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간화선 시리즈2-생활선아카데미 월암스님

2012. 5. 25. 11:2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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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일(수) 템플스테이관 보현실에서 친절한 간화선 6회차 공부가 있었습니다.

금강카페 회원님께서는 경주법사님, 수형님, 무착님, 서미님, 여여성님, 묘정님, 정심화님, 대도행님, 박인식님, 그리고 저가 참석한 가운데 이번 주는 3장의 善知識4장의 先悟後修 였습니다.

 

날씨 따라, 우리는 더워 죽겠다. 추워죽겠다는 말을 자주하는데, 먼저 이 말부터 생각해보자.

어떻게 하면 춥지도 덥지도 않겠는가?

춥다는 생각이 죽는 곳

덥다는 생각이 죽는 곳 춥다·덥다는 생각(분별) 그 이전의 자리가 바로 피서지, 피한지이다.

, 그런 마음자리를 깨달아 지키는 그 자리가 피서지이고, 그것을 구하는 방법은 수행이다.

 

부연하면, 마음으로는 이해하고 깨달은 것 같지만 수행은 온몸으로 부딪혀 체득(體得)해야 되는 것이지, 머리로만 이해해서는 되는 것이 아니다. 수행함에서 몸의 고단함과 수고로움 없이는 어렵다.

 

다음은 선지식의 정의와 선지식의 분류와 선지식과 도반의 중요성에 대한 설명이다.

 

선지식이란, 원각경에 이르기를

정법에 대한 바른 안목(智慧), 중생에 대한 한량없는 사랑(慈悲), 역사와 사회를 향한 끊임없는 회향(願力)을 실천해가는 대승보살이 참다운 선지식이다.

참됨과 망령됨을 구분해 中道正觀(정견)을 깨달아 바른 지견을 가진 사람이 선지식이다.

부연하면 혜능스님이 6조 단경에서 말한 無念, 無相, 無住를 깨달으면 선지식이다.

무념 無念

於念不念 = 念而不念.

생각하되 생각하지 않는 것이 無念이다.

하루종일 돌아다니되, 한 발짝도 움직인 것이 없는 상태가 무념, 수행자의 경지다.(에 바탕을 둠)

나무, 돌같이 아무 생각 없는 수행이 아니라, 생각하되 생각에 집착하지 않거나 끄달리지 않음

무상 無相

=於相離相. 속에 있으되, 을 떠난 상.

어떤 모습으로 있으나 그 모양을 떠나야 함.

스님신도 서로 절하지만, 절은 받는 자도 절을 하는 자도 없이 할 때, 그때가 無相이다.

중생은 공간, 시간, 모양 속에 갇혀 살아가나 그 (육신), 我人衆壽者상에에 집착하지 않아야 그 것이 無相.

무주 無住

사람의 性品하다고는 하나, 파도 속에 거품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처럼, 사람의 생각도 끊임없이 일어나지만, 이 생각이 흘러가는 생각일 때 無住가 된다.

그 반대가 되면 번뇌망념(煩惱妄念)이 된다.

 

 

선지식을 보지 못하는 것은, 신심, 원력, 진정한 발심이 없고, 도를 사모하는 간절함이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과 역대조사, 눈앞에 부딪히는 두두물물이 선지식이라지만, 그 가운데 눈 밝은 스승을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종경록촬요에는, “좋은 벗이자 스승이기도 한 선지식을 만나기란 하늘에서 겨자씨 한 개를 던져 바늘 끝에 놓는 것과 같다고 했다스승과 동시에 도반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열반경에서는, 네 가지 인연을 갖추어야 를 증득할 수 있다고 했다.

, 착한 벗을 가까이 하는 인연,

기쁜 마음으로 정법을 듣는 인연,

진여의 이치를 사유하는 인연,

부처님 설법대로 수행하는 因緣이다.

 

선지식의 분류에는

외호(外護)선지식: 수행대중을 보호하여 안온하게 수행하게 도와주는 사부대중, 우리도 이미 선지식이다.

동행(同行)선지식 : 대중과 더불어 행동하고 격려해주며 경책해주는 도반

교수(敎授)선지식 선교방편으로 설법해 깨달음으로 인도해주는 스승

 

만공선사께서도 유사하게, 참선은 혼자해서는 안되고, 도량(환경), 도반, 도사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씀하였다.

