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종사선(三種邪禪)/청화큰스님

2012. 5. 5. 21:1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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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종사선(三種邪禪)

청화큰스님   

 

삼종사선(三種邪禪)이라, 세 가지 삿된 참선을 말하는 것인데 그 하나가 암증선(暗證禪)이요, 그리고 문자선(文字禪)이라. 오직 문자나 이론적인 개념으로만 따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야호선(野狐禪)이라, 들 야()자, 여우 호()자. 여우란 놈은 재주와 꾀가 있어서 자기가 필요할 때는 세 개의 구멍을 판다고 합니다. 구멍을 한 개 파놓으면 적들이 침범하면 바로 잡히니까 세 개를 파놓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피한다고 합니다.

그와 같이 여우 모양으로 잔꾀를 부려 미처 못 통하고 통했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재주가 좀 있고 위풍도 좀 갖추고 큰소리 치면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도인처럼 보이기도 하겠지요. 못 통했으면서 통했다고 하고 증명하지 못했으면서 증명했다고 거짓말 하는 것이 야호선, 즉 여우같이 삿되게 하는 참선입니다.

 

먼저 암증선은, 부처님 가르침이나 조사 스님들 가르침에는 참선하는 방법과 진여불성 자리를 증명해 가는 과정을 우리에게 극명하게 밝혀 놓았습니다. 그런데도 게으른 사람들은 책도 보기 싫어하고 더구나 불경이 한문으로 되어 있는지라 보기가 좀 어렵고 하니까 그저 화두만 들고 다른 것은 다 무시를 해 버립니다.

우리 선방에서도 전혀 경을 못 보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해서, 물론 정진 할 때 경을 보면 방해가 되는 수가 있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부처님 경전은 소중한 생명의 글입니다. 다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금과옥조 같은 글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경서나 훌륭한 선지식들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고서 덮어놓고 하는 참선을 암증선이라 합니다.


그렇게 암증선을 하면 자기 공부가 얼마나 진전 되었는지 스스로 점검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 놓으면 섣부른 걸 가지고 다 되었다고 교만심을 부리기도 하겠지요. 선지식들의 말씀도 곧이 듣지 않고 남의 충고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멋대로 행동할 때는 틀림없이 아만심(我慢心)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는 겸허하게 앞서간 선배들, 선지식들, 부처님 경전들을 충분히 참고로 해서 공부해 나가야 합니다.

그 말씀들은 모든 중생들이 성불에까지 이르는 길을 명료하고 소상하게 밝혀 놓은 길잡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길을 게으름 부리고 업장이 많으면 더디게 갈 것이고 부지런하고 업장이 가벼우면 훌쩍 뛰어 빨리 갈 수도 있겠지요. 우리가 그런 길을 무시하고 외면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따라서 암증선을 피하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경전도 많이 보시고 특히 참선에 관한 여러 가지 책들도 보고 선배들에게 묻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암중모색하는, 모르면서 헤매는 암증선을 피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문자선(文字禪)이라, 참선이라 하는 것은 실제로 마음을 닦아야 하는 것인데 경만 많이 보고 이론적인 쪽으로 너무 치우쳐서 실지로 참선을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아무리 바빠도 조석으로 한 삼십분 정도는 하셔야 합니다. 우리 죽어서 갈 때는 자기 몸뚱이마저 버리고 가지만 오직 생전에 닦은 법력만은 가지고 갑니다. 이것이 우리한테는 가장 큰 재산입니다. 따라서 평소에 조석으로 삼십분이면 하루 한 시간, 한 시간 정도면 그렁저렁 헛생각도 하고 그냥 지나가 버리는 그런 시간입니다.


