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행복해지는 법

2010. 2. 4. 19:5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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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문수보살님의 게송으로 익히 알고들 계시고 차를 마실 때 다포에 자주 써지는 구절입니다.

面上無嗔供養具, 口裡無嗔吐妙香,

면상무진공양구 구리무진토묘향이요,

心裡無嗔是珍寶, 無垢無染是眞常.

심리무진시진보 무구무염시진상이라.   -균제동자

직역: 얼굴에 화가 없는 것이 그것이 공양이요, 입에 화가 없으면 아름다운 향기를 토한다. 마음에 화가 없는 것이 보배요, 때도 없고 오염도 없는 것 이것이 참되고 영원한 것일세.

해설 : 이 게송은 문수보살의 시자인 균제(均提)동자의 게송으로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아름다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변함없는 부처님의 마음일세.”로 번역되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게송이 나오게 된 유래는 항주의 무착문희(無着文喜821-900)선사로부터 시작되는데 선사는 일곱 살에 출가를 하여 항상 계율을 익히고 경학에 열중했는데, 하루는 대자산의 성공(性空)선사를 만나 여러 지방의 다른 사찰들을 두루 참배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무착은 천하를 주유하다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주석하신다는 말을 듣고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원을 세우고 일보삼배를 하면서 오대산에 이르렀는데 인가는 없고 날은 저물어 가는데 한 노인이 소를 끌고 가기에 하룻밤 유숙을 부탁하고 노인의 집에 따라 들어갔는데 노인은 자기 집에 들어가자 동자를 불러 소를 놓아주라하고 무착을 데리고 집에 들어갔는데, 집들은 모두 금빛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노인과 마주 앉자 노인이 묻기를, “어디에서 옵니까?” “남방에서 옵니다.” “남방의 불법은 어떻습니까?” “말법의 비구들이 계율이나 조금 지키고 살아갑니다.” “대중들의 수는 얼마나 됩니까?” “혹 삼백 명도 되고 혹 오백 명도 됩니다.” 그리고 무착이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이곳의 불법은 어떻습니까?”

이 대화는 상식적인 일상의 대화인 것 같지만, 공부를 하는 禪客이라면 문자나 말에 들어있는 뜻에 매이기보다는 말과 글이 전하고자하는 의미에 禪智가 열려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용과 뱀이 함께 있고 범부와 성인이 같이 삽니다.(龍蛇混雜 凡聖同居).” 하자 “대중들은 얼마나 됩니까?” “전삼삼 후삼삼(前三三 後三三)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무착은 문수의 법담에 나가떨어진 것입니다. 무착이 대중을 묻자 문수는 범부인 무착 너와 문수인 내가 함께 하고 있다는 의미의 용과 뱀이 함께 한다고 했던 것이며, 대중의 수를 묻자 “전삼삼,후삼삼,” 이라는 애매모호한 답을 한 것은 모양새와 현상에 떨어져 있는 무착에게 다만 화두인 의심덩어리를 던져주었던 것입니다.

노인은 동자를 불러 차와 소락을 대접하게 하였는데 무착은 그것을 먹고 마음이 환하게 열리고 상쾌하여졌다.

노인은 다시 파리로 된 찻잔을 들고, “남방에도 이러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평소에 무엇으로 차를 마십니까?”

( 이 또한 노인은 찻잔의 용을 물었고, 무착은 파리찻잔의 상에 집착해 대답하는 대목입니다. )

그러자 무착은 대답을 못했습니다. 날은 저물었고 하여 노인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하룻밤을 투숙하고 싶은데 되겠습니까?” “그대에게 집착하는 마음이 있으면 투숙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집착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대는 일찍이 계를 받았는가?” “계를 받은 지는 오래입니다.”

“그대에게 만약 집착하는 마음이 없다면 왜 계를 받았는가?”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불법은 계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계는 자율과 타율로써 수행자가 스스로를 경계하는 수단일 뿐인 것입니다. 변질된 다른 종교에서는 믿으면 천국, 불신지옥이라는 극단적인 논리를 앞세우지만, 문수의 법문은 본디 자성이 청정함에 무슨 계가 필요할 것이며 어디에 집착함이 있을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무착은 물러나오고 노인은 동자에게 무착을 전송하라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무착이 가슴이 답답하여 동자에게 물었습니다. “전삼삼 후삼삼이 얼마나 되는가?”  그러자 동자가 “스님”하고 불렀습니다.

