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 백고좌 법회

2010. 2. 7. 23:3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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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華嚴經)이라고 하는 경명(經名)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의 약명(略名)이며, 범어

(梵語)로는 마하‧바이푸르야‧ 부다‧ 아바단사가‧ 수트라 (Mahẫ-vaipulya-avatamsaka-sūtra)로서 대방광(大方光)이라고 하는 부처님을 설하는 화엄경이라는 뜻입니다.


대방광불이란 대비로자나불(大毘盧遮那佛)을 가리키는 뜻입니다.

비로자나불은 범어 바아로차나(Vairocana)의 음사(音寫)로서 『광명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이 두루 비친다(光明遍照)』는 무한한 광명을 뜻합니다.


또, 대방광(大方光)이란 광대(廣大)하다는 뜻으로서 부처님을 형용하는 말이므로 대방광불(大方光佛)이라고 하면 광대한 부처님이라는 뜻인 것입니다.


따라서, 경명이 뜻하는 것은 우리의 제한된 지성(知性)이라든가 제한된 시간과 공간이라고 하는 그러한 것으로는 한정시킬 수 없는 무한대(無限大)의 부처님을 설하는 화엄경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또, 화엄경의 화엄(華嚴)이라고 하는 말은 온갖 아름다운 꽃으로 장엄(莊嚴)되었다는 뜻으로, 그것은 찬란함을 비유하는 말이며,


결론해서 무한한 비로자나 부처님을 설하는 찬란한 경임을 경명은 뜻한다할 것입니다.


우리가 적어도 불교라는 한 종교를 선택하여 신앙행위를 함으로써 자신의 삶에 의지처가 되고자 한다면 먼저 부처님께서 살아생전에 우리에게 남기셨던 말씀들을 정리해보고 말세 중생인 우리들에게 전해주려 하셨던 참다운 가르침을 찾아가보는 여행도 의미와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빌어,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 몸으로 수행을 이루어 완전한 인격자가 되셨던 분이시며 중생을 위해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살다, 길에서 죽음을 맞이하여,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보란 듯이 똑같은 생멸의 길을 보여주셨고, “너희도 내가 행한 수행을 실천한다면 부처를 이루리라” 하셨던 가르침, 이 세상 종교의 어느 교조가 일반 범부중생들에게 동등한 자격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주신분이 계시겠습니까?


당시의 바라문들처럼 신의 피조물로 전락하여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돌리며 합리화의 모순에 빠져들지 않도록 당신의 평생을 중생들에게 일체로부터 자유를 얻는 지혜로운 반야만을 설하셨던 일생동안 남기셨던 말씀들을 요약하여 정리하여 두었을 때, 불자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며, 혼탁한 현실의 오탁악세에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 까지도 무명에 빠져 떠밀려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으로부터 지혜로운 광명의 빛을 찾아 살아갈 수 있는 참다운 정신적인 의지처이자 불교라는 신앙행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 부처님께서 남기셨던 일대사의 가르침을 다섯단락으로 나누어보면,


첫째로 화엄시라 하여, 세존께서 성도하신 후, 그동안의 힘겨웠던 수행의 완성을 사흘 동안 홀로 즐겨 여기시다 홀연히 밤하늘을 올려다보시고 우주법계의 대 파노라마를 관하시고 21일 동안 중중무진의 화엄법계를 노래하신 게송이 바로 화엄경이셨던 것입니다.


둘째로는 아함시라 하여, 세존께서 우주법계에 대한 말씀을 홀로 설하시다, 이를 중생들이 알아들을 수 없음을 깨닫고 중생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12년간을 녹야원에서 법을 설하셨으니 이때 설해진 아함부가 후대에는 남전 북전으로 나뉘어져 현재 우리가 아는 장아함과 잡아함, 증아함과 증일아함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화엄경, 반야경, 법화경, 열반경등의 4부 경전을 제외한 모든 경전을 방등부경 이라하며 이때를 방등시라 하여, 녹야원에서 아함을 설하신 후, 8년 동안 지금의 우리가 아는 유마경, 금광명경, 능가경, 승만경, 무량수경 등의 방등부의 여러 경전을 설하셨던 것입니다.