여기 젊은 스님들도 있지만 이 분들은 하루에 다섯 시간도 못 잡니다. 재가 불자들도 하루 다섯 시간 정도 자면 충분합니다. 공부를 많이 하신 스님들은 안 자고 몇 달이고 몇 년도 배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한테 갖추고 있는 진여불성, 우리 본성이 바로 부처기 때문에 우리가 정작 의지를 가지고 한다면 능히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바구라(Vakkula)존자라, 바구라존자는 부처님 십대 제자 중의 한 분입니다. 그 분은 140세를 사신 분인데 장수 제일 바구라라, 그 분은 자기 평생에 한 번도 누운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른바 장좌불와(長坐不臥)라, 항시 앉아서 생활했다고 합니다. 요새 장좌불와 하는 사람들을 보면 벽에 기대기도 하고 합니다마는 그 분은 한 번도 벽에 기대지도 않고 오로지 앉아서만 지냈다고 합니다.

장수제일(長壽第一)의 바구라존자는 음식도 하루 한 끼만 먹었다고 합니다. 그 분은 또 무병제일(無病第一)이라, 승려가 되어서 140세까지 살면서 한 번도 앓아 누운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 할 때는 ‘그렇게 무리를 하면 몸이 어떻게 당해 낼 것인가, 신경통도 생기고 영양실조로 쇠약해져서 쓰러지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무병제일(無病第一), 장수제일(長壽第一)의 바구라 존자, 그 분은 그와 같이 평생을 앉아서 하루 한 끼만 먹도고 무병하게 장수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한테 들어있는 부처님 기운, 우주의 정기 에너지는 무한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원자력 같은 것은 광파(光波)의 속도로 초속이 30만km나 되지 않습니까, 그것보다 훨씬 더 고성능의 기운이 우리에게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불성에 들어있는 그 기운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대승신앙은 우리한테 들어있는 무한의 공덕을 믿는 것입니다.

불경(佛經)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들어있는 그 무한의 공덕을 믿으면 바로 ‘즉시입필정(卽時入必定)’이라, 그 믿음으로 바로 선정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나한테 있는 무한력을 믿으면 즉시에 삼매에 들어간다는 것인 데도 못 믿으니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것은 성자의 말씀을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문자도 많이 배우고 불경도 많이 봐야 되겠지만 참선을 해서 우리 마음을 자꾸 맑혀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경험하신 것처럼 반야심경 한 편을 보더라도 참선 한 철하고 볼 때와 두 철하고 볼 때와는 해석이 다릅니다. 똑같은 법문이지만 성자의 법문은 우주의 본질을 말한 법문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정화가 되면 정화된 만큼 해석을 달리 합니다.

참선을 오랫동안 하고서 경을 보면은 ‘그렇구나, 그렇구나’ 하고 평소에 풀리지 않던 까다로운 문제가, 자면서 꿈속에서도 문득 풀려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무엇이든 일구월심으로 생각하면 우리 마음이란 것이 원래 뿌리가 부처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풀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도 젊었을 때 한 번은 꿈을 꾸었는데, 도륜 스님이라는 도반하고 꿈에 어디를 가는데 아주 장엄한 궁전이 나왔어요. 그 궁전 앞에 문지기가 지키고 있었는데 그 문지기가 문 앞을 가로 막고 서서 자기가 묻는 말에 답을 못하면 못 들어간다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물어보라고 하니까 저한테 먼저 묻기를 “지옥이 어디 있는가?”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저한테 그런 질문을 했더라면 그때 당시는 삼십대도 채 안된 나이라 선명한 답을 못했겠지요. 그런데 꿈에서는 아주 명쾌하니 ‘혜안관시 지옥공(慧眼觀時 地獄空)’, 이렇게 대답이 나온단 말입니다. ‘혜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지옥은 공()이다.’ 평소 같았으면 그런 질문에 그 대답이 나오기가 어려웠을 텐데 꿈에서는 아주 명쾌하게 대답을 한 것입니다.

