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간화선 시리즈1-생활선아카데미 월암스님

2012. 5. 25. 11:1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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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간화선'의 첫 강의가 3월28일(수) 19:00~21:00까지 대각사에서 있었습니다.

첫 시작으로는 성공적으로 63분이 참석하신 가운데 여러말씀을 하셨으나 몇 가지만 소개드립니다.

 

스님께서 이런 공부 모임을 시작하고자 하는 것은 신앙과 참선수행과 생활이 하나가 되어 한국의 불교가 지금보다 몇 단계상승하는 것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하신다는 말씀이 있었으며,

동시에 신심과 원력이 따르지 않으면 수행이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1) 세계곳곳의 바다는 각각 지형과 해류와 기온과 바다의 깊이 등 환경적인 영향으로 비록 다르게 보일지는 몰라도 결국은 바다는 一味 이듯이,  

불교의 가르침도 염불이든 위사빠나든, 간화선이든 모두가 하나임을 알고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2) 참선이란, 선것은 익게하고, 익은 것은 설게하는 것이다라 하셨습니다.

즉, 우리의 수없이 계속되어 온, 몸에 익은 業識妄念은 설게하고, 禪, 眞如本性처럼 몸에 설익은 것은 익도록 하는 것(대혜선사)이 禪의 요체란 말씀이었습니다.

 

3) 우리가 다니는 길도 잘 다니는 익숙한 길이 있듯이, 생각도 길이 있다.

그 길이 습관이 되고 業이 되는 것이니, 항상 생각을 바르게 가져야 하고,

業의 생을 願의 생으로 바꿀 수 있도록 반복 수행해야 한다.(이를 습인(習忍)이라 하심)

 

4) 우리가 늘 쓰는 보살이라는 말이 얼마나 거룩한지를 설명하여 주었습니다.

 

 

2차는 4월4일, 19:00~로, 충무로역 #8 출구역 인근의 센트럴 오피스텔 308 호실에서 있습니다. 

많이 참석하시어 생활선을 통해 스님께서 원하시는 한국불교의 중흥을 기대해 봅니다.  

월암 스님께서 중요시하는 생활 속의 선, 생활 속의 불교를 지향하는 생활선 아카데미’2회차 공부가 있었다.

장소는 바뀌었지만 지난 회와 유사하게 약 60여분이 참석하였고, 우리 금강카페에서는 경주법사님, 무착님, 수형님, 승진행님, 여여성님, 정심화님, 묘정님, 대도행님, 그리고 저가 참석했다(더 계셨는데 몰랐을 수도)

 

언제나처럼 우렁찬 목소리에 혹해서, 돌을 던지면 던진 사람보다는 돌을 쫒아가는 개꼴이 나지 않도록, 목소리보다는 스님의 법문 말씀 중에서 요체를 간직하기 위해 필요한 메모를 하면서 법문에 귀 기울였다. 다음은 스님의 법문의 요지.

 

수행이 없는 불교, 수행을 통한 깨달음이 없는 불교는 정법이 아니다.

수행방법에는 염불, 참선, 주력, (참회) 등 여러 방법이 있지만, 수행을 하는데 있는 전제조건이라 할까 아니면 수행의 첫걸음이라 할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발심, 즉 발보리심이다.

수행을 통한 결과를 대중에게 회향하겠다는 그런 발보리심!

초발심시변정각, 처음 발심 했을 때의 그 마음에서 바로 정각을 이룬다는 말도 그래서 있다.

 

금회의 법회 범위는 귀의 신심, 발보리심, 출가의 3부분으로 되어 있다.

무엇보다 佛法僧 三寶에 귀의하는 것이 공부의 첫 걸음이고,

둘째는 마음이 부처요, 사람이 부처라는 확실한 믿음(신심)을 가져야 하며,

셋째는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우리의 자성인 본래부처를 회복하고 일체중생을 성불(내가 먼저가 아닌 自他一時 成佛道)시키겠다는 원력, 發心이 있어야 한다.

신심과 원력을 가지고서 이를 바탕으로 한 수행, 이것이 진정한 수행이다.

 

혼자 고요히 틀여 박혀 수행해 見性을 하더라도 중생구제의 원력이 없으면 이는 부처가 아니다.

가난한 자가 있기에 부자가 있듯이 衆生이 있기에 부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육조 혜능 스님도, 진정한 고요함은 움직임이 있는 가운데 있는 고요함이라 했다.