네번째로 반야시라 하여, 22년 동안 600부가 되는 반야부의 경전을 설하시어 아집과 집착과 애욕과 질투와 증오와 미움과 신기루 같은 허상에 소유욕에 휘둘리는 온갖 번뇌의 무명 속에 허덕이는 중생들에게 참답고 지혜롭게 살아 가는 무상의 아뇩다라 샴먁삼보리의 길을 일러주셨던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법화열반시라 하여, 최후의 8년간을 당신의 삶을 마무리하고자 하셨던지, 말세 중생들에게 참다운 보살은 오탁악세에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위해 법화경을 설하시고 입멸을 앞두시고서는 열반경을 설하셨던 것 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오시팔교라는 교상판석으로 볼 때, 부처님께서 50년 하고도 21일 동안 중생들을 위해 남기셨던 말씀의 물줄기가 이러하건만, 부처님께서는 “ 여래무소설” 이라하시며 여래는 한 법도 설한바가 없다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도리를 깨달을 때 비로소 여래의 참다운 법을 알게 될 것이며 육도윤회의 셋방 돌며 이옷 저옷 바꿔 입는 업보중생을 벗어나 누진의 열반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래께서 이 많은 팔만 사천법을 설하셨음은 모두가 중생을 가엽게 여기셨던 마음에서 나온 것일 진대, 부처님의 마음과 당시의 아라한 들이나 지금의 우리들의 마음이나 마음의 자성 자리에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심불급 중생이 시 삼무차별”이라 어디 제가 틀린 말입니까?


다만, 마음이라는 체는 시공을 초월하여 차별이 없다하나 마음이라는 체를 사용하는 우리는 범부중생심으로 사용하기에 보여지는 모습은 다겁생래의 습기와 훈습된 업으로 보여지는 모습은 중생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좋은 법왕사 대 도량에 나와 백일간의 무상 법문들을 들으면서도 듣는 귀만 열리고 업식이 함께 되지 않는다면 이 얼마나 뜬구름 잡기가 되겠습니까?

이 대목에서 주지스님과 법왕사의 모든이들에게 다같이 박수 한번 칩시다.

여러분들께서 인간사 백년을 산다한들 삼만하고도

육천오백일에 불과하지만, 백년을 사는 이가 얼마

나 될 것이며 불과 칠팔십을 산다한들, 기쁘고 즐겁고 잘나가던 호시절을 손에 꼽아보십시오.

아마, 열손가락 안에 다 들어올 것이나, 괴롭고 힘들고 미움과 증오와 번뇌와 근심걱정으로 밤잠을 설치는 날들을 꼽아 본다면 열 손가락만 아니라 열 발가락을 합쳐도 부족할 것이고 옆 사람 손발가락을 빌려야 할 판일 겁니다.


제말이 틀렸나요. 이러는 저도 그러고 사는데요 뭘,

다만, 여기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기에 함께 벗어나자고 오늘 이러한 자리에 와 있는 것뿐입니다.


하여, 화엄경도 다 이 마음 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금강경도 법화경도 도덕경도 심지어 성경까지도 다

이 마음 바로 자기의 마음 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오묘한 이치를 아시다면 바로 이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차별이 없는 경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화엄경 강의는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이러한 중중무진의 이치를 설하셨으나, 중생들의 경계에서는 도저히 알아듣지 못함을 안타까이 여기셔서 傳. 敎. 法歸라 하여 3세 제불들이 전하는 말씀인 전과 법이라는 의미의 교와 만가지 선이 돌아가는 곳이라는 법귀의 아함 설하신 채, 많고도 많은 방등의 경전을 설하셨으되, 그래도 깨닫지 못하는 중생들을 위해 아집과 집착과 애욕과 질투와 증오와 미움과 신기루 같은 허상의 소유욕에 휘둘리는 온갖 번뇌의 무명 속에 허덕이는 중생들에게 참답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무상의 아뇩다라 샴먁삼보리의 반야의 길을 일러주셨던 것이며,


말세 중생들에게 참다운 보살은 오탁악세에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위해 법화경을 설하시고 입멸을 앞두시고서는 열반경을 설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화엄경을 해야하는 법회이기에 화엄경의 문고리라도 잡아드리고 가야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주지스님께서 다음에 또 보자고 하시겠지요.

