救苦行에 정진하자

2013. 7. 11. 06:5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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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사회로 가는 길

 

救苦行에 정진하자

 

올해는 8 11일이 우란 분재일 이다. 이날은 우리에게 거의 민속화된 축일이다. 오늘날의 백중이란 과실 차려놓고 쉬는 날로 기억될 뿐, 그 본래의 뜻은 불자 사이에서만 살아서 전해 온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 날은 세존 당시 목건련존자가 아귀도에 빠진 어머니를 구해낸 날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받들어 승자자일(僧自恣日)에 백미오과를 스님들께 공양하고 현재부모와 다생부모, 일체 친속과 악도에 빠진 중생들을 건져내는 것이다. 목건련존자의 효성에서 부처님의 법문이 열리게 되고 우란분의 법식도 알게 되었다. 우리 모두 선망부모를 위한 효의 정신이 우란분을 기하여 사회 대중구제의 의미가 있는 것을 생각하여야 하겠다.

 

 [지장본원경]에는 광목이라는 여인이 어머니를 구하는 이야기가 보인다. 악도에 떨어져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하여 지성 염불 공양하여 어머니를 구해 냈는데 고통에 빠진 수 많은 악도 중생들을 보고 큰 원을 발한다.

 

일체 악도에 떨어진 죄고 생들을 건져내어 악도에서 벗어나 모두 부처를 이루게 한 연혹에 내가 성불 하리라

 

 고통에 빠진 모든 중생들을 건진 연후에 스스로를 돌아 보겠다는 이 정신이, 지장보살의 대비 위덕을 성취시킨 근거이고 지장보살 법문의 핵심이 된다.

 

 [우란분경]이나 [지장보살경]은 많이들 알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불교가 행하고 있는 것은 대개 개인의 완성을 위주한 기도로 일관하고 있지 않나 돌이켜 보아 진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철저하게 대중구제를 통하여 자신의 완성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릇된 자기의 집착을 버리고 많은 중생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데서 자신의 완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원래 밝은 눈에서 볼 때 자신과 중생과는 둘이 아니요,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이렇게 말씀 하신다.

 

 [모든 중생을 부모와 같이 생각하고 자식과 같이 생각하여야 한다. 보살은 이런 마음으로 수행한다…. 그리고 다시 자신이 고통에 빠졌을 때 어떤 경우에든 어떤 방법으로든 벗어나려고 하는 것처럼, 모든 중생도 온갖 방법으로 언제나 모든 고통에서 해방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중생들을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중생이 곧 자기 자신일 때 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며 그의 고통을 없이 하는 것이 나의 고통을 없애는 것이 된다. 자타의 분별이 없는 것이다. 다만 온갖 고통에서 해방 되어야 한다는 의지와 노력만이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와 같고 과거 성자들의 원과 행이 이러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는 어떠한가. 불자 개인이나 불교 교단이나 불교 수행단체에서 얼마만치나 구고행(救苦行)을 닦고 있을까?

 

 말할 것도 없이 고난에 빠진 이웃을 도와 함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데는 그 첫째가 지혜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허망한 것을 알아, 집착에서 벗어나고 고에서 벗어난 생명진실의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고에서 벗어나도록 베푼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것이 제일 요건이다. 가난한 이를 재물로 돕고 병든 이를 약으로 돕는 것은 우선 당장의 고통을 멈추게 하는 것 뿐이요, 궁극적인 해탈의 기쁨은 없다. 법은 궁극적인 해탈, 자유, 기쁨을 안겨 준다.

 

 그런데 구고행으로서의 전법행은 얼마만큼 행해지고 있는 가. 사실 몸에 오는 고통, 예를 들어 병고나 가난조차도 법문을 받아들여 그 마음을 바꿀 때 기쁨과 함께 고난이 사라지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불교가 베풀 것이 없어 주지 못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부처님의 법문은 보배중의 보배이고 무진장이 아닌가. 우리들은 이웃의 고통을 대하여 염불일구로써 그를 돕는 수행에, 보다 적극적이어야 하겠다.

 

오늘날은 세상이 비교적 풍요로워지고 생활이 윤택해 져서 우리의 생활 환경은 크게도 달라졌다. 그렇지만 아직도 가난 때문에, 병고 때문에 또는 사고무친이어서 그늘에서 신음하는 형제들이 수없이 많다.

 

저들을 돕는 일은 먼저 깨달음에서 우러나야 한다. 저가 나와 더불어 한 몸이며 저를 구하지 아니하고 나를 구할 길이 없으니, 나를 빛내는 길이 바로 저를 구하는 길이다. 부처님께서도 [자타 일신]이라 하였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저를 도우라] 하셨다….

 

 우리는 깊은 깨달음에서 고난에 빠진 저들의 참된 구도자가 되어야 한다. 돈으로 돕고 힘으로 돕자. 혼자서 돕고 모여서 돕자. 일시적도 좋고 장기간 지속적으로 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구고행이란 나의 따뜻한 생명의 표현이며 자비스러운 불자의 체온이다.

 

 그렇다면 비록 작은 액수라 하더라도 정성껏 지속적으로 행하여야 한다. 참으로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정성을 바친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자기 완성이다. 받는 저 사람이 크게 도움을 받기 이전에, 정성스럽고 자비한 마음의 주인공에게 먼저 법성의 태양은 빛나는 것이다.

 

 우리 주변을 돌이켜 볼 때 자비 법문은 도처에서 끊임이 없고 자비를 배우는 보살학도가 절마다 법회마다 넘친다. 그런데도 적극적이며 지속적인 구고행이 크게 눈에 띄지 않는 것은 불광자 무식의 탓일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법문은 화려하고 구호는 요란해도 자신의 실천 구고행의 실천은 미약한 것이 우리 주변의 솔직한 현실이 아닐까? 구고행이 없는 자비론사는 공론이 아니겠는가?

 

우란분재를 맞으면서 제성의 간곡한 가르침을 다시 생각한다. 그리고 구호에만 그치고 빈 메아리로 요란한 자비실천론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부터 다시 새롭게 자타동체, 구고실천의 법문을 배울 것을 다짐한다. 불교의 존재가 살아있는 진리의 힘인 것을 우리 불자들이 보여줄 때가 바로 오늘이라는 것도 생각한다.

 

 형제들이여, 정진을 다짐하자.

 

<84>

 

광덕 큰스님 지음 빛의 목소리 p476 p480 밝은 사회로 가는 길에서, 불광출판사

접시꽃 당신/도종환
낭송/ 김종성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 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육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 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