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부처님과함께] 94일: 내 제자를 막지 말라

2010. 3. 15. 21:0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365일사자후를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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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일: 내 제자를 막지 말라

 

 사진/ 眞 旭 님

 

*아난다야, 수바드라를 막지 말아라. 내 마지막 제자를 막지 말아라.

수바드라는 나를 귀찮게 하는 것이 아니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니, 질문을 듣고

대답해 주리라. 그는 반드시 곧 깨달을 것이다.

-장하함경-

 

구시나가라 사라쌍수 언덕.

밤은 깊고 부처님의 유교도 끝났습니다. 

임종의 시간이 가까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깊은 선정(禪定)에 드시고,

제자들은 비탄의 눈물을 참고 있었습니다. 이때 감자기 한 늙은이가 나타났습니다.

‘수바드라’라는 외도(外道, 타종교)가 나타나서 부처님을 뵈옵고 질문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아난다 존자가 허락지 않았으나, 그는 계속 물러서지 않아

떠들썩하였습니다. 이 때 깊은 선정에 드셨던 부처님께서 눈을 뜨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야, 내 마지막 제자를 막지 말라.’ 이렇게 해서 수바드라는 질문하고

부처님께서는 고구 정령히 대답하셨습니다. 과연 수바드라는 머지않아

눈이 열리고 법을 보았습니다. 수바드라는 곧 세존 앞에 출가하니,

세존께서는 그의 정수리를 만져 수기(인가)하셨습니다.

어찌 이토록 지극할 수가 있을까!

우리는 실로 여기에서 대자비(大慈悲)의 완성을 봅니다.

사랑의 극치를 발견합니다.

영생자(永生者)의 실재를 목격합니다.

‘정년퇴직’이란 게 있습니다. 

정년퇴직하면 이 세상 다 산 것처럼 허망하고 슬프다고들 합니다.

그럴테지요. 그러나 부처님의 입멸을 바라보면서, 우리 생명에는 정녕 어떤 형태의

정년퇴직도 없다는 기쁜 대진실을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치열하지 않은 고요는 없다

배영순 교수의 방하 한생각

적멸(寂滅)이란 개념은 불교에서는 아주 소중한 개념으로 쓰인다. 그래서 ‘적멸을 낙으로 삼는다(寂滅爲樂)’고 말하기도 한다. 적멸은 번뇌가 소멸된 고요한 상태, 평화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삶의 이상적 모습을 그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통상적 이해방식에서는 적멸은 그냥 조용한 것으로, 그냥 가만히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가령 천지가 조용한 적막강산에 들어 앉아 있어도 내 속이 시끄러우면 결코 고요할 수 없다. 또 바깥세상이 어떻든 내 마음만 고요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코 고요해질 수 없다.


내가 해야 할 바를 하지 않고 또 하지 않아야 할 짓을 해 놓고 그렇듯 내 인연들이 오염되어 있는데 내 마음이 고요할 수는 없다. 번뇌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까 고요하다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조용한 곳에 들어 앉아 있다고 해서 내 삶이 고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적멸이 구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자전거를 탄다고 하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가만히 멈추어 서려면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다가 쓰러질 것이다. 가만히 있고자 해서는 결코 고요할 수 없다. 그리고 바퀴가 천천히 굴러가면 바퀴살이 다 보인다. 이도 고요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아주 빨리 달리면 바퀴살이 보이지 않고 그냥 바퀴만 보인다. 마치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을 두고서 고요하다는 표현을 쓴다.


그러니까 고요하다는 것, 그냥 조용하다는 개념이 아니다. 치열하게 전진하는 삶, 그속에서 번뇌와 망상이 자리할 여지가 없을 때 고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정말 고요한 것은 치열함에서만 나온다는 그런 이야기다. ‘머무는 바 없이 머물러야 한다’는 것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삶의 품격은 얼마만큼 고민하느냐, 얼마만큼 치열하냐에 따라서 정해진다. 치열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는 삶은 구차하고 비루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삶은 치열할 것을 요한다. 치열하다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키고 그 일관성을 지켜가는 것, 그것을 치열하다고 한다. 그리고 번뇌, 망상이 자리할 여지가 없고 잡스러움이 없을 정도로 치열한 삶, 그것을 고요하다고 한다.


공자는 ‘사십에 불혹(不惑)’이라고 했다. 이도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초지일관할 수 있었다는 것, 그렇게 지행합일에 있어서 치열했기에 달리 어떤 의혹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공자는 ‘사십에 불혹’이라고 했는데, 우리 세간사 인생은 의혹만 늘어간다.


하늘은 의미 없는 생명을 낳지 않고 땅은 의미 없는 목숨을 기르지 않는다고 한다. 풀 한 포기도 의미 없는 목숨이 없는데, 우리네 인생이 아무 의미 없이 아무 생각 없이 떠돌다가 마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늘 생각하고 고민하고 또 행동해야 한다.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으면 죽은 것이다. 또한 생각만 하고 행동을 안 해도 거의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다.

‘적멸’이란 개념도 ‘불혹’이란 개념도 밀어두기로 하자. 그러나 이것만은 다시 확인하자. 치열하지 않은 인생, 서툰 인생, 대충 사는 인생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치열하다는 것은 자신이 마주하는 문제를 비켜가지 않고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것이고 그 문제의 한가운데에 자신을 던지는 것이며 그리하여 끝내 그 문제를 소화하고 해결하는 것이다.


영남대 국사과교수·

 

 

월요일 아침이 우리를 반기는군요

오늘 하루도 풍성하게 채우기 위하여 열심히 무언인가에 도전해야 하겠지요

우리도 남은생을 번뇌와 망상이 자리할 여지가 없도록 치열하게 전진하는

삶으로 채워갑시다

바퀴살이 보이지 않고 바퀴만 보이는 고요한 삶을 느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