  

1. 글에 의한 분류


① 과보를 말하여 신심을 내게 하는〔擧果勸樂生信 分〕것이니,

제 1회에서 말씀한 六품(제一권에서 十一권까지)이 비로자나불 의 원만한 과보를 말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원하는 욕망을 일으키고 믿는 마음(信)내게 하는 것이요,


② 인행(因行)을 닦아서 과보를 얻음을 말하여 지혜 를 내게하는 [修因契果生解分]것이니, 제 二회에서 말씀한 여래명호품으로 부터 제七회에서 말씀한 여래출현품까지 三十一품(제 十二권에서 五十二권까

지) 은 十신과 十주와 十행과 十회향과 十지의 다섯

단계의 인행을 닦아서 부처의 과보를 이루는 일을 말하는데, 원인과 결과가 서로 계속되며 차례차례

윗단계로 올라가는 것을 말한 것으로 인을 닦아서

과보를 받는 이치에 의지하지혜(解)를 내게 하

는 것이요,


③ 수행하는 법에 의탁하여 닦아 나아가면 인행을 성취하는 [託法進修成行分]것이니, 제 八회에서 말

씀한 이세간품(五十三권에서 五十九권까지)은 여러

단계의 수행하는 법에 의탁하여 二천가지의 인행

(行)을 닦아서 성취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한 것이요,

④ 사람에 의하여 증득하면 과덕을 이룬다는[依人證人成德分]것이니, 제 九회의입법게품(六十권서

八十권까지)에서 선재동자  (善財童子)가 五十三선

지식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五十二단계의 인행을 닦

아서 법계를 증득하고 훌륭한 덕을 성취(證)하는 것이다. 라고 할 것입니다.



2. 뜻에 의한 분류를 해본다면


① 제一회의 처음에 말한 세주묘엄품은 화엄경을

말하게 된 인연을 말한 서문이므로 그것을 제외하

고, 제 二여래현상품에서 제 五화장세계품까지는

비로자나불의 과상(果上)의 덕을 말하였고,

제 六비로자나불품에서는 옛적에 닦던 인행을 말하

였으므로 이것을 믿을 인과(所信因果)라 하고,

 

② 제 二회의 여래명호품에서 제七회의 보살주품까

지 二十六품에서는 五十위의 인행이 차별한 것을

말하였고, 다음의 불부사의품과 여래십신 상해품과

여래수호 광명공덕품에서는 부처님과 상의 三덕이

차별한 모양을 말하였으므로 이것을 차별한 인과

[差別因果]라 하고,

 

③ 제 七회의 보현행품에는 보현의 원만한 인행을 말하고, 여래출현품에서는 비로자나불의 원만한 과

상을 말하였는데, 앞에 있는 차별한 인과의 모양을

융통하여, 인은 반드시 과를 포섭하고 과는 반드시

인을 포섭하는 것이어서 인과 과가 서로 융통하여

둘이 아닌 것을 보이므로 평등한 인과[平等因果]라 하고,


④ 제 九회의 입법계품에는 처음 본회(本會)에서는

부처님의 자유자재한 작용을 말하여 증득하는 과상

을 보이었고, 다음에는 선재동자가 선지식들을 방

문하면서 인행을 닦아서 법계의 법문에 들어가는

일을 말하였으므로 증득하는 인과[證人因果]라

합니다.

 

그러하여 이 경의 내용은 통틀어 다섯 번의 인과를 환히 보인 이니, 이것을 앞에 말한 네 가지에 배대한다면,

네가지는  신(信)과 해(解)와 행(行)과 증(證)의 사(四)분인데 믿을 인과는 이요, 차별한 인과와 평등한 인과는 요, 수행을 성취하는 인과는 이요, 증득하는 인과는 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글과 뜻이 이 네가지에 일치하는 것이니 화엄경의 강령은 신 ‧ 해 ‧ 행 ‧ 증(信解行證)의 넷으로 통일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처님의 가르침이 육도윤회를 벗어나고 여래와 하나되는 진실한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진실로 믿고 알려 들고, 배우려 노력한다해도, 천만가지를 안다한들 한가진들 생활 속에서 행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종국에는 얻음이 없을 것이니 화엄의 깊은 속뜻은 여기 이 네가지에 있을 뿐인 것입니다.

 

나라는, 내 생각이라는, 내주관이라는 나의 아집으로 부터 자유로워고 이것을 삶속에서 실천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바로 내 마음 안에 있을 뿐이요, 내 마음 먹기에 달렸을 뿐이니, 작심삼일이 되지말고 초발심이 변정각이라는 여러분의 마음 속에 화엄경도 금강경도 성경도 도덕경까지도 감춰져 있는 내 마음의 보물창고들을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지경게持經偈]

본래부터 내게 있는 아름다운 이경전은

붓과 종이 먹물로써 이뤄진게 아닌지라

펼쳐보면 한글자도 찾아볼 수 없거니와

언제든지 찬란하게 대 광명을 놓고있네


성불하십시오.

