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를 모르면 불교인이 아니다

2012. 8. 4. 10:2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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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도 중도를 실현한 훌륭한 불교다.

 

중도를 모르면 불교인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이 지구상에 오셔서 인류에게 희망과 행복을 주셨습니다.

이 세상은 고통의 연속이지만 깨우치고 나면 고통이 없는 행복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여신 후 초전법륜에서

그리고

생을 마감하는 입멸의 순간에도 중도(中道)를 설했습니다.

 

 

 

◇ 초전 법륜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여시고 교진여 등 5비구에게 감로의 법문을 최초로 여십니다.

“내 이제 감로의 법문 여나니 귀 있는 자 들어라. 낡은 믿음을 버리고. 비구들이여, 나는 중도를 얻었노라. 욕락과 고행이라는 양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취했노라.”

이렇게 중도를 설하시고 구체적인 연기와 사성제 그리고 팔정도를 설하셨습니다.

 

 

 

법등명 자등명 - 중도(中道)의 경책

 

 

(1) 법등명(法燈明)

법에 의지하지 말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

율이나 경에 견주어봐서 고정관념을 버리고 자기주장에 빠지지 마라.

한편 자기주장에 빠져 자기 멋대로 하는 것을 미리경계 하기 위한 것

 

 

(2) 자등명(自燈明)

타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기의 양심에 따라 정직하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경험하며, 체득하면서 <경. 율>도 무조건 따라가지 말고 하나 하나 점검해야 한다. 그래서 지나치게 형식주의에 빠지는 것을 미리 경계한 것이다.

또한 중생이 망상을 피우면 초발심으로 돌아가 자기를 잘 살피고

자신을 점검하라는 뜻이다.

 

 

 

[참나]에 대하여

※ 초기경전에서 아(我)가 없다고 했는데, 왜 부처님께서 자등명, 자귀의란 말씀을 하시면서 자신(我)에 귀의하고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고 했을까요?

 

여기에서 아(我)란 바로 무아(無我)인 상태 즉 너와 내가 없어진 마음의 상태 대립이 없는 상태, 나를 낮추고 남을 존경하고 배려하는 나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되려면 시비가 없고 망상을 여의고 탐심, 진심, 치심이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하니

[아래]글을 쓴 주인공은 이 참나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생각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용수보살로부터 역대 무수한 조사 그리고 조계종 종정스님 진제큰스님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의 자등명을 등불삼아 중생제도를 위해 여념이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등불이 없다고 생각하는 아래 주인공은 당연히 눈은 있어도 부처님의 밝은 마음을 볼 수가 없으니 나라는 것은 없다고만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나를 등불삼고 나를 의지해라하는 나의 참뜻을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만심에 가득한 마음으로 대승불교를 보니 그 진상을 볼 수 없고

자신의 비뚤어진 시각만 세상에 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도 화엄경도 모든 대승경전이 비불설이라는 생각에 빠져 진실한 부처님의 마음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가련하고 불쌍한 생각마져 듭니다.

 

 

 

◇ 부처님께서 설하신 말씀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삼법인과 사성제 그리고 팔정도”라는 것은 공부를 좀 한 불교도는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 혼자 알고 있고 대승불교를 공부한 사람은 그것을 하나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습니다.

 

대승경전 안에 그 내용이 다 녹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머릿속으로만 그것을 생각하거나 탁상공론하면 안 됩니다.

또한 그것을 설하신 부처님의 마음을 모르고 그것을 문자 그대로 앵무 새처럼 따라

해서는 더욱 곤란합니다.

하물며 그것을 자기식대로 변형해서 고집해도 더욱 안 됩니다.

 

 

 

 

● 부처님께서 입멸 후 후대에 반드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유훈으로 말씀하신 것이 바로 대열반 법문입니다.

 

“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 자신에 의지하라.

  (자등명自燈明 자귀의自歸依)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에 의지하라

  (法등명自燈明 法귀의自歸依)”라고 하셨습니다.

 

 

 

◇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위 내용은

자신의 양심에 의지하고 그 양심이란 부처님의 마음과 같은 것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엇이 양심인지를 보는 것은 법을 거울로 삼아 보라는

뜻입니다.

무엇이 양심인가?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도 경청할 줄 알고

극단적인 대립 즉 양변을 벗어난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주장하더라도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면 다른 것이 보이지 않습니

다. 즉 중도를 얻어야 진리가 바르게 보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정견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또한 탐심과 진심(성냄)과 치심(어리석음)에서 벗어난 자기라야 합니다.

 

즉 부처님은 생의 마지막에도 중도를 설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기독교 사상에 물들면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걱정하신 이 일들이 결국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몇 세기가 지나자 않아 그러한 현상이 일어났으며, 오늘날 이 시대에도 그

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원조냐 짝퉁이냐 하는 논란입니다. 그런 논란할 시간에 한사람이라도 더 교화를 시키거나 수행에 힘써야 하겠지요.

 

 

 

◇ 부처님 당시 인도 사회의 문제점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날 무렵 인도사회는 바라문사회가 극도로 부패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도 사람들은 전쟁과 기아 그리고 질병으로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성바라문 사회에 반대하여 수많은 철학자와 수행자들이 등장하였습니다.