 

우리가 이렇게 좌복에 앉아 있지만, 그냥 좌복에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내가 본래부처다. 일체가 다 한 것이다. 하는 그런 자리에 좌복을 딱 깔고 앉아야한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도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이라했다....

일체가 다 공하는 사실, 즉 지나간 밤의 꿈은 小夢이며, 인생사 길어야 100년은 大夢이다.

지난 밤 꿈속의 그 악몽도, 즐거움도 깨면 아무 것도 없듯이, 우리 인생, 인연으로 이루어진 이 몸도 꿈을 깨 보아야 空하다는 사실을 알지, 그 전까지는 아무리 말해도 모른다.

 

그러나 비록 이런 사실을 깨우쳐 알지는 못해도, 理致로, 6(의식)으로라도 일체가 공하다는 사실을 알고 수행해야 한다.

 

중생이냐 부처냐의 차이는 내가 생각, 온갖 망념에 휘둘리면서 사느냐, 아니면 생각과 나를 분리해서 사느냐의 차이다. 생각을 하되 무기에 떨어지지 않고, 나를 생각과 분리해 무념으로 살면 부처이다.

 

어리석은 생각, 화나는 생각, 탐하는 생각 따라 내 마음이 움직이면 곧 그런 생각과 내가 동일시되므로, 생각을 바로 볼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순간순간 덮치는 망념, 어리석은 생각, 화나는 생각 생각을 덥석 물어 그곳에 끄달리지 마라.

생각과 나를 분리해 무념으로 살면 부처요, 망념된 생각을 따라가면 내가 화가되고 망념이된다.

 

그래서 경전에도 념념보리심 처처안락국이라 했다.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도 같은 의미다.

응당 머무름없이, 즉 경계에 끄달리지 말고 보리심을 내야 한다.

 

중생은 앞서 말한 것처럼 개가 돌을 쫒아가듯, 그냥 경계를 덥석 물어버리나, 본래부처 자리에 앉으면 태풍과 같은 경계가 와도 요지부동이 된다.

 

 경계에 끄달리지 않기 위해서 이 뭐꼬一念으로 하되, 생활 그 자체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가운데서 一切皆空자리에 앉아 확대해 나가는 것이 진정한 생활선이다.

그리고 그 첫 걸음이 바로, 생각 바라보기 이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면, 수시로 솟아나는 생각은 어쩔 수 없지만 이 생각에 빠지지 않고, 이를 창조적인 보리심으로 전환하는 것이 생각 바라보기이다.

 

숟가락이 한평생 입속을 들락거려도 아무 맛도 모르듯이, 이런 이치를 모르고는 아무리 절간 문이 닳도록 절에 다녀도 헛일이다.

 

보리방편문에도 설명되어 있는 삼신일불 아미타불.

이미 아는 대로 법신은 내가 부처(자성불)라는 사실, 이는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 이기도하다.

법화경 장자편에 나오는 잃어버린 거지 아들을 처음부터 너가 고관대작의 아들이라 하면 놀래서 도망갈 것을 우려해, 차츰 차츰 허드레 일을 시켜가면서 최종적으로 그 집의 아들이요 주인인 것을 알려준 것은, 이는 처음부터 우리가 바로 부처다 하면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 이렇게 비유적으로 내가 주인공임을 단계별로 깨우쳐 나가도록 설한 것이다.(성경의 '돌아온 탕자'도 거의 유사)

 

보신불은, 법신을 바탕으로 이를 믿고 수행해 부처가 된 것을 보신불이라 한다.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약사여래불 등 수많은 부처님과 보살이 다 보신불이다.

보신불은 법신불을 다시 드러낸 것이지만 수행의 결과로 나타난 무한 공덕을 갖춘 부처님이 보신불이다. 또 이를 인격화시면 원만보신 노사나불이 된다.

 

다시 정리한다면, 마음을 생각 따라 쫒아가지 말고, 고요히 의 자리에 앉아 삼보에 귀의하며,

내가 부처요 마음이 부처다.라는 信心

자타일시 성불도(自他一時 成佛道)하겠다는 願力을 가지고 ,

생활 속의 선, 생활 속의 불교를 실천하는 것이 오늘의 불자가 해야 할 일이다.

 

또한 이런 수행의 첫걸음이 생각 바라보기, 생각 생각마다 경계를 쫒아 갈 것이 아닌 내가 이생각의 주인이 되어,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자리 그 자리를 이 뭐꼬?” 하면서

생활 속의 선을 실천해 나가야 한다.

