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의 7 대 정신

2012. 4. 27. 23:4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728x90

 

如天 無比 스님 범어사 법문 후반부

禪의 7 대 정신


創建精神(창건 정신)인 의상스님의 화엄사상(華嚴思想)은 그쯤 이제
간략하게 말씀드린 걸로 마치고
이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또 이 시대에 최근에 中興(중흥)을 시킨 일정 성월스님이
'선찰대본산 (禪刹大本山)'이라 하고 이렇게 했고
'선찰대본산 (禪刹大本山)'의 '禪(선)'이란 바로 가장 멋 있는 삶
이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좀 더 세분화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중국사람들은 그런 표현을 했더라구요.
중국에 서점에 내가 가서 보니까, 큰 서점에 가서 보니까
불교책이 상당히 많이 있는데
거기도 禪(선)에 대한 책이 거의 90%를 차지하고 있어요.
전부 참선에 대한 책이야.
내가 놀랬어요. 중국에는 불교가 무슨 문화혁명때문에 있느니 없느니 그래도
최근에 불교가 그 禪(선) 중심으로 그렇게 되어있어요.
그래 내가 禪(선)에 대한 책도 많이 사 오고 그렇게 했는데
그 만치 禪(선)이 그렇게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
그런 시기에 마침 우리 범어사에서 '선찰대본산 (禪刹大本山)'이란 간판을
70년 전에 걸어서 그것이 면면히 한 70년동안 그런대로 이어져 왔고
최근에 주지스님께서 '禪 문화 체험타운'을 건립을 목표로 하고 있고
곳곳에 禪(선)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 이 차제라.
禪(선)이란 가장 멋있는 인생을 사는 것이다.
여러분의 마음에 맞든 안 맞든 내가 梵魚寺(범어사)에 다니니까
범어사는 나의 원찰이고
원찰의 정신은 바로 禪(선)이다 ,
禪(선)은 바로 한 마디로 말하면 가장 멋있는 인생을 지향하는 그런 가르침이다.
멋있는 인생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세분화해서 자세히 말씀드리면 첫 째
칠 대 정신이 있어요 일곱가지 정신이 있다구요.

첫째는 간소(簡素)야 간소.

첫째는 간소(簡素).
여러분들
선방(禪房)에 들어가 보시면 아시겠지만 선방 마당이 깨끗해요.
선방(禪房)에 들어가 보면 댓돌위의 신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어.
강원에 가도 그래.
이 禪(선) 정신 때문에 그런 거야.
그 다음에 마루에 올라가서 방에 딱 들어가도
방석을 쌓아 놓았다든지 이불을 개어놓았다든지 하면 그 주변에 가면
얼마나 날이 서게 해놓았는지 가까이 가면 손 베일까봐 겁날 정도로
그렇게 간결하게 딱 해놨어.
뭔가 조금 짐작이 가죠?
禪(선)의 정신을 일곱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그 중에 첫째가 간소야.
그렇게 많지가 않아.
뭐든지 번듯하게 많은 것이 이게 禪(선)의 정신이 아니야.

내가 그전에 탄허스님을 모시고 어느 신도님 집에 갔었는데
얼마나 물건이 많은지 혼자 사는 신도야.
창고 같더라고 보물 창고같애.
별별 좋다는 것은 꽉 차있어 집에.
그런데 그 사람이 상당히 많이 몸이 아픈 사람이야.
탄허스님은 아주 예지가 밝은 분 아니야?
예언도 많이 하시고 그런 분이거든 스님들 중에서도.
딱 보고는
'아이고 네가 그래서 아프구나.'이러더라구요.
'집을 꽉 이렇게 채워놓고 어쩌자고 이러냐?
이거 전부 다 비워라. 싹 다 비워라 - 그리고 간결하게 하여라.'

그게 禪(선)의 정신이야.
그것이 우리의 몸도 마음도 말도 행동도 전부
간소 - 간결하고 소박한 것.
이것이 첫째 조건입니다.
선에는 일곱가지 조건이 있어요.
첫째 조건이 간결하고 소박해.
여러 분들 집에도 살림사는 사람이 구석구석 다 그렇게는 못하지.
그렇지만 최소한도 방 하나 정도는 간결하고 소박하게 해놓고.
그것이 한 평이 되든 반 평이 되든 딱 들어가서 참선할 수 있는.

참선(參禪)이란 뭐냐?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그래서
진짜 멋있는 인생을 살 수 있는 그런 연구를 하는 곳이라.
선방(禪房)이란.