화엄경에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자주 나오고, 일심소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저 일체(一切,온통 切)라는 말은 SARVA, 살바의 의역인데, 만물의 전체, 온갖 것, 모든 것, 이라는 뜻으로 사물의 전체를 말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몸체의 一體는 사물의 외형은 천차만별이나 그 체성으로 말하면 같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오늘은 이 두 가지의 단어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온통 체를 쓰는 일체유심조는 원효대사가 맨 처음 사용하신 걸로들 알고 있으나, 이는 화엄경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보여지는 것은 눈까풀 하나에 보여지고 말고가 달려있고, 들리는 모든 것은 이 귓구멍 하나로 인함이요, 소위, 색성향 미촉법이 모두 안이비설신의 라는 육근의 뿌리에 의해 존재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모여지는 의식의 작용이 존재함으로써 온갖 지각이 이루어지고 판단이 이루어져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사고와 팔고, 백팔의 번뇌고와 팔만사천가지의 번뇌마와 고가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과연 있을까? 를 고민하던 싯달타 태자는 소위, 출가라 부르는 가출의 원조가 되셨던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번뇌의 원인과 고의 원인을 소상하게 말씀하셨고,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주셨던 것입니다.

지나는 이야기로 들으시고 이 이야기 속에서 한가지를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건 실화랍니다.


“LA에 어떤 교포가 무지 부자가 있었는데, 그 주위의 집들을 보면....파티를 하면 주차하는 사람이 따로 있고 개 키우는 사람, 집사 가정부, 뭐 이렇게 도대체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없는 동네였답니다.

열심히 교회에 헌신하면서 아주 좋은 일을 많이많이 하시는 분들이에요


근데 이집 사모님이 늘 청바지에 티만 입고 다닌답니다.

그냥 늘 편하게 그런 차림으로 다닌답니다.

의류계통으로 미 주류 사회에서도 알아주는 사업체를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옷에 대해서 일가견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부인이 주로 하는 일은 여기 저기 쇼핑가서 옷의 유행도 보고, 옷도 사서 연구하고 그런데요.


어느 날, 고국에 와서 한국 유명백화점의 소위 명품상점에 떡하니 청바지 차림으로 갔더니, 거들떠보지도 않더랍니다. 뭘 물어봐도 대꾸도 귀찮다는 듯이 하고 말입니다.


그 집에 일하는 아줌마가 아주 부티나게 생겼는데..

그 이모라 부르는 아줌마에게, 이렇게 이야기 하더랍니다.

이모가 갔으면 안 쫒겨 났을꺼야. 하면서 웃더라는 거죠,

  

그런데, 그 점원이 아무리 거들떠보지 않고 무시하고 쫒아내어도 이 부인은 이미 그러한 전포를 수십 개씩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과연,그 모욕에 괴로워했을까요? 그냥 웃고 말았겠죠.

이 사람은 전혀 자신의 부를 자랑할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으니까요. 이미 그러하기 때문이지요.


중국의 세설신어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천자는 한 숟가락의 밥에도 배부르고, 제후는 한그릇의 밥에도 배가 차고, 백성은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다. ”


이 이야기는 인간의 욕구에 진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예전 없이 사는 양반들이 “찬물 먹고도 이쑤신”는 말을 그냥 허세로만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는 현실은 현실이지만, 내 영혼마져도 빼앗길 수 없다는 긍지에서 나오는 내면의 욕구를 이겨내는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상황에서 진실은 나에게 있는 것이지,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님을 생각해 보세요.


내가 어떠한 관점을 사용하는 가에 따라서 진실이 정해지고 있음을 한번 직시해 보십시요.


나는 그 상황 속에 희생양이 아니라, 그 상황에 주인임을 한번 느껴보세요.


나는 이미 온전하고..이미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부자임을 오늘 한번 절실히 느껴보아요. 생각과 생각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오로지 나만이 진실임을...

내가 있음으로 부모형제와 아내와 남편과 자식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 가족은 모두가 건강하고 모두가 몸에 큰병이 없음을 감사하고 만족하면서 보다 나은 내일을 준비하는 가정과 매일 매일 순간순간 욕구의 노예가 되어 허덕거리며 살아가는 집안의 분위기는 천차만별일겁니다.


