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원을 크게 세워야 하는가 / 지운스님

2013. 10. 3. 20:0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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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원을 크게 세워야 하는가 / 지운스님
 
 
원을 크게 세우면 큰 원으로 인해 작은 번뇌와 업이 소멸됩니다.
그래서 병이 낫기도 합니다.
원을 세운다는 것은 보리심을 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은 반조의 의미도 있습니다.끊임없이 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뇌세포는 마음따라 움직이니 서원을 따라
 
온몸의 세포가 나란히 섭니다.
원은 내 성격을 인도합니다.
 
이와같이 발원한다는 것은 운명을 바꾸는 의미가 됩니다.
대원으로 인해 사소한 일에는 동요가 되지 않으며
 
마음이 너그러워집니다.
그러니 꼭 큰 원을 세우고 기도하십시오.
 
무념무상이란 생각이 없다는 멍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망념과 망상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생각은 다 나쁘고 망념이라고 보면 안됩니다.
번뇌망상에 물들지 않으면 무념입니다.
 
깨달은 사람도 좋고, 싫고, 더럽고,깨끗하고,
 
예쁘고,밉고 등 표면적 마음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자취(흔적)는 남지 않습니다. 대상에 마음이
머물지 않는다는 겁니다.
 
대상에 마음이 동요되고 머물면 착각을 일으킵니다.
생각은 하되 대상에 머물러 자신의 의견이나 상상을 덧붙이면
망념 망상이 됩니다.
 
깨달은 사람은 어떤 느낌도 없는줄 아는데 그건 죽은 마음입니다.
그 죽은 마음으로 어떻게 중생구제를 합니까.
 
기도가 잘 되었으면 분별심이 없어야 합니다.즉 허망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알아지는게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과 내가 같은 불성이라는 것)
 
지혜로운 사람은 비유를 들어 법을 설합니다.
내 마음을 동요케(일어나게) 하는 것은 모두 경계입니다.
 
수행중 무얼 느끼려는 의도를 버려야 수행이 잘 됩니다.
보려고 하고 느끼려 하고 깨달으려 하지 마십시오.
그 기다리는 마음이 번뇌가 되어 깨닫지 못합니다.
상념은 버리려 하면 더욱 성하게 일어납니다.
 
모든 생각은 관찰대상입니다.
 
불보살에 의지하며 사는 것은 신앙이고
내안에 있는 부처의 성품에 의지하는 것은 신심입니다.
신앙심이 강하면 수행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형상에 취하는 사람은 사이비에 빠지기 쉽습니다.
 
(부처님 모습만 봐도 좋다며 형상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
신심이 있으면 신앙은 자연히 생깁니다.
 
기도만 하는 사람은 불법을 모를 수 있습니다.
법을 먼저 듣고 기도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학습을 하다보면 지혜가 밝아져서 신심이 생깁니다.
불교신심은 체험을 동반합니다.
 
믿기만 하고 앎이 없으면 광신자가 됩니다.
앎이 있으면서 믿음이 없으면 탁상공론이 됩니다.
 
기독교는 믿음에서 시작되어 믿음으로 끝납니다.
앎은 있지만 수행이 없어 증명되기 힘듭니다.
기독교는 세월따라 변질되었지만
 
불법은 세월이 흘러도 똑같습니다.
신의 사랑은 인간도 신이 될 수 있게끔 해주어야 진짜 사랑입니다.
종속 관계로 묶어두어서는 안됩니다.
 
부처님은 중생도 똑같이 부처되게 하는 것이 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가장 좋아하는 공양은
'저도 깨달아 부처되겠습니다' 하고 발원하는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절대로 깨달았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 깨달음 자체가 무아이기 때문에
 
그런 말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지혜가 곧 법신입니다. 그래서 법신은 형상이 없는 것입니다.
 불교는 모든 종교중 가장 수승한 종교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종교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왜냐 ,불법은 모든 상을 떠났기 때문이며
최고는 굳이 최고라고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종교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갇혀있는 사람입니다.
 