정말 진짜 참으로 멋있는 인생을 살 수 있는 연구소가 선방(禪房)이예요.
연구의 한 가지 조건으로서 간결하고 소박해야돼.
우리 불자들의 옷이 얼마나 간결하고 소박합니까?
아주 간결하고 소박하거든요.
먹물 색이 禪(선)의 색깔입니다.
불교색깔이라고도 할 수가 있지만 禪(선) 의 색깔이예요.
좀 더 아무리 봐도 지루하지 않거든.
그리고 편안해.
간결하고 소박하고 편안해.

그 신도님 집에 들어가니 도대체 정신이 없더라구요.
나는... 보기만 해도 그 집에 눈 감고 앉아있어도 정신이 없는거야.
꽉 차있다 생각하니 그만 정신이 하나도 없는거야.
그래가지고 안 아프고 못 배긴다고 딱 그렇게 지적하더라구요.
그러면 멋있게 살 수가 없는거야 .
자기는 잔뜩 보물을 쌓아 놓았으니까 든든할른지는 몰라.
그렇지만 인생은 그게 아니라는 거지요.

깨달은 사람들의 눈하고 달라.
좀 다른 것을 배우려고 절에 다니는 것 아니겠어요?
달리 사는 인생.


그 다음에 탈속(脫俗)
해야 해요, 탈속(脫俗).
이거 참 어려운데 , 속된 것 구질구질한 성격있지,
구질구질하고 아주 속기가 주르르 흐르는 ,
때가 주르르 흐르는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속된 것을 다 벗어버린
구체적으로 표현을 하면

마침 오늘 저 가을 하늘같은 그런 마음 .
그런 행동. 그런 말씨 .

그 보면 추하다고 할까 속기, 속때가 너무 묻었다고 할까
僧.俗 (승속)을 막론하고
스님이 되어 가지고 그러면 더 보기 싫고 더 추해보이고
또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너무 속되 보이고 속기가 주르르 흐르면 그것 참
부처님 제자라 하기엔 곤란하거든요.
탈속(脫俗)이 이게 또 중요한 거야.

이게 또 禪(선)의 정신 일곱가지 중에 아주 중요한 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로서 지금 가을하늘을 들었습니다만
선방에 가 보면 그래도 그 선방(禪房)의 분위기라고 하는 것은 속기가 잘 안보여.
어딘가 스님들이 잘 몰라도 느끼고는 있어요.
속기가 흐르고 속된 말을 하고 그러면 그만 지적을 당하는거야.

에이!~ 하고 고개를 돌린다구요 .
이게 탈속하게 사는 것.

우리가 俗家(속가) 에 살면서 어떻게 탈속(脫俗)하게 산단 말이냐?
속가에 살아도 탈속하게 살 수가 있어요.
탈속(脫俗)하게 살고도 안 죽어.
더 멋있어. 정신적으로 훨씬 멋있는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게 탈속(脫俗)한 삶이라!


불교꽃이 연꽃이라고 하는 의미가 탈속(脫俗)아닙니까?
俗家(속가)에 살면서 탈속하게 사는 것 그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저기 높은 산꼭대기에서 탈속(脫俗)해서 사는 것.
누가 못해?

연꽃은 진흙속에 피지만 진흙이 묻지 않는다.
진흙에 뿌리박고 사는거예요.
그러면서도 물 한 방울 연꽃에나 연잎에는 묻지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 불교꽃이라고 하는 이유가 거기 있는 거지요.
그것이 그대로 禪(선)의 정신으로 연결되는 거죠.
그래서 禪(선)의 정신 중에 두 번 째가 탈속(脫俗)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또 세번 째가 선방(禪房)에 들어가 보면 어떻지요?
웬지 거기 가서는 대화를 해도 크게
옆에 사람에게 들리기 하기가 좀 미안한 것을 느껴.
저절로 그렇게 느낀다고.
그래서 그저 말 듣는 사람만 겨우 들릴 정도로
일부러 뭐 소근소근댈려고 해서가 아니라
그저 음성을 한 옥타브 쯤 낮추어가지고
조용히 조용히 이야기를 하고 걸음걸이도 조용 조용하게
포행을 해도 20명 30명이 포행(布行)을 하는데 발소리 하나 안들려요.
스님들 바루공양 할 때 한 40~50명이 한 방에 앉아서 공양을 하는데
숟가락 젓가락 소리 하나 안들려.
선방(禪房)에 가면 그건 더 해. 더 하다구요.
그게 뭐냐?

