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성취할 수 있다/뿍꾸삿띠와 부처님의 하룻밤 에피소드

2012. 3. 10. 11:5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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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성취할 수 있다

뿍꾸삿띠(Pukkusatti)와 부처님의 하룻밤 에피소드

 

 

 

나라마다 다른 부처님 얼굴

 

부처님이 출현하신 이래 전세계적으로 부처님만큼 만큼 많이 알려 진 분이 있을까. 예수나 공자, 소크라테스가 아무리 유명하다고 해도 부처님처럼 떠 받들어지고 경배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불상의 형태로 나타난다.

 

부처님이 이 땅에 출현한 이래 옛날부터 부처님을 기리기 위하여 수 많은 불상이 만들어져 왔다. 불교를 신봉하는 나라치고 사원이나 가정에 불상이 모셔지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런 불상의 숫자를 합하면 얼마나 될까. 아마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숫자에 달할 것이다. 그런 불상의 형태를 보면 나라마다 각기 다르다.

 

중국불상의 경우 중국인의 얼굴이 보이고, 스리랑카 불상의 경우 스리랑카 불상 특유의 형태로 되어 있다. 이렇게 불상은 나라마다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는 그 나라의 얼굴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리랑카의 부처님상

명상에 잠겨 있는 모습이다.

스리랑카 Polonnaruva

출처 : http://www.flickr.com/photos/kaso/

   

 

그래서 태국불상의 상호가 우리나라 불상의 상호가 확연히 달라 마치 부처님은 여러가지 얼굴을 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진짜 어떤 모습이었을까.

 

 

부처님의 하루 일과

 

경전에서 부처님의 외모는 32 80종호로 표현된다. 정수리에 육계가 있다든가 미간사이에 흰털이 있다든가 하는 부처님만이 가지는 독특한 형상을 말한다. 이런 상호를 가진 부처님 형상을 사원에 가면 쉽게 접할 수 있다. 아주 잘생긴 용모를 가진 부처님의 묘사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형상은 인간이라 하기에는 너무 비범한 특징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불교tv사이트에서 스리랑카 아상가교수의 강의(불교영어도서관특강, 근본불교의 가르침, 1 부처님의 생애)에 따르면 부처님의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아상가 교수는 인간적인 부처님의 모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은 어떠한 삶을 사셨는가? 부처님은 어떠한 분이셨는가? 우리가 초기설법에서 모을 수 있는 흔적들은 무엇인가? 사실 부처님의 설법을 읽으면 아주 흥미로우면서도 가끔 매우 감동적입니다.

 

부처님의 삶은 다른 평범한 사문들처럼 매우 단순한 삶을 사셨습니다. 점심공양을 하기 위해 모든 사문들은 탁발하러 나갔으며, 보통 그들은 하루 한 번 식사를 했습니다. 부처님도 마찬가지 이었습니다.

 

물론 가끔 초대받기도 하였고 그럴 때는 탁발하러 나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여느 사문들처럼 음식을 구하기 위하여 탁발을 하시고, 거처에서나 나무 아래에서 공양을 드셨습니다.

 

오후에는 명상을 하시며 휴식을 취하셨고, 혹은 강가로 가셔서 목욕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저녁에는 사람들과 수행자들을 위하여 설법을 하셨습니다.

 

이처럼 부처님은 아주 평범하고 단순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아상가 교수, 불교영어도서관특강, 근본불교의 가르침, 1 부처님의 생애, 불교tv 2007-12-27)

 

 

이렇게 부처님의 모습은 매우 인간적임을 알 수 있다. 그 어디에도 초월적이거나 신격화된 모습으로 비추어지지 않는다. 아상가교수는 부처님의 이러한 삶의 방식과 단순성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부처님께 오는 모든 사람들은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의 초기설법을 살펴 보면 부처님은 아주 평범하고 단순한 삶을 사신 것으로 보인다. 그런 부처님의 생애는 가르침과 중생제도에 완전히 헌신되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부처님의 제자들인 비구, 비구니, 재가자 등의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에는 딱히 불교도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고 한다. 부처님께 오는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종교를 이미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람들의 의견을 늘 존중해 주었고 그리고 설법을 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점은 최근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단 화쟁위에서  발표한 종교평화선언과 무척 대조되는 내용이다.

 

종교평화선언 초안을 보면 전법은 다른 종교인을 개종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되어 있고, 수정안에서는 전법은 교세의 확장이 아니라 뭇 생명의 평화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부처님의 방식과 다른 것이다. 부처님은 부처님 당시 이교도라고 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하기를 포기한 것이 아니었고, 이교도라고  해서 전법을 포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 주는 에피소드

 

이처럼 부처님은 찾아 오는 누구에게나 가르침을 설하고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삶을 평생 동안 하셨다. 그런 부처님은 초월적이고 신비적 존재가 아니다.