불교는 이러한 토양에서 태어나 그 시대에 새로운 종교와 학문 철학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 불교의 씨앗을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 시대 사회와 대중들의 문제를 잘 파악하고 그에 맞는 약 처방을 하였기 때문이며, 더 중요한 것은 부처님께서

스스로 자비 행을 실천하셨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사성제와 12연기 등 진리를 설하셨지만 먼저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행동을 하신 후 법을 설하셨습니다.

 

 

알라위 지방의 가난한 농부가 잃어버린 소를 찾아 헤매다 법회에 늦게 도착하였을 때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저 농부에게 먼저 밥을 주라!”

“베고픔은 으뜸으로 가는 질병, 오온은 으뜸가는 괴로움

지혜로운 이는 이 같은 진실을 알아, 으뜸가는 행복을 이룬다.” -법구경

 

 

사밧티의 한 젊은이가 출가하여 수행 중 악성 피부병이 걸려 고약한 냄새로 헛간에 버려져 죽어가고 있을 때, 부처님께서 직접 물을 데워서 비구의 몸을 씻기고 가사를 벗겨 손수 세탁하시고 말리어 가사를 입히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래지 않아 이 몸 흙바닥에 버려지고

마음 또한 어디론지 사라져 버리리.

그 때 덧없는 이 몸 실로

썩은 나무토막보다 쓸모없으리.” - 법구경

 

 

 

 

◇ 근본불교의 분열(상좌부와 대중부)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1차 집결로 경과 율을 편집하고

불멸 후 100~200년이 지나며, 세월이 흐르고 지역이 넓어지며

- 불교내의 변화 : 무상(無常 변화)의 이치가 불교에도 적용된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현실에 적용함에 있어 <수행자>들 사이에 견해차가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럴 때 <원형>을 그대로 고수해야 된다는 주장이 장로 중심으로 일어났으니 이를

상좌부(태라밧다)라 합니다.

 

반면 현실에 적용할 때 약간의 자유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경제활동이 가장 왕성성한

바라나시를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불멸 후 200년경 아쇼카 왕이 인도 천하를 통일하고, 아쇼카 왕이 힌두교에서 불교로 개종하므로 불교가 지역적으로 넓어지고, 승려수나 불자수도 크게 증가 하였다. 그래서 지역적으로 차이가 생기고 또 경전에 대한 해석상 견해차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상좌부>와 <대중부>로 교단이 분열되었습니다.

 

 

 

◇ 부파불교 등장

 

불멸 후 300년경에는 20개부파가 생겨나고, 이 때 상좌부 계통의 설일체유부가 주의주장이 강하고 힘도 아주 강했습니다. 아쇼카 왕 사후에 마우리 왕조도 멸망하면서 인도가 힌두이즘이 민중의 힘을 바탕으로 강력하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불교는 승려들이 자신들이 속해 있는 교단의 부파가 주장하는 내용을 공부하고 또 그것을 발전시키느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 실천하지 못하고 대중의 삶과는 크게 유리되었습니다.

 

물론 이 결과 불교가 철학적 사변적으로 발달하였지만, 최초의 순수성이 많이 사라지고, 불교가 정형화되고 권위주의적이 되고, 살아 숨 쉬는 것이 아닌 탁상공론으로 흘렀다. 그래서 대중들은 이러한 부파들이 제공하는 정보에 식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당시 인도는 우파니샤드 철학이 사라지고 대중들은 생활적인 주술과 결합이 되었습니다.

대중들은 같은 불교가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것에 의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정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하고

 

 

 

◇ 이 상황은 오늘날 서양불교(특히 미국불교)가 겪는 혼란과 비슷합니다.

미국 LA에는 미얀마불교, 태국불교, 스리랑카불교, 베트남불교, 한국불교,

중국불교, 티벳불교, 밀교, 원불교, 대승, 소승, 그리고 출가일과 열반일도

다르고 심지어 계율도 다릅니다.

 

이를 부정적으로 보면 매우 혼란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보면 모든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고 이것을 극복할

하나의 무엇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 부처님은 대중 속으로 대중 속으로 들어가셨고

그 사회에 문제가 무엇인지를 항상 간파하셨습니다.

위와 같이 복잡한 불교 상황을 보고

문제를 제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사람은>

새로운 법칙을 찾아갈 것입니다.

즉 다양한 문화 다양한 종파가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법칙을 찾아 갈

것이요,

 

<부정적이고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은> 의문을 제기하며

투쟁을 전개하거거나 스스로 지쳐서 실망한 나머지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아래 글을 쓴 주인공은 아무런 대안이 없이

 “무조건 근본불교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라고 하는 무책임한 발언을 하며

심지어 불교가 대승불교 때문에 망할 것이라고 저주에 가까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근본 불교를 수행하는 분 중에 아라한이 몇 분이나 나왔습니까?