靜寂 (정적)
이야 정적(靜寂).
선의 일곱가지 정신 중에 정적이야.
고요함.
고요할 靜 고요할 寂 .
적정이라 하지 않고 정적(靜寂)이라고 해요.
정적(靜寂)이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고요하게 느껴지는 거지요.


마음도 고요하고 행동도 고요하고 말도 고요하고
말을 해도 고요하게 하는 거예요.

입 다물고 가만 있으라는 뜻이 아니예요.
말을 해도 고요하게 하는 것.
얼마든지 고요하게 할 수 있잖아요.
우리가 그 사람 말을 많이 듣는데도 아주 고요하게 하는 듯한
그런 느낌이 오잖아요.
제대로 된 선사는, 진짜 프로급 선사는 그래요.
그러면서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 이게 정말 禪(선)의 정신이 무르녹아 있는
그런 법문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집에서도 정말 선을 중심으로 해서 내가 생활을 한다 이렇게 했을 때는
고요해야 돼. 고요해야...
말을 해도 고요하게
그것이 禪(선)의 정신 중에 또 중요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한 가지는 고고(枯高) !
라고 하는 말이 있어 고고 .

고고 (바짝 마를 枯 높을 高), 고고(枯高).
이건 무슨 말인고 하니
저 높은 산꼭대기에 아주 큰 고목이 바싹 말라서
수 십년 수 백년을 풍우에 이렇게 시달렸지만
깡 마른 나무의 줄기는 그대로 잘 서있쟎아요.
그런 것 더러 보시지요?
사진에도 그런 것 다 나와 있지.
그와 같이 그것은 무언가 위엄 있어 보여.
아주 오랜 세월에 풍상을 견딘 그런 위엄이 있어 보여.
그리고 오랜 세월의 경험을 다 그 바싹 마른 가지속에 다 담고 있고
그런 느낌을 우리가 받는다구요.
그와 같이 선을 하는 사람은 뭔가 禪(선)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는 사람은
뭔가 위엄이 서려있어 위엄이.
그래서 영가 현각(永嘉玄覺)선사 증도가 (證道歌)에도


24 窮釋子口稱貧 궁색한 부처님 제자 입으로는 가난타 말하나

實是身貧道不貧 실로 몸은 가난해도 도는 가난치 않음이라.

25 貧則身常披縷褐 가난한 즉 몸에 항상 누더기를 걸치고

道則心藏無價珍 도를 얻은 즉 마음에 무가보(無價寶)를 감추었도다.


바싹 마르고 몰골은 형편없는 거지같이 보이는데
거기서 풍기는 그 위엄은
누구도 감히 거기서 함부로 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을 주는 거지요.
이건 정말 기도를 많이 하던지 정말 禪(선)을 많이 깊이 하던지 할 때
저절로 그런 그 풍모가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런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는 것 - 이게 禪(선)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그냥 호락호락하지도 않고 느긋하지도 않고
정말 높은 벼랑에 수 백년 묵은 그런 마른 고목은 가까이 가서
손을 대기가 두려워요. 왜냐하면 부드럽지가 않습니다.
잘못 하면 손이 베이어요.
그와 같이 자칫 잡았다가는 손이 베일 것 같은 그런 위엄 ,
대강 짐작 하시겠지요?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선천적으로 그런 사람들도 있어.
그렇다고 사람이 나쁜 것도 아니면서 오랜 세월동안 참구를 많이 했다든지
禪(선)을 많이 했다든지 했을 때 그런 어떤 풍기는 맛이 또 있어.
그 다음에 또


그러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자연(自然)

스러워야 돼. 자연(自然).
자연환경이 아니고 '저절로 그러해야' 해.

인위적인 것은 싫어해.
선에서는 제일 인위적인 것을 싫어해요.

조작적인...
그 뭐 우스운 표현이긴 하지만 어떤 스님이
토굴에서 참선(參禪) 한다고 이렇게 있다가
참선이 뭐 마음대로 되나요?
실컷 놀고 왔다 갔다 이렇게 하다가
저 밑에서 도반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거든.
가만히 나가서 이렇게 능선에 나가서 보니까 진짜 사람들이 올라오거든 .
그래서 얼른 쫒아 들어가서 방석을 착 깔고
참선(參禪)하는 듯이 가만히 있는거야.
가까이 와가지고 소리를 막 내고 주인을 찾는데도
모른 척 하고 앉아 있는거야. 이거는 이거야...비자야.

정말
얼마나 인위적입니까?
얼마나 조작적입니까?
이거 禪(선) 정신 아니야 이거.

