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20. 17:36ㆍ일반/금융·경제·사회
운암 김성숙 선생님, 아니 태허 스님은 암울한 일제강점 36년 시대에 편안하고 고귀한 종교인의 길을 버리고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평생을 보내신 분입니다. 해방 후에는 좌우합작과 평화적인 남북의 통일을 위해 애쓰시다 박정희정권 치하에서 2년의 옥고를 치루고 가난에 시달리며 말년을 보내신 전형적인 독립운동가의 삶을 사셨습니다. 태허 스님의 거룩한 삶과 희생 앞에 후배로서 부끄럽습니다. 오늘 스님 앞에 머리 숙여 참회합니다.
일본이 또 다시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이런 움직임은 다시 한 번 한반도 침략의 저의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됩니다. 다시 또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다면 태허 스님 같이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친일파가 그랬듯이 일제에 붙어서 부귀영화를 누려야 하는 건지, 더 나아가 일본군에 들어가 독립 운동가를 잡으러 다녀야 하는 건지…
<명진 스님의 추도사 중 일부>
격전이었던 4.11 총선의 여진이 채 가시지 않은 4월 12일 오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날씨는 화창했고 공기는 청량했다. 그러나 말끔하게 새 단장한 현충관에서 엄수된 운암 김성숙 선생(태허스님)의 서거 43주기 추모재는 시종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특히 이날 추모재에 참석한 전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의 “태허스님께 후배로서 부끄럽다, 참회한다”는 내용의 추도사는 현충관 추모식장을 숙연하게 만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추모재에는 태허 스님의 후손과 조선의열단의 후손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 영담 스님, 태허 스님의 주석처였던 남양주 봉선사의 조실 월운 스님을 비롯해, 주지 정수 스님, 태고종 전 총무원부원장 법현 스님, 광동고등학교 박병선 교장과 학생, 해인사 신도회장, 이보현 봉선사 신도회장, 안중근기념사업회 회장 함세웅 신부, 항일운동가단체연합회 회장 김원웅 전 의원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조계종을 대표해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은 총무부장 영담 스님이 대독한 추도사에서 “평생 가난과 고난 속에서도 정의와 대중복리를 위해 사회악에 맞서 싸우신 것은 바로 파사현정의 정신을 실천한 선지식이었기에 가능했다”며 “태허 스님의 사상 속에는 불교의 자비, 화엄, 선사상이 내재돼 있으며 그 속에는 원융의 사상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애도했다. 자승스님은 또 “태허 스님은 3.1운동 당시 스님들을 규합해 양주, 양평, 포천 등지에서 비밀리에 독립문서를 만들어 대중에게 배포하는 등 선봉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시다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셨다”며 “오늘날 한국불교가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대한민국이 자주독립 국가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태허스님의 원력행이 큰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그 업적을 추앙했다.
태허스님의 출가본사인 남양주 봉선사 주지 정수 스님도 추도사에서 “태허 스님께서는 의열단에서,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약하시는 등 혼신의 힘을 다해 이 땅에서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투쟁하셨다”면서 “스님으로서, 독립운동가로서, 광복 이후에는 반독재운동을 벌인 태허스님의 생애가 오늘 추모제를 발판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어 김원웅 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 회장은 “일제 강점기 암흑의 세월 속에서 온갖 핍박과 억압에 굴하지 않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일제에 맞서 싸운 운암 선생과 같은 순국선열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다”며 “친일동조 세력인 조선일보는 아직도 건재해 국민들의 시각을 흐리고 있는 현실을 통탄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회장은 “아직도 친일 세력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운암 선생님 앞에 참회드린다”고 사죄했다.
함세웅 신부도 추도사를 통해 “구도의 길을 걸어가던 스님께서 민족의 아픔을 몸소 체험하고 중생의 삶 속으로 뛰어든 것은 부처님과 같은 아름다운 큰 삶”이라며 “아직도 이승만 박정희 독재의 졸개들이 활개를 치고 있는 등 온전하게 자주독립 민주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뵐 면목이 없다”고 개탄했다. 함 신부는 이어 "스님께서는 이승만 박정희 독재에 의해 옥고를 치르시는 등 민족과 민주주의를 위해 외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셨다"며 "그러나 지금도 이승만 박정희 독재의 아류들이 퇴치될 수 있도록 선생님의 지혜와 지도가 간절한 시기"라고 호소했다.
