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삼처전심 // 니르바나 / 삶은 환(幻)타지다

2011. 4. 4. 17:4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당신이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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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전에서 찾아낸 행복한 인생 이야기’를 듣는 시간

                               울림이 있는 유쾌한 배움의 시간’

                                   불교TV방송시간:수(14:30) / 일(22:00, 23:00)

 

 

 

피소드      삼처전심(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다)

episode 2   

 

깟사빠 존자에 얽힌 일화 중에 유명한 게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는 말이 있어요.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다. 예, 삼처전심. 이게 바로 선가에 내려오는 아~주 아름다운 일화인데요.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다. 그래서 삼처전심입니다.

 

두타행을 해서 다른 제자들이 다~ 못 알아보고 있었는데, 부처님께서만 알아보시고, “이리 오너라.” 해 가지고 본인이 앉은 자리의 반을 내 줬다 그래요. 같이 그 옆에 앉게. 다른 사람들은 어리둥절했죠. ‘누군가?’ ‘깟사빠다.’ 하하~ 그게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坐라 그래서 다자탑이라는 탑이 있었는데, 고 앞에서 부처님께서 법문을 하고 계실 때, 깟사빠 존자가 온 거예요. 그때 부처님께서 자리를 반을 내주셨다. 그래서 다자탑전분반좌.

 

다자탑이라는 건 어떤 사람이 아이들이 많았어요. 60명이 있었다고 그래요. 아이가. 요새는 뭐 60명까지 있는 사람 없죠. 60명. 그래서 다자多子. 아이들이 많은. 하하~ 다자탑을 세웠어요. 그 사람이 세운 탑을 다자탑이라 그러는 거예요. 거기에서 법문을 설할 때 반쪽 자리를 내줬다.

 

다자탑전분반좌라고 해서 자식을 60명이나 둔 사람이 세운 탑이 다자탑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아마 60명은 없을 거예요. 그죠. 하하~ 많아야 여섯 명. 여섯 명도 많죠. 근데 우리가 어렸을 때는 조금만 나아라고 계속 그랬었는데, 요새는 또 많이 나아라고. 그렇게. 그러니까 시대가 바뀌면은 그것도 바뀌는 거예요. ‘둘만 낳아 잘 기르자.’ 그러다가 ‘하나만 낳자.’ 이랬었거든요. 요새는 ‘셋 이상 낳으면은 국가에서 지원금을 준다.’고 하니까. 이게 참, 하하~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제행무상의 이치가 나와요.

 

과거에 60명이나 자식을 둔 사람이. 근데 그 탑에서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실 때 많은 비구들이 앉아서 있었는데, 그때 마하깟사빠 존자가 홀로 생활하다가 오랜만에 온 겁니다. 사람들이 못 알아 봤어요. 뭐 그냥 옷이 뭐 다 해진 옷에다가 지저분하고 이러니까, ‘웬 상거지가 왔나?’ 하하하~ 하는데, 부처님께서는 딱! 알아보시고, 그러니까 부처님하고 마하깟사빠 존자는 여러 번 이게 서로 통했던 거 같애요. 눈빛만 봐도 안다고. 출가할 때부터 시작해서, 그다음에 또 다자탑 앞에서 알아봐서 “이리 오너라.”해서 본인이 앉아계시던 자리의 절반을 내주셨다 그러죠. 그걸 유명한 다자탑전분반좌라는 삼처전심의 한 가지고.

 

또 하나는 영산회상 염화미소靈山會上 拈華微笑. 영산이라는 것은 바로 영축산입니다.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신 곳이죠. 영축산에서 법문을 설 하실려고 할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고 그래요.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것은 그만큼 천신들도 그것을 이렇게 축복하는 거죠. 미리 장엄을 하는 거죠. 우리가 왜 어떤 큰~ 행사 같은 거 있을 때 화환 이런 걸 쫙~ 펴놓잖아요. 하늘에서 온 꽃비가 아니라, 이것은 지상에서 온 꽃비고. 천신들조차 축복하는 그런 법회. 이런 것은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거예요.