여러분들이 집에서 참선(參禪)을 하든 어디서 하든 간에
자연스럽게 억지로 뭐 이렇게 남에게 보일려고 하는 것.
그거는 아니예요, 선정신이 아니예요.
남에게 일부러 보일려고 한다 라고 하면은 벌써
뭔가 아닌 것 같은 것을 느끼잖아요.
자신이 느껴.
자연스럽지가 못한 거지.
그러니까 생활이 자연스러워야 돼.
자기 분에 맞게 자기 능력에 맞게.
별로 경제적으로 넉넉치도 못한 사람이 남에게 잘 보일려고
허장성세 겉으로 번드리하게 해서 있는 것 처럼 보일려고 하는 것.
이것도 禪(선) 정신은 아니야.

제발 이제 범어사에 다니는 선찰대본산을 원찰로 두고 다니는
우리 범어사 신도님들은 그런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냥 있는대로 소박하게 있는대로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
그게 아름다운거야.
그게 멋있는 인생이라.

뭐 없는 것 잘 보이려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손님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그런 폐단이 있어요.
있는대로 보이는 게 그게 가장 멋있는 모습이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예요.
그래 자연(自然)을 꼭 강조합니다.
禪(선)에서.

禪(선)의 칠대조건 가운데 자연을 꼭 들어요.
'저절로 자연스러워야' 돼. '저절로 그러'해야지.

조작백이.
무엇이든지 조작백이 그건 선 정신하고는 안 맞는 것이고
범어사를 중흥한 중흥의 정신에 안 맞는 것이고
'선찰대본산 (禪刹大本山)'의 정신에 안 맞는 것이예요.

내가 범어사에서 선철 법회도 하고
여러가지 선을 타이틀로 해서 행사를 많이 하는데
그런 정신에 좀 입각해서 간판도 그런 정신에 입각해서 하고
광고도 좀 그런 정신에 입각해서 하고
여러 가지 분위기를 그런 정신으로 딱 이렇게 만들어 버리면
저절로 말 하기 이전에 禪(선)은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 이전에 느낀다고 .
사람은 워낙 불성(佛性)이라고 하는 아주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도 선방(禪房)에,
절에 처음에 온 사람도 선방(禪房)에 딱 앉히면
그냥 뭔가 거기에 느껴. 느끼는 게 있다구요.
그렇듯이 그런 느낌을 받도록 그게 멋있는 인생입니다.
자연(自然)스러운 것 .



그 다음에 유현(幽玄)

유현이라고 하는 말이 있어요, 유현(幽玄).
(그윽할 幽 깊을 玄 ), 천지현황할 때 아득하다 멀다 검을 현.
검을 현자이지만 그건 아득하다, 멀다, 그런 뜻이에요.
유현이라고 하는 말은 선의 7대 조건 가운데 하나인데
이것은 사람은 깊이가 있어야 돼.
자연스러운 것도 좋고 간결하고 소박한 것도 좋고 탈속한 것도 좋은데
이게 깊이가 없이 촐랑대는 것 이것은 또 아니야.
禪(선) 정신은 아니라고.
禪(선)의 정신은 깊숙한데 그 사람이 무슨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소견이 얼마나 나 있는지 안목이 얼마나 높은지
이게 금방 바닥이 드러나 보이면 이게 禪(선)이 아니야.
그러니까 말이나 아니면 이등이라도 가지 하는 그런 말이 있잖아요.
선을 많이 하면 저절로 입이 그렇게 가볍게 떼어 지지가 않아.

묵묵히 침착하게
제일 늦게 말해도 괜챦아. 제일 늦게 말해도.
먼저 나서서 얄팍한 소견 자기가 떠들어 봤자 별 수 있나요?
자기 속만 다 보이는 거지.

깊이가 있는 삶 - 그것이 멋있는 삶이지요.
멋있는 인생이라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들이
모두 그 사람의 삶에, 가정에서나, 행동에서나, 말에서나,
일체 행동거지 일상생활에서 그러한 것이 표현되었을 때
그 사람이 가장 멋있는 인생이라.
가장 멋있는 인생.

일곱가지 조건을 다 이야기 했나요?
하나 남았지요?
그건 뭔고 하니,

변화(變化)야 변화.

뭔가 한다고 해서 거기에 다 국집되어 있으면 이게 또 禪(선)은 아니야.
선은 예측 불허.
왜 그런고?
우리 마음이 예측 불허(豫測不許)라.
그러기 때문에 '아,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야.' 이렇게 되어 버리면
이건 멋있는 인생이 아니예요.

