸이 시집가서 하는 짓하고 똑 같은 짓들이 그 시대에도 있었나봅니다.

 

이 옥야가 장자의 아들에게 시집은 왔으나 친정의 부귀함을 믿고서 아내의 도리를 우습게 아는 행위가 많았나 봅니다.

그래서 보다 못한 급고독 장자가 부처님께 청을 넣어 가르침을 원하므로 부처님이 부녀자의 도리를 옥야에게 말씀해 주는 지극히 현실적인 가르침입니다.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함에 대해 부처님께서 설한 일곱 가지 아내란 “어머니 같은 아내, 누이동생 같은 아내, 스승 같은 아내, 부인다운 아내, 노비 같은 아내, 원수 같은 아내, 살인자 같은 아내” 등입니다.

 

팔리어 본에서는 살인자 같은 아내, 도적 같은 아내, 지배자 같은 아내, 어머니 같은 아내, 자매 같은 아내. 친구 같은 아내, 노비 같은 아내 등 7종을 열거 하고 있습니다.

 

자, 지금부터 들어보십시요.

 

부처님의 경전에는 항상 현대의 6H원칙이 있듯이 “여시아문이라고 하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하는 첫 대목이 나옵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舍衛國)의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계셨다.

이 때 급고독(孤獨園) 장자(長者)는 아들을 위해 며느리를 맞고자 하여 부유하고 귀한 장자의 집 딸을 데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얼굴이 단정하기가 제일이었으나 방자하고 오만하여 며느리의 예로써 시부모와 남편을 받들어 섬기지 않았다. 급고독장자는 집안사람들과 의논했다.

 

“며느리가 오만방자하니, 어떤 방법으로 가르쳐야 할까?

만일 몽둥이로 때린다면 그것은 좋은 법이 아니고, 만일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 죄는 날마다 더하여질 것이다.

오직 부처님 대성(大聖)만이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공양을 준비하고, 다음 날 부처님을 청하기로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곧 청을 허락하시고 다음 날 비구들을 데리고 오셨다.

그러나 급고독의 집안사람들이 모두 나와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데도 옥야는 나오지 않았다.

 

부처님께서는 곧 자마금빛의 큰 광명을 발하여 옥야의 방안을 비추고, 부처님의 32상 80종호를 나타내셨다. 옥야는 부처님의 광명과 상호를 보고 깜짝 놀라고 두려운 마음이 생겨 곧 나와 부처님께 예를 올렸다.

 

부처님께서 옥야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의 법도는 얼굴이 단정하다고 교만한 마음을 내어서는 안 된다.

용모가 단정한 것이 단정이 아니다. 오직 마음과 행이 단정하여야 사람의 경애를 받는 것이니, 이것이 단정함이다.

따라서 얼굴과 몸매가 단정한 것을 의지하여 교만, 방자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 짓을 하면 뒷세상에 비천한 집에 태어나 남의 종이 되리라.” 부처님께서 이어서 옥야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의 법에 세 가지 장애(三障)와 열 가지 악(十惡)이 있는데 어리석은 이들은 스스로가 알지 못한다.”

 

옥야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무엇이 세 가지 장애와 열 가지 악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는 어렸을 때에 부모에게 장애되는 것이요, 둘째는 출가하여 남편에게 장애되는 것이요, 셋째는 늙었을 때에 아들에게 장애되는 것이다. 이것이 세 가지 장애이다.

(이 대목은 요즘 세상에는 씨알도 안 먹힐 대목일 것입니다만,)

 

열 가지 악이란 무엇인가? 첫째는 낳았을 때에 부모가 좋아하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양육하는 재미가 없는 것이요, 셋째는 시집갈 때 예를 잃을까 항상 근심하는 것이요, 넷째는 곳곳에서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부모와 이별하는 것이요, 여섯째는 다른 문호에 의탁하는 것이요, 일곱째는 임신하기가 어려운 것이요, 여덟째는 생산할 때 어려운 것이요, 아홉째는 항상 남편을 두려워하는 것이요, 열째는 항상 자유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열 가지 악이니라.”