스승은 복덕과 지혜를 다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복을 짓는 사람은 연민심을 갖고 있습니다.
수행을 하지 않고 복만 짓는 것을 치복(어리석은 복)이라 합니다.
 
연민을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은 스승이 가장 좋습니다.
부처님이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것도
 
중생을 제도하려는 연민심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80종호 32상은
 
중생을 제도하려는 보리심을 냈기 때문에 갖춘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항상 중생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깨달은 사람도 습업이 남아 있기 때문에
 
감정적인 뿌리는 잘 해결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때로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선지식을 대할 때는
 
그의 과거지사를 물을 필요도 알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그가 설하는 법만 보면 됩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복덕이 많아야 합니다.
 
복덕이 적으면 하는 일마다 걸림이 많습니다.
영험은 정성을 드리는 그 마음에 있지 도량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이란 재미없는 것을 재미로 삼는 일입니다.
 
자비롭고 부드럽게 사람을 대하는 사람은 지혜가 개발된 사람입니다.
곧 모든 존재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화를 내지 않습니다.
 
오직 중생제도의 방편으로만 화를 냅니다.
그러나 화가 마음에 머물지는 않습니다.
 
멀리서 볼 때 맑은 기운이 느껴지는 사람은
 
계행을 잘 지키는 사람입니다
멀리서 볼 때 뜀박질을 해도
 
고요한 기운이 넘치는 사람은 선정을 닦은 사람입니다.
 
법 없이 살수 있을 만큼 착해도 어리석으면 착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착함에는 지혜가 들어 있어야 합니다.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인상하나 찌푸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선법을 닦는 사람입니다.
 
기도를 했을 때는 반드시 회향을 해야 마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공덕을 불보살에게, 위없는 가르침에,
 
일체중생에게 회향해야 합니다.
회향이란 내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공덕이 생기므로 남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요즘 보기드문 스님의 귀한 법문이 예전 우리들이
공부할때의 표준전과 와 같은 귀한 가르침이
전해져 옵니다
 
이렇게 자세히 가르쳐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지운스님에게
삼배 합니다
 

 

 

 



지나온 길은 반드시 흔적으로 남습니다
자기 자신이 걸어온 길 뒤 돌아보면 발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앞보고 말 할때는 애국자요 사회에 지도자 말인데
뒤 돌아 보면 발자국 흔적은  비뚤어 져 있는것일까요

 

내가 생각하는 일 내가 하는 말 모두다 옳다고 맞다고 자신 자신 하는데 나 아닌 사람들의 생각은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의 말은 모두다 틀린 말이다 틀린 말이다 엉터리라고 확신하는데 흥분해서 들떠서 하는 말도 술취해서 하는 말도 빠짐없이 발자국으로 남는 법인데 오던길 멈추고 뒤돌아 보세요 남아 있는 발자국 지워 졌던가요 그 발자국 흔적 한치의 오차도 없이 남아 있습니다

 

당신이 해버린 지난 시절 말 말 모두 모아 보세요 당신의 발자국과 남겨진 어록들 보면 알겁니다 내 창피 내 잘못 길을 모르면 묻고 또 물어가시고 뜻을 모르면 그 뜻을 아는이에게 배워 보시고 어찌 모르는 길을 제가 잘아는 길 처럼 그리 자만을 한답니까

 

현자의 말씀에도 길을 모르면 물으면 될것이요 길을 잃으면 조금 헤매며 길을 찾으면 될것이고 중요한것은 확실한 목적지가 어디인지 기억 해야 하는것 눈 덮인 광야에 함부러 발자욱 내지 마라 그 잘못된 발자국 때문에 뒤 따른이가 목슴을 잃을 수도 있다. 

 

당신이 남긴 흔적들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걸어온길 뒤에는 반드시 흔적이 남습니다 남는 흔적을 사람들은 발자취라고 말을 합니다.

 

- 詩庭박 태훈의 해학이있는 아침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