 

다음은 제4장의 수증론에 대한 설법. 

부처님 열반 후의 分岐 발전과정과 수증(修證)

열반 후

성격

心性論 측면 (분파)

大乘佛性론 측면

중국에서 돈점론

(頓漸論)으로 발전

상좌부

전통, 보수적

심성부정(心性不淨)

성악설과 유사

설일체

유부

불성 始有

수행을 통해서 비로소 불성이 생김

돈점

수증론

대중부

진보, 개혁적

심성본정(心性本淨)

성선설과 유사

대중부

불성 本有

본래부터 불성 갖춤

頓悟

=

 

, 돈점수증론(頓漸 修證(=))은 수학의 경우의 數와 같이, 돈오돈수, 돈오점수, 돈수점오, 돈수돈오, 점오점수, 점오돈수, 점수점오, 점수돈오 등 여러 조합이 가능하나 성철스님은 돈오돈수만이 구경각이라 하심(8백년 전의 보조국사는 돈오점수를 말함)

 

그런 배경에는, 가짜 도인이 많아 종문을 바로잡기 위한 방편으로 여겨지며, 한국 불교의 종지(종풍)는 돈오점수를 표방하지만 어느 것이 옳으니 이를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방편으로서 경우의 수에서 말한 모든 것이 다 필요한 것으로 여겨짐. 

 

청화스님은, 선오후수(先悟後修), 먼저 깨닫고 후에 닦아 나가야 함을 설하심.

이는 돈오점수와 크게 다르지 않으나, 중생으로서의 작은 깨달음(해오)를 거쳐, 성인보살의 경지인 증오를 거쳐 최종의 구경각(대오)에 이를 수 있음을 설하심.

(구경각만을 강조하시면 중생이 쉽게 중생심을 내 포기할 것을 우려해 그렇게 자세히 설명하심)

하지만, 먼저 깨닫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님. 깨닫기 전 까지는 暗中摸索(더듬 수)이라, 어떤 구덩이에 빠질지도 모름.

 

해오(解悟)에 이르는 바른 길은, 발심정견참선(염불) 순을 거쳐, 온 몸이 시원해지는 어떤 경지를 체득하게 되면 이런 경지가 해오(解悟)요, 경안(몸이 가벼워지는 단계 : )이다.

해오가 되면, 해오점수세제일법을 거쳐 증오(보살초지)구경각에 이를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사실단(4가지 방편)을 말하셨다.

1실단 : 진리실단. 진리 그대로를 말한 것, 즉 초기 화엄경 등을 설하실 때, 방편이 없이 깨달은 바 그대로를 설하심

2실단 : 위인(爲人)실단. 즉 중생의 근기 따라 설하심

3실단 : 대치(對治)실단. 대증(對症)요법과 비슷한 말로, 중생의 증상따라 필요한 설법을 하심

4실단 : 세계(世界)실단. 세계각국의 민족, 문화, 풍속 등에 따라 다르게 설함

이처럼, 부처님도 방편따라 여러 방법으로 하신 것처럼, 돈점론(頓漸론)에서 시시비비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모든 경우가 다 필요한 것이다.

 

이상으로 정리하였으나 부족한 것이 많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대비의 마음으로 이해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5월 9일 수요일, 조계사 앞의 테플스테이관  보현실에서 매주와 마찬가지로 월암스님의 친절한 간화선 7번째 법문이 있었습니다. 함께 못하신 분을 위해 요약정리 하였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월암스님은 시간상 더 설명하시지는 않으셨지만, 큰스님의 말씀을 빌려 추가한다면, 위 見性卽成佛의 단계에서, 性을 단순히 空으로 보면, 이는 色卽空과 같은 단계이다. 즉, 중생의 눈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로 보이다가, 공부를 하면 산도 산이 아니요 물도 물이 아니다. 즉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다 空으로 보인다. 그러나 더 나아가면 성철스님이 설하셨듯이 도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즉, 空한 가운데 산도 물도 무한의 에너지 순수생명을 가진, 빛으로 가득찬 부처, 불성으로 가득찬 것을 보게된다는 말. 그래서 위에서 말씀하신 見性成佛에서의 견성이라 함은, 간단히 대비시키기 위해 "상이 공함을 보면 부처"라고 표현은 했지만, 空한 가운데 불성으로 가득찬 부처를 볼때라는 의미를 포함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게보면 뒤의 공적영지와도 상통하게 됨.]

