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칙. 구지의 한 손가락
<열기>
통하면 바로 통하고, 알면 바로 안다. 눈꼽 만큼이라도 앞이 있고 뒤가 있으면,
벌써 어긋난 것이다. 법이면 바로 법이고, 마음이면 바로 마음이다.
근원이 있고 바탕이 있다면, 벌써 망상이다. 언제나 하나일 뿐이고, 언제나 이것일 뿐이다.
<화두(話頭)>
구지(俱胝) 스님은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다만 하나의 손가락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뒷날 한 동자(童子)를 데리고 있었는데, 밖에서 온 사람이 “구지 스님은 어떤 법요
(法要)를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을 때, 그 동자도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구지 스님이 그 이야기를 듣고는, 칼을 가지고 동자의 손가락을 잘라 버렸다.
동자는 아픔을 못 이겨 울면서 도망갔는데, 구지 스님이 다시 동자를 불렀다.
동자가 머리를 돌리자, 구지 스님은 도리어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이에 동자가 문득 깨달았다.
구지 스님은 세상을 떠날 때가 되어
“나는 천룡(天龍) 스님에게 한 손가락의 선(禪)을 얻었는데, 일생 동안 사용하고도
다 사용하지 못했다.”는 말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俱胝和尙 凡有詰問 唯擧一指 後有童子 因外人問 和尙說何法要 童子亦竪指頭 胝聞 遂以刃斷其指 童子負痛號哭而去 胝復召之 童子廻首 胝却起指 童子忽然領悟 胝將順世 謂衆曰 吾得天龍一指頭禪 一生受用不盡 言訖示滅
<바로 드러냄>
구지(俱胝) 스님은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다만 하나의 손가락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이미 드러나 있으니 생각하지 말라. 뒷날 한 동자(童子)를 데리고 있었는데, 밖에서 온 사람이
“구지 스님은 어떤 법요(法要)를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을 때, 그 동자도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드러난 것은 한 가지이지만, 생각이 앞장 섰구나.
구지 스님이 그 이야기를 듣고는, 칼을 가지고 동자의 손가락을 잘라 버렸다.
생각을 잘라 버렸군. 동자는 아픔을 못 이겨 울면서 도망갔는데, 구지 스님이 다시
동자를 불렀다. 동자가 머리를 돌리자, 구지 스님은 도리어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이에 동자가 문득 깨달았다. 생각이 죽으니, 사람이 살아난다.
구지 스님은 세상을 떠날 때가 되어 대중에게 말했다. “나는 천룡(天龍) 스님에게 한
손가락의 선(禪)을 얻었는데, 일생 동안 사용하고도 다 사용하지 못했다.” 말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삼라만상이 모두 이것 하나에서 나온다.
한 손가락을 한 번 세워 보라. 손가락이라고 여기지도 말고, 손가락이 아니라고
여기지도 말고, 세운다고 하지도 말고,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도 말라.
손가락을 휙- 세우는 것이 온 우주를 뒤덮게 하라. 나도 없고, 손가락도 없고, 몸도 없고,
우주도 없고, 세움도 없다. 손가락을 휙 세우는 여기에서 몰록 통하면, 분별심은 찾을 수 없고,
손가락과 온몸과 땅과 하늘이 한결같이 통하여 구분이 없지만, 구분이 없다는 생각도 없다.
모든 것이 한 덩이가 되어 그대로 단단히 안정되고, 막힘 없이 통하니 끄달림이 없고,
밝음도 없고 어둠도 없으니 헤아릴 일이 없고, 앞뒤와 좌우와 상하가 모두 사라져서
다만 눈앞의 이것 뿐이다.
손가락이라 해도 이것이요, 손가락이 아니라 해도 이것이요, 세워도 이것이요,
세우지 않아도 이것이요, 이것이라 해도 이것이요, 이것이 아니라 해도 이것이요,
부처도 이것이요, 중생도 이것이요, 번뇌도 이것이요, 해탈도 이것이요, 어리석음도
이것이요, 깨달음도 이것이요, 알아도 이것이요, 몰라도 이것이요, 보아도 이것이요,
보지 않아도 이것이요, 의심해도 이것이요, 믿어도 이것이다.