 

예. 그래서 요새도 우리가 참선을 지금 하고 있는데, 참선을 잘~ 하면은, 공부를 잘~ 하면은, 우리 왜 그런 시가 있잖아요. ‘걸음마다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면은’그것처럼 이렇게 포행 할 때 막, 꽃이 이렇게 깔립니다. 벌써 이 자리에는 보신 분도 있어요. 그래서 그런 그, 어떻게 보자면 참 환타지한 얘긴데. 환상의 세계에서나 있을 법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 프로그램 제목처럼, ‘삶이 환타지’예요. 이 자체가 지금 환타지한 거고. 그러기 때문에 얼마든지 환타지한 세계가 나타날 수 있죠. 다만 천안통이 열린 사람들은 볼 수 있고, 그게 안 열린 사람들은 육신의 눈으로만 보는 사람들은 볼 수가 없죠.

 

어쨌든 꽃비가 내렸을 때 부처님께서 꽃 한 송이를 들어 올렸더니 다른 분들은 어리둥절했는데, 마하가섭 존자만 빙그레 웃었다. 이게 바로 ‘영산회상 염화미소’라 그래서 아주 유명한.

 

꽃을 든 의미, 그걸 알고 싶어요? 하하하~ 그걸 알고 싶으면은 치열하게 정진을 해야죠. 그냥 그저 알려 그러지 말고, 하하~하하하~ 그 마하깟사빠 존자처럼 치열한 정진을 통해서.

 

옷을 그렇게 할 필요는 없고, 마음을 그만큼 소박하게, 검소하게, 또 절제된 생활, 이걸 하면서 치열하게 정진을 해야 그 소식을 알 수 있죠. 그냥 그저 꽁짜로 알라고 그러면 안 됩니다. 하하하~하하하하~

 

당연히 할 수 있고, 여기서 지금 선칠 정진, 일주일동안 참선에 지금 매진하고 있는 이 분들도 다 그걸 알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지금. 언전소식. 말에 앞선. 이미 말을 하게 되면은, 이게 표현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잖아요. 마음을 다 표현할 수가 없죠. 마음의 일부를 표현하는 것이지. 그러니까는 말하기 전에 알아차리면은 그걸 다 알게 되는 거죠. 그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가 마음공부를 하는 거죠. 참선을. 어쨌든 두 번째 소식이 ‘영산회상 염화미소’다. 통한 거죠. 마음과 마음이. 이심전심의 미소입니다. 그것도.

 

그래서 첫 번째가 ‘다자탑전분반좌’, 두 번째가 ‘영산회상 염화미소’,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세 번째가 ‘사라쌍수 곽씨쌍부 ’라고 해 가지고, 사라수라는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가 두 그루가 있었어요. 그것을 사라쌍수라 그래요. 고 사이에서 부처님께서 입적을 하셨죠. 이렇게 옆으로 누워서 입멸에 드셨는데. 입멸에 드시고 나서 화장을 할라고, 장작을 쌓아놓고, 관을 올려놓고 불을 붙이는데, 암만 불을 붙일라 그래도 불이 안 붙는 거예요. 거기에. 장작에. 그래서 ‘이상하다. 때가 아직 안 됐나 보다.’ 하고 기다리고 있었죠.

 

그런데 역시 그때도 마하가섭 존자는 대중하고 떨어져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입적하시고 나서 일주일이나 지나서 왔어요. 그러니까 칠일장되죠. 일주일이나 지나서 부처님이 입적하신 쿠시나가라, 사라쌍수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장작더미를 돌고 절을 하는데, 그러자 부처님께서 관 밖으로 발을 내보이셨다.

 

이미 돌아가신지 일주일이나 됐는데. 하하하하하~ 그러니까 불생불멸의 소식을 보여주는 거죠. 그러니까 육신이 사라진다고 해서 부처님께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걸 보여주시는 거죠.

 

그래서 바로 불생불멸. 육신은 소멸해도 법신은 여전히 이 세상에 남아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중생들을 제도하고 계시다. 이 소식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불생불멸의 소식을.