무착이 “왜 그러느냐?”하고 대답하자, “이것이 얼마나 됩니까?” 더욱 답답해진 무착은 다시 물었습니다.

“여기가 어디인가?” “여기는 금강굴 반야사입니다.”

무착은 처참한 마음이 되면서, 그 노인이 문수보살의 화신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자에게 머리를 숙이고 한 말씀 가르침이 있기를 부탁하고 그것으로 이별의 정을 달래고자했습니다.

그때 균제(均提)동자가 들려준 게송이 바로 이 게송이었던 것입니다.

말이 끝나자 균제동자도 절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다만 오색구름 가운데 문수보살이 금빛 사자를 타고 노니는데 홀연히 흰 구름이 동쪽에서 와서 감싸 버리고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그 후, 무착은 오대산에서 주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자장율사와 태백산 정암사 뒤 암자이야기)

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여왕 5년(636)에 자장율사가 당나라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전수받아 신라 선덕여왕(서기 643년) 때에 귀국한 뒤 만년에 경주를 떠나 강릉 땅 수다사(水多寺:지금 평창에 빈터가 있음)를 세우고 살아생전에 다시한번 문수보살을 친견하기를 원을 세우고 살았는데 꿈에 문수보살이 나타나 “내일 너를 대송정에서 보리라”(明日見汝於大松汀) 하고 사라졌다.

깜짝 놀라 깨어 대송정으로 갔더니 문수보살이 다시 나타나 “태백산 갈반지에서 다시 만나자” (重期於太白葛蟠地) 하고 사라졌다.

자장이 태백으로 가서 찾으니 큰 구렁이가 나무아래 둥지를 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자장이 “여기가 갈반지”라 하고, 그 자리에 석남원(지금의 정암사)을 창건하고 뒤편 백운계곡에 초막을 짓고 문수보살이 오기를 기다리며 수행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此所謂葛蟠地 乃創石南院 今淨岩寺 以候聖降) 하루는 왠 낯선 노인이 다 떨어진 삼베 잠뱅이에 새끼로 꼰 망태기 속에 죽은 강아지 한 마리를 담아 넣고 주독이 올라 빨개진 코를 벌름거리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스님을 찾기에 자장스님의 시자가 나가보자 꼴이 가관이 아닌 늙은이가 주정을 부리며 큰스님을 찾는 것이었다.

밖이 시끄러워 자장이 시자를 불러 연유를 묻자 대충의 연유를 전해들은 자장은 시자에게 주정꾼을 맡기고 다시 좌선에 전념하고 있었고, 시자는 같잖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스님이 안 계신다고 둘러대며 어서 빨리 가라고 재촉을 하자, 술 취한 촌노가 한다는 말이 “자장 미친놈, 지가 날 보잘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는 왠 냉대냐” 하면서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 하고 휙 내려가 버리는 것이었다. 이때 자장율사는 문득 집히는 바가 있어 문을 박차고 마당에 내려서자 술 취한 거렁뱅이 노인이 망태기에서 죽은 강아지를 꺼내자 돌연 사자로 변해지고 노인은 사자를 타고 이미 저 건너 산모퉁이를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자장율사는 앞도 보지 않고 문수보살님을 외치며 튀어 내려가다 온통자갈과 돌덩어리인 백운계곡에 굴러 떨어지며 그곳에서 열반하셨다는 곳이 바로 갈반지의 갈래사였던 지금의 정암사 백운계곡 산내 암자인 것입니다.

이처럼 당대의 선지식도 아차, 싶으면 눈에 보이는 상에 떨어져 귀천을 분별하게 되고 대소와 오욕칠정의 분별에서 일어나는 한 생각이 성품의식을 흔들리게 하면 그 동안의 수행경계는 다만 공덕으로만 저축될 뿐이지, 무량겁을 뛰어넘는 자성경계는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같은 중생경계는 어찌 할 것입니까?

일상에서 얼마나 많은 분별들이 순간순간 육근이 육경을 만날 때마다 육식을 만들어 가며 스스로의 내면에서 일어났다 사라지는 온갖 번뇌와 분별의 잡초들로 시달리고들 살아가시는지요. 이제 자유로워지시기 바랍니다.