 

부처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일화가 있다. 아상가 교수는 그 에피소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주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뿍꾸삿띠(Pukkusatti)라는 젊은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고행을 하며 방랑하는 종교 전통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부처님을 찾아 뵙고 싶어서 부처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그 당시에 여행을 하려면 몇 주 또는 몇 달씩 걸렸습니다. 부처님도 마찬가지로 제자들과 함께 이 마을 저 마을 여행하면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은 옹기장이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옹기를 말리는 넓은 곳에서 종교인들이 잠을 자곤 했습니다. 부처님도 제자들과 그곳에서 밤을 지내셨습니다.

 

우연히 뿍꾸삿띠도 그곳에 와서 같은 방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부처님을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날 밤 그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요. 사람들은 누워 있었고 부처님은 어둠 속에서 그 젊은이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자신은 누구이고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에 대하여 전부 이야기하였습니다. 물론 부처님은 그 젊은이가 올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셨지만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지는 않으셨습니다.

 

부처님과 젊은이와의 대화는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설법으로 바뀌었습니다. 의례적인 설법이 아니라 대화가 점진적으로 설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뿍꾸삿띠는 자신이 대화하는 상대가 부처님인줄 알게 되었습니다.

 

(아상가 교수, 불교영어도서관특강, 근본불교의 가르침, 1 부처님의 생애, 불교tv 2007-12-27)

 

 

비불교도인 뿍꾸삿띠라는 방랑유행사문이 어느 날 어느 밤에 우연히 대화한 상대가 부처님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부처님은 똑 같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설법을 듣기 전에는 전혀 눈치 챌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부처님의 모습이  32 80종호 대로 되어 있었다면 뿍꾸삿띠 뿐만 아니라 누구나 금새 눈치 채고 금방 알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뿍꾸삿띠가 마주친 부처님은 다른 평범한 사문들의 모습과 하등의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이 아주  위대한 분이 아니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두운 밤에서 어느 누구도 구별할 수 있는 특별한 형상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누웠고 부처님은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우리도 성취할 수 있다!”

 

이것이 아주 평범한 사문으로서의 삶을 살아간 부처님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위의 일화는 우리에게 어떤 중요한 것을 말해 주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아상가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 즉, 궁극적으로 부처님이 성취하신 것을 우리도 성취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이 인내심, 지구력, 지성 그리고 모든 자질들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면 우리들에게도 이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아상가 교수, 불교영어도서관특강, 근본불교의 가르침, 1 부처님의 생애, 불교tv 2007-12-27)

 

 

부처님도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었기 때문에 우리도 부처님이 성취한 그 길을 갈 수 있고 그 열매 또한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비록 지금 부처님이 바로 앞에 계시지 않더라도 부처님의 초기설법에 부처님 자신에 대한 사상이 담겨 있고, 부처님이 성취한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부처님은 가르치신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경우 부처님이 스스로 혼자서 성취한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부처님의 인도와 가르침을 통하여 성취한 것이다. 이것이 도와 과를 성취하는 데 있어서 부처님과 제자들의 다른 점이다.

 

하지만 우리들이 성취하는 순간 그 성취는 부처님의 것과 같다는 사실이다. 사성제를 예로 든다면 고통이 사라지고 고통으로부터의 자유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가르침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깨달음을 성취하고 난 후 45년동안 가르침을 펴신 것이다.

 

 

구미에서 불교가 호감을 갖는 이유는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부처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미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는 오래 전부터 불교전통이 전승되어 왔기 때문에 부처님은 매우 익숙하다.

 

그러나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 등에서는 아직도 익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미국에서는 불교가 인기 있다고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고려대 조성택교수는 현재 불교는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고도 표현하였다.

 

그런데 김종욱교수는 불교tv강의에서 유럽인들이 불교에 대하여 호감을 갖는 이유 중의 하나가 같은 아리안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는 붓다가 인도아리안을 대표하기 때문이라 한다. 이처럼 신이 사라진 유럽에서 그 공백을 메꾸기 위한 것이 무아를 특징으로 하는 불교에 대하여 대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현재 구미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유가 반드시 같은 아리안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지금은 무신론시대, ‘불교 르네상스시대’에 주류불교(Main stream Buddhism)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댓글을 주셨다.

 

 

“현재의 유럽인들이 불교에 호감을 갖는 것은
같은 계통의 종족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보편적인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부처님의 말씀이 인류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확신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혈연 지연 때문이 아니라
그 분의 가르침이 훌륭하기 때문에
서구의 지성인들이 감동하는 것입니다.

 

(마성스님)

 

 

스님의 글에 따르면 구미인들이 불교에 호감을 갖는 가장 큰 이유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언제 어디 누구에게나 시공을 초월하여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부처님이 최초로 법의 바퀴를 굴린이래 그 바퀴는 멈추지 않고 쉼 없이 굴러 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 법의 바퀴는 아무도 막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Rājāhamasmi sela               라자하마스미 셀라

dhammarājā anuttaro,          담마라자 아눗따로
Dhammena cakka
vattemi        담메나 짝깡 왓떼미

cakka appativattiya       짝깡 압빠띠왓띠양

 

“셀라여,

왕이지만 나는 위 없는 가르침의 왕으로 진리의 바퀴를 굴립니다.