 

그래서 요 세 가지 소식이 삼처전심이라 그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다. 유명한 선가의 일화고, 선가에서 많은 분들이 참선을 하는 것도 결국 이 삼처전심의 소식을 깨치기 위해서 참선을 하는 거죠. 부처님 마음을 읽기 위해서. 우리가.

 

삼처전심을 한번 같이 따라해 볼까요?

 

첫째,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坐

둘째, 영산회상 염화미소靈山會上 拈華微笑

셋째, 사라쌍수 곽씨쌍부沙羅雙樹 槨示雙趺

 

요렇게 하면 한문이 되니까, 좀 어려우니까, 요걸 한글로 풀어서.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나누어 주시다.

영산회상에서 꽃을 드니 미소 짓다.

사라쌍수에서 관 밖으로 발을 내보이시다.

 

여기에는 보면은 공통적인 게 이심전심이다. 불립문자. 그래서 선가에서는 불립문자 교외별전. 이런 말을 써요. 문자를 세우지 않고 가르침 밖의 별도로 전한다. 이렇게 선가에서 많이 쓰는 말인데,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그렇다 그래서 그럼 경전을 아예 무시하고, 경전을 아예 보지 말라는 소리냐? 이건 아니라는 거. 왜? 마하깟사빠 존자야말로 경전을 결집한 분이라는 거. 허~ 요거를 잊어버리면 안 되겠습니다. 만약에 정말 경전이 필요 없다면은 참선의 대가인 마하깟사빠 존자가 왜 주도적으로 나서서 경전을 결집을 했겠어요. 그러니까는 새의 양 날개와 같다. 경전과 참선 수행, 이것이 양 날개와 같기 때문에 양쪽을 다 균형 있게 발전을 시키고 공부를 해야 된다.

 

다만 순서에 있어서 경전을 먼저 보고 나중에 참선을 하는 방법도 있겠고, 또는 참선을 먼저 하고 나중에 경전을 보는 방법도 있겠어요. 순서는 좀 바뀔 수도 있고, 또 사람에 따라서, 또 취향에 따라서. 왜냐하면 동시에 둘을 다 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그러고 선후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 선후라는 것은 취향이나, 이면의 선후지, 어떤 게 더 중요하고, 어떤 게 덜 중요한, 이런 거는 아니죠. 뭐 내가 지금 두 팔이 있는데, 오른손 하고 왼손이 있잖아요. 어떤 팔이 더 중요해요? 하하하하하~ 하~ 하하하~ 그렇죠. 다만 용도가 다를 뿐이지. 그죠. 오른손의 용도가 있고, 왼손의 용도가 있는 거지. 어느 게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다. 이렇게 얘기할 수는 없는 것과 똑같죠.

  

원래 니르바나라는 말은 불교용어, 범어인데, 고것을 한문으로 번역할 때는 열반이라고 번역하죠. 열반. 근데 니르바나라는 말의 원래 뜻은 ‘훅! 불어서 끄다.’이런 뜻이예요. 촛불 있잖아요. 촛불을 훅! 불면은 꺼지죠. 그거 그런 뜻입니다. 훅! 불어서 끄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의 어떤 열망 있죠, 열망. 어떤 고뇌, 이런 애착, 이런 것을 쉰, 꺼버린, 그런 상태, 그게 바로 니르바나입니다. 닙바나라고도 하죠. 닙바나, 니르바나. 그래서 아주 시원~해지죠. 열망이 식으니까 시원~해지는데, 그렇다 그래서 단멸론으로 알아서는 또 안돼요.

 

불교는 단멸론이 아닙니다. 단멸론은 끊어야지, 없애야지, 이게 단멸론 이거든요. 무조건 끊고 없애나가는 것이 아니다. 이게 금강경에도 나와요. 무단무멸분(제27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끊고, 없애나가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으로 사람들이 너무 큰 욕심과 애착에서 허덕이고 있기 때문에, 일단 욕심을 놔라. 애착을 끊어라. 이렇게 얘기해 줄 뿐이지. 그것이 또 궁극은 아니고, 궁극으로 가면은 역시 또 ‘응무소주 이생기심.’ ‘원을 세워서 열심히 살아라.’ 이렇게 또 나갑니다. 한 걸음 더 나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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