바쁜 마음에 정리한 것이라 조금 부족하더라도 널리 양해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모두 성불하는 그날까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우리 금강카페 회원으로는, 제가 아는 분은 12명이 참석(저, 경주님, 수형님, 서미님, 여여성님, 무착님, 묘정님, 정심화님, 대각행님, 대도행님, 보리수님, 마니심님)한 이번 주의 학습범위는 발보리심(發菩提心)出家였다.

먼저 원효스님의 발심수행장을 보면, “모든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한 것은 오랜 겁 동안 욕심을 버리고 고행(수행)을 하였기 때문이요, 모든 중생이 삼계화택을 윤회하는 것은 한량없는 세월동안 탐욕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철스님은 불교란 부처를 믿는 종교가 아니라 부처가 되는 종교다라고 하셨다. 즉 이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깨닫는 깨달음의 종교라는 가르침이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수행깨달음을 강조했다.

여기서 불교와 타 종교의 차이를 알 수 있다 

 

 

그림에서처럼 신해행증(信解行證)‘의 바탕위에 서 보리심을 내어야 한다.

 

반복하는 말이지만 우리가 실제로 깨쳐서 도달한 경지는 아닐지라도, 理致로라도, 일체가 하다(我空, 法空), 내 마음이 부처고, 우리 모두가 본래부처, 우리는 이미 깨친 존재이다, 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깨쳤다고는 하지만 워낙 그 힘이 미약한 반면에, 업력(業力 : 업이 끌어당기는 힘)이 강해서 발현(發現)이 안 될 뿐이다. 이런 업력이란 제 8식인 아뢰야식에 다 저장되어 있다가 점점 더 커질려고 하고 또 순간 순간 뛰쳐 나갈려는 성질이 있어, 언제든지 우리의 중생심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중생의 업력에 의한 삶, 부처의 원력에 의한 삶으로 바꾸기 위해 수행(苦行)을 할 필요가 있는데, 그런 방법으로 절, 참선, 염불 등도 이런 수행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의식 작용인 6식의 뿌리에는 7식인 말나식(근본 無明)이 있고,

7말나식의 뿌리에는 8 아뢰야식이 있는데, 여기는 선악을 떠나 우리가 잠시 생각만 해도 그대로 그런 것이 저장되고 종자가 되어 인연이 닿으면 언제든지 싹이 틈을 말하는 것.

그리고 8식의 뿌리에는 9식인 암마라식(眞如佛性, 청정 그 자체)이 있음.

바닷물이 위나 중간에는 흐려도, 저 심해저 끝에는 청정함만 있는 그것처럼]

 

무량수경종요에서는 두가지 發心을 설하는데, 첫째는 수사발심(隨事발심), 즉 번뇌가 무수하지만 모두 끊기를 원하고, 선법이 무량하지만 모두 닦기를 원하고, 중생이 무변하지만 모두 제도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이는 실천하는 발심,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홍서원과 같은 것이다.

둘째는, 순리발심(順理발심)이란, 諸法한 이치, 금강경의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처럼, 즉 제법이 꿈이요, 환상이요, 물거폼이요, 그림자요, 이슬이요, 번개와 같은 그런 이치를 알고서 닦아 나가고 중생을 제도하기를 원하지만, 제도하는 자와 제도받는 자도 없다는, 無相을 철저히 이해한 발심을 말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네 가지가 있다. 인생난득(人生難得), 佛法난득, 장부(丈夫), 정법(正法)난득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사람 몸 받았고, 불법 만나 공부하고, 무상보리심(보살심)을 발심했고, 불법 중에서도 정법 만나 공부하고 있으니, 이 세상에서 가장 무량한 복을 받았고, 가장 행복한 사람임을 다시 한 번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보리심을 일으키고 나서 해야 할 다섯 가지 일로는, 좋은 벗을 가까이 하고, 성내는 마음을 끊고,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고, 연민의 정을 일으키고, 끝없이 정진, 하는 것이다.

성내는 마음을 끊음에서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흔히 우리는 화가 나면 속에서 천불이 난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런 속에서 솟아오르는 천불(불같이 화난기운)천불(千佛) 승화시킬 줄 알아야 한다.

금강경에서도 須菩提 忍辱波羅蜜 如來說 非 忍辱波羅蜜 是名忍辱波羅蜜 何以故 須菩提 如我昔爲 歌利王 割截身體 我於爾時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이 있지만, 여기서 인욕바라밀은 그저 참는 수준의 인욕(忍辱)이 아니라, 이미 모든 것이 함을 알았기에 참을 것조차 없는 도리를 깨친 것을 말한다.

