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오후수의 순선(純禪) 안심법문/청화스님

2011. 7. 4. 20:3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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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오후수의 순선 안심법문

청화큰스님

 

여러분들께서도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시대적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어려움에 봉착해 있습니다. 전에는 동서 양 진영이 서로 겨루고 다투는데서 그때그때 긴장을 고조해 왔지만 이제는 한 쪽 공산세계가 붕괴(崩壞)되면서 더욱 혼란이 가중되어 오고 있습니다.

대체로 어떻게 하여야 우리 인류를 구제(救濟)할 것인가? 그런 우리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관(價値觀), 이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치관을 우리는 어디서 구해야 할 것인가?

사실 지금까지 이루어진 대부분의 혼란상은 주로 서구문화(西歐文化)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훌륭한 석학들이 다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만 서구(西歐)사상으로 해서는 앞으로 오는 21세기 이른바 새로운 문명에 있어서 참다운 지도원리(指導原理)를 구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반 위대한 분들도 역시 동양사상(東洋思想)이 아니면 앞으로 오는 새로운 시대의 지도 원리를 구할 수가 없다고 말씀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저희 불교인들은 더욱 확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가르침, 다른 문화 현상들은 모든 것을 나누어 분열해서 보는 경향이 있는데, 부처님 가르침만은 모두를 하나로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람만이 본래 하나가 아니라, 자연계라든가 또는 어떠한 것이나 다 하나의 생명(生命)으로 보는 일원주의(一元主義) 사상이기 때문에 이른바 동일률(同一律)이라! 어떤 것이나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로 통합이 된단 말입니다.


따라서 불교 사상의 일원주의, 소위 동일률적인 사고방식, 이런 가르침만이 비로소 세계를 하나로 평화스럽게 묶어 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게 됩니다.

 

참선(參禪)은 비단 우리 불교인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인 일반 세간인도 참선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것입니다.

우리 몸과 정신 건강을 위해서나 기타 산란스러운 일들을 헤치고 나가는데 참선은 지극히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기독교 쪽에서도 참선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일반 사람들은 다시 말할 것도 없이 참선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참선이면 참선이지 왜 이와 같이 순선(純禪)이라. 순수한 참선이라 이렇게 명칭을 붙였는가? 이것부터 의심이 생기실 것입니다. 불교를 전문적으로 안하신 분들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술어가 있어서 가급적으로 풀이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그렇더라도 어려운 술어가 나오면 그때그때 불편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번 여기서 하고자 하는 이 법문 정도는 꼭 알아두셔야 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렇게 문제를 제기 했습니다.


보통 참선이 아니고 순선이라는 것은 이른바 순수한 참선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을 순수한 참선이라 하는 것인가?

중국의 초조(初祖) 달마(達磨)스님 때부터서 육조(六祖) 혜능(慧能) 스님까지의 시대를 순선시대(純禪時代)라 하고 그때의 선을 순선(純禪)이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육조 혜능스님 이후에 다섯 파로 참선이 갈라지고, 그래서 서로 반목하고 옥신각신하는 그런 것을 주로 수용을 하고 있기 때문에 순선 그러면 참선하는 사람들도 그런 쪽으로 공부를 안하신 분들은 다소 생소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달마스님 때부터서 육조혜능 시대까지를 가장 순수한 참선으로 보고 이것을 순선이라 합니다.


다시 간단히 말씀드리면 화두선(話頭禪)이 있고, 묵조선(默照禪)이 있고, 무엇이 있고 이런 복잡한 갈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 마음 그대로 닦아서 나아가는 그런 참선이란 말입니다.

 

비단 불교(佛敎)뿐만 아니라 어느 종교나 다 우선 자기 마음이 편안(便安)하고 남과 화해(和解)하고 그렇게 청정(淸淨)하게 지내는 이런 것이 되어야 되겠지요. 그러기 때문에 어느 종교나 안심(安心)이라. 마음이 편안하고 안온한 것을 다 추구합니다.

그러나 특히 불교는 오로지 팔만사천 법문 전부가 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보고 안심법문 그럽니다.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나가 다 자기 마음이 편안하게 되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불안스러우면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불안스럽다는 것은 자기가 하는 일이 잘 안되기도 하고, 또는 내가 대체로 무엇인가? 자기 마음도 미처 무엇인가를 잘 모르고, 나한테는 지독한 고민이 있고, 더러는 미운 사람들도 있는데 어떻게 내가 편안할 것인가? 사실 여러 가지로 불안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천재(天災)인 지진(地震), 풍수해(風水害), 가뭄 그런 것 때문에도 우리가 인생을 사는데 굉장히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가 하면 정치를 잘못한다던가 무슨 제도를 만들어 가지고 우리한테 들씌우는 그런 것들 때문에 우리가 받는 인재(人災), 사람들 때문에 받는 재앙도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어떻게 우리가 안락스럽게 마음을 그야말로 안심하고 살 것인가?