 

우리의 몸과 마음도 마찬가지임을 空性相을 통해 설명.

, 우리 몸이란 지.수.화.풍의 인연으로 구성되었으므로, 이것이 다하면 없어지므로 결국 ().

따라서 우리 몸과 마음도 공적(空寂)한 것이라 할 수 있으나 모든 것이 멸하고 없다는 단멸상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춥고 배고프고 아프고 즐겁고... 등 모든 상황에 따라 가르치지 않아도 아는 그 어떤 신령스러운 성품(불성)이 우리 가운데 있음을 알고 있는데, 이를 일러 영지(靈知)라 함.

그래서 우리 불성을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도 함. 하나 作用靈知하다.

[이는 전 시간에 배운 이견왕와 바라제존자의 대화 가운데에서 설명하였으니 참고하시기 바람]

 

능엄경에, 반문문성(返聞聞性)이라, 이는 듣는데 집착하지 말고, 듣는 성품으로 돌아가서 존재하라는 말로, 소리를 듣되 돌이켜 듣는 성품을 들어라는 의미. , 듣는 경계에 빠지지 말라는 의미.

유사하게, 반견견성(返見見性)이라, 보되 보는 성품 그 자체를 보라!는 말.

 

화두라는 것도, 話頭 그 자체를 보면 (언어)의 머리 부분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소통하는 말은, 말()의 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화두를 든다는 말은, 도 꼬리()도 아닌, 말 머리에 해당되는 부분을 들어라는 말이니까, 말하기 이전자리, 생각 이전자리를 들어서 이 뭐꼬하든 무엇을 하든 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화두는 생각으로, 분별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참구(參究)할 수밖에 없다.

 

모두 성불하십시요. 감사합니다.

 

친절한 간화선(8)

 

5월 16일 월암스님 법문 전에 15일이 스승의 날이어서 스님께 꽃다발 증정과 케익 커팅이 있었습니다. 다음주에는 월암스님의 간화선 마지막 법문이 있습니다.

  (시절이 하수상하니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삼귀의를 들으면 부끄러운 생각이 일어난다. 최근 불교계 주변의 일련의 사건을 보면서 이번 기회가 조계종단의 권력과 돈을 쥐고 있는 기득권 승려들이 발로 참회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어야 하는데 이전투구 수수방관하는 분위기가 안타깝다. 재가자들도 함께 책임의식을 가지고 잘못된 풍토 쇄신에 역할 해야 하고, 행정, 재무 부분에서 재가불자들이 소임을 맡고, 스님들에게 생활보장과 노후를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진정한 4부 대중의 공동체가 되었으면 한다.)

 

제265쪽

정념(正念)과 화두(話頭)

 

견성성불 부분을 강의했으니 강의를 마쳐야 하는 것 아닌가!

 

正念(정념)은 위빠사나, 사티(마음챙김, 바라보기)와 같은 의미다.

 

남방불교의 위빠사나가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성행한다. 특히 젊은층에서 ‘명상’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하고, 상담심리, 심리치료 측면에서도 그 역할 담당하고 있다.

 

禪房(선방)에서도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위빠사나 수행하시는 분들이 상당수 있다.

 

초기불교의 위빠사나수행은 석가모니부처님이 직접 수행하신 수행법이고, 화두수행은 중국 송대 시작{송나라 대혜종고 선사(大彗宗杲, 1089~1163)가 창시}, 정법이 아니라는 비판이 있으나, 선방에서는 공식적인 입장표명이 없다.

 

간화선은 초보자가 수행하기는 어렵고, 입문해도 헤맨다는 평가가 있어서 간화선수행이 우리의 전통 수행방법임에도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간화선은 중국 송대 12세기에 창시되어, 고려시대 보조국사, 진각국사 혜심이 도입하였고, 본격적으로는 고려말 태고보우선사, 나옹혜근선사께서 법을 인가받고 오셔서 간화선풍을 진작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정책 때문에 침체기로 명맥만 유지되다가, 경허, 용성, 만공, 한암 큰스님께서 간화선 중흥의 계기 마련하셨다.