 

옥야는 부처님께서 말씀하는 세 가지 장애와 열 가지 악을 듣고 몸과 마음이 떨리고 두려워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에게 아내 노릇하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부처님께서 옥야에게 말씀하셨다.

 

“아내 노릇하는 법이 다섯 가지가 있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어머니 같은 아내요, 둘째는 신하 같은 아내요, 셋째는 누이 같은 아내요, 넷째종 같은 아내요, 다섯째는 남편 같은 아내다.

 

무엇을 어머니 같은 아내라고 하는가?

남편 사랑하기를 아들같이 하기 때문에 어머니 같은 아내라 한다.

무엇을 신하 같은 아내라고 하는가?

남편 섬기기를 임금같이 하기 때문에 신하 같은 아내라고한다.

무엇을 누이 같은 아내라고 하는가?

남편 섬기기를 오빠같이 하기 때문에 누이 같은 아내라고한다.

무엇을 종 같은 아내라고 하는가?

남편 섬기기를 첩같이 하기 때문에 종 같은 아내라고 한다.

무엇을 남편 같은 아내라고 하는가?

남편과 친한 사람을 등지고 남편이 멀리하는 사람과 친히 지내는 짓을 영구히 떠나며, 사랑하고 다정하여 한마음에 형상만이 다른 것같이 하며, 높이 받들어 공경하고 조심하여 교만한 마음이 없으며, 안팎을 잘 섬겨 집안이 풍성하게 하며, 손님을 잘 접대하여 좋은 이름이 날리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가장 좋은 부부의 도이다.”

 

부처님께서 이어 옥야에게 말씀하셨다.

“시부모와 남편을 받들어 섬기는 데도 또 다섯 가지 착한 것과 세 가지 악한 것이 있다.”

 

옥야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무엇이 다섯 가지 착한 것과 세 가지 악한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옥야에게 다섯 가지 착한 것을 말씀하셨다.

첫째는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 가사를 돌보며,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자기 입에 넣지 않고 먼저 시부모와 남편에게 드리는 것이요, 둘째는 집안의 물건을 살펴서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것이요, 셋째는 말을 조심하며 욕된 일을 참고 성내는 것이 적은 것이요, 넷째는 공경하고 단정하고 경계하고 조심하여 항상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한마음으로 시부모와 남편에게 효성하고 공손하여 착한 이름이 있게 하며, 친족을 기쁘게 하여 남의 칭찬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다섯 가지 착한 것이다.

 

무엇이 세 가지 악한 것인가?

첫째는 어둡지도 않아서 일찍 자고 해가 떴는데도 일어나지 않으며 남편이 꾸짖고 노하면 도리어 불평하고 욕하는 것이요, 둘째는 좋은 음식은 자기가 먹고 나쁜 음식은 시부모와 남편에게 주며 간사한 낯빛으로 속이고 거짓말하여 요사스럽기가 한이 없는 것이요, 셋째는 생활은 생각지 않고 세간을 돌아다니며 놀고, 다른 사람의 좋고 추한 것을 말하고 남의 장점과 단점을 들추어내 말싸움을 하며, 친족에게 미움을 받고 남의 천대를 받는 것이다.

이것이 세 가지 악한 것이다.”

 

옥야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다섯 가지 착한 것과 세 가지 악한 것을 듣고 믿고 공경하고 기뻐하며 뉘우치는 마음이 나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제가 어리석고 미련하여 부처님을 뵙지 못하고 법을 듣지 못하였을 때에는 한없는 죄악과 장애를 저지르고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말씀을 듣고는 확연히 깨달아서 지난 날 저의 행동이 그른 줄을 알았습니다.

지금부터는 지난 것을 고치고 앞일을 닦아서 세존의 말씀에 순종하며 다시는 어기지 않겠습니다.

 

바라오니, 세존께서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구제하시어 저의 참회를 들어 주셔서 죄과를 없애고 5계를 받아 제자가 되게 하여 주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착하다, 옥야야. 너의 참회를 들어 주겠다.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고 이제 주는 계법을 공경히 받들어 닦고 행하라. 잘 듣고 잘 생각해 기억하라.”

 

옥야는 말했다.