 

다음은 出家편이다.

지혜를 얻기 위한 出家가 있으면, 그 반대로 入家, 다시 말해, 常樂我淨의 집에 들어가고, 으뜸가는 진리의 집에 들어가고, 法身의 집에 들어가야 하고, 생사와 열반이 머묾이 없는 집에 들어가야 한다. 즉 생사를 위해 출가하고 열반을 위해 입가해야 한다. 동시에 깨달음을 성취한 후의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보살행이 뒤따라야 하는 법을 말한다.

 

출가는, 몸의 출가와 마음의 출가가 있으니 出家사문처럼 出家出家는 못되더라도, 在家는 몸은 집에, 속세에 있더라도 마음은 출가하여 수행하는 마음가짐을 지니는, 在家出家는 되어야 한다.

그러나 재가자와 출가자가 별도로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 서로 아끼고 의존하며 함께 법륜을 굴려야 할 부처님의 제자로서의 사부대중(四部大衆)임을 알고서, 같은 목적지 즉, 열반을 성취하기 위한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귀중한 말씀을 일일이 다 전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자신의 미약함을 느끼면서, 自他一時成佛道를 향해 함께 나아갈 수 있기를 발원합니다.

 

4월 18일 월암스님 '친절한 간화선'(4) 강의

(조계사 앞 템플스테이통합정보센터 3층 보현실을 가득 메운 가운데 스님의 강의 시작)

  명관거사님의 출장으로 대타로 가능한한 월암스님의 법문을 있는 그대로 옮기려고 했사오니

   허물이 있으면 모든 것이 저의 과오니 잘못된 것은 수정해주시기 바랍니다.

 

제2장 습인(習忍)

 

습인이란 닦아서 익힌다는 뜻으로 위없는 보리심을 내고 수행으로 거기에 길들이는 것.

천수경 “무상심심미묘법, 백천만겁난조우, 아금문견득수지, 원해여래진실의...”도

불보살의 원력으로 살겠다. 원생으로 살겠다는 의미이다.

 

중생은 업력에 의해 당장의 수행과 교화가 익숙하지 않다.

이를 익숙하게 하는 것이 습인(習忍)이다.

 

대혜종고 스님 : 선(禪)이란 익은 것은 설게 하고, 선 것은 익게 하는 것이다.

                             (중생 습기, 번뇌)          (수행, 불성, 깨달음)

 

금타선사 금강심론

해탈십육지(解脫十六地)에서 3번째가 습인지(習忍地)이다.

 

청화스님은 ‘습인지’에 대한 해설 가운데서 ‘복인에 대하여

                                                              (번뇌를 다 끊는 것이 아니라 번뇌를 눌러 억제하는 경지)

복인 : 상 - 道種人(도종인 : 이미 도의 종자가 심어져 범하려 해도 안 되는 것)

          중 - 性忍(성인 : 성품에 종자가 깊어 가는 것)

          하 - 習忍(습인 : 강한 의지로 공부를 익혀 가는 것)

 

절집에서 처음 출가하면 “중 물들인다”는 표현- 수행자의 습의, 정신과 자세를 익히는 것.

선방에서는 ‘장판 때 묻힌다’는 표현-신심, 원력, 발심으로 선, 교, 계율, 선정, 지혜를 얻는 것으로 곧 습인의 과정이다.

 

제1절 참회

 

(89쪽 중간)

그러므로 ‘불명경’에서 이르기를

불법 가운데 두종류의 건아(수행자)가 있으니

① 성품이 악을 짓지 않는 건아-다겁 생래에 원생, 원력으로 오신 분.

악을 짓고 참회할 줄 아는 건아- 이러한 사람은 마땅히 조용한 빈 곳에 머물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항상 좌선하며,

    그리고 대승경전을 독송하면 선정삼매의 경지가 나타난다.

 

(89-90쪽)

참회에서

참(懺)은 잘못을 뉘우치는 것,

회(悔)란 뉘우침으로 말미암아 다시는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천태스님 ‘지관좌선법(止觀坐禪法)’

1, 작법(作法)참회 : 의식을 통해서 참해하는 행위(소승참회)

2. 관상(觀相)참회 : 선정에 의거하여 참회하는 것(대승참회)

3. 관무생(관무생)참회 : 지혜에 의거 참회하는 것(대승참회)

 

(92쪽)

無相(무상)이 곧 實相(실상)이다,

無相空相(공상)이므로 無相이다

 

‘보현관경’의 게송

“일체 업장의 바다는 모두 망상에서 생기나니

  참회하고자 한다면 정좌하여 실상(實相 : 존재의 참모습, 불생불멸)에 집중하라.

