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을 보현행원으로 하면 더 잘 될 것이다!-어느 선사(禪師)의 말씀

2012. 4. 13. 20:1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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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을 보현행원으로 하면 더 잘 될 것이다!-어느 선사(禪師)의 말씀

 

 

 

<참선을 보현행원으로 하면 더 잘 될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계신 어느 스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금 유명 선원의 선원장으로 계신  선사이신데, 물론 제가 직접 들은 것이 아니고 아는 분을 통해 전해 들었기에 정확한 말씀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옳커니 스님, 정말 지극히 맞는 말씀입니다!>라는 맞장구가 제 마음 속에서 튀어 나왔습니다.

 

참선을 보현행원으로 짓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참선이 우리가 흔히 알 듯 깨달음, 성불의 도구가 아니라 부처님 공경, 찬탄, 공양의 도구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깨닫기 위해 화두 드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 공경하기 위해 화두를 들고, 부처 되기 위해 화두 드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공양하기 위해 화두를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깨달음, 성불, 이런 것이 아니라 오로지 부처님으로 꽉 찬 참선! 그것이 보현행원으로 화두를 드는 참선입니다.

 

화두를 보현행원으로 들면 참으로 이상한 경계가 찾아옵니다. 예를 들면 깨침이 최후의 경계가 아니라 <부처님 공양이 최후의 경계>로 다가옵니다. <내가 깨쳐 부처 되리라!>가 아니라 <내가 깨쳐 부처님 기쁘게 해 드리리라! 나의 깨침으로 부처님 공경하리라!>이런 마음,이런 맹세가 솟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수행, 나의 정진, 나의 밝음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 위한 것이 됩니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위한 것이 된다함은, 나라는 것이 그 자리엔 없다는 말입니다. 즉, 상(相)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상을 없애려 해서 없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는 자리에 부처님이 오시기에 나라는 놈은 저절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또한 <깨침이 최후의 경계가 아니라 부처님 공양이 최후의 경계로 다가온다>는 것은, 내가 아무리 깊은 경계를 얻더라도 그것이 <별 게> 아니라는 것을 뜻합니다. 나의 깨침은 특별한 것도,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깨달음은 나의 성불을 달성하는 수단이 아니라 다만 부처님 공양할 공양구에 지나지 않는 것. 다른 분들이 갖가지 공양구로 공양하듯, 나는 나의 깨달음으로 공양할 뿐입니다.

 

그러니 그런 공양구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법공양이 더 낫고 재공양은 덜하다는 그런 생각도 없습니다. 일체 만물이 자기 자리에서 온갖 정성으로 공양하는 바, 나는 수행으로 깨침으로 부처가 되는 것(成佛)으로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체 중생과 나는 조금도 차별이 없습니다. 나는 나의 공부로 공양하고, 중생은 중생의 업으로 공양하는 것뿐입니다. 이런 것이 보현행원으로 화두, 참선하는 것입니다.


참선만 아니라 다른 수행, 심지어 우리의 일상도 보현행원으로 지어가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더욱 찬란한 빛을 발휘합니다.수행은 나날이 일취월장하고 일상은 나날이 풍요로와지는 것입니다.

 

가령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가 고통의 하루, 마지못해 사는 고난의 하루가 아니라, 부처님 찬탄 부처님 공경 부처님 공양 이루는 하루가 됩니다. 아침이 오면 출근하기 싫다, 일하기 싫다, 수행하기 싫다가 아니라, 오늘도 부처님 공양 이룰 찬란한 하루가 시작되었구나! 어서 일어나 어서 부처님 공양하러 가야겠다, 오늘도 부처님 공양 실컷 이루는 하루가 되리라!...이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좌복에 앉아도 일터에 나가도 온통 부처님뿐, 이리 봐도 부처님 저리 봐도 부처님 오직 부처님 공경 공양 이룰 하루입니다. 그러니 수행은 용맹심이 솟고 삶은 힘차고 밝음으로 가득 찹니다.