설령 아라한이 한 분이라도 있다합시다. 그러면 그분이 부처님과 과연 똑같은 자비와

지혜와 복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몇 년 전 동남아에서 위빠싸나 등 근본불교 공부를 10년이나 하고 돌아와서 명상지도를 하는 어느 수행자가 실제 생활에 있어서는 [탐심과 성냄과] [어리석은 행동]일반 불자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한 적이 있습니다.

 

 

소위 사념처 수행을 오랫동안 한다는 수행자가 명상할 때만 도인이고 평상시에 오면 모든 경계에 부딪쳐서 일반인보다 더 화를 잘내고 고집불통이고 아상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내세우며 입만 뻥긋하면 대승불교 선사들 욕을 하였는데, 정말 큰 업만이 짓고 있습니다.

 

 

 

 

◇ 대승불교가 왜 일어나게 되었나?

그러면 대승불교가 태동할 시기에 그 당시 소승불교 스님들을 바라본 대중들은

 

1) 부처님의 인격과 지금 스님(아라한)의 인격과 같은가 다른가?

2) 부처님의 교화력은 100%인데, 지금 스님은 교화력이 0%이다.

- 통제된 울타리 속에서 학습에 여념이 없고

- 대중과 유리된 생활 속에서 / 세상에서 아기가 죽거나 가뭄이

있어도 관심이 없다.

- 세상의 실체가 있느냐 없느냐? 진리는 무엇이냐?

사성제가 어떻고, 삼법인이 무엇이며, 팔정도가 무엇이며, 37조도품

이 무엇인지 철학적으로 생각하고 아니면 그것을 수행하느라 골몰

합니다. 그들만의 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원조고 너는 짝퉁이다.”

- 이와 같이 대중의 삶의 문제와 동떨어져 있는 것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3) 그러면서 그 스님들은 스님에게 공양하면 복이 있다는 소리만 합니다.

 

 

 

◇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대중들은 스님들을 존경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이 그리웠습니다.

대중의 고통을 들어주는 자비하신 부처님이 몹시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그들 대중들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모였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을 생각하며 그리워하며, 스님에게 공양 올리는 것보다 부처님에게 공양 올리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기에 올리는 공양물을 가난한 사람에게 다시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희열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불탑>을 중심으로 <신앙=부처님에 대한 믿음>운동이 자연스럽게 태동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신앙심이 돈독한 사람 중에 자비로운 마음과 행동을 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상담을 해주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들을 보디사트바(보살)이라고 불렀습니다.

 

<탑>에 모여든 많은 대중들은 <괴로움> 때문에 왔기 때문에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보시>를 해야 하며 그것을 가장 큰 덕목으로 삼았습니다.

<재보시, 법보시, 무외시> 등 보시를 많이 하도록 권했습니다.

그리고 <인내>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형식>보다 <마음>을 매우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보살수행>을 위해 [보시/ 인욕/ 지계/ 정진/ 선정/ 지혜]를 닦아

야 하며 이때 지혜란 수없는 실천을 통해 경험하고 증득한 지혜를 말합니다.

이들은 “아라한은 부처의 경지가 아니다. 불완전한 깨달음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또 부처님을 전지전능한 부처님으로 보아 신앙의 대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신앙공동체에 대중부에 있던 스님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들은 출가해서 대중부에 들어가 보니 그곳에 있는 스님들이 ‘말로만

아라한과’를 얻었는데 실제 하는 행동을 보니 [탐 / 진/ 치]가 가득한

승려가 많아 신앙공동체인 보살승단보다 못함을 절감하고 신앙공동체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교의 본래 목적이 신앙이아니라 수행을 통한 깨달음에 이르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에 “대승교리”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삼법인]과 [사성제]와 [팔정도] 그리고 [중도]의

사상 및 [연기]의 이치를 대승경전 요소요소에 잘 배치를 합니다.

 

그리고 결국 수행과 동시에 중생을 교화해 가야 한다는 대승불교의 핵심적인 사상이

정립되게 됩니다.

그들은 부처님의 마지막 대열반 법문인 [자등명, 자귀의] [법등명, 법귀의]를 철저하게 실천에 옮겼습니다.

 

 

 

◇ 대승교단은 깨달은 자를 보살이라 불렀다. (아직 부처는 되지 못했지만)

대승교단은 “깨달은 자가 누구냐?” 그리고 그를 “보살”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법]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문자에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승불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현재 무엇이 합리적인가? 어느 것이 부처님의 마음에 더 가까운 것인가?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인연이 변화하면 부처님의 말씀도 그 시대에 맞는 언어로 바뀌어야 한다. 다만 이 경우도 부처님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고, 자신의 양심을 바탕으로 수행하고 중생을 교화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 다양한 치료법이 나오게 됩니다.

 

 

 

이에 비해

소승불교(근본불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특히 상좌부(태라밧다)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느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가? 즉 진짜, 가짜와 불설과 비불설 주장에

주장하여 원리 원칙을 고수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시대가 바뀌거나 심지어 상황이 바뀌어도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틈 만나면 [대승불교]를 폄하해볼 생각에 골몰합니다.