주변을 자기에게 맞추려들면 뜻대로 되면 즐겁고 해피하지만, 자기의 뜻대로 안되면 그때부터는 번뇌와 고의 원인이 되는 것이니, 자기를 환경에 맞추고 사는 지혜를 익히게 되면 항상 부자로 살면서 넉넉한 마음정신으로 내일도 편안히 맞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차피 범부중생은 다겁생에 뿌려놓은 인과 연의 과보로 얽혀 돌아가는 삶일진대. 일체유심조를 한 생각 바꿔먹는 쪽으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부처의 가르침

경전에서는 오늘 오신 분들을 칭하기를 선남자라 하고 선녀인 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태어나 지금 이 순간까지 정상적인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고, 모두가 다 대들보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었고, 살아왔지만 못다 해낸 아쉬움을 지금 가정에 있는 아이들에게 대물림하고 있습니다.


지식은 부지런히 읽고 많이 외우고 기억해서 시험을 잘보면 박사도 되고 교수도 되고 해서 살아가는데 밥줄은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됐다고 해서 과연 행복이 그림자처럼 함께 해줄런지 싶습니다.


아마, 알면 알수록 인간의 욕구는 더 커지기 때문에 그에 비례해서 번뇌는 더 많아지면 많아지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는 부지런히 버려가는 데서 얻어집니다.

나 잘났다는 생각도 버리고 내가 누군데 하는 생각도 버리고, 지금 나라는 아상과 내가 누군데 라는 허상을 버려갈 때, 내 생각이 옳다는 그런 헛된 아집과 독선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자유로워지고 정신만족도는 한층 높아져 삶의질은 풍요로워지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말과 글에 담긴 뜻을 찾기 바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말과 글이 전하고자하는 의미에 이해를 갖습니다.

                          

평생을 참선만 하면서 사교입선이라 하여 경전은 번뇌를 일으키고 알음알이만을 만드는 씨앗이라고 소흘히 했던 어느 스님이 기차를 타고 가는데 옆 자리에 앉은 승객이 자신의 곁에 그럴듯한 스님이 앉아계시자 살살 말을 걸더니, “ 스님 불교가 뭡니까?” 하고 묻자 그 스님은 참선에 대해서는 막힘이 없다고 자신했지만, 평생을 경전을 가까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뜻 문자와 단어가 떠오르질 않아 어떻게 설명을 해서 부처님 법을 전달할지 막막하게

목구멍이 꽉 막혀버리고 진땀이 흘렀습니다.


그러자 그 스님은 갑자기 생각이 일어나 자신의 주먹을 불끈 쥐었다 펴 보이면서 “이것이 바로 불교요!” 하자, 질문을 했던 승객은 혼자 생각하기를 “모이면 하나요, 펴지면 여럿이라.” 거참, 알다가도 모르겠구먼, 했더랍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생전에 주먹을 자주 쥐셨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당시 부처님을 가장 옆에서 보필하던 제자 아난은 이것을 늘 궁금해 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호기심을 참다못한 아난이 부처님에게 묻습니다.

“세존이시여 왜 늘 주먹을 그렇게 쥐고 계신지요?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그러자 부처님은 아난을 보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내 주먹 안에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가장 소중히 여기기에 주먹을 쥐며 이것을 늘 생각하고 있단다.


아난아, 마찬가지로 너의 주먹 안에도 그것이 들어 있단다.” 


부처님으로부터 그 말을 들은 아난은 자신도 주먹을 쥐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살며시 자신의 주먹을 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난의 펴진 손바닥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도 자신의 손을 주먹을 쥐었다가 펴보십시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아까 어리석은 사람은 말과 글이 남긴 개념을 갖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말과 글이 전하는 이해를 갖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법회에 참석하고 불교에 관한 책들을 읽고 경전을 보고 독송하고 한다한들,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삶 속에서 녹아들지 않으면 그것은 지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무릎이 닳도록 절을 하고 목이 쉬도록 석가모니불과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명호를 불러댄다 해도 일상의 생활속에서 남편을 대하고 아내를 대하고 자식을 대하고 주변의 이웃을 대하면서 내 생각과 다르고 나와 뜻이 다르고 뭘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무시하고 수틀리면 기도하던 선업을 짓던 입으로 네 가지의 악한구업이 쏟아져 나온다면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은 지식에 불과한 것이지

부처님의 지혜는 아닌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을 때 그는 부처인 것입니다.”