<풀어 말함>
구지 스님은 처음엔 5백 대중을 가르치는 강사(講師)였습니다. 어느 날 실제(實際)라는
비구니가 찾아와서는, “당신은 강사로서 매일 경전에 나오는 말만 가르치고 있는데,
경전에 나오는 말은 놓아 두고, 당신 스스로의 말을 한 마디 해 보십시오.” 라는
추궁했는데 대답을 못했어요. 거기서 크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강사도 집어치우고
끙끙 앓고 있었는데, 그 소문을 듣고 실제 비구니의 스승인 천룡 스님이 찾아 옵니다.
반갑게 맞이한 구지 스님은 천룡 스님에게 “당신 스스로의 말 한 마디를 해 보십시오.”
라고 실제 비구니에게 받은 질문을 물어 봅니다.
이에 천룡 스님이 문득 손가락 하나를 세웠어요. 구지 스님이 그걸 보는 순간,
생각이 끊어지고 경계가 무너지면서 확 터여서 걸림이 없어 졌어요.
‘스스로의 말 한 마디를 하라’는 말을 따라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고 헤아리면
벌써 망상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경전에서 익히지도 않았고, 남에게서 배우지도 않은
것은 이것(손가락을 들어 보임)뿐입니다. 본래부터 있었고, 세월이 아무리 바뀌어도
변함 없는 것은 오직 이것(손가락을 들어 보임)뿐입니다.
말은 배운 것이고, 생각은 얻은 것이거나 만든 것이므로 본래부터 있는 이것은 아닙니다.
말을 가지고 법(法)을 만들고 비법(非法)을 만들지만, 이것은 법도 아니고 비법도 아닙니다.
생각을 가지고 미혹을 만들고 깨달음을 만들지만, 이것은 미혹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닙니다.
말이 무엇인지를 가리켜 주려고 말로써 설명한다고 합시다. 이 경우 설명하는 바로
그 말이 곧 말이므로, 따로 말 속에서 말의 뜻을 가지고 ‘말’이라고 하는 헛된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습니다. 설명하는 그 말 이외에 따로 ‘말’이 무엇이라고 생각 속에서
헛된 그림을 그리면, 그것은 진실한 말이 아니라 생각 속에 그려진 망상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찾고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가리키고 찾는 대상인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리키고 찾는 그것이
곧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생각 속에서 이것이 마음이다, 저것이 마음이다 하고 헛된
그림을 그려서는 안됩니다. 생각이 끊어진 곳에는 모두가 마음 뿐입니다.
그래서 강사를 그만 두고 동자를 하나 데리고 산으로 들어가 암자를 짓고 살았는데,
구지 스님의 소문을 듣고 온 천지 사람들이 찾아올 게 아니에요? 사람들이 찾아와서
물을 때마다 구지 스님은 아무 말도 없이 손가락 하나만 세우는 겁니다.
동자가 곁에서 지켜보니까 법이라고 해서 뭐 특별한 것이 없는 거예요.
어느 날 구지 스님은 출타하고 동자 혼자 절을 지키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구지 스님의 가르침을 물었습니다. 이에 동자가 구지 스님을 흉내내어서 손가락 하나를
세웠어요. 이런 일들이 몇 번 있다 보니 이 동자도 법을 안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이윽고 구지 스님의 귀에도 이 소문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구지 스님이 동자를 불러 물었어요. “동자야, 네가 법을 아느냐?” 그러니
동자가 “예, 압니다.” 하고 대답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구지 스님이 “법이 뭣이냐?”
하니까 동자가 손가락 하나를 쓱 세우는 거예요. 그러자 구지 스님은 미리 소매 속에
숨겨둔 칼을 꺼내어 재빨리 그 세운 한 손가락을 싹둑 잘랐어요. 동자가 너무나 아파서
폴짝폴짝 뛰면서 정신 없이 도망가는데, 구지 스님이 뒤에서 “동자야!” 하고 불렀습니다.
동자가 얼떨결에 돌아보니 구지 스님이 다시 “법이 뭣이냐?” 하고 묻는 겁니다.
동자는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을 탁! 올렸는데 손가락이 없어... (웃음)
그 순간에 이 동자가 법을 알았다고 합니다.