“그리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즐겁게 받아 가지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옥야에게 말씀하셨다.

첫째 계는 몸과 손으로 죽이지 않고 은혜가 여러 생물에게 미치게 하는 것이요, 둘째 계는 맑고 깨끗하고 어질고 겸양하여 도둑질하지 않으며 자기 것을 덜어서 여러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요, 셋째 계는 정숙하고 깨끗하고 음란하지 않아서 행실에 오점이 없는 것이요, 넷째 계는 함부로 말하고 희롱하거나 웃지 않는 것이요, 다섯째 계는 술을 멀리하여 마시지 않으며 여러 죄악을 범하지 않는 것이다.

 

계율을 보호하여 가지되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이 하여야 한다.

몸은 이 세상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위태한 생명은 번쩍이는 번개나 뜰을 지나는 바람과 같음을 스스로 관찰하라.

 

젊고 성한 것은 반드시 쇠하고 만다.

자태와 얼굴을 믿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세상 영화를 버리고 보살의 법과 같이하라. 네가 이제 닦아 행하면 부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불도는 배우지 않을 수 없고 경(經)은 듣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지금 부처를 이루고서 좋도록 이루어 놓은 대승의 교법은 남자ㆍ여자 할 것 없이 즐겁게 법을 듣는 자는 소원하는 대로 이루게 할 것이다.”

 

옥야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착한 아내는 무슨 영화를 받고 악한 아내는 무슨 허물을 받습니까?” 부처님께서 옥야에게 말씀하셨다.

 

착한 아내는 이 세상에서 영예를 받고, 친족이 공경하며, 복을 받아 천상에 태어난다.

또 천상에서 수명이 다하면 도로 인간에서 왕후의 자손으로 태어나 나는 곳마다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는다.

 

악한 아내는 사람들이 미워하여 싫어하지 않는 이가 없으며 다들 일찍 죽었으면 한다.

또 목숨이 마치면 지옥이나 출생, 노비로 태어나 그 속을 해매며 벗어날 기약이 없을 것이다.”

 

옥야는 착한 아내와 악한 아내의 법을 듣고는 마음에 두려운 생각이 나서 정성껏 행을 닦아 곧 도의 자취를 얻었다.

옥을 조각하고 비단에 수를 놓아 주보장(珠寶帳)을 만들고, 비단 기와 일산을 달고, 여러 가지 유명한 향을 태우며, 탑을 돌며 염불 소리로 노래하니, 그 소리가 시방에 들렸다.

 

이 모습을 본 가족들도 따라 기뻐하며 묘당(廟堂)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기를, “이 경을 무엇이라고 이름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경의 이름을 옥야라는 이름의 여인을 교화한 경이라고 하라. 만일 여인이 이 경을 듣고, 받아 가져 읽고 외우며, 법과 같이 닦아 행하면 여자의 몸을 버리고 다시는 받지 않을 것이다.”

이 경을 말씀하시자 대중들은 기뻐하며 예배하고 받들어 행하였다.

이것이 바로 옥야경의 내용입니다.

 

보살님들 느껴지는 게 있습니까? 자기 집 개를 주인이 때리고 발로차면 지나는 사람도 그 개를 발로 차게 됩니다.

 

가장 소중한 자기 가족들을 남에게 험담하거나 미워하게 될 때, 그 업보는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며, 다음 생에는 서로 입장이 바꿔져 고리로 이자 쳐서 웬수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처사님들은 육방예경에 나오는 남편이 아내에게 대해야 하는 의무가 있음을 공부하시길 바랍니다. 참고하세요.)

 

성불하십시요.

 

명절을 앞두고 가족들의 업력을 소멸시키는 점찰경의 지혜 

 

해가 바뀌고도 이렇게 아무런 탈 없이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오늘은 일주일을 보내면서 나와 남들에게 알게 모르게 지었던 크고 작은 죄 업력들을 부처님 회상에 모여 간절하게 기도를 봉행함으로써 불보살님들의 위신력으로 업력들을 정화시키고 내면의 자성불이 무지에서 깨어나 밝음을 길들이고 선업을 기르는 날입니다.