모두가 오늘 법회를 끝으로 항상 순간순간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들여다보면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알아차리면서 지혜롭게 자신이 자신의 삶에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자기 삶의 주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초파일 법문입니다

4월 팔일인 오늘은 석가세존께서 싯달타 태자로 태어나신 지, 2550번째가 되는 날입니다.


한 인격체의 사람이 태어나 가정을 이루고, 부를 이루고 일국의 대통령이 되어보고, 한 시대의 대역사를 이루었고, 한 시대에 도를 이루어 큰스님이 되었다 한들,....


수많은 세월에 두고두고 자기의 조상도 아니건만, 세간의 사람들이 이렇게 지금까지도 오신 날과, 출세간을 하신 날과, 도를 이루신 날과 열반에 드신 날을 기리는 분은 아마도 예수님과 부처님 두 분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출생하신 날만을 기리지만, 부처님은 4월8일의 탄생하신 날만이 아니고 2월 8일의 출가일과 도를 이루신 납월인 12월 8일, 그리고 열반에 드신 2월 15일이라는 4대 기념명절이라 하여 기리고 불교가 있는 나라에서는 모두가 기념하고 있습니다.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한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한들, 그 후손들은 불과 백년도 못되어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마는 이 바쁜 세상에 세존께서는 도대체 어떤 복을 그렇게 많이 지으셨기에 지금 이 순간까지도 우리는 오늘 이렇게 한자리에 동업으로 모여 오늘을 기리고 기뻐하며 축하를 나누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까닭은 바로 이렇습니다.

부제불 제불이 장엄적멸궁은 어 다겁 해에 인욕고행이요.  바로 여기에 답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같은 날이 바로 장엄적멸궁일 것이니 이리되는 이유는 저나 여러분들처럼 천수경을 외우면서 여래의 열 가지 십대발원과 발 사홍서원이라는 그런 크나큰 서원을 입으로만 외우는 것이 아닌, 저 깊은 마음으로 원력을 세우고 내 먼저 먹고 싶고, 내 먼저 입고 싶고, 내 먼저 넉넉하게 쓰고 싶은 그러한 수많은 욕구들을 인욕고행으로 참아내며 수많은 생을 돌고돌며 태어날 때마다 나 아닌 다른 이

들을 위한 이타행을 실천했던 인욕고행의 결과라는 말입니다. 


중생은 세상에 태어나 성년이 되어 한 가정을 이룬다 쳐도 과거생에 지은바 복밭의 농사가 고만고만하여 자기가족 지키기에도 급급하여 살아가며 대도를 성취하기엔 꿈만 같고, 마음만은 굴뚝같으나 그리 못하는 이유는 바로 가족에 대한, 자식에 대한, 주변의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착심, 바로 애욕이 끊어지지 못함 때문이더라 하는 것이니,

그 대목이 바로 인유불욕 귀산 수도리요만은 이위부진은 애욕소진이니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은 그리그리 살다가 생을 마감하면 가는 곳은 바로 윤회의 길에 들어서는 이유가 되는 것이니 그 원인 또한 이와 같음이라, 중생 중생이 윤회화택문은 어 무량세에 탐욕불사니라. 했듯이, 윤회를 돌고도는 이유는 탐하는 마음과 욕심내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더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이 죽어 다음생을 기약하게 되면 무방천당에 소왕지자는 삼독번뇌로 위자가제보요. 무유악도에 다왕지자는 사사오욕으로 위망심보니라. 했듯이 천상에 오지말라고 막지도 않건만 가는 이가 적은 이유는 삼독번뇌를 집안의 보배로 삼은 때문이며, 어서 이리오라고 유혹하지도

않건만, 악도에 가는 이가 많은 이유는 사사오욕을 어리석은 마음의 보물로 삼은 까닭이더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도리를 깨달은 사람에게는 천상과 천하에 오직 홀로 존귀한 만물의 영장인 사람다운 사람이 됨이요.