부처님 법()에는 더러 자기가 사업에 실패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가까운 사람이 죽기도 하고, 이벌하기도 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능히 안락스러운 마음, 안심(安心)을 할 수가 있는 법문이 있습니다.


이런 법문은 어디서 얻는고 하면 허두에 말씀한 순선, 이른바 순수한 참선, 순수한 참선을 하여야만 그런 안심을 얻습니다. 따라서 순수한 참선을 떠나서는 우리 마음의 안심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순수한 참선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어느 때나 안심을 얻고서 시시때때로 모두가 다 행복(幸福)스럽게 지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요체(要諦)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순선안심탁마법회』라!


이러한 순수한 참선으로 해서 우리 마음이 어느 때나 안락스럽게 나날이 행복스러운 날이 되는 것을 서로 피차 토론(討論)도 하고 갈고 닦는 그런 법회(法會)가 이번 법회입니다.


따라서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要旨)도 주로 순수한 선()쪽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순수한 선 이것은 어느 것에도 막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흔한 말로 하면 이른바 원통불교(圓通佛敎)라! 원통사상, 또는 회통사상입니다.

회통사상(會通思想)은 이것저것 합해서 모두 다 화해를 시켜서 이루어진 하나의 진리(眞理)가 이른바 회통사상입니다.


부처님 가르침뿐만이 아니라 자고로 위대한 성인(聖人)들은 다 회통사상입니다. 우리 한국만 놓고 본다 하더라도 신라 시대의 원효, 의상, 자장, 고려 때 대각, 보조, 태고, 이조 때 서산대사 모두가 다 회통사상입니다.

왜 그 분들이 회통사상일 것인가? 성자라 하는 분들은 천지 우주의 하나의 도리를 압니다. 우리 중생들은 겉만 보기 때문에 나는 나요, 너는 너요, 좋은 것은 좋다, 궂은 것은 궂다 시비 분별해서 봅니다. 형상적인 것은 그럴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인들은 모든 존재의 근본 바탕, 근본성품(根本性品)을 봅니다.

따라서 근본 성품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하나란 말입니다. 예수도 공자도 다 그랬습니다. 근본 하나의 자리를 봅니다. 그 하나의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고 부처님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 순선 도리를 가장 극명하게 나타낸 법문을 제시하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안심법문1)을 다른 말로 하면 안락법문이라고도 합니다. 불교에서는 마음과 몸을 하나로 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이 안심하면 바로 안락스럽게 되겠지요.

 

1) 안심법문(安心法門) : 안락법문(安樂法門) 또는 안상삼매(安詳三昧)로서

    선오후수(先悟後修)의 법문(法門)을 의미(意味)함


 

복사물에 다 있습니다마는 중요해서 재차 여러분들한테 시각적으로 보다 더 인식을 깊이 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발췌 정리했습니다.

저같이 한문 세대인 나이를 많이 드신 분들은 몰라도 젊은 세대는 대학을 나오고 박사가 되고 하여도 한자를 모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일이 한글로 음을 달았습니다.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 그야말로 글자만 봐도 마음이 편안한 법문입니다.

안심법문은 바로 안락법문입니다.


불교의 특색은 마음과 몸을 절대로 둘로 안봅니다. 하나로 봅니다. 마음도 몸도 하나요, 또는 자연(自然)과 인간(人間)도 하나요, 우주(宇宙)를 하나의 생명(生命)으로 보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중요한 핵심(核心)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안심스러우면 몸도 안락스럽고, 불교 전문적인 참선하는 공부로 말할 때는 안상삼매(安詳三昧)라! 편안할 안()자, 자상할 상()자입니다. 차분하게 우리가 조금도 서둘 것이 없단 말입니다. 불안스러워야 서두르는 것인데, 급할 것도 없고, 앞에 갈 것도 없고, 끝에 갈 것도 없고 말입니다.

자기만 잘나고 자기만 무엇이 잘되고 그런 때는 우리 마음이 안락스럽게 안됩니다. 안심이 안됩니다. 그런데 그 반대로 언제나 꼼꼼하고 자상스럽고 말입니다. 이른바 유연스러운 것, 이것이 안상입니다. 안상삼매라. 삼매(三昧)라는 것은 오로지 거기에 몰입한단 말입니다.

