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의 길/석산스님

2012. 4. 6. 20:1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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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길

 


석산 스님 (성북동 정법사 회주)

 

  
한 번 왔다가 가는 것이 정법(正法)입니다.

이 몸이 늙었으면 버리고 가세요. 사람 몸으로 태어났다고

백년 이백년 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한 번 왔으면 잘 살고 가냐, 못 살고 가냐 그게 있는 것이지 이 세상에 왔다가는 것은

매한가지인 것입니다.


우리 스님들도 성불했느냐 못했느냐, 그 차이가 있는 것이지

왔다가 가는 것은다 한 가지입니다.

세속에 왔으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죄짓고 살지 말아야 합니다.


출가해서 중(僧)이 되면, 중이 곧 계(戒)입니다.

계를 철저히 지키고 그래야만 시주(施主)의 은혜가

무겁지 않은 법입니다.


시주받은 밥 한 알의 무게가 일곱 근이라 그랬거든요.

계를 안 지키면, 한 알에 일곱 근이니까 일평생 밥을 먹으면

그게 몇 근이나 되겠습니까.

무섭지요. 시주가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세속에서 살면 농사짓든지, 장사하든지 그러면서 살지만

출가자는 그렇게 안 살아요.

시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주로 사니까 시은(施恩)이

그리 무거운 것입니다.

먹고, 자고, 입고 그리고 아프면 약 먹어야 되고. 이것을 불가에서는

네 가지 큰 시주라 하여 사사시주

(四事施主)라 하거든요.


내가 계를 철저히 안 지키면 그 시주, 무섭지요.

시주만큼 무서운 게 없습니다.

시주물이 절에 들어오면 출가자는 먹고, 공부하고, 또 절 짓거나 고치고.

그 외에는 쓰지 마라 그랬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둑놈이라 그랬어요.


시주란 그렇게 엄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계를 잘 지켜야 됩니다.

계를 잘 지키는 것이 사사시주의 은혜를 갚는 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갚을 길이 없습니다.


원래 출가자의 근본이 계 아닙니까. 계를 벗어나서는 못 살지요.

기차가 레일이 없으면 못 가는 것처럼 출가자는 계를

안 지키면 못 사는 겁니다.

일반 재가불자도 마찬가지예요. 불자는 모름지기 계를

지키는 것이 그 근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부처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첫째 계를 지켜야 하고,
둘째는 신심이 있어야 되고,
셋째는 부지런해야 되고,
넷째는 끈기가 있어야 되고
다섯째는 다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계를 안 지키면 출가자가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계가 아주 세밀하고 엄해요.

비구 250계를 보면, 남과 얘기할 때도 이빨을 보이고 웃지 말라고 그랬어요.

 

길을 갈 때도 7m 앞만 보지, 그 이상을 고개 들어 보거나 옆을 보지도 말고,

다닐 때는 언제든지 차수하고

다니라고 그랬거든요.
이게 아주 엄해요. 지키기 어렵죠. 지키기 어려우니까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출가자도 필요하고, 재가불자도 필요하지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항상 선근(善根)을

닦으라고 그러셨습니다.
원래 부처님 자리는 때가 하나도 없거든요.


그런데 나쁜 짓을 하니까 때도 없는 불성(佛性)에 때가 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근을 많이 닦은 사람은 자성(自性)에 낀 때가 얇고 가볍게

 되는 것이고, 선근을 못 닦고 자꾸

죄를 지은 사람은 때가 두껍고 무겁게 되지요.

 

자연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성불이 멀고, 때를 많이 닦은 사람은

때가 얇고 가벼우니까 성불이 가깝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마거사도 ‘무구(無垢)’라고 그랬습니다.

이 세상에 오면 때 없이 살라 그랬어요.


제가 50년대에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모시고 한 4년 지낸 적이 있는데요,
거기서 많이 배웠습니다. 동산 스님의 신심,

그 신심을 우리는 죽어도 못 따라갑니다.
대개 큰 절 조실이라고 하면 예불에 잘 안 나오게 마련인데

동산 스님은 비가 많이 와도, 날이 추워도

나오고, 눈이 와도 나오셨어요.


그것도 다른 대중보다 일찍 일어나셔서 각단을 돌며 예불을 올리고,

 예불이 시작되기 20~30분전에

대웅전에 와 턱~ 하니 앉아 계세요.

그리고 아침 공양이 끝나면 언제든지 빗자루를 들고 나오셔서

도량 청소를 하시거든요.


그러면 대중이 안 따라 나올 수가 없지요. 조실 스님이 빗자루 들고 나오는데,

안 따라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날마다 쓰는데 쓸 게 뭐가 있겠어요. 그래도 하시거든요.

그래, 그 스님께서 날마다 쓸 게 없는 것을

쓰는 그 법을, 그 법을 바로 들여다보려면 우리가 공부해 가는 데 닦을 것이

없는 것을 닦아야만 바로

닦는다는 것. 그것을 알아야만 됩니다.

 

동산 스님은 그것을 법문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조주록>에 수록된 문답을 보면, 한 스님이 “개에게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묻자 조주 스님이

“없다!” 하셨거든요. 그 “무(無)” 하신 게 무슨 뜻이냐 하면,

‘닦을 것이 없는 것을 닦아라’는 그 뜻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조주 스님의 법문을 바로 아는 것이지, ‘무’ 했다 해서

조주 스님은 무자 화두(無字話頭)만

가르쳐 줬다 하면 조주 스님 법을 잘못 가르쳐 주는 것이지요.


