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疏通)의 불교적 의미

2010. 11. 14. 13:2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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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疏通)의 불교적 의미

 

-틀려 보이는 것도 맞게 느껴지는 소통(疏通), 같은 것도 다르게 보이고 결국 맞는 것도 틀리게 느껴지는 불통(不通)

 

 

바빌로니아사람들이 궁금해하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야훼(yahweh)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였다.

그래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탑(塔)을 쌓아 올렸다.

가만히 보니까 잘(못)하면 올라오게 생겼다고 생각한 야훼가 그들의 말(言語)을 허물어 버렸다.

그래서 서로 하는 말이 달라지고 결국 소통이 되지 않아 쌓던 탑을 완성할 수 없었다.

 

바이블(Bible)의 이야기이며 어려서 즐겨 읽었던 요꼬하마 미쓰떼루라는 일본 만화가가

 1971년에 발표해 김 동명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작가로 해서

당시 어린이들을 사로잡았던 바벨2세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이렇게 말은 소통의 중요한 도구이며 사회통합의 열쇠이며 거꾸로 분열의 열쇠이기도 한 것이다.

 

짚신을 만들어서 생계를 이어가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똑같이 밤새워 만들었다고 생각되는데 아버지 것은 잘 팔리고 아들 것은 덜 팔렸다.

늘 그 비법이 궁금했지만 짚으로 만든 신이 얼마나 차이가 나겠는가?

아버지에게 물어도 아무런 대답이 없고 궁금해 하다가 세월이 갔는데

죽음에 임박한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남기고 죽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털털털...”.

짚신을 삼다보면 바깥부분에 마무리를 잘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면 털이

남아있다는 것. 아들은 그것을 아버지가 죽어가면서야 알게 되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통치하던 시절 조선총독부에서는

일본불교와 조선불교를 하나로 만들려는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그 시절 그들은 불교사찰에서 범패(梵唄)를 금지했다.

범패는 부처님 이름이나 경전 등을 소리 내서 읽는 것인데

신앙 또는 음악적인 아름다움을 삽입해서 평소 내는 소리와는 다르게 하는 독특한 가락이 있다.

독특한 그 가락 또한 나라마다 다르게 독특하다.

이는 당나라에 유학했던 일본 천태종의 고승

엔닌(圓仁)스님이 지은 여행기록인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나온다.

 

산동반도에 있는 신라사찰인 법화원(法華院)에 머물 때

그 절 스님들이 당나라풍의 염불도, 일본풍의 염불도 아닌 신라풍의 염불을 한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그 신라의 맥이 이어진 조선풍의 염불인 범패를 금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범패를 통해 조선불교도들이 뭉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일제가 설치한 조선총독부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이 승만정권 등에서

우리말 교육의 틀을 허물어버렸다.

그래서 한자어를 중심으로 한 우리말에 있었던 성조(聲調)를 기억하는 이가 없어지고

따라서 같은 말이라도 다르게 읽고 불러서 사회통합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정확한 교육을 받았다는 이름난 아나운서도 우리말 띄어 읽기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이나 베트남 등 성조가 남아있는 한자권 국가나

미얀마, 스리랑카스님들이 뒤늦게 참여한 불자들과도 같은 목소리로 염불한다.

그것이 하모니를 이루고 아름다운 노래처럼 들리지만

우리나라 스님들의 그것은 외우거나 함께 가락을 배우지 않으면

전혀 다른 염불을 하는 현상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소통은 그런 것이다.

친하고 밀도 있는 조직끼리만 통하는 것은 그 사회의 통합에 기여하고,

다른 조직과 사람과도 소통하면 그 사회의 확장에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교통의 발달과 통신망의 진화를 통한 정보공유의 지구촌 시대를 맞이하여

인류는 여러 가지 커다란 경험과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이전에는 전혀 만나지 못했던 민족과 문화를 한 자리에서 만나기도 한다.