 

일제시대와 해방공간을 거치면서 비구, 대처의 대치로 수행풍토를 마련하지 못했다. 그 당시 비구스님은 소수였고, 대처스님이 다수로 요직에 많은 분들이 있어서 힘이 약한 비구승단에서 주도권 경쟁을 하다 보니 결국 폭력이 난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국은 대처승은 무조건 물러가라는 식으로 전개되었지만, 대만은 서로 의논하여, 대처승의 주지직 및 재산을 인정하되 다만 자식에게 상속은 못하도록 하였고, 제자를 둘 수 없게 하여 3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대처승 문제가 정리되었다. 우리의 경우 강경일변도로 치닿으면서 피해가 컸고, 그 여파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간화선은 선방에서만 명맥이 유지되고 있고, 가르칠 스승도 없다.

 

최근 초기불교는 중국을 거치지 않고, 인도, 태국, 미얀마 등으로부터 부처님의 원음이 직수입 되고, 유럽, 미국의 명상 붐으로 우리나라까지 그 영향을 받고 있다.

 

7, 80년대에까지 양산박(긴두르막, 주장자 차림)차림의 승려들로 인해 선방에서 조차 폭력이 난무하였고, 선방에서 그러한 폭력이 사라진지 오래되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간화선 수행은 제대로 수행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요즘도 간화선 위기를 걱정하는 스님은 소수이고, 선방의 주류는 그 위기 조차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다.

 

위빠사나 수행자들은 간화선을 두고 주로, 송대의 조사가 제창하였고, 정법이 아니라고 비판하고 있으나,

 

불교란.

좁게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하고,

넓게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역대 조사)들의 깨달음을 경전이나 어록으로 기록한 경, 률, 논 3장의 가르침을 신앙하고 수행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초기경전도 부처님 멸후 3, 400년 후 결집된 것이므로, 대승비불설 등으로 서로 대립 보다는 연기․중도를 인정하는 것이 ‘불교’이고,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비불교’로 보아야 한다.

 

위빠사나나 간화선도 모두 ‘연기․중도’에 입각하고 있으므로 “부처님이 간화선을 수행했느냐”라는 반박은 소모적 논쟁일 뿐이다.

 

중도, 정관에 입각한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p267

6조 혜능스님께서 ‘선의 종지’를 잃지 말 것을 유촉하신 것이 3과법문과 36대법이다. 3과법문{3과법문에서 3과란...음(온). 계. 입을 말함}은 오온, 12처, 18계가 이 모두가 空하다는 것을 알아야 함을 말하고, 36대법은 생과사, 나와너 등 二元化된 법 초월하여 中道로 나아가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부처님 당시에도 緣起, 無我, 苦, 無常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셨고.

초기불교도 緣起, 中道란 표현 많이 사용하였으며

대승에서는 不二(불이), 中道(중도)을

선불교에서는 ‘空寂, 靈知’를 강조하였다.

 

혜능스님도 단경에서는 ‘自性 淸淨(반야, 공, 불성)’를 강조하신 것을 볼 때

위빠사나와 간화선이 둘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물질), 受想行識(정신, 마음)의 5온이 空하다는 입장(몸과 마음이 空하다는 입장), 즉 자아(아트만, 고정된 실체로서의 我)가 없다는 것이 無我說의 입장이다.

 

대승에서도 반야경을 중심으로 오온설 주장(반야심경 無我說입장)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오온을 더 확대한 것이 12처, 18계이다.

 

* 달마스님은 게송에서

外息諸緣 밖으로 모든 반연을 쉬고

內心無喘 안으로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고(구하지 않는다)

心如牆壁 마음이 장벽 같이 흔들림이 없어야

可以入道 도에 들 수 있다(참선할 자격이 있다)

 

 

* 오온, 12처, 18계에 대하여

 

오온         인식주체       객관대상           인식작용(활동)

               (6근根)         (6경, 진)          (6識):살아가는 삶의 모습

                                  색                 안식계

                  耳                성                 이식계

                  鼻                향         捨(中)    비식계 전오식

                  舌                미                   설식계

수상행식                      촉                    신식계

                  意(뜻, 생각)     (대상)              의식계 : 6식

 

모든 현상을 나(我)를 기준으로 판단(자아의식, 7식=말라식)한다.

그 뿌리가 8식(=아뢰아식) 아뢰아식에 저장되어 지향성을 가지는데 이는 7식을 통해 나온다.