일체의 모든 번뇌와 고통을 가볍게 여겨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마저도 마음 편하게 해줄 것이니 이를 일러 일체개고 아당안착이라 하는 것입니다.


석가세존께서 태어나 사방을 일곱걸음을 걸으신 후, 세상을 향하여 일갈하신 사자후가 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요 일체개고 아당안착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우리들 중생은 이날 이때까지 법당 안에 들어와 말 못하는 부처의 상만을 우러르고 안되는 일 되게 해달라, 어려운 일 풀리게 해달라, 우리 손주 공부 잘하게 해달라는 그런 바램으로 참배만 하였지, 영단을 보고 무상의 도리를 체득하고 부처님의 존상을 우러르며 유정 다겁생래의 윤회화택의 세계에서 알게 모르게 짓고 뿌려온 생각과 말과 행동의 열가지 악업의 씨앗들을 거두고, 이로인한 죄업장들을 소멸하는 원력을 세우고 보살행을 실천하는 데는 소흘히 하였으니, 이제로부터 거듭 다시 태어나는 삶이 되시어 일체의 업장을 소멸하시고 가족 모두가 업장이 소멸되시면 절로절로 원하는바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이 부디 그리 성취되시기를 간절히 발원하고 축원드립니다. 


그리고 초파일에 등을 공양하는 유래에 대한 법문은 하두 들어서 다들 아시겠지만, 한번더 해 드린다면 설일체 유부경전 중에 “현우경”이라는 경전에 보면 “등불공양의 유래”가 밝혀져 있습니다.


불교에서 등불이란, 무명(無明)의 어둠을 밝히는 지혜의 광명을 의미하고, 과거 인도에서는 깨달은 자에 대한 우리의 존경과 찬사의 표시로 등불을 공양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 등불을 성인들 앞에 올리며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어 모든 중생들의 어두운 마음을 밝게 해주고, 나의 모든 기원이 성취되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초파일엔 빈자일등(貧者一燈)의 이야기가 주제로, 부자가 공양한 만 개의 등보다 가난한 자의 정성이 담긴 한개의 등의 공덕이 큰 것임을 가르치는 대목이 있습니다만, 이것은 부자도 자기 돈은 아까운 것이고 가난한 이도 돈이 아깝기는 마찬가지이나,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당장 저녁끼니를 굶으면서도 인욕하는 마음과 발원하는 마음의 간절함을 더 높이 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셔야 하는 것입니다.  


등불 유래를 살펴보면 부처님 당시 "아사세" 왕이 기원정사에서 부처님께 법문을 청해 들을 때 동참한 모든 불제자들이 기름등불을 켜서 법회자리를 밝힌데서 유래가됩니다. 


이때 춘다라는 한 가난한 여인이 많은 사람들이 기름등불 공양을 올려 공덕을 쌓는 것을 보고, 거지인 자신이 처지를 비관하여 스스로도 복을 쌓고 싶었으나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복의 인연을 맺을 수가 없음을 안타까이 여기다 문득 생각에 그날 구걸한 돈과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서 기름을 사자 기름집 주인이 그 까닭을 묻고 그 정성을 기특하게 여겨 남보다 더 많이 주었고 춘다는 깨진 동냥그릇에 심지를 구하여 불을 밝혔습니다.


아침이 되어 모든 불은 거의 꺼졌으나 이 춘다의 등불만은 꺼지지 않고 밝게 타고 있었고, 아난과 목건련 존자가 이를보고 부처님께 여쭈니 부처님께서는 “이 등불은 지극한 성심과 큰 원력을 가진 사람이 밝힌 등불이기 때문에 꺼지지 않는다.”고 말씀 하셨다.


이때 춘다 여인이 부처님 전에 예배하자 부처님께서는 “네가 오는 세상에 이 아승지겁을 지나 부처가 되리니 이름을 동광여래라 할 것이다.”고 수기를 내리셨습니다.