 

 

 

[쓴 소리]

예들 들면 [대승불교] 흠집 내기에 앞장선 어떤 법사가 대승경전을

자기식대로 마구 해석하여 흙탕물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틀리게 재 멋대로 하는 행위는 진정한 [불교인]의 행동이 아닙니다.

광신적인 기독교인과 다를 바 없다는 뜻입니다.

 

대승의 한 조사께서 깨달음 없이 떠들면 그 사람은 미친사람이라 했습니다.

하물며 대승의 내용도 제대로 모르고 떠들면 완전히 정신히 나간 사람입니다.

 

 

 

대승의 공[空]을 이야기하면서, 공[空]을 아무것도 없는 허망한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참으로 자기생각에 미쳐 있구나 하고 혀를 내두러

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는 어떤 근본불교 학자들이 어디에서 주장하는 것을 여과 없이 인용하다보니 그런 엉터리 발상을 계속하고 있구나 하고 봅니다.

 

그렇게 불교의 공을 엉터리로 해석하는 것은 ‘라즈니쉬’가 잘합니다.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라즈니쉬’가 지은 금강경을 보고 그것이

대승불교의 주장이라고 보기 쉬운데, 라즈니쉬’가 지은 금강경이 또는 법구경

을 보세요.

 

대승불교 공부를 한 사람이 보면 배꼽을 잡고 웃을 노릇인데

불행히도 우리나라에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 중에 그러한 유치한 해석을

해 놓은 것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히 아래 주인공은 ‘라즈니쉬’가 주장한 공과 아주 흡사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라즈니쉬는 [空]을 허망한 것 허무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대승의 [空]이란 것이 과연 아무것도 없고 허망하고 허무를 뜻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空]이란 허공과 같아 인연을 따라 생멸하는 것을 뜻합니다.

 

오온인 [색/ 수/ 상/ 식]도 이와 같이 인연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이니 즉 변화하는 것이니 어느 하나도 집착할 것이 없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인데, 이를 알지 못하고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엉터리 주장을

하니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금강경 말씀도 한결 같이 어디에도 머무르지 말라 집착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것이 사성제의 집에 대한 말씀이 아니고 무엇인가요?

 

그리고 금강경 말씀은 무아(無我), 무집착(無執着)를 이야기하고

보시를 하고도 보시하였다는 상을 내지 않는 것이 바로

[무주상보시] 아닌가요?

 

 

그런데 공은 없는 것이요, 허망한 것이요, 망령된 것으로

해석하는 아래 주인공은 과연 제정신이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자기 생각에 빠져 놀고 있는  어린아이인가?

 

 

이 정도는 왠만한 대승경전 공부를 한 불자는 다 아는 것 아닌가요?

 

아래 글을 쓴 사람은 아상(我相)이나 아만심(我慢心)이란 말도 듣지

못했나요? 아상(我相)과 아만심(我慢心)에 포로가 된 것인지 아닌지

스스로 사띠(알아차림) 해 보시기 바랍니다.

 

대승불교에 대한 출처도 모르는 글을 베껴 와서 자기가 무슨 아라한이나

되는 것처럼 떠들고 있으니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용수보살과 세친이나 마명 보살이 죽어도 깨어나도 무아(無我)를 모른다고 했는데, 필자가 보기에 생각은 자유라고 하지만,

아래 글을 쓴 주인공이 제대로 자신을 조금만 성찰(사띠)만 해도 지금의 엉터리를

주장하는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근본불교가 옳고 원조고] [대승불교는 짝퉁이고 옳지 않다.]는 그 한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무명(무명)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아니 그 많은 역대 조사나 성인들이 왜 대승불교를 믿었지? 이한 생각만 내어도 위와

같이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로 대승불교를 열심히 공부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비판을 하든지 말든지 해야할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면 기독교인이 불교가 옳지 않고 하느님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과 똑 같습니다.

(참고로 미국인들은 ‘라즈니쉬’가 지은 금강경이나 법구경을 잘 봅니다. 이 영향으로

 불교를 처음 접하는 젊은이들 특히 유학파는 ‘라즈니쉬’가 지은 엉터리 금강경이나 법구경을 아무것도 모르고 보고 그내용을 인터넷에 도배를 해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대승불교의 진수도 모르고 계속

대승불교를 폄하하는 버릇을 보니 문득 그 사람의 습성이 생각납니다.

그 글을 쓴 사람이 기독교인에서 전종했다고 하는데, 하는 방식이

너무 기독교인의 행동을 닮아 있습니다.

 

그리고 “늘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구나!”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군요.

 

먼저 불교에 대해서 전혀 모르거나 알아도 깊이 알지 못하고 남이 하

는 주장을 몇 가지 일을 끄집어내어 심심하면 한번 씩 떠들어 됩니다.

이번에 실은 글은 너무 어처구니없는 내용이라

혹시 불자들이 혼동하지 마시라는 뜻에서 이글을 올립니다.

 

 

 

◇ 대승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마음을 함께 지닌 불교입니다.

짝퉁불교가 아닙니다.

