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따돌림’은 연기론의 배척 행위 / 도산 스님

2012. 2. 17. 15:01일반/금융·경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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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따돌림’은 연기론의 배척 행위 / 도산 스님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아바스티의

제타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가지 평등한 마음이 있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이른 바 사랑하는 마음, 가엾이 여기는 마음,

기뻐하는 마음, 보호하는 마음이니라.
무슨 이유로 범당(梵堂)이라 하는가. 비구들이여, 알라.

범(梵)중의 큰 범을 천(千)이라 이름한다. 그것은 견줄 것이 없고

그 보다 뛰어난 것이 없어 일천 나라를 통솔한다.

그것이 당(堂)이기 때문에 범당이라 부른다.

비구들이여, 이 네 개의 범당은

큰 세력이 있어 일천 세계를 관찰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범당이라 부르느니라.”
〈증일아함경〉


친지와 고향친구들을 오랜 만에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리라 생각합니다.

흔히 인간을 일컬어 ‘사회적 동물’이라고 합니다.

정신적 그리고 문화적 성취를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타자와 관계를 맺고 유지해 나갑니다.

관계란 생명의 약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꾸준히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내 삶의 비약과 발전을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써 창조적으로 진화합니다.

이러한 의식은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자인 야스퍼스나 하이데거에 의해

더욱 발전적인 이론으로 전개됩니다.

실존주의는 일정부분 불교의 연기론과도 상당한 유사성이 발견됩니다.

사회적 관계를 벗어난 ‘존재’란 낙오와 실패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강압과 폭력에 의해 사회적 관계에서

다른 사람을 밀어내는 행위는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용납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요즘 초등학교 뿐 아니라 중·고등학교에서 속칭 ‘왕따’로

괴롭힘을 당하자 자살하는 사건이 이어지면서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왕따’란 집단 따돌림의 비속어입니다.

이에 따른 고통과 충격은 당해보지 않고는 실제 알 수 없습니다.

더욱이 사춘기 시절 여린 마음에 상처를 입다 보니

자살로 이어지고 있는 게 오늘 우리 사회의 서글픈 자화상입니다.

교육 관계자들은 이런 현실에서 해결책으로 가해자의 강제 전학조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학부모들은 여기에 공감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밝힌 부처님 말씀은 바람직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불자 여러분이 꼭 새겨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인간은 신분과 우월한 두뇌와 막강한 재력에 의해 차별되어서는 안 됩니다.

누구나 평등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이러한 속에서 존중받아야 합니다.

‘네 가지 평등한 마음이 있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이른 바 사랑하는 마음, 가엾이 여기는 마음, 기뻐하는 마음, 보호하는 마음이니라.’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네 가지 마음을 낼 때 미움과 원한이 있을 수 없고

갈등과 대립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내 가족에게 조차 불신과 불편한 마음으로 대하므로 미움이 만들어지고,

벌로 징계를 가하므로 또 다른 폭력양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평등관계가 깨지고 경멸과 협박에 의한 ‘따돌림’ 현상을 부릅니다.

오늘날 학원가의 폭력 현실은 가해자에게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 자신과 내 가족, 나아가 우리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할 공업(共業)입니다.

유럽에 인간학의 중심을 세웠던 독일 철학자

헬무트 플레스너(Helmuth Plessner 1892~1985)는 “인간이 자기 삶의 중심을 거듭 반성하고

이를 초월해서 ‘탈중심’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동물과 다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헬무트의 이 말은 불교에서 ‘아상(我相)’을 버리라는 말과 의미를 같이 합니다.

아상을 버릴 때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연민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곧 보살심인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인간은 정신적 문화적 성취를 이루어 나가는데 있어서

사회적 관계는 필수 요인입니다.

과거의 역사가 증명하듯 폭력을 앞세워 만들어진

문화, 정신적 가치는 바로 소멸되고 맙니다.

약자를 정복하여 얻어낸 이익은 곧 자신의 패망으로 귀결됩니다.

모든 생명은 평화를 바라고 있습니다. 인간 뿐만 아니라 뭇짐승,

소나무 한 그루의 자연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은 평화로운 삶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런데 폭력으로 이들을 해친다면 그 업보는 매우 엄중합니다.

존재의 의미를 파손하는 형태거니와 상의상관의 질서와 조화를 망가뜨리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폭력으로 잠시 자신의 평화를 구할 수는 있어도 모든 존재와 뒷세상의 평화를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불자여러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평등한 마음으로 평화로운 세상을 열어 나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