 

아뢰아식은 7식인 染識(염식, 오염된 식, 말라식)을 통해 6식에 전달하고, 전오식은 6식이 작동해야 알아차린다.

 

아뢰아식도 6식에서 저장된 것이므로 아뢰아식도 그 실체가 없다.

 

현 행 종 자

↳(훈습)

종 자 생 종 자

↳(업식의 종자)

종 자 현 행

    지향성(연)   ↳ 현행(5. 6. 7식)

 

지향성이 쉬어야, 경계가 공한 경계로 된다.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하라.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18계는 현행(現行)에서 아뢰아식으로 저장(훈습)된다.

저장된 종자는 끊임없이 다른 종으로 난다.

 

부쉬맨이 코카콜라를 인식하지 못하듯

경험되어지지 않은 것은 이미지로 현행하지 않는다.

 

인식체계는 길드려져 있어서 내가 편리한대로 생각하고,

항상 나의 인식의 틀 안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다.

 

내가 보고 있는 객관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아니하고 나의 인식체계로 본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일체 모든 유위법은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라고 했다.

 

즉 모든 것이 가상이다.

凡所有相 (범소유상) 皆是虛妄 (개시허망) 若見諸相非相 (약견제상비상) 卽見如來 (즉견여래)라(=무릇 모든 상(相)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안다면 바로 여래(부처)를 보리라)

 

현생은 현재의 삶, 아뢰아식에 종자를 저장하고

종자 스스로 종자를 낳는 등 끊임없이 생멸 유전하면서 종자로 훈습한다(끊임없이 내 삶에 나타난다).

 

끊임없는 윤회, 일생윤회, 일념윤회!

 

一生輪廻(한 생에 연기)

一念輪廻(한 생각에 연기)

만일, 종자가 같다면 운명론에 떨어진다.

그러나 끊임없는 연기과정에서 변화가 가능하다.

 

           

 

→ ‘현행-종자-현행-종자....’의 윤회, 그러나 발전, 변화의 업장을 설명할 수 없다.

 

 

 

  

 

무한한 발전 가능성이 있다. 중생→부처, 여기에 수행의 필요성 개입한다. 好(좋다), 惡(싫을 오), 捨(中 그저그렇다)라는 생각만 버려라.

 

一念生死’에서 보면,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 生이고, 생각이 사라지면 死이므로 ‘하루 한 번 생사’, 또는 ‘一日一夜 萬生萬死’라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念起生

念滅死

一念輪廻(좋다-천상, 싫다-지옥, 그저그렇다)

생사윤회 끊기 위해 ‘좋다’, ‘싫다’는 생각의 실처를 없애라.

그러면 6도 윤회에서 해방된다.

 

至道無難 唯嫌揀擇 지도무난 유혐간택 但莫憎愛 洞然明白 단막증애 통연명백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리라(3조 승찬대사의 ‘신심명’중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오온, 12처, 18계를 설하신 것은 인식주체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안과 밖의 중간인 6식은 여러 가지 인연의 가합상일 뿐 고정된 실체가 없다(空하다).

 

인식주체가 없고, 객관대상 또한 아뢰식의 인식틀에서 인지된 허상이며,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이고, 6식 또한 허상이므로 끊임없는 반복된 삶 가운데 ‘좋다’, ‘싫다’는 생각만 버리면 된다.

 

보되 본 바 없이 보라!

이를 위해 근기에 따라 ‘진언’, ‘염불’, ‘참선’이 필요하다.

 

* ‘위빠사나’에서

  ‘念起卽覺 :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이를 알아차려라

                      (좋은 생각, 나쁜 생각 이전으로 돌아가라)

 

  '화두선'에서는

  ‘覺卽空’ : 알아차리는 그것이 무엇인가(이뭣고?)

                           (알아차리는 그 생각자리가 空할진대 그 바라보는 것이 무엇인가를 참구)

 

위빠사나는 무상, 고, 무아를 隨觀(수관:계속 지켜봄)’하는 것이고, 화두선은 ‘空寂靈知(空寂을 신령스럽게 앎, 본래면목)’가 무엇인가(‘이뭣고?’)를 참구하는 것으로 두 수행방법 모두 중도정견에서 보면 다르지 않다.

 

자기 성향에 맡는 수행방법을 선택하여 수행하면 되고 초기불교, 선불교와의 소모적인 논쟁은 불필요하다.