 

 

따라서 대승불교는 부처님의 대열반 가르침 중에 [자등명 / 자귀의]

더욱 치중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이 결과 경전의 자의 적인 해석을 하거나

쉽게 경을 창작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후대 용수보살이나 그 외 고명한 대승보살들이 이점에 유념하여 [법등명/ 법귀에] 어긋남이 없는 좋은 가르침을 남기고 있습니다.

 

결국 대승불교는 법화경에 가면 소승불교도 다 존중하여 삼승을 다 존중합니다.

즉 성문, 연각, 보살 모두를 존중합니다. (승문, 연각은 소승 수행자)

 

또 화엄경은 그 규모나 내용이 방대하고 우주와 세상을 논하고 있으며

현대물리학 이나 정신과학하고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대승불교의 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현재 부처님의 대열반의

가르침인 [자등명 / 자귀의]과 [법등명/ 법귀에]에 충실하게 경전이 구성

되었고 지금도 많은 대승보살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 언제까지나 짝퉁시비 할 것인가요?

대승불교는 불교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나타난 역사적 산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회적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승려가 아닌 대중에게서 부터 먼저 태동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회적 고통[두카]이 무엇인가]에서 시작하며

[사회개혁]은 개개인의 의식개혁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합니다.

 

앞으로 대승불교보다 더 혁신적인 불교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끝으로 개인의 의식개혁은 다음과 같이 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상대의 의견도 준중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래 글을 주장한 사람도 자신의 생각에서는 전적으로 옳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생각을 강요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중도적인 관점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근본불교와 마찬가지로 대승불교도 훌륭한 불교입니다.

 

 

대승불교시작은

대중 불자의 양심의 선언에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즉 시대 변화에 의해서 태동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화합입니다.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것을 공격하는 것이아니라

이해하고 화합하고 서로 어울려 잘 사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세계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대중화합을 가장 중시했습니다.

 

기독교가 호시탐탐노리고 있는데

서로 티격태격 짝퉁 논란을 하면

기독교만 좋아지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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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위에서 이야기한 대승불교에 대한 엉터리 주장 이야기입니다.

 

 

 

대승경전을 보는 바른 시각

반야심경과 금강경에 속을 것인가?

 

원oo o현

 

 

초기불교 시대를 지나 불교사의 위대한 전법사 아쇼카 대왕 시대에 대왕은 나라를 불교승단에 바칠만큼 불교를 숭상합니다.

모든 불교정사마다 식당을 지어 전국에서 나는 산해진미를 스님들이 공양할 수 있도록 보시한 이후, 그 맛있는 공양물에 눈이 어두운 외도들 중에 방대하기 이를데 없는 베다나 우파니샤드를 줄줄 외우는 힌두논사들이 불교 승단에 귀의하게 됩니다.

 

그 이후 본래 논장이 발전하지 않았던 초기불교교단에 일대풍파가 일어나는데 바로 부파불교를 위시한 대승불교입니다.

 

힌두논사들은 힌두경전인 베다와 우파니샤드의 핵심 사상인 공과 아트만(참나)를 가져와, 나와 세상 모두가 허망하고 허무한 것이라 하여 그것을 공이라 하고, 여몽환포영로전이라고 하고 한 마디로 皆是虛妄이라 표현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 세상이나 나라는 존재는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것이어서 내가 행복한 이후 세상도 평화롭고 행복하게 만들어야 하는 현법 현실주의인데, 진정한 행복과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이 현실이나 대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펴기 위해 모든 일체법이 무상하고 나 역시 무상하여 무아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나 힌두논사들은 이 무상과 무아를 죽어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체법이 무상한 것이 아니라 허망한 것이라고 새로운 경전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반야부경전입니다.

 

니까야에는 허무주의 공이라는 단어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나라는 것은 허망한 것(아공) 세상 모든 것은 허망한 것(법공)이라는 단어는 힌두논사들이 만든 것이지요.

 

가장 먼저 반야심경에서

 

오온이 무상이 아니라 허망한 것인 공이다(조견오온개공).

색은 즉 허망한 것이다(색즉시공).

허망한 것이 색이다(공즉시색).

제법이 모두 허망한 것이다(제법공상).

살아도 산 것이 아니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허망한 것이다(불생불멸).

 

라고 무상(단순히 변한다는 것)을 허무주의 염세주의로 변질시킨 후

 

수상행식도 없고(무수상행식)

안의비설신의도 없고(무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도 없다(무색성향미촉법). - 5온 12처 18계 역시 없거나 허망한 것이라는 것.

무안계 무의식계 무무명 무노사로 부처님의 교학을 무시하거나 부정한 뒤

 

결국 고집멸도 조차 없는 것(무고집멸도)이라고 하면서 사제 팔정도까지 부정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초기불교 근본 교리교학을 송두리채 부정해버리는 것입니다.

 

이후 금강경에서는

 

"수보리야 내가 단 하나라도 설한 것이 있느냐?"

"아닙니다 여래께서는 하나도 설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 나의 설법은 뗏목과 같은 줄 알아라.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아닌 것이랴!"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를 수 없이 반복하면서 부처님은 스스로 근본불교교리를 하천한 것으로 버리셨다고 주장한 후에 모든 것은 개시허망하여 제상이 비상(공)임을 본다면 진리(참나)를 본다면서(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세상은 허망한 것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미 물 건너 갔다(所謂佛法者 卽非佛法 :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고 단정해버리는 것이 금강경인 것입니다.