“세상 모든 것은 나의 생각입니다. 나는 그 생각의 주인입니다. 하지만, 그 나조차도 생각일 뿐입니다.”


이러한 자명한 진리를 알고 있음에도 나를 알고, 나는 보는 아주 쉬운 공부임에도 아직도 생각의 미로에서 헤메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직도 생각이 무엇인지 확연하지 않은 때문이며, 모든 것이 생각임을 진정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무엇인가요?

우리들 의식이 생성하는 모든 것은 다 생각입니다.

의식은 물질의 자유스런 형태이고, 물질은 의식의 부자유스런 형태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육신과 의식작용을 통하여 인지하는 모든 것들 온갖 느낌, 온갖 감정, 온갖 번뇌........ 세상 모든 것 생각 아닌 것이 없습니다.

금강경에 끝 구절에 나오는 일체유위법이 여몽환포영이라,이 세상이 생각으로 만든 꿈이라 함은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것이 생각임을 인정합시다.

허상이든, 실상이든, 희미하든, 생생하든, 명확하든 불명확하든.........그 모든 것이 생각입니다.


일상의 일어나는 그 모든 번뇌와 괴로움의 생각들이 내가 또 욕구를 일으켜 남과 나를 비교하고, 남의 집과 내 집을 비교하면서 부질없는 고에 떨어져있구나 하는 자각을  바로바로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고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스스로를 뒤돌아보고 자신의 발밑을 내려다보며  무수의 과거 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내 인생의 마음 밭에 어떤 씨앗을 뿌려 어떤 농사를 지어왔던가를 생각해보는 자작자수의 진리를 깨달아 봅시다.


"내가 또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모든 것이 내 생각이구나."하고요.

그것이 진정한 자각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귀걸이도 목걸이도 반지도 팔찌도 형태는 천차만별이나, 체성은 금덩이로 이루어졌고, 눈도 비도 안개도 시냇물도 모습은 천층만층이나 본질은 물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두의 살아가는 모습이나, 삶은 달라도 본 자리는 하나입니다.

그 하나의 주인공은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인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

 

 

 

 

사랑은 깊은 우물을 닮아야 합니다

 

 

모름지기 사랑은 깊은 우물을 닮아야 합니다.

내안의 물을 퍼내고 또 퍼내어

그의 갈증을 씻어주는....

사랑은 '함께' 입니다.

그러나 그가 나와 '함께'하는것이 아니라

내가 그와 '함께'하는것입니다.

'함께'를 통해 '나'는 점차 소멸되고

드디어 '우리'가 탄생합니다.

 

사랑은 실천입니다.

그를 위해 몸을 움직이는 수고입니다.

나의 전생애를 한곳으로 모으는 노력입니다.

생명을 걸고 쫒아야할 헌신입니다.

사랑은 그를 향한 깊고도 먼 눈길을 지녀야 합니다.

보이는 것이 아닌,보이지 않는 것을

더 깊이 마음에 품어 두어야 합니다.

 

사랑은 이해하는것이 아닙니다.

이해하려 애쓰지 마십시오.

이해되지 않는 부분 때문에 속상해 하지도 마십시오.

사랑은 이해보다 훨씬 윗길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

내가 그의 쪽으로 걸어간다는 뜻입니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그가 내편으로 다가옴입니다.

사랑을 이룬다는 것은...

두 사람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다시 시작케 하는 힘입니다.

지쳐 주저앉은 나를 일으키는 동력입니다.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가능성입니다.

사랑은 그 사람을 등에 업고

먼길 가는 것

지치고 고단해도 내려놓지 않은 채

뚜벅 뚜벅

아득히 먼길 걷고 또 걷는 것.

어제에 대한 집착이 오늘의 사랑을 초라하게 만듭니다.

어제와 오늘의 비교가 사랑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어제는 오늘의 사랑을 이룩한 한 과정이었습니다.

오늘은 내일 더 사랑키 위한 또 다른 과정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내 자신을 태웁니다.

나를 태워 마침내 그를 따뜻하게 만듭니다.

그에게 온기가 되어주지 못한다면

나는 아직 사랑밖에서 서성이고 있는 셈입니다.

 

 

- 사랑으로 나를 버리고> 중에서/조창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