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우주는 바로 지금 참선을 하고 있습니다 - 청화큰스님

2011. 4. 2. 11:3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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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우주는 바로 지금 참선을 하고 있습니다

 

청화큰스님

 

우리 중생들은 본래 부처다, 본래 부처니까 그냥 내가 한 생각 돌이키면 곧장 부처가 되겠지, 이렇게 부처경계를 너무나 안이하게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마는 역시 부처님 공부하는 가장 지름길, 그야말로 가장 성불의 정문이라 하는 것은 참선 아니겠습니까? 참선을 우리는 성불의 정문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인들은 모두가 다 참선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를 믿는 분들도 어느 분들은 염불이나 주문은 하기 쉬운데 참선은 어렵다 하고 처음부터 참선에 대해서 굉장히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참선같이 쉬운 것은 없습니다. 참선의 별명(別名)이 안락법문이라, 즉 안락스럽단 말입니다. 어째서 안락스러운가 하면, 참선하면 몸도 개운하고 좋아져서 생리건강에 좋고 또한 정신건강에 좋습니다. 마음도 개운하고 또 자기 분위기도 고요해집니다. 우주의 도리에 안 따르면 참선이 못됩니다. 참선이란 우주의 도리에 따르는 것이므로 누구한테나 참선은 좋습니다. 가사,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외운다 하더라도 관세음보살은 저만큼 어딘가에 계신다, 계시다가 열심히 염송하면 우리를 도와주겠지. 이렇게 생각할 때는 염불은 되어도 참선은 못됩니다. 이것이 무엇일까, 저것이 무엇일까, 그런 의심하는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할 때라도 우리가 그냥 상대적인 문제나 의심하고 있으면 참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본래면목 자리를 분명히 추켜들어야 합니다. 불심자리를 안떠나야 비로소 참선이 됩니다.


보조국사 어록의 돈오(頓悟)라는 대목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본래 부처니까, 무한의 공덕이 본래 갖추어 있고 그 공덕이 부처와 더불어서 조금도 차이가 없다고 딱 느끼고서 참선해야 돈오(頓悟)라고 말씀했습니다. 물론 돈오라는 것이 지금 여러 가지 논쟁거리가 됩니다마는.

따라서 부처라 하는 우리 마음의 본래면목 자리를 분명히 느끼고서 그 자리를 안 떠나려고 해야 선()인 것입니다.

가사, 관세음보살님을 외운다 하더라도 관세음보살을 저만치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천지우주의 자리, 천지우주가 부처님뿐인데 천지우주의 부처님자비가 관세음보살이다, 부처님지혜가 문수보살이다라고 느낄 때는 그것이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좋아서 하느님을 부른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천지우주가 모두 부처님뿐이다, 이렇게 느끼고서 하느님을 부르면 참선이 됩니다. 우리 마음이 현상적인, 유한적인 문제를 떠나서 절대적인 본래면목에다 우리 마음을 머물게 하고 안주(安住)를 시킨다면 모두가 참선이 됩니다.


더 완벽히 말하면 천지우주는 바로 지금 참선을 하고 있습니다.

천지우주가 다 부처거니 바로 참선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천지우주의 그 도리에 따르면 그것이 바로 참선이란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그런 것을 여묘포서(如猫捕鼠)라 합니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 조금만 한눈 팔면 쥐가 하도 잽싸니까 도망가고 맙니다. 집중해서 노려야만이 쥐가 도망 못가고 고양이한테 잡히게 됩니다. 그와 같이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천지우주가 부처 아니라는 생각이나 나와 남이 따로 있고 분별시비하는 생각을 다 털어버리고서, 모두가 다 무량공덕을 가진 부처뿐이라는 이 생각을 바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한 눈 팔지 않고 한다 하더라도 우리 중생은 과거 전생에 지은 버릇, 금생의 버릇이 굉장히 많아서 자꾸 마음이 빗나갑니다.

그 때는 여계포란(如鷄抱卵)이라, 마치 어미닭이 병아리를 안 듯이 말입니다. 어미닭이 병아리를 부화할 적에 21일 동안을 제대로 안아야 하는데 사흘정도 안다가 그냥 훌쩍 떠나버리면 계란이 병아리가 못 됩니다. 21일동안을 진득하게 참고 참아야만이 병아리가 나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원래 부처인데도, 즉 계란이 병아리가 될 수 있는 힘이 다 갖춰 있는데도 참아야 하듯이, 어미닭이 계란을 품듯이 한 눈 팔지 않고 부처님 자리를 지켜서 염념상속(念念相續) 이어가야 합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천지우주가 다 부처다 하는 것은 일상삼매(一相三昧)에 해당하고 그러한 일상삼매, 천지우주가 다 부처뿐이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것은 일행삼매(一行三昧)에 해당합니다.