 

이런 분을 보고 이웃 분들은 사람이 어떻게 저리도 밝고 생기가 넘치는가 하고 의아해 합니다. 그 비밀이 바로 보현행원입니다. 누구가 알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러나 단지 잊어 버리고 별 것 아닌 줄 아는 착각으로 실천을 못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그것이 행마다 서원을 세우고 오직 공경, 찬탄, 공양을 하는 화엄 수행의 정수, 보현행원의 소식입니다.  


*월암스님은 <수행자들이 중생의 아픔을 떠나 자기 개인의 구원에만 집중하지 말고, 좌복 밑에 중생의 아픔과 고통의 질곡을 좌복에 깔고, 그야말로 견성성불과 아울러서, 견성성불하고 나서 요익중생하겠다는 게 아니라, 견성성불하는 수행 그대로가 요익중생이 되는 삶을 살아갈 것>을 말씀합니다. 바로 마음은 부처님을 향하고 몸은 중생을 향하는 <보현행원의 참선>입니다.

 

*화엄경에는 부처님이 출현하셨다는 소식에 모든 사람들이 <어서 부처님 뵈오러 가자>는 말씀을 합니다. 그렇게 부처님을 뵈옵고는 갖은 공양구로 공양을 올리고 부처님의 출현을 찬탄하십니다. 어서 가서 부처님을 뵙는 하루! 그리고 부처님을 뵙고 찬탄, 공경, 공양하는 하루! 그것이 보현행원의 하루입니다.

 

*이처럼 참선과 보현행원은 별 게의 것이 아닙니다. <참선이 바로 보현행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니(?) 참선 한참 하고 나서 보현행원을 또 따로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기한 바와 같이 참선이 단순한 참선이 아니라 <참선보현행원>이 되면 참선 자체가 참선 이상의 진가를 발휘합니다. 100%가 아니라 200%, 300%, 아니 그 이상의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참선과 보현행원이 다른 줄 알고 계시다면, <한 마음> 먹기 따라 <참선이 바로 보현행원>이 됨을 꼭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참선보현행원>을 하면, 나는 비록 참선을 하지만 바로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시는, <보현행자>이십니다. 참선과 보현행원에 조금도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겉보기(?)엔 참선수행자이시지만, 또한 동시에 보현행원 수행자이십니다.

 

 

[보현행원]일반 불자님들의 보현행원에 대한 오해--필독을 부탁드립니다


보현행원을 말씀드리다 보면 우리 불자님들이 오해하는 대목이 여러 곳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말씀드려 봅니다.

 

1.보현행원은 교학, 수행과 상관없는 줄 아는 일


많은 불자님들이 보현행원 그 자체는 좋지만 <보현행원은 수행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보현행원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참선, 염불, 주력, 독경, 기도, 명상 등등을 하고 한 경계 이룬 후에 시간 나면 하시려 하는 것입니다. 또한 발심, 참회 등과도 상관이 없어 아무리 보현행원이 좋다 하더라도 수행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먼저 발심과 참회행을 해야한다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보현은 멀리 두고 오지 않는 발심을 한다고 고민하고 참회행을 한다고 업장 참회의 염불을 하거나 무수한 절을 하십니다.

 

 또 보현행원은 불교 가르침과 큰 상관이 없어(?) 반야, 연기 등을 알려면 따로 이런 공부를 해야 하는 줄 아십니다. 물론 보현행원 자체에는 그런 말이 없지만 보현행을 하게 되면 자연이 그런 가르침, 즉 반야나 연기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을 모르시는(?) 것입니다.

 

이 결과 보현행원은 그런 불교적 가르침과는 상관없는 <별개의 것>이 되어, <수행 따로 보현행원 따로>, 혹은 <교학 따로 보현행원 따로>의 <따로 국밥>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잘못된 착각입니다.