 

사람에게 있어 하루 밤 낮의 일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하는 인사도 있잖습니까?

7일 날, 이웃동네인 이천 호법면에 있는 코리아냉동에서 40명의 생명이 죽어간 대형사고가 있었습니다.

 

한 치 앞도 모르고 살아가는 무명 중생인 우리들이기에 항상 주변의 모든 인연들에 감사하고 기도하는 순간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에게 기도공덕이 회향되기를 지극하게 발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섬기는 자세로 대통령직을 수행하겠다고 입에 달 듯이는 낯간지러워 못 할지라도 하루 백 팔배 절을 하는 공덕이나, 오고가며 염불하는 공덕을 가까이는 가족들과 멀리는 이웃과 형제, 친척들에게 회향하려는 마음을 가질 때, 보이지 않는 그 공덕의 무량함이 자기를 지켜주는 것입니다.

 

오늘 법문은 해도 바뀌고 설 명절이 다가오는데 이런 명절날 가족들이 함께 하는 시간에 부처님 경전에 나오는 재미있는 놀이를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신수대장경 17권에 수록된 경으로 수나라 때, 보리등(菩提燈)이 상하 두 권으로 번역한 경으로 “선악의 업보를 살피는 경이다” 해서 경의 이름을 “점찰선악업보경경(占察善惡業報經)”이라 불렀습니다.

 

이 경을 보게 되면, 사람이 지은 전생의 업을 소위 점이라는 방편을 써서 알아보게 하는 방편설의 내용이 들어있습니다만, “점찰선악업보경”이라고 하듯, 경의 이름 그대로 “자신의 선악의 업보를 점을 쳐서 살펴본다는 뜻”입니다.

 

오늘 법문이 자칫하면 성철스님께서 남기셨던,

生平欺 男女群 생평기광 남녀군 

彌天罪業 過修彌 미천죄업 과수미

活焰阿卑 恨萬端 활염아비 한만단

一輪吐紅 掛碧山 일륜토홍 괘벽산

(한평생 남녀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보다 커서 산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지오니 한이 만 갈래인데 한 덩이 붉은 해가 푸른 산에 걸렸구나.)했던 열반송을 보고 서상준 목사라는 기독교인이 “거 봐라, 얼마나 남을 속였으면 죽을 때 지옥으로 간다고 하잖냐”고 비아냥 거렸듯이 오늘 법문에 나오는 점찰선악업보경도 잘못 받아들여 점이나 치는 외도로 오해 받을 소지도 있겠습니다만 듣고 보면 무릎이 탁! 쳐지는 지혜 그 자체인 것입니다.

 

성철스님의 열반송을 감히 입에 올릴 수는 없지만, 지옥 중생을 위해서 성불조차도 뒤로 미루고 계시는 지장보살님에게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뭐라고 할런지 싶습니다.

 

“교회 밖에도 구원은 있다.”고 감리교회에서 파문을 당하면서도 파격적인 선언을 했던 타계하신 감리교의 변선환 목사님 같은 분들이 많아져야 한국의 기독교가 거듭 나게 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신수대장경 17권에 나오는 “점찰선악업보경”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부처님이 왕사성 기사굴산에 계실 때 견정신(堅淨信)보살이 이렇게 묻기를, “부처님께서 가시고 난 뒤, 말법시대가 되었을 때, 중생들의 복은 엷어지고 세상이 어지러워져 사람들이 불도를 닦을 겨를이 없게 되고 선악을 가리지 못하게 될 때, 이때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고 묻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때, 견정신 보살의 이 같은 물음에 부처님의 곁에 있던 지장보살이 부처님을 대신해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대답을 해주게 되는데,

 

“사람들이 자신이 당하고 있는 괴로움과 즐거움, 행복과 불행, 길흉의 원인이 전생에 자기가 지은 죄와 복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되면 죄를 씻고 복을 얻기 위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게 될 것이며, 또, 자기가 전생에 어떤 죄를 지었고 어떤 복을 지었는가를 알려면 점을 쳐서 알아보는 방법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견정신 보살이 그 방법이 무엇인가를 묻자, 지장보살은 나무로 손가락만한 크기의 패를 10개 만들어 앞면에는 10가지 선업의 이름을 써 넣고 뒷면에는 10가지 악업의 이름을 써 넣어 이것을 한꺼번에 공중에 던져 떨어지게 한 다음 거기에 나타난 선악 업의 조목들을 보고 전생에 어떤 악업을 범했던가, 선업을 지었는가를 판단하는 것이라고 했답니다.