이와 같이 천지우주가 부처뿐이라는 생각을 계속적으로 이어가는 일행삼매를 또한 금강삼매(金剛三昧)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하는 것이 이른바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 즉, 오염되지 않은 수행이라 합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좋다 궂다 시비를 가리고 또는 부처와 중생이 따로 있다는 생각을 괜히 해대면 그것이 오염된 수행인 것이지 무염오수행이 못 되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범부라 하더라도 역시 참선할 때는 적어도 내가 부처가 다 된 셈치고 해야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별 차이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천지우주는 조금도 차이가 없는 부처님이므로 부처님을 안 떠나고서, 잘나도 부처님 못나도 부처님 넘어져도 부처님입니다. 죽으나 사나 옆을 보나 뒤를 보나 모두 다 부처님뿐입니다. 따라서 그 생각을 안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이 선()이 됩니다. 즉 본래면목을 안 떠나는 것이 선()인 것이고 그래야 오염을 떠난 무염오수행입니다. 무염오수행이 되어야 그때는 돈오돈수(頓悟頓修)인 것입니다. 천지우주가 부처님뿐이라는 생각을 딱 해야 비로소 돈오(頓悟)인 것이고 말입니다. 물론 이론도 더러 있을 수가 있으나 그 생각을 안 떠나고 수행을 해야 돈수(頓修)란 말입니다. 이것이 정통적인 해석인 것입니다.


천지우주가 부처님의 생명의 광명이기 때문에 대일여래(大日如來)라, 우주가 바로 대일여래입니다. 또한 우주의 생명이 나한테 똑같이 다 들어있습니다.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거니, 너와 나와 우리가 둘이 아니거니, 일체존재는 다 간격이 없이 불성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천지우주가 부처님의 광명뿐이거니, 비로자나불이라, 광명변조 즉 광명이 두루해 있다는 말입니다.

비로자나불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광명변조입니다. 에너지 광명이 우주에 꽉 차 있습니다.


물질의 근원에는 광명만, 불성광명만 충만해 있습니다. 공부를 하면 광명을 분명히 보는 것입니다. 도인들은 모두 그런 광명을 보고, 자기생명과 자기 모두와 광명과 하나가 딱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무아무소유(無我無所有)라, 나와 남이 없고 또 내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나무아미타불이라. 아미타불이라는 것은 무량광불, 부처님의 광명이 우주에 충만해 있어 무량광불입니다. 그 가운데는 행복이나 여러 가지 가능성이나 안락 모두가 충만해 있기에 환희광불입니다. 기쁨과 환희가 충만해 있습니다.

광명과 행복과 환희가 우리 자성, 우리 인간의 본성 가운데 가득 차 있습니다. 인생은 그것 뿐인데 우리가 잘못본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치를 하나 또는 경제를 하나 또는 학교스승이 되나 어떤 지위에 있든지간에 인생의 본래면목자리를 딱 느끼고서 그 자리를 안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원의 차원에서 봐야지 그냥 중간쯤 되는 데에서 본다면, 같이 어우러지고 같이 시야비야하고 맙니다.


우리는 순간찰나도 영원의 차원에서, 불성차원에서 문제를 조감하고 반조해서 봐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행동 하나를 모두가 성불하기 쉽듯이 말입니다. 우리 이웃을 모두가 성불로 이끄는 것이 우리 불자의 보살행이 되지 않겠습니까.

천지우주는 바로 무량광불입니다. 대일여래입니다. 천지우주는 부처님 광명으로 충만된 비로자나불입니다.

우리 역시 그와 같이 똑같은 아미타불인 것이고 우리 자비는 관음보살이고 우리 지혜는 문수보살입니다. 조금도 간격과 틈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야만이 인간은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하늘 아래나 하늘 위에 가득 차 있는, 더 나을 것이 없는 가장 고귀한 인간의 존재입니다.

이렇게 해서 금생에 한사코 성불하십시요. 우리가 성불할 때에 우리 이웃도 정화가 될 것이고 우리 사회도 정화가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 이것으로 마칩니다.

 

 <1989년 3월 19일 KOEX 대강당에서 서울 금륜회 창립법회시 법문내용중 일부입니다.>

 

 




    석문 / 조지훈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 난간 (石壁欄干)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 년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저희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긴 푸른 도포 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만 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 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 하늘 허공 중천(虛空中天) 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 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 년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 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 1952년 시집 '풀잎단장' 신부(新婦) 서정주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읍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손으로 잡아다리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읍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읍니다.
    그러고 나서 사십년인가 오십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읍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버렸읍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읍니다. --- 1979년 시집 '질마재 신화' * 그림 : 박항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