 

보현행원은 수행과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서원이 있는 곳, 간절한 부처님 공경, 찬탄이 있는 곳이 바로 보현의 행원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보현의 원행을 떠나 참된 수행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무슨 수행, 무슨 공부를 하든   <참되이 수행하면 언제나 보현의 행과 원이 그 속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보현의 원과 행이 없는 수행은 참된 수행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현은 수행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보현행원 자체가 수행입니다. 참된 수행자는 늘 보현의 마음으로 수행을 짓는 것입니다. 참선, 주력, 염불 독경, 기도, 그리고 지금 내가 부처님께 바치고 있는 모든 나의 수행이 바로 <보현행 그 자체>임을 아셔야 합니다. 

 

보현행원은 발심과 무관하지도 않습니다. 발심이 안 되어 고민하는 불자님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경전에도 얼마나 발심을 강조하십니까? 보리심을 내어라 보리심을 내면 바로 성불한다, 이렇게 외치는 경전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 잘 안 되는 발심, 일지 않는 보리심이 보현의 서원과 행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부처님을 섬기겠다, 하는 그 서원 자체가 보리심이요 발심인 것입니다. 신심 또한 마찬가지. 믿음이 없던 분들도 부처님을 사무치게 공경하고 찬탄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불같은 신심이 솟습니다. 그리고 부처님 감사합니다 하는 소리가 저절로 사무쳐 오릅니다. 은혜를 모르던 사람이 은혜를 아는 이가 되는 것입니다.

 

보현행원은 참회행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참된 참회는 밝은 행업으로 어두운 과업을 소멸시키는 것인 바, 밝은 마음을 내지 않고 무조건 짓는 참회는 맹행(盲行)밖에 되지 않습니다. 죄라는 것이 본래 없구나! 있는 것은 오직 찬란한 부처님 무량생명뿐이구나! 이런 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짓는 참회행들은 그것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그저 무명만 더할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보현의 서원과 행은 이런 맹행을 막아줍니다. 왜냐하면 보현행에 있는 것은 부처님 무량공덕뿐이기 때문입니다. 내 죄가 아무리 깊더라도 부처님 무량공덕 앞에서는 한 조각 티끌도 되지 못하는 것! 그러므로 보현행은 무량 업을 무량 공덕으로 지워 나갑니다. 보현의 서원과 행을 가지고 나아가는 그 자체가 무생(無生)의 참회행인 것입니다.


보현행원은  명상입니다. 따로 명상을 하지 않아도, 아니 명상할 줄 모르는 분들이라도 <간절히 서원을 세우는 그 자체>가 명상을 가져옵니다. 또한 공경, 찬탄, 공양, 참회의 마음을 <골똘히 내는 것 자체>가 선정 상태와 둘이 아닙니다(不二). 실지로 해보면 보현명상만큼 쉬운(?) 것도 없습니다. 고맙고 잘했고 미안한 마음이 들 때, 내 마음에 잡념 망상이라고는 이미 없는 것입니다.

 

보현행원은 반야안을 갖게 합니다. 세상을 향해 오로지 공경의 마음, 찬탄, 공양의 마음을 낼 때, 분별로 얼룩진 나의 삶이 분별없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공경만 있고 찬탄, 공양만 있는 곳이 보현의 세계일진데, 그동안 밉고 싫고 좋고 나쁘고의 마음으로 바라보던 세계가 홀연히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애증(愛憎)심을 떠나고 보면 모든 것은 통연명백하니, 중생이 있던 곳엔 부처님이, 무명이 있던 곳엔 찬란한 반야의 태양이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여실지견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현행원은 연기입니다. 모든 것이 연(緣)하여 있구나, 하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게 합니다. 말로만 듣던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 내가 체험하는 연기>인 것입니다. 나와 네가, 시간과 공간이, 과거와 현재 미래가 더불어 있기에 이 세상은 참으로 고맙고 서로가 공경하고 서로가 찬탄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복덕, 지혜가 모두 충만하니, 보현행원은 <그 자체가 복덕 자량 지혜 자량>입니다.