 

'生-死-生-死...'윤회의 고리를 끊으려면 '起-滅-起-滅...'을 끊는 수행이 있어야 하고, 생각을 한 자리에 집중(화두일념, 염불일념, 주력일념)하여 수행자체로 윤회를 초월해야 한다(일념자체→ 생사없고→윤회없다).

 

대승은 空의 이치를 깨달아 향상일로로 무한 자비, 사랑으로 垂手入廛{수수입전: 십우도 마지막 경지로 저자거리(시장터)로 가서 교화하다, 또는 入廛垂手입전수수: 시중에 들어가 중생을 제도하다}해야한다.

 

무한 사랑의 실천만이 수행자가 살 일이다.

 

결국, 오온, 12처, 18계가 空하다는 것을 ‘초기불교’는 ‘수관’하는 것이고, ‘선불교’는 ‘이뭣고’ 등의 화두로 수행하는 것이다.

 

월암 스님과 함께 한 친절한 간화선법문이 이번 주(5월 23일. 수)를 마지막으로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함께 하여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면서 마지막 강의분을 간략히 정리하였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화두참구의 수증(修證)단계에서,

첫번째 단계는 공적(空寂)을 깨닫고, 두번째 단계에서 지혜(靈智)를 성취.

태고선사와 나옹선사, 한암선사 모두 유사한 말씀을 하심.

-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생사(生死), 화두가 순일해지면 일어나고 사라짐이 다하고,

   그 자리를  일러 고요(寂 : 적)이라함.

 - 고요한 가운데 화두가 없으면 무기(無記)요, 화두가 어둡지 않음을 일러 智慧라 함.

 - 이 텅빈 고요함(空寂) 가운데 신령스런 지혜가(靈智) 있어, 무너지지도 않고, 더렵혀지지도 않음.

 - 즉, 화두가 분명하고 또렷한 靈智 상태가 지속되면 머지않아 道를 이룸.

 

즉 아래그림으로 설명.

동정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와 관련된 여담으로,

옛날 어느 거사가 항상 대다라니를 외우다가 생이 다해 염라대왕 앞에 다가서서 질문을 받았다.

그대는 사바세계에서 무슨 공부를 했나?

전 늘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고 익혔습니다.

그래? 어디보자! ....아무리 보아도 그대가 그런 공부를 한것이 기록되어 있지 않는데?

그럴리가요? 다시 찾아보세요.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염라대왕이 다시 이곳 저곳 뒤적이더니, 어! 여기 있구먼, 그런데 한번도 제대로 일념으로 끝까지 한적이 없어, 그러니 제대로 기록된 것이 있을리 있나?. 라고 했다는 말이 있다.

무슨 공부를 하든, 오로지 일념으로 은산철벽의 자세가 아니면 안된다는 말을 비유적으로 한 말이 아닐까?

 

지난 9주 동안 법문해주신 월암스님께 이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무한한 감사를 드리오며, 끝까지 함께 공부한 도반님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해 올립니다. 모두 성불하십시요.

 

 

 

삶 자체가 되어 살아가는 일 / 법정스님

 

 

삶을 소유물로 여기기 때문에 우리는 소멸을 두려워 한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 순간의 있음이다.

 

순간 속에서 살고 순간 속에서 죽으라.

 

자기답게 살고 자기답게 죽으라.

 

 

삶 자체가 되어 살아 가는 일,

 

 그것이 불행과 행복을 피하는 길이다.

 

오늘 핀 꽃은 어제 핀 꽃이 아니다.

 

 오늘의 나는 새로운 나이다.

 

과거의 좁은 방에서 나와,

 

 내일이면 이 세상에 없을 것 처럼 살라.

 

 

진정 순례자나 여행자 처럼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날 그날 감사하면서 삶을 산다.

 

집이든 물건이든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순례자처럼 살아야 한다.

 

 

 -법정스님의 일기일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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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ude Ciari 기타 연주곡 모음 ─ 클로드 치아리

 

 

개별듣기


Solenzara(추억의 소렌자라)  


Adoro(사랑해요)


La Playa(밤안개속의 데이트)


The Music Played(음악은 흐르고)


Jeux Interdits(금지된 장난)


El Bimbo


Amsterdam Sur Eau (물위의 암스테르담) 

Nabucco's Guitar(나부코의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