특히 이날의 추도사는 운암 김성숙 선생이 현 민주통합당의 전신인 신민당을 창당해 운영위원으로 활동한 스님의 이력을 의식해, 전날 4.11 총선에서 패배한 민주통합당에 대한 아쉬움, 친일독재세력이 주축이 된 새누리당의 총선승리에 대한 참담함을 직설적으로 담은 추도사가 이어졌다.
내빈 추도사에 이어 월운 스님은 <인본생욕경주해>를 추모 헌정했다. 이 책은 월운 스님이 지난 6년 동안 번역한 것으로 2세기 후한시대에 서역에서 중국으로 온 안세고 스님의 한역본에 도안 스님이 소를 붙인 것이다.
이날 추모재는 일초 스님이 이끄는 불교의식단의 작법 추모의식에 이어 봉선사 합창단의 왕생극락의 노래, 무상게 연주로 이어졌다. 이어 헌화와 분향에 이어 조총발사 묵념, 운암 김성속 선생 묘소참배 순으로 추모재는 막을 내렸다.
민성진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공사다망한 가운데에 운암 선생의 서거 43주기에 참석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며 “앞으로 더욱 더 힘을 다해 운암 선생님의 가르침과 정신을 기리고 선양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태허 스님(운암 김성숙 선생)은?
1898년 3월 10일 평안북도 철산에서 태어난 태허스님은 대한독립학교에서 수학하다 경술국치 이후 폐쇄되자 할아버지로부터 한문과 불교경전을 배웠다. 1916년 신흥무관학교 입학을 꿈꿨으나 여의치 않자 1918년 경기도 용문사에서 오신 풍곡 신원 선사를 만나 출가했다. 본사인 봉선사에서 월초스님으로부터 성숙이란 법명을 받고 불학을 공부했으며 월초스님과 인연이 있었던 손병희와 김법린 스님, 만해스님 등과 교류했다.
1919년 봉선사에서 정진할 무렵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순재, 김석로, 강완수 스님 등과 함께 독립문서를 만들어 대중에게 살포하다 일경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2년에는 승려의 신분으로 조선무산자동맹과 조선노동공제회에 가입해 활동했으며, 1923년에는 불교유학생으로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민국대학에 입학, 고려유학생회를 조직해 회장으로 활동했고, 혁명단체인 ‘창일당’을 조직하고 조선의열단에 가맹하는 등 항일활동을 활발히 벌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동맹 등을 규합해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해 활동했다. 이후 광복군에 편입되어 기관지 <의용대통신>을 펴내는 등 항일활동을 전개했다.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차장에 취임한데 이어 이듬해에 국무위원에 선출되어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해방이후 미군정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렀고 한국전쟁 후에는 조봉암 등과 진보당 건설에 주력했다. 1957년에는 진보당, 민주혁신당 등 진보세력을 통합을 위해 애썼으나 이승만 정권이 선생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몰아 다시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5.16 군사쿠테타로 정권을 가로챈 박정희 정권은 운암 선생을 이른바 통일사회당 사건을 이유로 ‘반국가행위’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10개월간 또다시 옥에 가뒀다.
태허 스님은 1960년대 혁신정당 운동을 통해 진보와 혁신의 세상을 끊임없이 추구했으나 1969년 4월 12일 가난과 궁핍 속에서 입적했다. 이후 1982년 정부가 고인의 공훈을 기리며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면서 스님의 항일 업적이 재평가를 받았다. 그 뒤 2004년 7월 28일 국립 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유해가 안장됐다. 현재 태허스님의 항일 독립운동 업적을 기리는 ‘운암임시정부기념관’ 건립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음악 ; sunog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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