 

이렇듯 모든 공덕, 모든 가르침이 보현의 원과 행 속에 모두 들어 있고 현실로 현전(現前)하게 됩니다. 그러니 <불가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이라> 하는데, 이런 보현행의 실체를 알지 못하시니 그저 수행이나 견성과는 상관없는, 그런 것 다 하고 난 뒤 시간 날 때 하는 최후처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2.하화중생의 방편으로만 생각하는 일

본래 불교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모든 불자님들의 소망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보현행원을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깨달음과는, 즉 상구보리와는 상관없고 오직 하화중생의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구보리를 하기 위해서는 보현행원을 해서는 안 되고 다른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다. 보현행은 깨달음과는 무관한 줄 아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보현행원은 깨달음을 가져옵니다. 물론 깨달음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행원은 깨달음이 물밀 듯 밀려오게 합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깨달음이 있었는가 할 정도로 행원은 지금까지 모르고 지내던 세상의 진리성(眞理性)을 밤하늘 별처럼 드러내게 합니다. 증도가의 말씀처럼, 무명이 바로 부처님의 모습이요(無明實性卽佛性), 이 허깨비같은 덧없는 몸뚱아리가 바로 그대로 진리의 몸(幻化空身卽法身)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보현행원은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가르침입니다. 상구보리하고 나중에 하화중생, 또는 하화중생하고 나서 상구보리가 아니라 <보현행을 하는 즉시 보리와 제도중생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행원의 깊은 소식을 알지 못하고 그저 보현행을 하화중생의 방법으로만 생각하니 행원은 <오늘날의 나의 이야기>가 되지 못하고 <저 먼 훗날 남의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보현행은 깨달아야만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또 깨달은 후에야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한 마음 사무칠 때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게 보현행입니다. 수행 많이 한 분들만 아니라, 번뇌 가득한 범부 중생도 할 수 있는 것이 보현행인 것입니다(출전의 보현, 입전의 보현, 과후의 보현 참조). 이러한 보현행은 즉신성불을 이루게 합니다. 우리가 보현행을 하는 것만큼 우리는 이미 부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신성불을 주장하는 밀교의 가르침이 화엄에 기반함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할 것입니다.

 

 불교는 무엇이든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걸 경계합니다. 선정이 따로 있고 해탈이 따로 있고 중생의 삶이 따로 있고 성자의 수행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는 결코 따로 있는 것을 설하지 않습니다. 번뇌 속에 해탈이 있고 수행 속에 공덕이 있고 생사거래 속에 불생불멸이 있는 것을 설하는 게 불교입니다. 기실 불교가 그런 것이 아니라 <진리가 그런 것>입니다. 이 세상의 참 된 모습은 결코 분리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차별 가득하게 보이는 이 세상의 진실 모습입니다. 따라서 공부를 하든 수행을 하든 무얼 하든 우리는 <따로> 다시 <무엇을 구하는> 태도를 경계해야 합니다.


3.보현행원을 배울 생각을 안하는 일-상식(?)으로 아는 행원을 화엄의 행원으로 착각한다

누가 보현행을 이르거든 함께 모여 환희하라고 경에는 이르건만, 제가 감히 보건대 죄송한 말씀이지만, 우리 불자님들은 보현행을 배울 생각을 하지 않으십니다. 겉보기에 다 아시는(?) 내용이라 그런지,  보현행원을 배울 마음을 도무지 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보현행원을 나는 알고 있다, 또는 이미 행하고 있다며 <내가 생각하는 행원>을 <화엄경이 말하는 보현행원>으로 착각하십니다. 


 화엄에서 말하는 보현행원은 우리가 흔히 아는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가령 행원의 처음이 공경인데, 행원의 공경을 세속에서 말하는 그런 공경으로 알면 큰 착각입니다. 화엄의 공경은 우리가 아는 그런(?) 공경이 아닌 것입니다. 엄청난 비밀(?)이 화엄의 공경에는 숨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화엄의 공경을 우리 불교계는 배울 생각을 도무지 하지 않는 것입니다.