난타는 감격하며 출가하기를 청원하여 계를 받고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엄격한 계급사회이었던 당시에도 출가에 자격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큰 원력을 세우고자 하는 사람은, 부처님 전에 지극 정성으로 기원봉양하면 무량한 공덕을 입을 수 있음을 깨닫고 부처님 전에 등불을 밝혀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고 자신의 지혜를 밝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화엄경에 “믿음을 심지삼고, 자비를 기름으로 삼으며 생각을 그릇으로 하고 공덕을 빛으로 하여 삼독(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을 없앤다”고 말씀하셨고,

대열반경에는 “중생은 번뇌의 어두움 때문에 지혜를 잃는데 비해, 여래는 방편으로 지혜의 등을 켜니 모든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중생의 번뇌와 삼독으로 인해 불성보배를 보지 못하고 있음을 표명한 것이며 부처님께서는 곧 법신,보신, 화신의 삼신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투시어 중생들이 지혜로서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인도하여 주신 것입니다. 


다시한번 축원드리지만, 오늘의 이러한 인연공덕으로  다겁생래 알게 모르게 지은바, 신구의 삼업이 모두 소멸되시고 거듭 태어나시어 원 하시는 모든 일들이 원만성취되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윤회를 벗어나는 자각하는 삶

어제 오후에 영등포에 있는 고대 병원에 문병을 다녀왔습니다. 병원에 가면 모두가 아픈 사람들 천지요. 군부대를 가면 고만고만한 청년들이 모두 모여있고 교도소에 면회 를 가면 죄를 진 사람들이나 교도관들이나 다들 한 솥 밥을 먹으면서 한 가족으로 살아가고들 있습니다.


이런 것을 불교에서는 동업중생이라 부르고, 세간에서는 끼리끼리 유유상종이라고들 표현하고 유가에서는 천지 동근이라고들 합니다.


이 시간에 여기 법당 법회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도 수십겁의 인연이 있어 한날 한시에 여기에 이렇게 참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생전의 신구의 삼업의 인연을 어찌 짓느냐에 따라 다음 생에 언젠가는 인과 연이 어우러지게 되면 또다시 이렇게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한생을 살더라도 생각과 말과 행동의 업의 씨를 뿌리는 인과 연이 가족관계를 만들되 웬수같은 가족들이 모여사는 집안이 될 것인가, 서로가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관계가 될 것인가, 호박씨에 수박이 열리게 할 것인가 하는 모든 것들이 지금 이 순간에 알게 모르게 뿌리고 심고 있는 인과연의 신구의 삼업에 따라 결정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법문을 들려드리는 제 자신도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합니다만, 적어도 순간순간 내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생각들을 알아차리며 스스로 알아차리며 살아가는 데는 익숙해져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자각이라 부릅니다.

어제 병원에 문병을 다녀왔습니다만, 흔히들 건강의 소중함을 빗대어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다. 라는 말을 합니다.


한 사람이 일평생 살면서 많은 것을 욕심내어 추구하고 많은 것을 생각하고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것을 성취하고 사회적인 지위를 어느 정도 갖게 되고 자신의 명함에 거들먹한 명예를 여러가지 써 넣어가지고 다닌다 해도 나이가 들고 자신의 건강을 잃어 죽음이 임박할 쯤 이면 그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느껴지듯 허망한 생각이 들며 일생을 살면서 나는 무엇인가 많은 일을 했다고 여겨왔던 신념도 나는 아무것도 이룬 바가 없다는 자괴감으로 바뀌게 되고 주변의 가까운 친구들이 한 두 사람세상을 떠나기 시작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산다는 것에 대한 허무함과 자신의 살아온 가치에 스스로의 재평가 등으로 천국을 가기 위해 교회를 찾게되고 극락을 가기위해? 아니면 스스로의 마음의 위안과 평안을 얻고자 종교를 찾게 됩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죽음 앞에...  그리고 이웃의 죽음 앞에서는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며, 모든 것이 한낱 꿈에 불과 하다는 말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것입니다.

부귀도 영화도 권세도 사랑도 자신의 건강을 잃으면 다 잃게되는 것입니다.


사계절의 변화는 윤회를 알려주고 있고 밤과 낮의 태양의 움직임은 어제 날은 오늘 날이 아니듯, 사람의 나고 죽음과 끝없는 윤회를 알려주고 있듯이 사람이 갓난아기로 태어나서 늙어 노년이 되어 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사람들은 참으로 다양한 형태의 인생을 제각기 살아가게 됩니다.