예측 불허가 되어야 돼.
그 사람 참 깊이가 있고
그러면서도 어떤 변화를 가져올 지 모르는 거야.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어떤 한 곳에 딱 고정되어서 '그 사람은 이런 모습이다.' 라고
남이 다 그렇게 알아버리고 그러면 이거는 이제 禪(선)을 한 사람이 아니지.
禪(선)을 공부하는 사람은 아니야.

그래서 禪(선)은 변화(變化).

일정하게 딱 고정되어 있으면 이거는 禪(선)의 정신에 어긋나는 거지요.
그러니까 늘 변화를 주어야한다구요.

집안에서도 늘 변화를 주고 항상 그대로가 아니라
옷 입는 것도 변화를 주고 변화를 줄 줄 아는 것 - 이게 창조력이거든요.
왜 그런 조건을 내세우는가 하면
우리들 마음 자체가 그렇게 생겨먹었어.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아무 때가 묻지 않은 우리들 마음의 본성을
그렇게 일곱가지로 표현한 것이예요 사실은.

그런데 우리는 이런 저런 조건과 이런 저런 환경과
거기에 지배를 받다 보니까 때가 묻고 그래서
내 본래의 마음을 상실(喪失)했어.

상실(喪失)하고
남의 눈에 살고
세상 눈에 맞추려고 살고
그러다 보니 그게 자꾸 습관이 되고 늘어나가지고 세상에 맞추려고
그렇게 사는 게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 있다구요.

그래서 참선도 안하는 사람이 도반(桃盤)이 올라 올 때
척 참선하는 척 하고 앉아있는 것.
그렇게 부자연스런 그런 삶이 있고 그리고 많이 갖다 놓으면 좋은 줄 알고
간결하고 소박하게 살지를 못하고 재 놓고 사는 것.
또 깊이가 없는 인생.
이런 것들이 전부 그야말로 정말 우리가 부처님의 제자로서
부처님의 가장 올곧은 정신과 부처님의 삶을 내 삶에다 연관시켜서
내가 어느 정도 부처님처럼 닮아 가려고 하는 그런 마음에서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면 그런 7가지 정신.
그것이 꼭 말하자면 우리 가슴에 남아 있어야 된다, 이런 생각입니다.

아시는 대로 그런한 7가지 禪(선)의 정신은 근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부처님은 어느 날 법문을 하시려고 법상(法床)에 올라갔는데
법문은 하시지않고 대범천왕이 부처님께 꽃 공양을 했어요.
대바라라고 하는데 큰 연꽃을 천 송이 인가를 올렸는데
그 중에 한 송이를 척 ~! 이렇게 들어 보였어.



일곱가지 禪(선)의 정신을 이야기 했는데
부처님은 그 연꽃 한 송이를 척~!
들어 보이는 거기에 일곱가지 정신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꽃을 들어 보이시는 거기에서 시발(始發)을 했어.
그게 부처님이 성도(成道)하시고 40년 지난 뒤야.

그래 영산회상이라고 했기 때문에
영산회상이라면 부처님이 설법 시작하신 지 40년이 지나고
마지막 최후 8년 째 해당되는 그런 시기에 그 경을 설했거든요.
그 경을 설한 대목에서 그런 모습이 있는거야.


그래서 염화시중이니 염화미소니,
조실스님계시는 데를 염화실이니, 등등 그런 염화라고 하는 뜻이
거기에 포함됩니다.
그래서 불교를 또 한 마디로 그렇게 부처님이 보여준 것은,
- 뭐 한 마디도 아니지요.
한 가지 행동으로 보여 준 것은 연꽃을 척~ 이렇게 들어 보여준 것!


그 속에는 간결함도 있고, 소박함도 있고, 탈속함도 있고
깊이있는 아주 유현(幽玄)함도 있고
그러면서도 누구도 거기에 범접할 수 없는 고고(枯高)함!
큰 위엄도 있고 변화도 있는거야.
법문 해달라고 하니까 맨날 말만 하는것이 아니라
정말 새로운 모습으로 법문을 보였잖아, 그게 변화야.
일곱가지 조건 중에 마지막에 내가 변화라고 했지요?


당장에 집에가서 좀 오늘 변화 부터 해.
집안부터 변화를 좀 줘. 그러면 내가 변화해.
경도 늘 읽던 경 부르지 말고 또 딴 경도 좀 읽어보고
내~ 부르던 관세음보살만 부르지 말고 딴 보살도 불러보고.
경이름도 한번 불러 봤다가, 보살이름도 불러 봤다가
석가모니도 한번 해보고 부처님 이름도 한번 불러보고.
이것도 하나의 작은 변화예요.
그것이 꼭 禪(선)은 아니야.
그러나 禪(선)에는 그게 포함되어 있어.