결코 거꾸로 돌릴 수 없는 바퀴를 굴립니다.”

 

“Sela,

I am the righteous king,

incomparable,

Righteously I turn the wheel,

not ever to be stopped."

 

(셀라경, 숫따니빠따 Sn3.7,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숫따니빠따에서 셀라에게 자신은 진리의 왕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진리의 바퀴는 결코 멈출수도 없고 거꾸로 되돌릴 수도 없다고 하였다. 이는 무슨말일까. 부처님의 담마는 오로지 앞으로 나아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전륜성왕이 군대를 이끌고 바퀴가 달린 전차로 진격하였을 때 그 전차를 막을 자가 없다는 말과 같다.

 

 

법의 바퀴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거꾸로 되돌릴 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는 담마의 바퀴는 오로지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세상사람들에게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라고 고성제를 법문하였을 때 어느 누가 그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에요, 그것은 현실적이지 못해요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가르침을 펼쳤을 때 어느 누구 하나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법의 바퀴는 오로지 앞으로만 굴러 가는 것이다. 그런 법의 바퀴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이처럼 멈출 수 없는 법의 바퀴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에서도 볼 수 있다. 맛지마니까야 셀라의 경(Selasutta) 의 게송을 보면 법의 바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셀라여,

내가 굴린 위없는 바퀴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사리뿟따가 굴릴 것입니다.

그는 여래의 계승자입니다.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을 곧바로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자입니다.

 

바라문이여,

나에 대한 의혹을 없애고,

나에게 믿음을 가지십시요.

언제나 올바로 깨달은 님들을

만나기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세상에서 그 존재를

결코 만나보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바라문이여,

나는 올바로 깨달은 자,

위 없는 자, 화살을 뽑아버린 자 입니다.

 

비길 데 없는 하느님으로서,

악마의 군대를 때려 부셨으며,

모든 적을 항복시켰으므로

어떠한 곳에서도 두려움 없이 기뻐합니다.

 

(셀라경, 맛지마니까야 M92, 전재성님역)

 

 

여기서 하느님브라흐마부따(brahmabhuta)’ 로서 범천의 존재를 뜻하지만, 불교적 의미로는 최상의 존재(setthabhuta)’로서 성스런 존재또는 청정한 존재를 뜻한다.

 

 

칠드 사운드트랙과 명상의 붓다

 

위 없는 자, ‘슬픔의 화살을 뽑아 버린 자로서의 부처님은 아시아 불교권 국가 뿐만 아니라 이제 구미에서도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초월적이고 신격화된 부처님이 아니라 인간적인부처님이다.

 

인간 부처님이라고 하여 그 가치가 낮아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부처님을 숭배하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존경하는 것이다.

 

 

최근 인터넷 검색 중에 영국의 붓다페이스(http://www.thebuddhasface.co.uk/ )라는 사이트를 발견하였다. 일종의 불교용품을 판매하는 사이트이다. 그런데 붓다페이스에서 제공된 다양한 음악동영상을 볼 수 있었다.

 

검색어 Faces of the Buddha로 검색하면  수 많은 불교음악동영상을 볼 수 있는데, 특징은 매우 차가운 느낌의 사운드트랙(a super chilled sountrack)과 명상에 잠겨있는 평화로운 부처님의 이미지 (meditative images of contemplative peace)를 조화하여 만든 것이다. 그런 곡중의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Ultimate Chill Out Buddha

 

 

 

 

 

 

출처: http://www.youtube.com/watch?v=EYAlPQ8B7As

 

 

 

 

 

-* 매화는 세한삼우 중에 하나

 

 

 

꽃 소식 앞장서서 눈 속에 피는 매화가 피었다는 화신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松)와 항상 그늘을 바꾸지 않는 대(竹)

그리고 눈 속에 피는 설중매(梅)를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하여

시인묵객들의 작품 소재로 즐겨 다루어 졌다.

 

매화는 벚꽃을 닮기는 했으나 벚꽃처럼 야단스럽지 않고,

배꽃과 비슷해도 배꽃처럼 청상(靑孀)스럽지 않다.

군자의 그윽한 자태를 연상시키는 그야말로 격조있는 꽃이 바로 매화다

그래서 옛날에 장원급제하면 머리에 매화를 꽂았다.

 

 

퇴계 이황은 매화를  "梅一生寒不賣香" 이라 하지 않던가.

 매화는 한평생을 춥게 살아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뜻이다.

 

 

뜰을 거니로 라니 달이 사람을 좇아오네.

매화꽃 언저리를 몇 번이나 돌았던고.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기를 잊었더니

옷 가득 향기 스미고 달그림자 몸에 닿네.

 

청빈한 사람은 결코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올곧은 사람은 지조를 자신의 생명처럼 소중히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