  죄는 서리나 이슬 같은 것, 지혜의 태양이 능히 소멸시키네.

  그러므로 지성으로 육근을 참회할지라“

 

→ 중생은 한 생각 일어나면 바라보아야 하는데

    그것을 ‘나’라고 생각한다.

    미운 대상은 없는데 미운 생각을 내 마음에서 일으킬 뿐이다.

 

물론 공분(公憤)이나 원력에 따른 방편으로 화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원력으로 화내는 것과 과보로 화내는 것을 잘 구별해야 한다.

 

 (물질적으로)몸의 형상 이든 心相 이든 공한 상이다.

 

집도 하나의 상(相)이다.

집은 시멘트, 물, 자갈, 나무, 못 등 각종 재료로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집은 영원한 모습은 아니다.

 

임시로 모인 것, 애초에 있는 것도 아니고, 고정된 모습, 실다운 모습도 아니다.

(인연에 따라 모였기에)空相이다

 

유상(有相)이되, 여러 가지 인연상(因緣相)이므로 무상(無相)이다.

 

금강경에서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어떤 스님 ‘즉견여래= 즉시여래)"

('무릇 있는바 상이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상이 상 아닌(공상. 비상) 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실다운, 고정된 모습, 영원한 모습 × )      

   

금강경無相(무상), 無住(무주)를 설하고 있다.

 

無相 實相(무상 실상)이다

유상은 가상, 무상이 실상이다.

 

무상은 유상에 대한 무상이다.

그러나 무상이라고 공(空), 허무(虛無)에 빠져서는 안된다.

 

유상을 보고 인연으로 있기에 무상임을 알고

공 또한 끊임없이 형상 있음으로 나아간다,

 

유식(唯識)에서

6식(六識)으로 끊임없이 업(業)을 짓는다.

 

이 업이 소멸하지 않고 아뢰아식에 저장된다.

이것이 업장(숨어있으므로)이다.

 

그것들이 육식을 통해 밖으로 나오려고 한다.

 

6식에 물들어 있어서 통찰, 지혜 아닌 고정관념(업식)으로 보게 된다.

 

6식이 짓는 것이 아뢰아식에 갈무리(저장)된다.

그러나 절대적 무, 허무의 무가 아닌 업이 저장된 무(無)로

6식을 통해 나온다.

 

반야심경에서 ‘인연, 조건에 따라 연기되어 空, 즉 ’色卽是空(색즉시공)‘이다.

 

공 또한 공하다.

空亦空(공역공), 공한 모습으로만 있지 않고,

 

공 또한 끊임없이 색(色)으로 드러난다.

이를 ‘空卽是色(공즉시색)’이라한다.

 

현대물리학에서

물건을 쪼개고 쪼개면 분자. 원자. 핵 쿼크가 되고....

쪼개고 쪼개도 에너지가 있다.

그 에너지와 에너지가 합쳐 물질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卽色卽空(즉색즉공)’ 색은 그대로가 공이다.

 

‘월암’(스님)이란

1)이름

2)몸

3)정신(마음)

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 ‘몸’은 ‘地水火風(지수화풍)’으로 잠시 모인 것이다.

 

마음은 ‘受想行識(수상행식)’이다.

그러나 실체는 없다.

중생은 8만4천 마음 가지고 산다.

그러나 마음의 그림자 일뿐 속고 있다

즉, 空하다

 

월암(스님)은 월암(스님)이 아니고 그 이름이 월암(스님)이고

佛法(불법)은 불법이 아니고 그 이름이 불법이다.

 

有相을 보되 無相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無相(무상)이지만 有相(유상)의 입장에서 활용되어야

이것이 중도적 입장(있되 연기이므로 없고, 없되 작용이 있으므로 있는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

 

(99쪽)

원효대사의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

대승경전의 참회에 관한 부분을 모은 것으로 보리심을 발하여 대승을 수행하고, 진실된 참회를 행하려고 하는 수행자들로 하여금 모범을 삼으라는 가르침이다.

 

→ 대단히 훌륭한 가르침이고,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하지 않은 저술을 월암스님께서 잘 번역하였으니 참회할 일 있는 분들은 이것으로 참회하는 습관을 가지면 좋을 듯합니다.