또 뭐 오늘 법문하는 스님이 관세음보살만 부르지말고
딴 보살도 불러보라 하더라,
(대중 웃음 박수)
그것만, 그말만 외워가지고 돌아가서 또 그것만 이야기할까봐
겁이 나서 말 못하겠어요.
(대중 웃음)

이제 정오의 대종소리도 울렸습니다.
그동안 범어사가 창건된 정신은 뭐라고?


'화엄(華嚴)'이라고 했지요?

'화엄(華嚴)'은 글자가 의미하는 것 -
'꽃처럼 아름다운 마음, 꽃처럼 아름다운 말씨, 꽃처럼 아름다운 행동,
신(身)·구(口)·의(意) 3업(三業)을 그렇게 정말

꽃같이 아름다운 그런 신(身)·구(口)·의(意) 3업(三業)으로써
가장 아름답게 인생을 살자.'

고 하는 것이 창건의 정신이라면
70년 전의 '선찰대본산 (禪刹大本山)'이라고 하는 간판을 걸고
선을 선양하겠다고 하는 중흥조(中興祖)의 중흥정신(中興精神)이
오늘날 이 시간, 우리들에게 까지 이렇게 내려와서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지금 이렇게 선을 선양하고 있는데

禪(선)의 정신은 뭐라고?

'가장 멋있는 삶을 살자'

고 하는 것이다.
'가장 멋있는 인생 '!
그 멋은 구체적으로 7가지를 대변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뿌리는 바로 부처님이 한 송이 꽃을 드는 데에서 부터 출발을 했다!

아 얼마나 불교가 멋있어요?

참 멋 있잖아요.

(대중 박수)

이런 멋있는 부처님의 정신, 또 조사스님들의 정신
그것이 오늘날 '선찰대본산 (禪刹大本山)' - 禪(선)에 함축이 되어 가지고
禪(선)의 깃발이 저렇게 펄럭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梵魚寺(범어사)를 원찰로 생각하시는 여러분들은
그래도 뭔가 禪(선)의 물이 조금은 튀어 가야지....
뭐 무슨 보살 무슨 보살하고 엎어져 있을 것이 아니라
그래도 禪(선)의 정신이 조금은 튀어 가서 무슨 생활을 아주 간소하고
간결하고 소박하게 그렇게 한다든지

아니면 모든 말이나 행동이나 이런것이
꾸미지 않고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도 않고
또 잘못 보이려고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한다든지
아니면 탈속하다든지... 탈속(脫俗) - 그것은 아주 뭐 최고야 사실은 .
얼마든지 좋은 게 있쟎아요.

그리고
인생을 오래 사신 분은 깊이가 있어 유현(幽玄)해. 아주 ...
그윽하고 유현(幽玄)하고, 하는 그런 모습으로 인생을 산다든지...
이게 인생을 멋있게 사는 사람이고
불교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이고
또 '선찰대본산 (禪刹大本山)'에 다니면서 '禪(선)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다.
이렇게 정리해 드릴 수 가 있습니다.

오늘 법문 여기까지 입니다.

(대중 웃음 큰 박수와 합장합니다.)

- 위 녹취는 '육성법문 그 외' 게시판 [11월 2일 (음 10월 1일)법문 2]

 

 

선기는 선의 일곱 가지 의미 또는 선의 7대 정신을 표현해 봅니다.


         (어른 스님의 가르침을 대신해서 전합니다.)




       간소,  탈속,  자연,  유연,  고고,  정적,  변화




1. “簡素(간소).” 멋집니다. 이것이 선입니다. 간단하고 소박합니다.


선은 첫째, 간단명료하고 소박해야 합니다. 禪房(선방)에 가 보면 그 방석정리라든지 신발정리라든지 가사장삼 걸어놓은 정리라든지 그냥 선이 느껴집니다. 선이 뭔지 모르는 사람도 그냥 선이 느껴집니다.


우리 조계종이 선불교를 표방함으로 해서 세계적으로 상당히 위상이 높지요.


모든 불자들은 많은 선지식들에게 선을 많이 들어서 정말 거기서 검증 하고 선별해서, 선의 오롯한 정신을 정리해야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2. “脫俗(탈속)” 해야 됩니다.


俗氣(속기)가 너덜너덜 붙어서 禪師(선사)가 됐던지, 禪氣(선기)가 됐던지, 禪房(선방)이 됐던지, 禪寺刹(선사찰)이 됐던지, 禪자를 붙였으면 탈속해야 됩니다.