 

명절에 가족들이 다 모여 윷놀이를 하듯이 이렇게 점을 치듯 선악을 점찰을 하다보면 놀면서 십악과 십선을 깨닫는 계기가 되고 심성을 자극하여 스스로 선업을 짓게 되는 발심의 동기가 될 거라 봅니다.

이 얼마나 지혜로운 불자다운 명절놀이입니까?

 

여기서 더 발전시켜 간자를 던져 십선행 중에서 나오는 선행은 복을 짓고 악업을 소멸시키기 위해 한 달 간 실천하는 것으로 정하고, 반대로 십 악업 중에서 악업이 나오면 전생에 지은바 악업이 나온 것으로 여겨 자비참법의 해당되는 내용 편을 펼쳐 참회기도를 하는 것으로 한다면 이 얼마나 멋진 일문 권속들의 신년 행사이겠습니까?

 

악착같이 벌어서, 자식들 뒷바라지 하느라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는 인생을 살아가지만, 그 자식 또한 전생의 업력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기에 혹시나? 가 역시나가 될 것인데도 자식들에게 순풍의 돛단배처럼 살아가도록 해주는 업력을 소멸하는 방법들은 배우게 하지 않고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학교만 들어가면 한시름 놓을 거 같지만 아니 올씨다고, 짝만 맞춰주면 고생 끝나고 효도할 줄로 알았지만, 그때가선 찢어지지 않고 잘 살아주기만을 바라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다 업연과 업력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불행은 전생의 악업을 지은 결과로 온 것이며, 복을 누리는 또한 선업의 결과인 것입니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자작자수(自作自受)”라 양무제가 황제가 된 연유가 그랬듯이 자식이 잘되고 복을 누리는 것도 전생에 부처님께 지극하게 공양을 올린 공덕이 있었기에 그 과보로 그리되는 것이니, 만약 점찰 후, 죄업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면 반드시 참회를 해서 죄업을 소멸시키도록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중생들은 모든 것이 자기 본위인지라 자기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그릇됨과 악업이 되는 점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지만, 이렇게 지장보살님의 남겨진 말씀처럼 10개의 나뭇토막에 십악과 십선을 앞뒤로 써 넣고 온 가족이 둘러 앉아합장을 한 채, 가족과 가정을 위한 발원을 하고 각자가 한 해의 소망을 말하고 참회진언을 외우면서 열개의 나뭇토막을 던져 자신의 죄를 찾아서 참회기도를 해본다면 아주

색다른 맛이 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전에도 제가 말씀드렸습니다만, 부처님의 팔만대장경 안에는 꼭 불설(佛說)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는 진경(眞經)도 있고 위경(僞經)도 있습니다.

 

불설(佛說)은 부처님께서 남기셨던 말씀이고 비불설(非佛說)은 외도들의 경전이나 말들입니다.

 

진경은 오시팔교라 해서 부처님께서 50년 하고도 21일 동안 중생들을 위해 남기셨던 말씀을 설한 시기와 설한 차례와, 의리의 얕고 깊음에 따라 분류하고 판별하였던 교상판석이라는 기준에 해당된 경만을 진경이라 하고 팔만대장경 안에 들어있다 해도 그 외의 경들은 위경이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법을 설하셨던 시기를 기준으로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교양으로라도 알고 계시도록 집고 넘어가겠습니다.

 

첫째로 화엄시라 하여, 세존께서 성도하신 후, 그동안의 힘겨웠던 수행의 완성을 사흘 동안 홀로 즐겨 여기시다 홀연히 밤하늘을 올려다보시고 우주법계의 대 파노라마를 관하시고 21일 동안 중중무진의 화엄법계를 노래하신 게송이 바로 화엄경이셨던 것입니다.