 

제2절 좌선(坐禪)

 

(110쪽)

종색스님 ‘좌선의’에서

“좌선하고자 할 때는 한가하고 고요한 곳좌복을 깔고, 위의(몸과 마음)를 가지런히 한 후에

결가부좌(또는 반가부좌)를 하여 그 모양이 부도(浮屠)와 같아야 한다”라고 하셨다.

                                     (부도란 ① 부처님, ②스님 사후 사리를 모신 것을 의미한다.)

 

(111쪽)

혜가스님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 가운데 좌선에 의하지 않고 성불한 분은 없다. 좌선을 해야 공(功)이 있는 것이니 몸 가운데 스스로 증득(自證)하는 까닭이다.

→ 즉, 몸으로 앉으라, 몸과 마음이 둘 일 수 없다. 먼저 마음을 집중위해 몸이 앉아야 한다. 인도의 선은 좌선법. 그러나 조사선에서는 달라진다.

 

달마스님이 중국으로 오셔서 ‘벽관(壁觀)’을 보면

外息諸緣(외식제연) 밖으로 모든 반연을 쉬고

內心無喘(내심무천) 안으로 마음으로 헐떡꺼림이 없어

心如牆壁(심여장벽) 마음이 장벽과 같으면(마음이 움직임 즉 흔들림이 없으면)

可以入道(가이입도) 가이 도에 들어갈 수 있다.

(외식제연 : 6근이 6경 곧 대상에 꺼둘리지 않은, 보되 본바 없고, 듣되 들은 바 없다. 6식이 경계 놓음)

(내심무천 : 안으로 지향성이 없다. 즉 안으로 구하는 바가 없다. 구하는 바가 있으면 중생, 구하는 바가 없으면 부처다, 다만 부처는 방편으로 구하는데 반해 중생은 내 욕심으로 구한다. 차별경계 없이 구하되 구하는 바없이 구한다. 중도의 관점에서 육근을 놓고 일체의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다.)

 

진정한 벽관이란

心不起(심불기)가 坐禪(좌선)이다(달마스님의‘능가사자기’에서).

 

즉, 요가하는 분들처럼 잘 앉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좌선이다.

 

그런데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어떻게 살아가는가?

 

6조 혜능스님은 無念(무념)이란

아무런 생각 없는 바위나 나무 같은 것이 아니라

생각하되(망념이 일어나되) 생각하지 않는 것(망념에 끄달리지 않는 것)

즉, 念而不念(염이불념)을 말한다.

 

생각하되 생각한 바 없이 하라!

 

생각을 꾹 눌리고 있는 것이 좌선은 아니다.

아무리 큰 바위로 풀을 누르고 있다하더라도

그 풀은 옆으로 나와 자란다.

 

생각하되 생각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집착하지 않는다).

 

혜능스님은 (좌)란?

밖의 일체 경계에 끄달리지(꺼둘리지) 않는 것(念不起, 달마의 心不起)

밖의 경계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곧 정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선)이란 본성(本性)을 보아서(見本性) 어지럽지 않는 것이다.

 

‘性(성)은 일체 상이 (공)함을 말함

자성, 불성, 법성, 본성, 진성 등

 

번뇌 망념 너머 실체적 성품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면

브라만의 참 자아인 아트만과 같은 개념으로 보게 되어 외도가 된다.

 

번뇌를 끊겠다는 것은 번뇌의 공함을 깨닫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煩惱가 곧 보리’가 된다.

 

마음이 오염된 상태가 번뇌이고

일체상이 공함은 표현하기 위해 만든 개념이 ‘’이다

 

단경에서 ‘坐禪’이란 일체 경계에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듣는 즉시 깨달아야(문각聞覺), 이 자리에서 바로 체득(頓悟)해야

며칠후에 복습해서 알아서야...}

 

見成은 相이 空함을 깨닫는 것(空性을 깨달아야)

見相卽衆生, 空相卽成佛(견상즉중생, 공상즉성불)이다.

 

於相離相(어상이상)이 無相(무상)

상 가운데 있되 상을 떠나는 것,

즉 상을 보되 相(상)이 空한 相을 보고 性을 보되 相을 보는 것 곧 中道이다.

 

中道‘질적인 비약’이다.

깨달음을 얻어야 중도를 확실히 체득할 수 있다.

 

꿈속에서 강도를 만났다면

꿈속에서는 실제 상황이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꿈을 깨야한다.

 

꿈속에서 계(契)돈을 타면 은행에 저축하려하지 말고

얼른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깨고 나면 그만이다.

