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求道)와 덕(德)

2012. 2. 17. 15:1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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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求道)와 덕(德)

 

비워야 함이 구도이다
구도는
옛사람의 어록을 빌어 오염된 나의 관념을 세척함이다.
사랑과 자비
진실과 선
지식과 명예, 권력과 금력의 유혹
구차한 염원마저 놓아버린 것을 말한다.

육신과 정신 속에 담겨 있는 나라고 주장하는 앞선 생각 전체를
깨끗이 비우는 것이 구도이고 선의 길이다.
비우지 아니하는 구도는 존재하지 아니하고 불법(佛法)이란 비우는 방법을 설한 각자의 어록이다.
완전히 놓고 비우고 버리지 아니한 바른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우지 않은 것 모두는 아집이고 놓아 버리지 못한 그 모두는 집착의 산물이다.
집착에 묶여지는 원인 물은 과거 기억을 끌고와 미래를 걱정하는 미혹한 마음이 주범이다.

수행 정진이란 이런 저런 생각 모두를 놓고
비우고 버린 다음 만상에 끄달려 가지 않는 마음됨을 위함이며
그 확신을 위한 중심으로 다가감과 같다.

바른 인간도는 망상을 내려놓고 선각자가 걸어간 정도 길에 놓여진 습을 새롭게 익히는데 있다.
죽은 지식의 잣대로 삼라만상을 끼워 맞춘
알음알이를 깨달음이라 주장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망상의 자손임을 증명하는 일이다.

옛사람의 어록인 경전 몇 줄 읽고
그 속에 있는 미묘한 소리 몇 구절 익힌 것을 가지고
자기 소리인양 이야기한다면 이것은 길 잘못접어든 나그네다.
인간이 힘들여 익힌 지식과 관습 속에 담겨진 습인을
주장으로 내세우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지식은 우주관에 비교하면 나약한 인간의 항변과 같은 것이며
그 역할은 지극히 미미한 힘이기에 극대화된 사고를 위해서는 결국 주장을 내려놓아야 한다.
마음속에 소 털 한 올만큼이라도 집착의 근원이 남아 있고서는
지혜의 불꽃은 피어나지 않는다.

올바른 자아는 만상에 묶여있는 집착을 놓아 버린 이후에
다가오는 대의에서 탄생한 확신의 산물이다.
왜 사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은 놓아버린 이후의 행(行)에서
그 빛의 역할이 있기에 이를 일컬어 덕인(德人)이라 칭한다.

그의 언행은
가공되지 않은 통나무에 견줄 만하다
무한 그릇이다
그는 꽉 찬 역할의 화신이다
점잖은 사랑방 손님이다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순진하며
살얼음 위를 걷는 길손처럼 조심 조심한다
분별이 없어 두리번거리지 아니하고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기세는 언제나 당당하다
심식(心識)이 하나이기에 품위가 고결하고
화색이 만연하며
언행이 간단 명료하며 조건이 없다
예(禮)를 철저히 숭상하고 따르며
순리를 지향한다
무위 자연과 벗하며
유유자적함이 일상이다
그러나
불의와 맞닿으면 성난 사자를 능가한다
덕인의 본체는 면벽서생이 아니다

그는
인내가 태산과 견줄 만하나 결단을 내리면 하늘과 땅,
마왕도 그를 대적할 수 없다.

그의 의식은 생과 사의 경계가 없으니 소아에 묶여 연연하지 않는다.
작금은 너절한 형상과 행위에 묶임을 당하는 것을 종으로 삼는
말법시대이기에 가공할 힘을 배양한 진인이 존재할 이유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는 걸림 없는 삶을 구축하려는 것이 본업이기에
세간의 혹자들이 염원처럼 그리는 특징적인 모습을 취하지 않는다.

수요는 공급을 창출하듯이 이 시대는
진인이 더러 생겨나 있을 가능성은 있으나
될수있는 자와 되어있는 자의 삶은 과정이라고 하지
결코 완성이라고 규정하지 않기에 분별상이 남아있는 중생은 그를 올바로 알기 어렵다.

시대는 언제나 덕(德)을 배양한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빛이 있음을 인식케 되며 이런 힘이 진리의 구현이며
세상의 올바른 척도가 되기에
구도(求道)가 덕(德)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피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