투철하게 혜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 지옥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혜안관시 지옥공(慧眼觀時地獄空)’이라, 지옥이라는 것이 우리 중생의 어두운 눈으로 봐야 있는 것이지 정말로 맑고 투철한 마음으로 보면 지옥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상시에 무던하게 부처님 생각하고 정진하다보면 이런 때 신기하게 꿈에도 나올 수 있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불교를 안 믿는 분도 난해한 수학문제 같은 것을 골똘하게 생각하다 보면 꿈에 그 문제가 풀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 정신이라는 것은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게 무한의 힘이 있는데도 우리는 아주 조금밖에 못 쓰고 사는 것입니다. 인간의 뇌 세포가 백억 개가 넘는다고 하지마는 결국은 십분의 일도 못 쓰고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 사상은 뇌 세포 문제가 아니라 무한의 능력을 내포해 있는 것이고 꼭 인간의 뇌에만 그것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정기는 우주에 충만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성자들은 꼭 뇌 속에 들어있는 뇌세포만 가지고 이래저래 쓰는 것이 아니라 우주 에너지를 그대로 끌어다 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는 허상(虛相)과 법상(法相)이 나옵니다. 허상, 이것은 부질없는 상을 말합니다. 그런데 공부를 않고 한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허상(虛相)과 법상(法相)을 구분 못합니다. 법상은 차근차근 챙기고 허상은 그냥 부정을 해 버리면 되는 것인데, 그 구분을 못하면 이래저래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이나 선지식들 말씀을 참고로 해서 암중모색하는 그런 선은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문자만 따지고 실수(實修)하지 않는 그런 문자선도 경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경전을 대할 때도 적어도 그 경을 보기 전에 다만 몇 분이라도 고요히 마음을 가다듬고 참선을 하고 봐야 경전의 뜻과 내용의 갈래가 잡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경장과 논장을 다 외운다 해도 그것이 갈래가 안 잡히고 통일이 안되면 자기 것이 못 됩니다. 이른바 문리(文理)를 알아야 할 것인데 문리를 모르면 가닥을 못 잡습니다. 참선과 더불어 해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하나하나 가닥이 잡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야호선(野狐禪)이라, 여우같이 교만한 짓은 정말로 우리가 피해야 됩니다. 기독교 사회나 불교 사회나 여우같은 무리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래 놓으면 자기도 망치고 남도 망칩니다. 한 소경이 무수 소경을 인도하다가 수렁으로 몰아놓는 것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불경에도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일맹인중맹(一盲引衆盲)’이라, 한 소경이 많은 소경을 데려다가 같은 함정에 빠져 죽는다는 얘기지요. 잘못된 스승이 남을 지도하고 이끈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두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잘못 지도한 사람은 불교 말로 병도사(病導師)라 그럽니다. 우리 중생을 병들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부처님 법대로 여실하게 말하고 증명하지 않고서 꼭 자기 의견을 보태서 함부로 말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남을 지도할 때 병도사(病導師)를 피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님 법을 말할 때 자기가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꼭 그대로 옮겨주고 자기가 정리한 것만 남한테 밝혀야 하는 것입니다.

 

 

 

 

          野言 / 象村 申欽

 

          桐千年老恒藏曲   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

        梅一生寒不賣香   매화는 일생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月到千虧餘本質   달은 천 번을 이즈러져도 그 본질은 남아있고

        柳經百別又新枝   버들은 백 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올라온다.

 

 

 

 

 

 

  "옛 선조들의 매화 사랑은 단순히 매화의 꽃과 향에만 기인하지 않는다.

 화려한 꽃에 정을 주기보다는 우리에게 도덕적인 교훈이나 상징성을 주는

꽃을 가까이하고 사랑을 주었는데, 추위를 이기고 고운 꽃을 피우는 매화는

불의에 굴하지 않는 선비의 기품과 절조와 비슷하기에 늘 가까이에 두고

노래하며 매화의 기품을 본받고자 하였다.

매화는 고려시대 이래로 추운 겨울철의 세 벗이라는 뜻으로 소나무,대나무와

더불어 세한삼우(歲寒三友)라 일컬어졌으며 난초,국화,대나무와 함께 사군자

(四君子)라 하여 유교적인 이상 인격인 군자를 상징하였다."

 

-(안완식의 '우리매화의 모든것'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