대강 생각나는 세 가지만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더 많은 말씀을 드리고 싶으나 너무 드리고 싶은 말씀이 많아 일단 이것으로 그만합니다. 더 드리고 싶은 말씀은 덧글이나 새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임금님의 과제와 달래처녀의 지혜




 

                                   
임금님에게 외아들이 있었는데 며느리를 고르게 되었다.
앞으로 이 나라의 왕후가 될 사람이므로
가장 슬기로운 처녀를 찾는 것이 문제였다.

                      
임금님이 며느리를 뽑는다는 광고를 듣고
                    아름다운 처녀들 수백명이 궁전으로 모여 들었다.
                         임금님은 이 처녀들에게 시험문제를 냈다.




                         
"너희들에게 쌀 한되씩을 주겠다.
                       이것으로 한달 동안을 먹다가 다시 모여라."

 


                               처녀들은 큰 걱정이었다.
                        쌀 한 되라면 사흘이면 다 먹어 버릴만한
                      
                                
적은 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처녀는 멀겋게 쌀물을 끓여서 마시기도 하고
                          어떤 아가씨는 처음부터 굶기도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처녀들은 아예 포기해버렸다. 

                



 
그런데 그 처녀들 중에 달래라는 어여쁜 소녀가 있었다.
                  달래는 임금님의 쌀을 앞에 놓고 밤새도록 연구를 했다.

               "훌륭한 임금님께서 이런 엉터리 시험문제를 내실 리가 없다.
                             임금님의 생각이 무엇일까?"





                     아침이 되어서야 달래는 무엇을 깨달았는지
                            무릎을 탁 치고 방실 웃었다.
              달래는 곧 부엌에 가서 그 쌀 한되를 가지고 몽땅 떡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예쁜 옷을 차려입고 시장에 나갔다.
                  임금의 며느리감쯤 되는 이 아름다운 처녀가 떡을 파니까
                                  참 팔리기도 잘 했다.
                       동네 총각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떡을 사먹게 되었다.





달래는 떡 판 돈을 가지고 다시 쌀을 팔아 떡을 만들었다.
                         이제는 더 많은 떡을 만들 수가 있었다
 
 


                   .
                         달래는 떡장사에서 아주 재미를 부쳤다. 
             
                    


                    
그리고는 남들처럼 굶는 것이 아니라
                    장사해서 번돈으로 먹고 싶은 것을 실컷 사 먹었다. 
        



  
그러다 보니까 몸도 건강해지고 떡판을 이고 다니며
                            햇볕에서 일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얼굴도 알맞게 타서 더 아름다워졌다. 



            
                 한달이 지나고 마감날이 되었다.
                임금은 높은 보좌에 앉아서 궁궐로 들어오는 처녀들을 보고
                                    얼굴을 찌뿌렸다. 
        



                           
인력거에 탔거나 아버지 등에 업혀 오는 처녀들은 사람이 아니라,
                            뼈만 앙상하게 남은 송장들이었으니까. 
      


     
                 드디어 달래가 들어왔다.
                      달래는 힘차게 두 팔을 흔들며 들어왔다.
               그 뒤에는 쌀가마니를 가득 실은 소달구지가 따라 들어왔다. 
   



 
"임금님께서 주신 쌀 한 되로 장사를 하여
           그 동안 제가 잘 먹고 남은 것이 한 달구지나 되었사오니 받으시옵소서." 



임금님은 달래의 이야기를 듣고 정말 기뻐하셨다.
                                  그리고 한 말씀을 하셨다.




  "달래는 있는 것을 앉아서 먹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일해서 그것을 불릴 줄 아는 참으로 지혜로운 규수구나.
                   이 나라의 왕후는 일하기를 즐거워 하고 
                   지혜가 있는 달래가 되어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