 

이후 유식론자들은 차츰 본색을 나타내어 무아마저 부정하기 시작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허망한 것(假我)이지만 자세히 보면 아트만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찾아서 브라만 혹은 힌두신과 합일하면 곧 해탈이고 그 아트만(참나)가 계속 윤회하는 것이라는 힌두교리를 그대로 불교에 적용한 것입니다.

 

결국 훗날 무아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 불교로 유입된 힌두논사들은 무아도 유아도 아닌 어정쩡한 단어를 생산해 내기 시작했는데...

 

아뢰야식 여래장 진아 주인공 그놈 그것 하나 법성 자성 품성 실체 진여 참생명 근본자리 공성 견성 주시자 소소영영한 이것(이뭐꼬) 한물건 본래면목 등등... 한 없이 많은 이름으로 마치 무아가 아닌 그 무엇이 있어 영구히 존속한다는 상주론으로 변질시켜간 것입니다.

 

결국 진제종정께서 항상 하시는 법문이 "부모미생전에 본래면목이 뭐냐? 그것은 참나인데 그놈을 찾는 것이 해탈열반이니라..." 라고 설법하시는 것입니다.

 

아쇼카 대왕 초기까지는 불교승단에 힌두논사들의 유입이 별로 없었지만(아쇼카 대왕의 아들 마힌다 장로가 오염되지 않은 근본불교를 그대로 스리랑카로 전함), 아쇼카 대왕의 후기 불교승가에 대한 처우나 공양의 질이 현저히 좋아진 이후 승가에 탁발이 필요 없어진 다음, 불교승가로 대거 유입된 힌두논사들은, 정사에 들어앉아 경전상 불요의경들을 해석한다는 구실로 논쟁을 일삼았고, 이론적으로 일가를 이룬 지도자급 승려를 중심으로 부파가 형성되었는데, 이들 대부분이 무아를 넘어 어떤 식이 있어 존속한다는 유식을 만들어 냈습니다.

 

특히 설일체유부 경량부 독자부 등의 유식사상이 유명한데, 설일체유부는 49일 중음천 사상을 만들어 한국 대승불교의 49재 천도재에 유익하게 활용되는 근거를 남기기도 햇을 정도로 무아사상을 유아사상으로 변질시켜갔습니다.

 

이때 힌두논사인 용수가 불교논사로 하루아침에 전향한 후 즉각적으로 한 일은 무아에서 유아로 흐르는 설일체유부 경량부 독자부 등 힌두논사들이 점령한 부파불교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유부의 유아 유식사상을 무아사상으로 환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래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 제법무아라고 하면 될 것을, 힌두교의 공사상(나나 세상 모두가 꿈같고 환상같고 거품같고 그림자 같은 것)을 가져와 나를 허망한 것(가아, 아공)으로 바꾸고, 다시 세상(일체법) 역시 허망한 것(법공)으로 변질시킨 것입니다.

 

즉 이 세상이 무상(제행무상)하고, 나라는 것은 무아(제법무아)라는 가르침을 힌두교사상을 따라 둘 다 허망한 것이라고 단정지은 것입니다.

 

더구나 중론 대지도론 등으로 단순한 허망하다는 뜻의 空이라는 단어에 지극히 복잡한 철학적 의미부여로 인해, 중관학파를 위시한 후대 불교는 공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 극심한 논장空불교, 공철학불교로 바뀌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후 한국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근본불교 교학인 5온 12처 18계 37조도품 4제 8정도 12연기 등이 모두 空에 매몰되어 버리고 우리 스님들은 죽으나 사나 공 하나밖에 모르고 다른 교리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참나나 찾고 있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참 나는 힌두교의 아트만입니다.

나와 세상(일체법)은 여몽환포영(공)이기 때문에 허망한 것, 그래서 아트만(참나)를 찾는 것이 해탈이라는 힌두사상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 대승불교지요.

 

부처님의 무상(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마저 변하는 것이다)과 힌두교의 공(이 세상 모든 것은 허망한것, 여몽환포영, 허무주의 염세주의)과는 명백히 다른 것입니다.

 

부처님은 무상하다고 하셨지 허망한 것이라고는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무상하기에 집착하면 괴로운 것이라는 것과, 허망하기에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무상하기에 나라고 하는 자아가 아닌 무아라는 것과, 허망하기에 참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불교적인 해탈은 내 안의 절대적인 참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무상과 무아를 체득하여 탐친치를 여힌 것이 해탈이고 열반입니다.

