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곧 절대絶對다 - 성철 스님[性徹]

2010. 7. 18. 20:1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법화경·관세음보문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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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곧 절대絶對다 - 성철 스님[性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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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도중생고  방편현열반  불실불멸도 상주차설법

                             爲度衆生故  方便現涅槃  不實不滅度 常住此說

 

                            중생을 제도濟度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내지만

 

                            실제實際는 내가 죽지 않고

                            항상 여기서 법法을 설한다.

  

이 구절句節은 법화경[法華經]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 나오는 말씀인데 무슨 뜻이냐

하면 부처님께서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래 겁劫이 다 하도록

절대로 멸滅하지 않고 여기<當下> 계시면서 항상 法門을 說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라 함은 부처님 계신 곳을 말함이지 인도印度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한국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이 나타나 계시는 곳은 전부 여기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천백억 화신化身을 나타내어 十方法界법계에 안 나타나는 곳이 없으시니까

시방법계가 다 여기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상주불멸常住不滅이라고 하였습니다. 항상恒常

머물러 있으면서 절대로 멸滅하여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상주불멸, 현재에도 상주불멸, 마래에도 常住不滅. 이렇게 되면

일체만법이 不生不滅 그대로 입니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영원토록 화장찰해華藏利海 무진법계無盡法界, 극락정토極樂淨土 뭐라고 말해도

좋은 것입니다. 이름이야 뭐라고 부르든 간에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부처님은 항상恒常

여기계시면서 설법說法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釋迦牟尼:Sakyamuni라고 하는 개인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인가?

아닙니다. 일체가 다 과거부터 현재 미래 할 것 없이 항상 무진법문無盡法門을 설하고

있으며 무량불사無量佛事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저 산꼭대기에 서 있는 바위까지도 법당法堂 안에 계시는 부처님보다 몇 백배

이상 설법을 항상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위가 설법한다고 하면 웃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위가 무슨 말을 하는가 하고 그러나 실제 참으로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눈만 뜨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귀도 열립니다.

 

그러면 거기에 서 있는 바위가 항상 무진설법을 하는 것을 다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고 합니다.

 

 

 

유정有情 즉 생물은 으례 움직이고 소리도 내고 하니까 설법을 한다고 할 수 있지만 무정물

無情物인 돌이나 바위 흙덩이는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무슨 설법을 하는가 하겠지만 불교를

바로 알려면 바위가 항상 설법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모양도 없고 형상도 없고 보려고 해야

볼 수도 없는 허공까지도 항상 說法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온 시방법계에 설법 안 하는 존재가 없고 佛事 안 하는 존재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만 불교佛敎를 바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누구를 제도濟度하고

누구를 구원한다고 하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짓입니다.

 

오직 근본요根本要는 어디 있느냐 하면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부터 성불成佛한 면목,

본지풍광本地風光 본래부터 전체가 불국토라는 것.

 

이것만 바로 알면 되는 것이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참 좋은 법이야.. 우리 전체가 불국토에 살고, 우리 전체가 모두 부처라고 하니

 할 것이 뭐 있나. 공부도 할 것 없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아무래도 안 좋은가.」

 

이렇게도 혹 생각하겠지만 이것은 근본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토佛土이지만, 본래 해가 떠서 온 천지를 비치고 있지만 눈 감은 사람은 광명을 볼 수

없습니다. 자기自己가 본래 부처이지만 눈 감고 있으면 캄캄한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말간 거울에 먼지가 꽉 끼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거울은 본래 깨끗하고 말갛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있는 대로 다 비칩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먼지가 꽉 끼어 있으면 아무 것도 비추지 못합니다. 명경明鏡에 때가 꽉 끼어 있으면 아무

것도 비치지 못하는 것. 여기에 묘妙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래부처라는 이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내가 본래 부처다. 내가 본래 불국토에 산다.

이것만 믿고 “내가 공부를 안 해도 된다?” “눈 뜰 필요 없다” 이렇게 되면 영원히 봉사를 못 면

합니다. 영원토록 캄캄 밤중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自信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무슨 자신을 가질 수 있느냐 하면 설사 우리가 눈을 감고 앉아서 광명을 보지 못 한다고 해도

光明 속에 산다는 것. 광명 속에 살고 있으니 눈만 뜨면 그만이라는 것. 설사 내가 완전한 부처

의 행동을 할 수 없고 불국토를 보지 못 한다고 해도 본래 부처라는 것, 본래 불국토에 산다는

그런 자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노력해서 마음의 눈만 뜨면 전체가 다 내 것이라는 그런 自信을 가져야 합니다.

 다만 한 가지 흠이라는 것은 눈을 뜨지 못하여 그것을 보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쓰지 못 한다고 하지만 전후좌우에 황금이 꽉 차 있는 것을 알 것 같으면

눈만 뜨면 그 황금이 모두 내 물건 내 소유이니 얼마나 반가운 소식消息입니까?

 

 

 

 

이것을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현실 이대로가 절대다” 하는 것입니다. 즉 현실 이대로가 불생

멸인 것입니다. 전에도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현실 이대로가 절대이고 현실 이대로가 불생

멸인데 이 不生不滅의 원리는 자고로 불교의 특권이요 전용어로 되어 있었다고….

 

그러나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원자물리학에서도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리 위에 구성되어

음을 증명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해서 불교가 수승하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본래 그런 원리가 있는데 요즘 과학이 실험에 성공함으로써 불교

에 가까이 온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미 2500여 년 전에 우주법계의 불생불멸을 선언宣言하셨고, 과학은

오늘에 와서야 자연의 불생불멸을 실증함으로써 시간의 차이는 있으나 그 내용은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水蓮別曲/ 金春洙

 

 

 

바람이 분다

그대는 또 가야하리

그대를 데리고 가는 바람은

어느땐가 다시 한번

落花하는 그대를

내 곁에 데리고 오리

 

그대 이승에서

꼭 한번 죽어야 한다면

그 소란에 잠시 밝았던 눈이

다시 어두워진다.

 

술렁임으로 멎고 다시 잠잠해진다

킴캄한 머리를 뒤적거리다

어디엔가 부딪치면

수련인가 하고 얼른 

눈을 뜬다

 

 

 

 언제까지나 그대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