동산 스님도 한낱 예불하고 청소하는 것만 보여줬다고 말하면

그 스님 법을 바로 못 본 것입니다.
예불하는 그 신심 하나와, 닦을 것이 없는 것을 닦아야 한다는 것과,

쉴 새 없이 닦는 것. 그것을 보여주신 것이지요.


제가 앞에서 부처님 길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첫째 계를 지켜야 하고,

둘째는 신심이 있어야 하고, 셋째

부지런해야 하고, 넷째 끈기가 있어야 된다고 했죠.

그 다음에는 이제 버려야 됩니다.

 

다 버려야 돼요. 다 버리지 않고는 부처님 경지에 못 들어갑니다.

마지막에는 버린다는 그 놈도 버려야 됩니다.

버린다는 그 마음까지 안 버리면 안 돼요.


내가 건봉사에서 공부할 때 당시 조실로 계시던 만해 한용운 스님이

무자 화두를 가르쳐줬는데, ‘무’ 라는

것이 완전히 버려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없는 자리서 와서 없는 자리로 가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가질 게 없지요.

자꾸 가지려고 하면 공부가 안 돼요. 또 갖는다는 것은

남을 해칠 수가 있습니다.


수행은 완전히 버리는 것입니다. 완전히 버리면 미운 사람도,

고운 사람도 없습니다.

미운 사람, 고운 사람이 생기니까 자꾸 시비가 생기거든요.

학교에서는 시험을 쳐야 되니까 저 놈을 이겨야

내가 산다고 그래요. 그리고 회사에 들어가려면 저 놈을 죽여야 내가 살거든요.

 

사회에 나가 살아보니까 다들 저 놈을 죽여야 내가 사는 거라 그래요.

그러니까 또 남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사니까. 그것, 안 되는 것입니다. 시험 봐서 저 놈을

죽이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건 자기가 붙어야 되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살아가는데 저 사람을 죽여 버리고

 자기가 살려고, 물질적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의 대승 사상은 남을 위하는 것이 곧 자신을 위하는 것입니다.

남을 해치는 것이 자기를 죽이는 거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그것을 안 믿거든요. 남을 무찔러 버리고 자기만 잘 살려고 하는데,

그건 안 되는 겁니다.

남을 죽이면 자기가 죽는 것, 그것을 모르거든요.

그러니까 대승 사상은 남을 살리는 것이지요.

남을 살려야 자기도 산다,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남이 죽으면 자기도 죽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불자 여러분들은 항상 부족한 마음으로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훌륭하다, 이러면 공부가 안 됩니다. 아만(我慢)이 생기면 안 돼요.

그것이 무섭습니다.

그렇지만 아만보다 더 무서운 게 법만(法慢)입니다.

 

항상 마음을 비우고, 부족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스스로 부족하다는

마음을 가져야 공부가 됩니다.

(2003-12)

  

지나간 대덕스님들의 법문을 보다가 귀한 법문이 있어 올려봅니다

남을살리는 행, 내가 잘났다는 행 ,스님의 행 ,이모두 참되고 귀한말씀입니다

구하지않으면 마음에 끄달림 이없이 편안하다는 온전한 수행자들의

말씀은 또 우리에게 하나의 귀한법문입니다

이것을 가지면 저것또한 맞춰야 구색을 갖추고

이것을 먹으면 더 좋은것을 먹고자하는 우리 중생들

 

남에게 보이고저 하는 행 ,하심하지않는마음들

하지만 불자라 행복하다는 어느님을 말씀처럼

하나하나 배우고 덜어내고 그 마음조차 마음에 분별하지않는

행하는 불자 ,정진하는 불자가

되고져합니다

 

 

 

동행

 

 

 

"같이 늙어 간다는 것, 같이 간다는 것, 같이 있다는 것,

그것은 쉽지 않는 일이지만 감사한 일이다."

 

어느 분의 페이스 북에 써 놓은 글이다.

 

 

인생은 누구나 홀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쓸쓸한 길에서

누군가와 함께 동행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다.

 

그것은 힘들 때 기댈 수 있고 아플 때 위로하고

어려울 때 큰 힘이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연인도 좋고 친구도 좋지만 언제나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지만, 그렇게 동행할 사람을

찾기란 모래 속 바늘 찾기만큼 어렵다는 것을 더 실감하게 된다.

 

 

 

 

 

 

 

 

우리 주위에는 다양한 부류의 친구들이 있다.

 

그 많은 친구들 중에 내게 꼭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

 

 

어느분은 ‘인생에 필요한 12명의 친구들’에 대해 이렇게 꼽았다.

 

 

 

-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선배하나

- 무엇을 하자 해도 믿고 따라오는 후배하나

 

- 쓴 소리도 마다하지 않는 냉철한 친구 하나

- 나의 변신을 유혹하는 톡톡 튀는 친구하나

 

- 여행하기 좋은 먼 곳에 사는 친구하나

- 어떤 상황에서도 내 편인 친구하나

 

- 언제라도 불러낼 수 있는 친구하나

- 독립 공간을 가지고 있는 싱글 친구하나

 

- 부담 없이 돈 빌려주는 부자 친구하나

- 추억을 함께한 오래된 친구하나

 

- 연애 감정이 생기지 않는 속 깊은 이성 친구 하나

 

 

 

나는 과연 이 중에서 몇 명이나 이런 친구가 있을까?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느끼는 것은 이러한 많은 친구들 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어떤 것이든 공유할 수 있는

 

인생을 동행할 친구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내 마음을 꺼내어

진실을 이야기하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모르긴 몰라도 노후(老後)가 두렵지 않을 것 같다

 

- 좋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