'나' '내것'이라는 상을 가지거나, '내가 단멸한다' 혹은 '이 세상은 별 볼일 없지만 저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이 세상은 잠깐 그쳐가는 시험적인 삶이고 진정한 삶은 내 영혼이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다' 등의 상을 가지므로서 세상 사람은 악해지거나 허무주의에 빠져서 불행해지고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상 무아를 체득한 자만이 욕심과 악의에서 벗어난 진정한 성자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참나라거나 자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교의 교리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불교의 바른 교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인도에서는 결국 불교는 그 옛날 초기불교 당시에 잠시 무상 무아 사상을 가졌었다는 정도의 사상사로 기록될 뿐, 지금 인도사상사에서는 공과 참나를 찾는 힌두교의 한 부파로 인식될 뿐, 대승불교에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불교의 정체성을 찾는 것, 그것은 바로 초기불교사상인 무상 무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공사상과 참나사상의 힌두불교의 원천이 되는 반야심경과 금강경부터 퇴출시키는 것이 급선무일 것입니다.

 

 

어느 분의 답글 :

대승경전(금강경, 화엄경, 법화경 등)은 분명히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금강경은 불교의 진수를 말씀하신 우주의 진리로 모든 분이 읽고 따라야 하는 불교의 핵심경전입니다 .

 

금강경은 나我라는 생각이 멸진된 나我, 즉 진정한 무아의 경지에 들어서 대적정삼매를 통하여 금강반야바라밀을 증득하는 수승한 '붓다의 지혜'를 말씀하시고 계시며, 진정한 무아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여야 붓다가 될 수 있다는 불교의 정수를 나타내신 경전입니다.

 

'금강경 내용을 비방하거나 부처님 말씀이 아니다' 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이렇게 왜곡을 하여 중생을 혼란과 혼돈으로 몰아가지 않기를 촉구합니다.

 

 

 

 

oo의 답글 :

 

부처님은 현상계가 무상하다고 하셨지 실체가 없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은 만사가 공이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실체가 없다는 말은 힌두논사들의 말이고

만사가 공이라는 말은 역시 힌두논사들의 말이지요.

 

 

 

님의 말씀 그대로 우리나라 모든 대승인들은

반야경과 금강경 모두 무아를 극대화시킨 초기경전 비슷한 걸로 알고 있지만,

 

그러나 저 두 경전은 분명히 부처님의 무상을 공으로 부정했고,

무아 역시 공으로 대치한 것입니다.

 

이 엄연한 사실을 간과한다면 정법으로 나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무상과 허망이 엄연히 다른 것인데도 그 사실을 분간하지 못하고

제법무아와 공이 다른데도 그것마저 분별하지 못한다면

나는 차라리 힌두교가 더 좋다고 고백하는 것이 솔직한 것입니다.

 

차라리 조계종 진제종정스님처럼

일체법이 여몽환포영이기 때문에 참나를 찾는 것이 해탈이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대승불교는 허망과 참나를 찾는 힌두교일 뿐

무상과 무아의 불교가 아니라는 걸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스님들이 까딱하면 말씀하시죠.

"다 허망한 것이여! 모두가 공이여!"

 

그러나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무 아름다워서 집착하는 이 현상계가 무상하다는 것을 깨달아라"

 

"나라고 참나라고 집착하는 오온이 무아라는 것을 깨달아라"

 

무상하기 때문에 무아를 깨달아야 해탈이라는 것과

허망하기 때문에 참나를 찾는 것이 해탈이라는 것을 분간할 줄 아는 불자되시기 바랍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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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경이나 금강경은 참나 유식으로 넘어가기 전,

무상과 무아를 공으로 대체한 초기대승불교 경전이라는 것은 앞서 밝힌 바대로입니다.

 

그러나 중기 대승불교에서는,

무상이기에 무아라는 초기불교 교학체계로는,

 

참나를 찾는 것이 궁극적인 해탈 열반이라는 힌두교적 깨달음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일체법이 무상이 아니라 허망한 것으로,

나 역시 무아가 아니라 가아 즉 허망한 자아라고 만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힌두논사들의 천년에 이르는 줄기찬 작업으로

불교는 완전한 힌두교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 불교사상사인 것입니다.

 

 

 

 

어느분의 2번째 답글 :

님의 글은 연기가 무엇인지, 그리고 무아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르면서 억지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삼법인과 사성제, 팔정도, 그리고 연기설을 정확히 공부하시고 글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힌두교의 우파니샤드는 공사상이 아니라 범아일여 사상입니다.

공사상이 무엇인지, 범아일여 사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오도하는 글을 쓰지 않기 바랍니다.

 

 

 

00의 답글 :

먼저 범아일여 사상이라는 것은 인도 바라문들이나 후대 힌두논사들이

세상은 번잡하고 덧없고 허망한 것이지만 현상계 넘어 무엇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그 어떤 실체가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여 만든 것이 梵(우주적 자아)지요.

 

그리고 我 역시 짧고 덧없는 인생(假我)이지만 그 어떤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여 만든 개념이 아트만(참나)입니다.

결국 이 두 사상의 근본에는 공(이 세상은 덧없고 허망한 여몽환포영로전)이라는 기본 개념이 전제되었고 힌두논사들은 일체법(현상계)를 부처님의 무상이 아닌 여몽환포영으로 변질시킨 것이지요.

그래서 힌두교의 베다 우파니샤드의 사상은 공사상이고 범아일여 사상입니다.