구지 스님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되어서 대중들에게 “나는 천룡에게서 한 손가락의 선을
얻어서는 일생 동안 써먹고도 다 못썼다.”라고 말했다고 하듯이, 언제나 이것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것은 아무리 사용해도 다 못써먹죠. 닳지를 않는 건데 이것(손가락을 들어 보임)을
어떻게 다 써먹겠습니까? 뭔가 모양이나 물건이 있으면 조금씩 사용해서 언젠가는 다
없어지겠지만, 이것은 모든 모양과 사물이 생멸하는 곳에서 모양 없고 물건 없이 한결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공(空)이라고 합니다. 공이지만 모든 일은 여기에서 다 나옵니다.
언제나 이것(손가락을 들어 보임)뿐이고, 다만 이것(손가락을 들어 보임)뿐인데 이것을
어떻게 써먹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 조사선이라는 게 참 기가 막혀요. 쉽고, 간단하고, 단도직입적이고, 당연하고,
명백하고, 수행이라는 어떤 행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문득 통하는 경험이 오면 되는 것입니다.
눈치를 탁! 채서 통하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때부터 마음이 안정되어서 확고부동하게
자기 자리를 잡게 됩니다. 문득 확 통하는 거죠.
<무문(無門)의 말>
구지와 동자가 깨달은 곳은 손가락 위에 있지 않다. 만약 여기에서 알아 볼 수 있다면,
천룡과 구지와 동자와 자기가 한 줄기로 꿰어질 것이다.
無門曰 俱胝幷童子悟處 不在指頭上 若向者裏見得 天龍同俱胝幷童子 與自己一串穿却
<풀어 말함>
구지와 동자가 깨달은 곳은 손가락 위에 있지 않다.
손가락 하나를 이렇게 쓱 세웠습니다. ‘구지 스님과 동자가 깨달은 곳이 손가락 끝에 있지 않다’
란 말은 모양 따라가서 깨달은 게 아니란 말이에요. 진실한 자기로서 존재하게 된 거죠.
이것(손가락을 들어 보임)에 통한 것이지요. 손가락을 세운다는 모습을 따라가면 안됩니다.
그렇다고 손가락 세우는 것을 떠나 따로 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것(손가락을 들어 보임)입니다.
만약 여기에서 알아 볼 수 있다면,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여기서 당장 통한다면, 깨달은 곳이 손가락 끝에 있지 않다는 것을,
손가락을 쓱 올리는 이것이라는 것을, 손가락 끝이 아니라 바로 이것을, 구지가 일생 동안
쓰고도 다 못쓴 이것(손가락을 들어 보임)을, 언제나 이것밖에 없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이
확인하게 됩니다. 이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천룡 스님도 여기(탁자를 탕! 치다) 있고,
구지 스님도 여기(탁자를 탕! 침) 있고, 동자도 여기(탁자를 탕! 침) 있고, 나도 여기있고
(탁자를 탕! 침), 석가모니도 여기(탁자를 탕! 침) 있고, 가섭불도 여기(탁자를 탕! 침) 있고,
모든 게 다 여기(탁자를 탕!탕! 침) 있는 겁니다.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천룡과 구지와 동자와 자기가 한 줄기로 꿰어질 것이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것(손가락을 들어 보임)뿐이지 다른 게 없단 말입니다. 말 따라
가고 생각 따라 가니까 다른 게 있는 거지, 안 그러면 이것(손가락을 들어 보임)뿐입니다.
<무문의 시(詩)>
구지는 늙은 천룡을 괴롭히더니,
예리한 칼을 한 번 들어 어린아이를 심문한다.
거령신(巨靈神; 크고 힘 센 신)이 손을 듦에는 여러 일이 없어,
화산(華山; 섬서성에 있는 큰 산)을 천 겹 만 겹 갈라 버린다.
頌曰 俱胝鈍置老天龍 利刃單提勘小童 巨靈擡手無多子 分破華山千萬重
<풀어 말함>
구지도 손 끝에 있고,
천룡도 손 끝에 있고,
어린아이도 손 끝에 있고,
무문도 손 끝에 있고,
거령신도 손 끝에 있고,
화산도 손 끝에 있고,
손끝도 손 끝에 있다.
<닫기>
남한테 배우지 않은 한 마디가 바로 이것(손가락을 들어 보임)이에요. 모든 말은 다
밖에서 배운 것인데 이것 하나(손가락을 들어 보임)는 남한테 배우지 않은 겁니다.
밖에서 배우지 않고 언제나 여기에 있는 이것 하나(손가락을 들어 보임)만 알아차리면
그게 바로 법입니다. 이것 이외에 따로 있는 것은 없습니다.
- 김 태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