아파트도 선 스타일이라는 광고를 합니다. 어떻게 지어놓고 선 스타일이라고 하는가? 자세히 보니까 아주 간소 합니다. 장치가 거의 없어요. 텅 비었어요. 그리고 탈속해 보여요. 어딘가 모르게 탈속해 보여요.


벽장이 많고, 걸 것이 많고, 널 것이 많은 것이 아니고...




3. “自然(자연)” 천지자연이 아니고, “저절로 그러함” 을 말하는 것입니다.


천지자연의 춘하추동 자연도 사실 저절로 그러함이지요.


그런데 선은 체화. 우리들 자신이 선을 익혀서, 선의 정신을 도입을 해서, 내 삶의 어떤 한 표현으로 나타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연스러워야 됩니다. 조작이 있고 뭔가 억지가 있는 것은 선사가 아니고, 禪客(선객)이 아니고, 禪人(선인)이 아닙니다.


알고 보면 선은 좋은 겁니다. 아주 기가 막힌 겁니다.


왜 이 시대에 지금 간화선인가? 선중에도 간화선은 오로지 화두 하나뿐입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오로지 화두 하나뿐이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4. “유연(柔然)” “저절로 그러함” 뿐만이 아니고, 촐랑대면 안 돼요. 깊이가 있어야 돼요. 유연한 것. 이 선은 선사가 깊이가 있고 무게가 있고, 선을 하는 보살이나 선을 하는 거사나, 선을 하는 처녀나 선을 하는 총각은 유연해요. 깊이가 있어요. 침착해요. 이것이 또 선의 특징 중의 하나예요




5. “孤高(고고)” 한 것! 이것은 아주 권위입니다.


높은 바위 벼랑위에 서 있는 아주 깡마른 枯木(고목), 그 고목이 몇 백 년. 몇 천 년이 되었는지 모르는, 그러면서도 도대체 넘어지지 않고, 가까이 가면 살을 베일 듯한 날카로움도 있고 위엄도 있고...


오대산 비로봉에 가면 더러 몇 천 년 된 그런 主木(주목)이 있습니다. 오대산 상원사에 가면 가을에는 의례히 거기를 몇 바퀴를 도는데 그런 주목을 보면, 수 천년 된 주목이 이렇게 말라 있는데... 얼마나 거기에 위엄이 서려 있는지 가까이 갈 수가 없어요. 그런 것을 느끼게 됩니다. 선도 이 고고함이 있어야 됩니다. 선을 제대로 한 사람은 이것이 있습니다. 호락호락 하지를 않아요. 호락호락할 턱이 있습니까?


도인이니 명현이니 시시한 것에 호락호락 하면 그것은 선이 아니지요.


고고함! 멋진 의미입니다.




6. “靜寂(정적)” 인데요. 禪은 무조건 고요해야 돼요. 바깥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선 이라는 한 글자를 생각만 해도 저절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그 끝 모를 깊이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마음. 이것이 또 선입니다.


집에서 참선하신 분도 많으실 줄 압니다. 집안 사정이 어떻고, 자식이 어떻고, 회사 일이 어떻고, 세상 돌아가는 것이 어떻고, 大選(대선)이 어떻고, 무슨 이전투구가 되어서 물고 물리고 하는데... 선을 하는 사람은 그런 것 알바 없어요. 좌복을 펴놓고 앉으면. 가다가 공원에서도 좋고, 찻 간에서도 좋고, 선을 생각하면 그것이 화두가 됐던지, 선 이라는 글자가 됐던지, 아니면 하다못해 어록이 됐던지, 아니면 어떤 이야기를 하는 그 순간을 기억 하는 것도 좋아요. 이것도 다 선에 속하니까요. 이렇게 딱 하면 그 순간 모든 시끄러움. 모든 번잡함이 가라앉는 것! 이것이 가능해요.


얼마든지 가능 합니다. 이것이 정적입니다. 적정하고는 또 다릅니다.


수준이 다른 것이 정적입니다. 참 멋있습니다. 근사 합니다. 정적!




7. “변화무쌍” 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참선 좀 한다. 공부 좀 한다. 불교 좀 한다. 한 불교 한다면 그만 자기 아집이 생기는 겁니다. 자기 틀이 딱 생겨요. 불교를 안 한 사람은 없는데 한 불교 한다는 사람은 전부 자기 아집. 자기 고집. 자기 틀이 생기는 겁니다.


