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그루의 꽃/남전(南泉)스님

2011. 9. 17. 01:1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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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루의 꽃

 

남전(南泉)스님의 제자에 육긍대부(陸亘大夫)라는 사람이 있다.

여러 벼슬을 거친 끝에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이르렀으므로 생긴 이름인데,

많은 선객들과도 사귀어 꽤 이름이 있던 거사다.

한번은 언제나처럼 남전스님을 모시고 이야기하고 있던 중에,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천지는 나와 동근(同根)이요 만물은 나와 일체라고 조법사(肇法師)가 말했는데,

참말이지 이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자 남전스님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대부!"
그래서 무슨 일인가 하고 스님을 쳐다보는 순간, 곁에 있는 꽃을 가리키며 말했다.
"요즘 사람들이 이 한 그루의 꽃보기를 꿈꾸듯이 하는구나."

조법사란 구마라습(鳩摩羅什)의 사대제자(四大第子) 중의 하나인 승조(僧肇)

그 사람이다. 그는 스승의 역경도 도와 공이 있었거니와, 교리의 이해에 특히

뛰어났었다 하며, 후일 혐의를 받아 사형에 처해지게 되자, 며칠 동안 연기해

줄 것을 청한 끝에 필생의 명저가 된 [조론(肇論)]을 집필했다니까 예사 인물이 아니다.

더구나 당시의 나이가 서른 하나였다 하니, 종교적 천재였던 것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그런데 육긍대부가 인용한 말은 신중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조론] 권4(券四)에

보이는 이 말은, 장자(莊子)의 '천지는 나와 나란히 생기며, 만물은 나와 일체다'

하는 표현과 거의 일치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고유마경(古維摩經)]을 읽고 깨닫는 바 있어 어려서부터 받들어오던

노장사상(老莊思想)을 버렸다는 승조가 불교를 논하면서 장자의 사상을 새삼

들먹였다고는 보여지지 않고, 장자의 제동설(齊同說)쯤은 하나의 상식이던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 육긍대부 또한 그 정도에 놀라움을 표시했을 리 만무하다.

그러면 어떻게 다른가.

이 세상은 대소. 경중. 빈부. 영욕. 생사 따위 대립으로 가득차 있다. 그리하여

그런 것에 매이는 데서 우리의 희비가 생겨난다. 그러나 이것은 부분만 보기 때문이요,

초월적인 입장에서 전체를 바라볼 때에는 모두가 평등해질 뿐이니, 눈앞의

현상에 끌려서 일희일비(一喜一悲)할 것은 못된다. 이것이 장자의 제동설이니,

나는 천지만물의 한 부분으로서 천지만물과 동일한 것이 된다.

이에 비해 불교에서는 천지만물도 불성(佛性)이니 진여(眞如)니 하는 것의

나타남이라 보고, 그런 점에서 나와의 일체를 주장하는 터이므로 말은 같아도

내용은 크게 다르다.

장자는 '나'까지도 천지만물이나 다름없는 하나의 존재로 보았다. 그러므로 자연계의

현상과 마찬가지로 '나'는 인식의 대상일 수 있었으니, 만물과의 일체가 주장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요즘의 심리학에서처럼 나도 고찰의 대상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데서 얻어지는 나는, 일반화된 나일 뿐 구체적인 주체로서의 나는 아니다.

나란 무엇이냐고 스스로 물을 때, 물음의 대상이 되고 있는 나와 묻고 있는 나가

분열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 주체로서의 나는 언제나 뒷걸음을 치므로 영원히

잡히지 않는다. 이렇게 끝내 대상화되지 않는다 함은 그것이 분별 이전의 경지임을

뜻하니, 우리가 그렇게나 찾고 있던 본래면목(本來面目)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나'라는 우리들의 일상적 호칭과는 전혀 다른 것임이 분명하지만, 무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으므로 굳이 '나'라는 표현을 쓴다면 그것이 [조론]에서 말하는 '나'니,

이런 절대적 주체가 확립될 때에 외부세계는 어떻게 되는가.