 

둘째로는 아함시라 하여, 세존께서 우주법계에 대한 말씀을 홀로 설하시다, 이를 중생들이 알아들을 수 없음을 깨닫고 중생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12년간을 녹야원에서 법을 설하셨으니 이때 설해진 아함부가 후대에는 남전 북전으로 나뉘어져 현재 우리가 아는 장아함과 잡아함, 증아함과 증일아함이라는 4부 아함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화엄경, 반야경, 법화경, 열반경등의 4부 경전을 제외한 모든 경전을 방등부경 이라하며 이때를 방등시라 하여, 녹야원에서 아함을 설하신 후, 8년 동안 지금의 우리가 아는 유마경, 금광명경, 능가경, 승만경, 무량수경 등의 방등부의 여러 경전을 설하셨던 것입니다.

 

네번째로 반야시라 하여, 22년 동안 600부가 되는 반야부의 경전을 설하시어 아집과 집착과 애욕과 질투와 증오와 미움과 신기루 같은 허상에 소유욕에 휘둘리는 온갖 번뇌의 무명 속에 허덕이는 중생들에게 참답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무상의 아뇩다라 샴먁삼보리의 길을 일러주셨던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법화열반시라 하여, 최후의 8년간을 당신의 삶을 마무리하고자 하셨던지, 말세 중생들에게 참다운 보살은 오탁악세에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위해 법화경을 설하시고 입멸을 앞두시고서는 열반경을 설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오시팔교라는 교상판석으로 볼 때, 여러분들께서 다급할 때, 독경하시는 중국의 의정스님이 지은 석교문을 우리말로 음을 달아 간행한 “천지팔양신주경”같은 위경의 맥락인 것입니다.

 

불행은 전생에 악업을 지은 결과이기에 참회해서 죄업을 소멸시켜야 한다는 선악의 업보를 바로 알게 하는 인과법(因果法)과 스스로 지은 죄업을 참회해야 한다는 참회사상(懺悔思想)을 담고 있는 지혜로운 가르침이 들어있는 것이 바로 점찰선악업보경인 것입니다.

 

하권에 일실경계(一實境界)를 설하는 법문이 있는데, 모든 사람의 본래 마음은 허공과 같이 깨끗하기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바탕이 있어, 설사 아무리 악업을 많이 지은 사람이라도 부처가 될 수 있는 본바탕인 자성은 깨끗하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지장보살님의 가르침에는 “심불급중생이시삼무차별”이라듯, 부처가 특별히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부처가 될 바탕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닦아 찾아내면 그 사람이 바로 부처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심즉시불(心卽是佛)이니 즉심시불(卽心是佛),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 하는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는 말이 바로 이런 뜻인 것입니다.

 

“자신에게 부처가 될 바탕이 있음을 알고 닦는 살아가는 사람은 보살이고 그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범부이기에 범부는 보살이 되어야 하고 보살이 부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점찰선악업보경”을 의지하여 신라시대에는 점찰법회가 있었는데, 세속오계를 화랑들에게 전해준 원광법사는 점찰보(占察寶)를 만들어 점찰법회를 처음 시작하였다고 전해지고 또, 진표율사에 이르러 점찰법회가 성행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해동고승전을 보게 되면 진표율사의 출가동기가 나옵니다.

진표율사는 출가 전에 활을 잘 쏘아 사냥을 좋아했는데 어느 날, 사냥을 하다가 마을 앞 논둑에서 놀이 삼아 개구리를 잡아 버들가지에 꿰어 물에 담가둔 채, 다시 사냥을 하느라, 개구리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다가 이듬 해 봄에 또 사냥을 하다가 개구리 소리를 듣고 문득 지난 해 생각이 나자, 개구리들에게 가보니 개구리들이 버들가지에 꿰인 채로 울고 있는 것을 보고 죄업을 크게 뉘우치고 그 길로 출가해서 금산사에서 스승인 숭제스님으로부터 점찰경을 받아 수지한 후, 미륵보살과 지장보살 앞에서 참회하고 나중에 다시 변산의 부사의암에서 지장보살께 기도하다 현신수계(現身授戒)를 받고, 영산사에서 기도하다 미륵보살로부터 점찰법을 받았다고 삼국유사에 전해집니다.