강도는 누가 만드는가 내 생각이 만든다.

내 한 생각이 만드는 것이다.

 

꿈속엔 중도가 없다.

 

중도를 실현하려면 꿈밖으로 나와야 한다.

즉 꿈깨야 한다.

 

우리 중생의 삶 안에서는 중도를 체득할 수 없다

결국 꿈을 깨고 나와야(질적 비약이 있어야) 중도를 실현할 수 있다.

 

수행하여 깨달으라!

즉, 중도를 실현하라.

 

천태스님지관좌선의 행법에 초심자를 위한 ‘다섯 가지 일을 조화롭게 하는(조오사 調五事) 가르침’ 

 ․① 調食(조식 : 너무 배고프게도 않고 너무 배부르게도 않는 것),

  ② 調眠(조면 : 너무 적게 자지도 않고 함부로 많이 자지도 않음),

  ③ 調身(조신: 몸을 너무 풀어놓거나 급하게 다그치지 않음),

  ④ 調息(조식: 숨의 들고 남이 끊어지지 않고, 고요하고 가늘어 있는 듯 없는 듯 하여 정신을 도와 편안히 선정에 듬),

  ⑤ 調心(조심: 정진 중 산란과 혼침에 대해 생각을 조화롭게 함).

 

 

 6근                         6경(진)                         6식(계)

(인식주체)                (객관대상)                      (인식작용, 활동)

안                               색                                 안식계

이                               성                                 이식계

비                               향                                 비식계

설                               미                                 설식계

신                               촉                                 신식계

의(생각)                      법(대상, 경계)                의식계

 

반야심경에서 눈, 귀, 생각이 공하여

있되 없는 것이므로 중도에서 이를 없다고 한다.

 

안식 내지 의식은 인연에 의해 만들어진 그림자일 뿐이다.

그런데 중생은 이것을 ‘마음’, ‘나’라고 생각한다.

 

6근 공, 6경 공, 6식 공(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중생은 하루종일 호( 좋다) 오( 싫다) 중( 중간,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아니다.)

에서 노닌다.

 

하루동안 ‘안이비설신의’에서 ‘좋다/싫다/중간’을 분별하며 살고 있다.

즉 우리의 의식세계는 18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18계는 마음의 그림자로 공함에도

중생은 이를 모르고 끊임없이 18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18계에서 벗어나지 못해 육도윤회한다.

오늘 강의의 요체는 ‘18계가 공하다는 그 자리에서 앉으라’ 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 좌선’이다.

 

반야심경에서 五蘊皆空(오온개공)이라고 했고,

반야경에서는 ‘一切皆空(일체개공)’이라 한다.

 

좌복이 ‘일체개공’이라야

본래부처’는 ‘일체개공’의 그 마음자리다.

 

공한 자리, 본래 부처자리 즉 ‘내가 내 자리에 앉는 것’이다.

 

내가 내고향 찾아 그 자리에 않는 것이다.

이렇게 수행하는 것을 習忍(습인)이라 한다.

 

‘일체개공’ 즉 일체가 꿈속의 일이다.

금강경에서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일체유의법 여몽환포영 )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 "일체의 함이 있는 법은 꿈과 같고 환상, 물거품, 그림자 같으며, 이슬 또는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의 그 자리에 앉으라,

 

일체가 공한 자리를 종교적으로 ‘본래 부처자리’라고 한다.

 

소몽을 깨닫는 것이 아닌, 大夢(대몽)을 깨치라.

꿈 깨고 꿈꾸라, 희망의 꿈, 창조적 꿈, 주체적 꿈을 꾸라.

몸으로 바로 체득(體得) 하여 ‘일체개공 자리’, ‘본래부처 자리’에 앉으라.

 

분별로 아는 것을 다 내려놓으면

무분별의 세계에서 숭산스님의 'don't know', 오직 모를 뿐!’

 

존재실상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궁구하면서 ‘이뭣고?’해야한다.

은산철벽의 자리(벽관), 알음아리를 다 내려놓은 자리에 들 수 있다.

 

양나라 무제가 달마대사에게 “불법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불식(不識)!”(모른다)라고 한 그 자리!

무분별의 자리에서 ‘이뭣고?’를 하라

 

왜 요즘 세상에 도인이 안나오는가

불별로서 따지니까 그렇다.

 

오직 모를뿐!

내가 우주전체라는 마음자리(오직 모를 뿐인 그 자리)에서 ‘이 뭣고?’를 들라!