인도(印度) 말로는 삼마지(三摩地Samadhi)인데, 삼매라는 말은 우리가 보통 쓰지 않습니까. 거기에 몰입하는 이것이 삼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또는 움직이나 누구하고 말을 하던지간에 언제든지 마음이 차분하고 조금도 서두르지 않는 안상삼매에 들어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우리 마음이 안심이 되고 몸도 안락스러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안심이 되고 안락 스러울려면 우리 공부하는 것도 역시 선오후수(先悟後修)라. 우선 이치로 막힘이 없어야 합니다. 이치로 막힘이 없어야 비로소 우리 마음이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하룻 길도 우리가 길을 잘 모르면 불안스럽고 헤매지 않습니까? 길을 가더라도 갈래를 알아야 이제 안심하고 갈 수가 있는데 하물며 우리 인생살이는 더욱 가는 길이 확실하여야 되겠지요.


더구나 현대와 같이 정보가 종횡으로 착종(錯綜)하고 있는 이런 시대는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현대를 가리켜 정보화시대(情報化時代)라 하지 않습니까.

정보화 시대가 좋기는 좋은데 정보가 너무나 범람하므로 자기 인생관(人生觀), 가치관(價値觀)이 확립 안된 사람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느 정보를 우리가 선택할 것인가? 혼란스럽단 말입니다.


저번에 신문 쪽지를 보니까 미국 사람들 5분의 3정도는 노이로제 증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항시 마음이 불안스럽기 때문입니다.

항시 긴장되어 있고 항시 스트레스를 풀래야 풀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병의 원인도 되고, 가정 불화의 씨앗도 되고, 민족들끼리 분열도 되고, 그럴 수가 있겠지요.


아무튼 그런 것은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 내일은 어떻고 우리 공부는 어떠할 것인가?

부처님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도 지금 공부를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더러 대답을 확실히 못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무슨 방식으로 공부를 하는가? 그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따라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선오후수라! 선오후수라는 말을 우리가 꼭 명심해서 자기가 선오후수가 되도록까지 노력을 해야합니다.

이것은 무엇인고 하면 적어도 이론적으로만은 먼저 깨닫는단 말입니다. 참다운 중도(中道)를 깨닫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참선(參禪)도 하고 기도(祈禱)도 모셔서 우리 업장(業障)이 녹아나야 되겠습니다만 그렇기 전에 이론적(理論的)으로 먼저 깨닫는단 말입니다.


더구나 이 현대는 이론적인 논리(論理)가 앞선 시대 아닙니까? 하기 때문에 꼭 부처님의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논리로 해서 먼저 깨닫고서 뒤에 닦아야만 이른바 정수법문(正修法門)입니다. 바르게 닦는 법문입니다.

덮어놓고서 공부해라. 이렇게 해서는 지금 통할 때가 아닙니다. 부처님 법문의 요체는 어떤 것인데 그대는 지금 어떤 식으로 하는 것이 그대한테 제일 좋다. 남한테 지도를 못 받으면 스스로 연구해서라도 부처님 팔만사천 법문 가운데서 나한테 알맞은 것은 어떤 법문인가?

분명히 선택해서 공부를 하여야 이제 마음이 안락스럽습니다. 그래서 선오후수, 먼저 이론적으로 알고 단계단계 느끼면서 닦는 그러한 법문의 핵심이 여기에 있는 법문입니다.


 

 

 
 

세월은 나에게 그렇게 살라고


세월이 나에게 말합니다.
지나온 세월을 자주 뒤돌아 보지 말라고요
저기 저 나무 그늘서 조금만 쉬었다가 올 걸
그때는 왜 몰랐지.
저기 저 옹달샘에서
물 한 모금 마시고 올 걸
그때는 왜 몰랐지

세월은 나에게 말합니다.
자꾸 뒤돌아 보면
미련이 남고
후회도 남고
발걸음 늦어지니
자주 뒤돌아 보지 말라고 합니다.

정녕 이렇게 잊을 수 없는데
지나간 세월도 내 것이었다고
쉽게 버릴 수가 없는데
세월은 그냥 잊어버리라고만 합니다.

지나간 세월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많다면서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은
끝이 보이지 않으니
그렇게 걸어가다가 또 걸어가다가
이제는 힘들면 그늘에서 쉬어 가기도 하고
목마르면 옹달샘에서 물 한 모금 마시고 가라고
세월은 나에게 말합니다.

세월은 나에게 말을 합니다.
살면서 조금씩 잊어도 된다고요.
처음 신었던 신발이 발에 맞지 않아
자꾸 넘어졌다면
이제 조금씩 익숙해 질 거라고
세월은 나에게 말을 합니다.

그리고 세월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모습 또한 이렇게 달라졌으니
차라리 한 번씩 눈감고 잊어 가며 살라구요.


- 좋은 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