 

진표율사께서 점찰선악업보경으로 인연중생들에게 삼독심을 제거하고 선업을 길러주기 위해 점찰법회를 권하고 성행시켰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도 명절날 이렇게 지혜로운 놀이를 통해 자신들의 악업을 소멸하고 선업을 증장하는 기회로 삼아보셨으면 싶습니다.

부디부디, 성불하십시요.

 

자신의 복력을 바꿔주는 참다운 보시행

오늘의 법문은 보시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저, 보시라하면 한문으로는 베 布字에 베풀 施字를 쓰는데 읽기는 보시로 읽습니다.

 

하지만, 베 (布)포자는 돈, 화폐 布字도 되고 넓게 깐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베풀 施字도 베풀다, 퍼지다, 널리 전하여지다, 행한다는 뜻이 있으니 보시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나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넓게 베풀고 전하고 깔아놓는다는 뜻이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예전에 노스님께 듣기로 보시는 나눌 分字를 써서 分施라고도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 속담에 콩 한쪽도 열사람이 나눠먹는다는 말이 그런 의미였나 봅니다.

사실, 베푼다는 것은 상하관계 주종관계가 내포되어있다고 하겠지만, 나눈다는 것은 수평관계 평등관계를 뜻할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아니 부처님께서는 이 보시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셨는가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보시의 종류로는 3시라 해서 財施法施無畏施라고 하는 것은 다들 아실 것입니다.

 

財施란, 재물로써 널리 베푼다는 의미이고, 法施란 오늘 일요법회처럼 인연되는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들려주어 악업을 깨닫게 해주고 선근을 갖도록 해주며 그 선근이 자라나도록 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無畏施란 무엇인가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활화하여 평소 생활에 남에게 불편함과 불안함을 주지 않고 마음에 두려움과 번뇌와 공포 따위로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편안함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재물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남에게 편안함을 주는 업을 길러 인연중생을 부처님의 세계로 인도해주는 것이기에 보시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법시와 무외시는 행하기 어렵다고들 하면서 여덟 가지의 재시로 인과관계를 이어가고들 있습니다.

 

그래서 八施라고도하고, 八種施라고도 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수지시(隨至施)라 해서, 나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하고만 재물이든 마음이든 서로 베풀고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포외시(怖畏施)라, 재물이 없어지거나 못쓰게 될 것이 걱정되고 염려해서 차라리 보시나 하자는 생각으로 보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 번째의 보은시(報恩施)란, 예전에 보시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서 그 사람에게 되돌려 보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네 번째의 구보시(求報施)란, 지금 저 사람에게 보시하고서 나중엔 더 많은 것이 올 것을 계산하고 보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섯 번째의 습선시(習先施)란, 남을 도와주기 좋아하는 집안에서 보고 배운 때문에 별다른 의미 없이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여섯 번째의 희천시(希天施)란, 하늘에 태어나기를 바라고 천국에 가기 위해 보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곱 번째의 요명시(要名施)란, 자신이 하는 행위가 주변에 널리 퍼지고 이름이 나기를 바라는 속내로 보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덟 번째의 위장엄심등시(爲莊嚴心等施)라고해서, 자신의 마음을 정갈히 하고 장엄하게 하여 아끼는 마음을 없애고 정심(定心)을 길러 열반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보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종교생활을 하던 안하던 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행을 하면서도 이러한 잠재의식이 깔려진 상황에서 자신의 선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남겨주신 방등부(方等部)경전에 속하는 큰 법의 보배를 쌓아 두었다는 뜻의 대보적경(大寶積經)은 중국 당나라 때 보리유지(菩提流支)가 많은 대승경전을 집성한 일종의 혼합경으로 49회 77품으로 구성되고 각 회는 각각 별개의 성격을 띤 다른 경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구하는 불퇴전의 법력에 대한 설법이 있는가 하면 초기 경전의 중심사상인 삼법인, 12인연이 설해지고 무량수불의 인위(因位)에 대한 설명과 48원으로 극락세계를 장엄하는 대소승의 법문들이 혼재되어 있는 경입니다만, 대보적경의 12회의 “대승보살장정법경”을 보게 되면 육바라밀의 청정한 보시행에 대해서 열 가지의 보시방법이 나옵니다.