 

25일 수요일, 약 7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월암스님의 친절한 간화선 5번째 법문이 있었습니다.

우둔해 제대로 정리하여 드리지 못함을 송구하게 생각하오며 정리된 내용만 올려드리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이견왕과 바라제 존자의 대화를 통한 불성(성품)에 대한 이해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와 회의를 하고 돌아갈려고 할 때, 갑자기 김처사! 하고 부르면

무의식중에 뒤돌아보면서 ! 고 대답하는 이것이 불성이고,

이 때 이뭐꼬? 하는 화두를 던지면 순간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이치이다.

 

그러나, 앞에서 공부한 대로 보면, 본성, 불성, 성품자리 또한 공한 것이다. 텅 비어있기 때문에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지만 空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순수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개념화시키고, 분석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우리를 부를 때는 우리는 이미 누가 나를 부른다는 인식이 있기에,

대답은 !, !, ? 등 다양하게 답을 하곤 한다. 즉 분별심으로 이미 오염되어 있다.

그러나 예! 라고 답하기 이전의, ‘누가 나를 부르는구나하고 아는 자리, 생각이전의 자리에 머무르고 살면 바로 부처이다.

 

생각으로 살면 중생이요,

생각이 일어나도 화두나, 염불, 주력 등으로 생각이전 자리로 돌아가 살면 부처다.

 

화가 날 때 화를 내면서 살면 중생이요, 화내는 대신, 화낼 줄 아는 성품으로 살면 부처다.

슬픔일이 닥칠 때 슬픔에 잠겨 살면 중생이요, 슬퍼할 줄 아는 성품으로 살면 부처다.

 

절 입구에 있는 사천왕 상을 보면 크게 화난 얼굴 모습이다.

사천왕처럼 화를 내는 것은 업감중생을 조복시키고, 마구니를 물리치기 위해 화를 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처럼 내는 화는 방편이지 결코 내가 화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살면 화를 내는 것 같아도 부처의 삶이된다.

 

벌레도 건드리면 본능적으로 살기위해 꿈틀거리거나 피하기 마련이다. 누가 가르쳐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 그 불성은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이라는 것이다.

 

 

12연기라고는 하나 이것이 각각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果와 因이 동시에 진행되며, 12연기(三世연기)가 바로 一念연기가 된다.

동시에 생각 바라보기12 인연법의 윤회 사이클을 끊는 것이다.

 

 

다음으로 無生法忍 에 관한 말씀이다.

무생법인, 즉 무생(생멸이 없는) 진리의 법을 인정(인가) 의미에서는 을 쓰야 맞는 표현이겠으나 을 쓴 이유는,

忍, 즉 인욕바라밀, 온몸으로 진리를 체득하지 않고서는 불생불멸의 진리를 얻을 수 없다는 진정한 뜻이 담긴 구절이다.

몸의 수고스러움 없이 진리를 깨달을 수 없.

온몸으로 부딪혀 진리를 체득하라는 깊은 뜻이 담긴 내용이다.

 

잘못 옮긴 부분이나 오역이 있으면 알려주시면 바로잡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금생에 성불하는 큰 원을 세우시고 반드시 성불하시기를 발원드립니다.

 

 

 

 

깨달음의 뿌리


욕망은 화살과 같이 빠르고 정확하다.
두 남녀 사이에서 불붙는 욕망은 번뇌의 뿌리이다. 

 

이성(異性)보다 강한 욕망은 없다.
이 세상에서 이성과 같은 것이 하나만 있다는 사실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성은 번뇌의 뿌리가 아니라 깨달음의 뿌리이다.
마치 메마른 땅이나 사막에서는 연꽃이 피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번뇌 때문에 깨달음의 싹은 튼다.

- 이취경에서

 

 

 

 

 

천국의 門

 

 

세상의 종말이 왔다

이 지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

하나싹만 가지고 저 세상에 가도록 허락했다 .

 

어떤 자는 무거운 황금 뭉치를 낑낑대며 지고 간다

어떤 자는 연인의 손을 잡고 시시덕거리며 간다

 

어떤 농부는 씨앗 주머니를 소중히 안고 가기도 하고

어떤 어부는 큰 그물을 메고 가기도 한다

 

말을 타고 가는 자도 있도 수례를 끌고 가는 자도 있다

당신은 무엇을 가지고 가겠는가?

 

그런데 천상의 입구에 이르렀을 때

한 사람에게만 문이 열렸다

병든 노모를 업고 온 가난한 등대지기 였다

 

 

- 임보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