이른 바 스마트폰 또는 화상전화(畵像電話)를 통해 서로 만나지 않고도 만난 것처럼

여러 가지 자료와 사람을 앞에 두고 느낌과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소통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직접 경험하면서 붓다가 지녔던 능력 중에서 이마에 있었다고 하는

흰 털에서 나오는 백호광명(白毫光明)의 위력을 보는 듯도 하다.

그러다 보니 정말 하루가 다르게 지구촌 가족들의 의식구조가 변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서로 다른 민족(異民族)들이 한 자리에서 회의를 하는 모습을 보면

흔히 틀린(誤) 사람들이 모였다는 잘못된 표현을 하였다.

 

살갗의 색깔이 다르고, 눈동자의 빛깔이 다르며, 코의 높이가 다르게 생긴 것을 틀리게 생겼다고 보았다.

보는 자인 나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에서 형성된 의식이며 그 의식의 표현이었다.

틀린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다 보니 생각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틀린(誤) 사람이 아니라 다른(異)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같은 씨족 가운데 가장 가까운 친척도 다르게 생겼고,

한 집안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다르게 생겼다는 것을 생각해보니 그랬다.

더더욱 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형제자매들도 제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깨달음도 조금 시간이 지나니 다른 사람이 아니라

눈,귀,코,혀 개수 등 여러 가지가 같은 보편적인 인류라는 뜻에서 같은(同)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자연과학적으로는 105종 원소의 유기적 결합을 나름대로 한 모습이 각각의 존재이므로

구성요소가 거시적으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불교적 관점에서는 지, 수, 화, 풍의 4대로 이루어졌으므로

역시 거시적으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어느 하나 빼 놓지 않고

어느 부처님의 전생이며 나의 부모형제가 아닌 이가 없다.

 

이렇게 모두가 같은 사람임을 알게 되니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조금씩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틀린 것이 아니라 맞는(正) 것임을 알게 되었다.

각자의 처지와 시각에서 다르게 보였던 것이 틀리게 느껴졌었으나 이제는 맞게 느껴지게 된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눈으로 보면 어리석은 이의 어리석은 행동도 부처의 전생이거나 현생의 행동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세상은 복잡해보여도 관계일 뿐이다.

크게 생각하면 은하계가 많이 모여 있으며 지금도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고 있어서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는 우주, 작게 생각하면 세포 안에 들어있다고 하는 원자핵과 전자.

그리고 그 사리를 마음껏(?) 움직인다는 중간자 등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매우 복잡해 차라리 알고 싶지 않아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또한 하나의 관계일 뿐이라는데 생각이 이르면 편해진다.

내가 느끼는 행복감이 있다면

내가 맺고 있는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마음과 말과 행동을 쓴 덕이다.

내가 느끼는 불행감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맺고 있는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마음과 말과 행동을 제대로 쓰지 못한 탓이다.

 

관계를 아는 것은 전부를 아는 것이다.

우리 존재의 전부인 관계를 이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소통이다.

 

소통을 잘 하려면 세 가지를 알아야 한다.

첫째, 세상 모든 것이 그대로 있지 않고 마음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간다는 것이다(無常).

둘째, 흐름에 순응하지 않고 익숙해지지 않을 때 괴롭게 느낀다는 것이다(苦).

실제로는 자기(我) 또는 자기조직(단체, 사회, 나라, 종교...등)을 키우려고 하는 것이 괴로움이다.

셋째, 현실적으로 관계를 형성하는 모양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그것은 관계로서만 느껴지는 것이지

실재로는 그것 또는 나(我)라고 하기가 마땅하지 않다는 것이다(無我 또는 非我).

 

존재하는 것들의 이 세 가지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면

고요(寂)해서 평화(滅)롭고 그것은 결국 행복한 느낌(樂)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소통을 잘하면 행복해진다.

소통은 행복을 이루는 요체이다.

 

 

법현(法顯)스님: 열린선원 원장, 관악산 자운암 주지

opentempl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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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 금  /  김춘수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 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이미 가 버린 그 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만이 익어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놓칠 듯 놓칠 듯 숨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면은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the violent coloured mountains/Mikis Theodorak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