선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변화무쌍한 것입니다. 변화라는 말이 참 매력 있어요? 선은 꼭 이래야 된다고 고정되어 있는 것을 철저히 거부합니다.


사실은요. 댓돌 위에 신을 가지런하게 벗어놓고, 또 선방에 가 보면 방석을 손이 베일 정도로 모를 맞춰서 정리해 놓습니다. 그렇지만, 무계획하고 무질서 할 때는 아주 심합니다.


어디를 찾아볼 수 없게 무질서한 것이 또한 선객들입니다.


그러면서 또 질서가 있을 때는 서릿발 같은 질서를 세울 줄 아는 것이 禪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고정 되어 있지 않아요. 가지런하지가 않아요. 한결 같지가 않아요.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선을 제대로 한사람은 그런 변화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야 살아있는 생명이지요.


선은 생명을 극대화한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생명력을 극대화 하는 한 작업이고, 한 방편이 이 선이고, 그 중에서도 간화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지못해서 호국불교니 기도불교니 기복불교니 여러가지의  불교를 다 하지만, 그래도 그 중심에는 선이 있어요. 선이 생명입니다.


선불교가 면면이 중심에서 자리를 지켜 왔기 때문에 쓰러지지 않고 이렇게 불교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도 아닌 그 잡다한 불교, 불교 간판만 걸어놓고 타 종교인들 보다도 더 못하게 그냥 내달리고, 무당보다도 더 무당같이 하고, 그래도 쓰러지지 않고 이렇게 꿋꿋이 자기 갈 길 가는 것은 바로 그 중심에 선불교가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달마스님 이후로 그리고 800년 전 보조스님께서 이 간화선의 지침서를 도입해서 사람들에게 가르친 이후로 끊임없이 이것을 공부하고 있으며, 최소한도 불교전문가. 정말 진정한 불교전문가는 오로지 이 공부에 매진하는 것입니다.




천 가지 문제, 만 가지 문제 얽히고, 설킨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문제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건강의 문제, 집안의 문제, 자기가 처해있는 소속 기관의 문제, 사회의 문제, 하고 있는 온갖 일들, 어마한 문제가 많습니다.


그래서 서장에서 대혜스님이 그랬어요. 천 가지 문제와 만 가지 문제가 오직 이 한 가지 문제로 귀결되니, 이 한 가지 문제만 해결하면 천 가지 문제, 만 가지 문제가 다 일시에 소멸된다는 말을 여러 번 만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단순합니다. 간결하고, 소박합니다.


이 시대가 얼마나 복잡합니까? 지금도 거리에는 데모한다고 야단법석이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 그것을 다 뒤로하고, 이 자리는 그런 모든 것들을 잎 따고 가지치고, 줄기 다 베어 버리고, 뿌리까지 다 뽑아버리고, 뭔가 이름 모를 그 하나! 그것 하나만 내 마음 속에, 내 인생에 하나만 남겨놓는 시간을 가져보는 이것이 선 공부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참선 좀 한다. 공부 좀 한다. 불교 좀 한다. 한 불교 한다면 그만 자기 아집이 생기는 겁니다. 자기 틀이 딱 생겨요. 불교를 안 한 사람은 없는데 한 불교 한다는 사람은 전부 자기 아집. 자기 고집. 자기 틀이 생기는 겁니다.


이것이 불교를 망치는 일입니다.

최평규 교수 홈에서..

지혜의 말씀 38

 

 

장소 불문하고

 

덕을 베푸는 행위 속에서도 '나'가 있습니다 .
남에게 덕을 베푸는 그 이면에 베푼 것만큼
받고자 하는 '나'가 분명 있습니다 .

 

용서를 할 때도 거기에는 '나'가 웅크리고 있습니다 .
상대방을 용서해 준 대가로 자신은
'용서를 하는 자 '라는 자만심이 있지요 .

 

이처럼 우리의 행위에는 자신만을 내세우는 아상(我相)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신만을 내세운다면 괴로움만 더하게 됩니다.
때와 장소를 불분하고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그 움직임을 주시하고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 관심(觀心)거사

 

 

박정우님 그림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언젠가 지고 말며,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
 

나와 인연 맺어진 사람들 그리고 물건도
그 인연이 다하면 헤어지게 됩니다.
권력과 재물을 탐하는 동안 머지않아
그들과 이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

또 내 삶이 죽음으로 향하고 있음을
우리는 느끼지 못합니다 .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경쟁에서 이기는 것, 성공하는 것은
우리 삶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겠지요

 

 

- 손기원(지혜경영연구소장)

 

 

Violin, My Life .. Josef Suk/Mem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