또한 대승에서는 힌두교의 범아일여 사상에서 아뢰야식 여래장 진아 진여 참나 등의 영향을 그대로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공부가 없이는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대승경전 공부 이제 그만 하시고 인도사상사와 불교철학사를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제가 말씀드린 이런 기본 개념을 가지고 공부하면 불교교리와 사상사의 핵심과 맥을 뚫는데 크게 도움 될 것입니다.

 

그리고 힌두교도 대승불교도 초기불교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연기설을 논하기는 자리가 너무 협소합니다. 전화주시면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느 분의 3번째 답글 :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 사상과 불교의 공사상은 반대되는 사상입니다.

이 두 사상을 동일하다고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범아일여 사상은 한마디로 유有론입니다.

공사상은 무아, 그리고 우주 본체의 체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실체가 없다는 연기의 법칙(무상 고 무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초기 경전(5부 니까야, 4아함부)에서 힌두교의 불생불멸의 유론을 비판하셨습니다.

불교의 위대한 사상(공, 무아 사상)을 힌두교 사상(유론, 범아일여론, 아트만론)으로 매도하시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힌두교는 실아實我를 주장하지 가아假我)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0현의 답글 :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 사상과 불교의 공사상은 반대되는 사상입니다>라고 말씀하셨군요.

그렇습니다.

힌두교의 공사상과 초기대승경전의 공사상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초기대승경전의 공사상과 후기 대승경전의 공사상은 아주 많이 다릅니다.

일체법이 허망한 것이라는 힌두사상을 반영한 반야경이나 금강경의 공사상과

그 공사상에 복잡한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한 후기대승불교에서 자리매김한 공사상은 아주 많이 다릅니다.

초기대승불교에서는 힌두교의 공사상(여몽환포영)을 가져와 무상 무아를 모두 허망한 것(공)이라고 했지만 용수 등의 중관학파를 그치면서 공이라는 단어는 그저 허망한 것이라는 의미를 벗어나 복잡하기 짝이 없이 철학화하고 확대해석하고 침소봉대 되어 단순한 힌두교적 공사상에서 너무 많이 벗어났기에, 지금 한국불교에서는 공 하나를 해석하는데 몇년이 걸려도 부족할 정도로 공이라는 것은 복잡하기 이를 데가 없이 되어버린 것이고 우리 스님들은 죽으나 사나 공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지금 스님들에게 가서 초기불교 교리에 대해서 말해보라면 입 한 번 못 뗍니다.

아무것도 모르지요. 오온이 뭔지조차 모릅니다.

 

앞서 수없이 얘기했지만 대승불교에서 초기불교교학을 아예 모르는 것은

힌두논사들이 만든 반야경이나 금강경 같이 초기교학을 모조리 공이라는 단어 하나에 매몰시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개무시한 결과지요.

무상 무아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 힌두논사들이 우파니샤드의 공사상을 가져와 금강경이나 반야경 만들어서 불교의 무상 무아사상을 그저 허망한 것(공)으로 만든 것입니다.

<범아일여 사상은 한마디로 유有론입니다. 공사상은 무아, 그리고 우주 본체의 체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실체가 없다는 연기의 법칙(무상 고 무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군요.

그렇지요. 힌두교는 우주적 자아(범)와 개인적 자아(아트만)을 인정하고 있지요.

그래서 불교로 유입된 힌두논사들은 부처님의 무상 무아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힌두교의 공사상이 무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힌두교의 공사상은 그저 일체법이 허망하다고만 말하고 있지요.

다만 용수 등이 무아나 실체가 없다는 것을 공으로 설명하기도 했지만

무아를 무아로 설명하지 않고 공으로 설명했기에 결국 불교를 망친 장본인이 되었다고 위에서 설명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초기 경전(5부 니까야, 4아함부)에서 힌두교의 불생불멸의 유론을 비판하셨습니다. 불교의 위대한 사상(공, 무아 사상)을 힌두교 사상(유론, 범아일여론, 아트만론)으로 매도하시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힌두교는 실아實我를 주장하지 가아假我)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라고 했군요.

부처님은 600페이지 40권이 넘는 5부니까야 그 방대한 초기경전에서 무상 무아만을 주장하셨지요. 그래서 브라만교의 그 어떤 실체가 영속한다는 사상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리고 니까야에서 허망하거나 철학적인 공이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사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힌두화 되어버린 대승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무상 무아와는 정반대로

세상은 허망하고 나에게는 실아(참나)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요.

이런 사상은 결국 보살을 불러들였고, 신이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영혼이 있는 것으로 오도되어 전체 국민의 95%나 되던 불자가 해방 후 1.7%에 지나지 않던 기독교에 너무 쉽게 개종해 가도록 만든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매 주 일요일 교화나 성당을 가는 기독교인의 숫자가 2005년 조사기준으로 개신교 750만명, 천주교 350만명인데, 일주일에 한 번 절에 가는 불자가 10만 명은 될까요?

절에가는 불자는 일년에 1000원짜리 한장이라도 시주하는 분이 300만명이나 될까요???

불교가 신도 영혼도 인정하지 않는 종교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전에는 오래지 않아 불교는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인도에서 불교가 힌두화되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