때로는 행운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사회와 역사에 이름이 남는 잘난 삶을 살기도 하고 때로는 유명무실한 평범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사람에게는 공평하게 생노병사라는 똑 같은 삶의 방식이 있고 죽음은 그 사람의 과거생에 뿌려두었던 인과와 업에 따라 현실에서는 온갖 모습으로 노소가 없이 찾아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이, 그 어떤 시대에, 그 어떤 인종으로, 그 어떤 나라에 ,그 어떤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건 미국의 부시대통령이든 한국의 초대 대통령을 했던 이승만이건 박정희 대통령이든 모두가 나서 늙고 병들어 죽고 비운에도 죽고 편안히 죽는 것은 모든 사람의 업에 따라 제 각각이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태양과 달이 낮과 밤으로 자전과 공전을 통해 사계절과 음양을 알려주듯이 자연의 일부인 사람 사람들에게 있어 이러한 똑 같은 삶의 패턴은 연속적으로 되풀이되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계속해서 반복된 수많은 다양한 모습의 윤회전생을 거듭하는 것입니다.

자각을 잃어버렸기에 나는 나의 존재를 모르고, 나의 존재를 모르기에 나의 삶은 무의식적인 삶이 될 수밖에 없던 것입니다.


과거에 내가 아무리 강렬하고 치열한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현실에 안주하고 현실에만 매달려 왔던, 전체를 보지 못하는 한 토막만을 치열하게 살아온 무의식적인 삶이었기에 나는 나 자신의 삶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지도 못합니다.

그것이 비록 나에게 있어 수많았던 다양한 삶이었다 할지라도 나는 그렇게 기억도 못한 채 나의 과거의 삶을 다잃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나는 늘 어떤 모습이었던지 태어났던 대로 다시 태어나야 했으며, 늘 늙어왔던 대로 늙어야 했으며, 늘 병들었던 대로 병에 들어야 했으며, 늘 죽어왔던 대로 죽어야 했습니다.


나에 대한 자각, 나의 존재에 대한 자각, 나의 삶에 대한 자각이 없었던 까닭입니다.

건강을 잃으면 한 생을 잃습니다.

그러나 자각을 잃으면 윤회의 길에서 헤메일 뿐입니다.

그래서 2600년 전에 부처님께서는 중생중생 누구나 스스로 가지고 있는 자성을, 본질을 깨치라고 설파하셨던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가 자기 주인이 되는 시대가 올 때, 불국정토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때는 죽어서 가는 왕생극락이 아니라 머무는 자리가 바로 정토요, 살아있는 현실이 극락이 될 것이건만, 법화경의 마지막 대목처럼 중생이 윤회를 다하다보면 언젠가는 성불하리라는 말씀처럼 될 날도 있으리라 봅니다.

성불하십시오.

인연의 소중함

얼마 전에 영등포 교도소에 지인이 있어 면회를 가게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차장에 차를 막 세우고 문을 열고 차에서 나오는데 어느 분이 교도소 문을 나오면서 결제서류 파일을 옆구리에 끼고 나오다 마주치더니, 저를 보고 바로 합장하고 인사를 하시기에 저도 엉겁결에 합장을 하고 빙긋 웃었더니 그분이 제게 어디서 오셨느냐고 하더니 옆의 면회실로 저를 안내하여 간단히 인사를 하는데, 본인은 영등포교도소의 불교담당을 하는 소임자인데 철원소재의 심원사를 원찰로 하고 전 주지스님인 영도스님을 젤 존경하고 있다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더니 자신의 신행의 경험담을 전개하기 시작하는데, 교도 공무원의 박봉으로 살기도 어려울텐데 항상 합장주를 사서 수인들에게 나눠주고 불법을 전하다보니 총무원장의 표창과 각계의 표창경력도 화려했는데 그 모든 것을 부처님의 가피로 여기고 계셨습니다.