지금껏 엉뚱한 것을 나라고 여기는(認賊爲子) 착각에 빠져 있었기에 외부세계에

끌려다녔다. 그러나 지금에는 외부세계 전체가 도리어 나에게 예속되기에 이르는 것이니,

승조가 천지만물과 내가 일체라고 주장한 것은 이런 뜻에서다. 따라서 그것은 외부세계가

나와 같아진다는 뜻일 뿐, 내가 외부세계와 동일한 것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따라서 육긍대부가 놀라움을 느낀 것은 이런 도리를 이해했기 때문이라 여겨지는데, 남전

스님은 왜 이를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요즘 사람이 꽃 보기를 꿈꾸듯이 한다'고 하였던가.

육긍대부의 이해에는 아무 잘못이 없다. 절대적 주체에 눈뜨고, 천지만물이 나에게

예속되어 있는 하나임을 안 터이니까 찬양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교학(敎學)의 세계다. 교학으로서는 그것이 마지막 진리가 될지는 몰라도, 교학의 진리와

선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일치하지 않는다. 절대적 평등의 이(理)라 해도 이인데 그칠 때는

하나의 죽은 진리니, 반드시 구체적 차별인 사(事)로서 나타날 수 있어야 하는데, 도대체

'천지만물'부터가 문제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만나는 것은 한 그루의 나무요, 하나의 논이요, 하나의 길일 뿐이니,

천지만물이라는 말 자체가 추상작용을 통해 얻어낸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터에 일체니 뭐니 해보아야 어떻게 이(理)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꽃 같은 사물을 보아도 제대로는 못 본다. 범부는 꽃의 겉모습에 매이고 말며,

좀 수행한 사람이라면 애써 그것에서 공을 보려 들 것이며, 더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면 중도실상(中道實相)을 거기서 보려 할 것이니, 정도의 차이는 있다 해도

다 '꿈꾸듯이 보는' 태도임에 틀림없다.

일찍이 청원유신(靑原惟信)은 말했다.
"삼십 년 전 수행이 제대로 안돼 있을 무렵에는, 산을 보면 산으로 보이고 물을 보면

물로 보였다. 그 후 수행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을 때는, 산을 보아도 산이 안 보이고,

물을 보아도 물이 안 보였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는 산을 보면 다시 산으로 보이고,

물을 보면 다시 물로 보이게 됐다."

처음에 산과 물이 산과 물로 보인 것은 범부의 단계요, 산과 물이 산과 물로 안 보인

것은 이(理)의 세계에 들었음을 말하려니와, 다시 산과 물이 산과 물로 보인 것은

이(理)에서 사(事)로 나온 경지니, 무엇을 보는 덴들 이러하지 않으랴.

이쯤되면 남전스님의 뜻도 명료해지니, 그것은 이(理)에서 죽어 사(事)에서 되살아

나기를 요구하는 일방(一棒)이었다 할 수 있다.

 

 

 

가을의 기도/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오직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고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꼴자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I close my eyes only for a moment

And the moment's gone All my dreams Pass before my eyes,

a curiosity Dust in the wind

All we are is dust in the wind

Same old song Just a drop of water in an endless sea

 All we do Crumbles to the ground tho we refuse to see

Oh~ Don't hang on Nothing lasts forever but the earth and sky

It slips away

And all your money won't another minute buy

Dust in the wind All we are is dust

in the wind (All we are is dust in the wind)

Dust in the wind (Everything is dust in the wind)

Everything is dust in the wind The wind Ooh~  

 

 

 

잠시 동안 눈을 감으면 그 순간은 지나 가 버립니다.

내 모든 꿈이 눈앞에서 지나가 버립니다.

호기심도 바람 속의 티끌, 모든 것이 바람에 날리는 티끌입니다.

똑같은 옛 노래. 끝없는 바다 속에 작은 물방울 하나.

우리의 모든 행위는 비록 우리가 원치 않는다 하여도

흙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집착하지 마세요.

땅과 하늘 밖에는 아무 것도 영원하지 못 합니다.

모두 사라져 버립니다.

당신의 재산을 몽땅 털어도 단 1분을 사지 못합니다.

바람 속에 티끌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먼지와 같습니다.

세상만사가 먼지와 같습니다

 

 

 

  

 

왠지 그전에 많이 듣고 불렀던 kansas의 ‘dust in the wind’도 생각나고---

바람 속에 먼지 같은 것이 인생이지만 가슴속에 우주를 담을 수도 있고

바다보다 깊고 하늘 보다 높은 사랑을 담을 수 도 있는 것이 인간일진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