 

잘 들어보시고 법당에 오셔서 부처님 전에 공양물을 올리시거나 집에 가셔서 가족과 주변 분들에게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참다운 신앙인이라면 일상생활에서 실천이 되어야 하고 가족들에게는 분위기만으로도 감화를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신행생활을 하시는 삶과 가정 자체가 바로 주처정토인 것입니다.

 

그럼, “대승보살장정법경”에 나오는 육바라밀의 청정한 보시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업보의 도리에 맞는 보시를 행하라. (형편에 맞는 보시)

두 번째, 삿된 생각을 가지지 말고 보시를 행하라.(팔종시)

세 번째, 신심과 해행(解行)에 입각해서 보시를 행하라.

네 번째, 해태심을 가지는 일이 없이 보시를 행하라.

다섯 번째, 상을 내지 않고 보시를 행하라.

여섯 번째, 항상 용기와 바라밀에 대한 의욕에 차서 보시를 행하라.

일곱 번째, 도중에 후회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고 보시를 행하라.

여덟 번째, 계를 잘 지키는 사람에게만 편협하게 치우치는 일이 없이 보시를 행하라.

아홉 번째, 계를 벗한 사람에게도 경멸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자비롭게 보시를 행하라.

열 번째, 과보를 바라지 말고 보시를 행하라.

이렇게 열 가지 청정보시를 행하는 것이라고 설합니다.

 

남에게 베푸는 데도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업감연기의 법이 그대로 고리를 물고 이어져 오듯 일체의 만상은 사, 중, 생, 본유라는 4유에 의해 과거 전생의 업력과 인연에 의해 지금 우리의 만남은 고리처럼 이어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에겐 자기가 더없이 소중하듯이, 남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그 남도 자기를 소중하게여기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비참법에도 내가 큰 몸집의 중생이었을 때, 나보다 못한 작은 것의 생명을 먹이로 삼았던 죄를 참회하는 대목이 나오지 않습니까?

 

십악을 짓지 않는 것은 소극적인 선행입니다.

하지만, 죽어가는 것을 살리고, 두려움과 공포에 떠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분실된 물건을 주인을 찾아 돌려주고 하는 것은 바로 적극적인 선행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보시의 당위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게 넘침이 있는가를 살펴보고 넘치는 것은 남과 나눌 수 있을 때, 우리는 적극적인 선행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꼭 재물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재칠시(無財七施)라, 재물이 없어도 남에게 베풀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예전에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다 해도 나도 남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사대육신 멀쩡하고 아직까지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것 만으로도 복 지을 기회는 많고도 많은 것입니다.

 

다만, 자신이 모르고 알려고 들지 않고 무지했기에 다겁생을 돌고 돌며 지금 살아가는 바를 스스로 보고 느끼며 살아가십시다.

이렇게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신앙을 가진 불자로서 지혜롭고 올바른 삶의 철학들이 살아서 숨쉬고 생활화 될 때, 자신이 소속되어진 집단은 물론 가족 모두에게도 변화되는 자신의 삶을 자신있게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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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 .

 

사랑 속에 있는
섬세한 관심과 순수한 믿음,

더 바랄 것 없는 만족감,
미래에 대한 기대감,

이를 이루기 위한 열정과
성실은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첫째, 우리 마음에 사랑을 품는 것이
행복의 첫 걸음입니다.

둘째, 행복은 자신이 성장하고
성숙되고 있음을 느낄 때 찾아옵니다.

셋째, 진실해야 합니다.

넷째,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할 때 행복이 찾아옵니다.

다섯째, 긍정적인 생각이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여섯째,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일곱째, 나눔입니다.

여덟째, 자연을 사랑해야 합니다.

아홉째, 나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열번째,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행복은
뜻하지 않게 굴러오는 것이 아니라
정원을 가꾸듯 씨를 뿌리고
돌보아야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이미 행복"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