헌데, 그분의 신행경험을 듣다보니 그래, 중생은 스스로 느껴야 발심이 되고 간절하게 기도가 되는 것이다. 라는 사실을 재삼확인하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자신이 살던 아파트를 장만할 때도 간절하게 기도를 하는데 비몽사몽에 하늘에서 광명이 일더니 안방으로 서광이 쏟아져 내려 지금 사는 아파트의 호수번호가 벽에 씌여졌고, 그래서 당첨되고 보니 그 아파트였는데 부인은 네식구가 살기에 평수가 너무 좁아 그 집을 팔고 더 넓은데로 가자는데도 본인은 가피력으로 인연이 된 집을 팔기 싫어 미루고 있었는데 갑자기 평촌의 집값이 오르더니, 지금은 열배이상으로 치솟았다는 지난이야기와 근래에 군대에 입대한 아들이 훈련소 군 법당에 나가 평소 아버지를 따라 절에 가서 절하는 법을 배워둔지라 법회가 끝난 다음에도 평소대로 절을 했더니 군법사가 우연히 절하는 모습을 보고 이것저것을 묻더니 법당에 군종병이 필요한데 기다려보라더니 그곳에 남아 군종병이 됬다는 이야기 등 이었습니다.

중생은 이렇게 스스로 체험을 할 때 신심이 더욱 자라나고 간절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괴롭고 힘든 일이 어찌 없겠습니까?

살만한 집은 자식이 속을 썩이게 되고, 남편이 속을 썩이고, 딸이 속을 썩이게 되고, 그 속을 썩이는 것이 온갖 모습으로 나타나 몸이 아프거나, 사고를 치거나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것들이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이 모든 게 다 이유가 있어 오는 것들이고 겪어야할 업이고 인과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인정하기 싫어하는게 중생의 속성입니다.

며칠 전 여주에 사는 신도 분이 집터를 보아달래서 갔다가 지인의 속사정을 이야기 하며 그곳에 갔으면 하기에  가서 만나보았더니 이제 21살의 아들이 대장암으로 대장을 모두 절제하고 소장에도 전이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집의 모든 방의 수맥을 조사했더니 두 부부의 침대에서 남편의 잠자리에서는 수맥이 전혀 없는데 부인의잠자리에는 수맥이 강하게 잡히더니 아들의 방으로 흘러가는 수맥이었습니다.

결국 부인도 7년 전에 직장암 수술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 집안의 방을 샅샅이 살펴 잠자리를 정해주고 왔더니 어제 아들이 너무나 잠을 잘 자고 대변 또한 잘 보았다고 감사하다고 전화가 왔었습니다.


인연이란 것은 이런 것입니다.

그동안 그래도 절을 다니면서 알게 된 인연으로 저를 아는 분과 인연이 되어 제가 그곳까지 가게되었던 것입니다.

앞에 말씀드렸던 영둥포 교도소의 포교활동을 하시는 분이나 방금 전의 불자가정이나 모두가 불자라는 선한인연으로 인연을 지었기에 살아가는데 서로 힘이 되고 의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흔히들 인연 따라 간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 인연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저 막연한 어떠한 운명일까요... 인연은 다름아닌 생각의 결과입니다.

사람들의 인연은 사람들의 생각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이 바뀌면 나의 인연이 바뀝니다.
나의 생각이 사라지면 나의 인연 또한 사라집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렇듯 수없이 많은 자신의 생각을 일으켜왔고, 그 생각을 바꾸어 왔으며, 그에 따라 수많은 인연들이 맺어지고 헤어짐을 되풀이 해왔던 것입니다.

좋은 생각을 통하여 좋은 인연이 맺어지기도 하고 ,
나쁜 생각을 통하여 나쁜 인연이 맺어 지기도 합니다.
이렇듯 나의 생각에 의해 인연은 맺어지고 있으며,
나의 생각의 패턴에 의해 인연의 패턴이 달라지고,
나의 생각이 다함에 의해 인연이 다하는 것입니다.


결국 다겁생래 나의 의업의 결과로 몸둥이는 신업을 만들고 구업을 짓고 박복의 결과를 갖게되지만, 이제 우리는 부처님의 품안에서 하루를 시작할 줄 알고 끝낼 줄 알 때 우리에게는 업으로 인한 장애는 줄어들고 항상 편안함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

     

     

     

     

     

     

     

     

     

     

    뉴에이지 모음 8곡

     

    1. Through The Wind / Danny Wright

    2. Flight Of The Angels / Mehdi
    3. History Of Love / Francis Goya

    4. Nemorino Romca / Szentpeteri Csilla


    5. Winter Flame/ Craig Chaquico

    6. Night Snow  / George Winston

    7. Snow In The Morning / Andant

    8. Winter Solstice / Ad Di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