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절하시는 큰스님

2013. 12. 18. 18:3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728x90

 

나에게 절하시는 큰스님

 

 

대연성 한옥이(大蓮性 韓玉伊)|우바이, 도피안사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가끔 절에 가면 절 입구 신장(사천왕)들의 부릅뜬 두 눈이 너무나 무서웠다. 나의 불교에 대한 출발은 무서운 감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결혼하고 수년 후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평소 어머니께서 다니는 절의 스님이 사십구재를 인도해 주셨다. 그 절의 스님께서 나에게 불교 책 두 권을 주시면서 읽어보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시댁의 분위기를 따라 타종교에 적을 두고 있었다. 그렇지만 스님이 주신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었던 불교에 대한 이해가 달라졌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어린 시절에 알고 있는 불교란 절에 가면 울긋불긋 그려진 탱화, 그리고 사천왕이나 신장들의 무서운 모습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스님이 주신 책(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음)을 읽으면서 불교란 참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우주 논리에 맞는 종교구나 하는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스님께 여쭈어 보았다.

 

 

“스님, 저는 서울에서 살고 있습니다. 서울 어디에 다닐 만한 절이 없을까요?”

“서울 종로 대각사에 찾아가면 매주 법회를 하니 거기로 가봐요.”

 

 

나는 가끔 시간을 내어 대각사로 법문을 들으러 다녔다. 불교의 분위기는 다른 종교와는 매우 달랐다. 역사 교과서 같은 강압적인 교리만 들을 때보다 훨씬 마음이 편하고 마음에 와 닿는 것이 많았다. 나는 그런 쏠쏠한 재미에 빠져서 소리 없이 다녔다. 미리 성급하게 발설하자면 그때 법문을 하신 분이 바로 나중에 다시 뵙게 되는 광덕 큰스님이었다. 큰스님은 그 당시 사십대 중반이었다.

 

 

첫눈에도 예리한 성정이 눈에서 빛으로 뿜어졌다. 그리고 무척 영민하시고 또 열성이 깊으셨다. 신도들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주시려 무진 애를 쓰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법문을 듣고 ‘기도를 해야겠구나’하는 마음이 일기도 했다. 그 후 세간의 욕락에 파묻혀 살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절에는 다니다 말다를 반복하게 되었다. 가끔 속상하면 절에 가서 마음 달래는 것이 고작일 때가 많았다. 그리고 한창 커 가는 아이들 돌보랴, 집안일 감당하랴, 바쁘기도 했지만 모두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은 이런저런 구실이나 핑계보다 그 당시 진리에 대한 소중한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 더 솔직한 고백이 될 것이다. 그래서 불법을 만나는 것도 시절인연이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어느 날, 서울에 있는 여고시절 친구들 만나서 웃고 떠들고 하다가 어느 한 친구가 자기는 불광사에 다니고 있다면서 여러 가지 유익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속으로 귀가 솔깃했다. 그래서 불광사를 찾아가 보니 아니 대각사에서 뵈었던 광덕 큰스님이 거기에 계시는 것이 아닌가. 외모는 변하셨지만…….

 

 

나는 묘한 인연을 느꼈다. 큰스님과의 불법 인연을 깊이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날부터 다시 뵈온 큰스님의 전법도량, 불광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부지런히 다니면서도 큰스님 법문의 뜻을 잘 몰랐고, 또 법등가족 모임을 이끌면서도 무엇 때문에 해야 되는지를 잘 알지 못했다.. 어쩌면 남이 하니까 나도 했고, 큰스님의 일이고 불광사의 방침이라고 하니 마냥 적당히 따라 했을 뿐이었다.

 

 

 경전의 말씀에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생선냄새가 나고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냄새가 난다’고 했다. 나는 이 말씀처럼 내용도 모르고 까닭도 잘 몰랐지만 분명 과거생 어느 시절 큰스님과의 불법 인연으로 말미암아 무턱대고 향을 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고지식하게 불광의 흉내(?)를 내다보니 나름대로 차츰 재미도 붙었고 또 사람들을 불러 모으면(법등가족 모임) 젊은 보살들이 잘 따라 주었기에 사람들 불러 모으는 재미도 있었다.

 

 

그리고 그때만 해도 만만하고 아롬하기까지 한 지원스님을 데려다가 법문을 시켜 놓고는 미주알 고주알 질문을 퍼부어 대었다. 어떤 때는 어떻게 하면 좀 더 골탕을 먹이나 며칠 전부터 연구하기도 했다. 나는 어렵고 난처한 질문을 준비했다가 송암스님을 골려주는 것이 무척 재미있었다. 그런 골려먹는 잔재미에 이끌려 몇 년 동안 변덕부리지 않고 법등의 책임자 노릇도 했다.

 

 

역시 세월은 영 허무한 것만은 아니었다. 비록 법회에서 큰스님의 설법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법등의 마하보살로 모범을 보이느라 남의 앞자리에 앉는 열성만은 가졌었다. 그러다 보니 그 좋은 설법이 반은 귓가를 스치고 지났고 나머지 반은 고작 귓가를 맴돌다가 사라져 버리는 정도였다. 그래도 그런 것이 토대가 되어서 나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법문에 대한 이해가 커가지 시작했다. 앞자리를 떡 자지하고 앉아서 때로는 큰스님 법문에 꾸벅꾸벅 졸다가 집에 돌아올 때도 있었고, 법등가족 만나는 잔재미로 법회 갔다가 올 때도 있었지만 말이다. 나 같은 사람을 두고 누군가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콩나물 시루에 물을 부으면 몽땅 밑으로 빠져버리지만 콩나물은 자라지 않느냐’고

 

 

사실 그러한 것은 나만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 신도들 거의가 그런 수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만약 큰스님께서 그런 우리 신도에게 쏟은 정열을 출가한 스님들께 전적으로 쏟았다면 큰스님의 사상은 훨씬 견고하게 자리잡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설령 다른 신도들이야 나보다 훌륭했겠지만 아무려면 스님들만큼이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나같이 한심한 신도를 상대로 눈을 열어주고 가슴을 넓혀 주기 위해 온갖 노고를 마다 않고 애를 쓰신 큰스님을 생각하노라면 죄스럽고 안쓰럽기까지 하다. 철들자 부모는 이미 떠난 뒤라고 하더니만 늦게서야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그처럼 놀이 반 재미 반으로 불광사를 다니는 사이 나에게도 부모로서의 또 다른 의무와 책임이 돌아왔다. 어느덧 두 아들이 차례로 대학에 들어갈 때가 닥쳐왔던 것이다. 도를 닦는 일에는 가장 뒷줄이어도 자식을 생각하는 애착심에 있어서는 결코 남들 못하지 않는 내가 대학입시기도를 안 할 리 없고, 남보다 뒤처지거나 게으를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더구나 내 자식에게 소홀히 한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기에 말이다. 허나 이것은 나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 한국 어머니들의 모성애는 자식들의 교육열에서 꽃을 피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너나 할 것 없이 헌신과 희생을 자식들에게 아낌없이 바쳤다.

 

 

그 시기에 나는 불광사에서 대학입시기도에 들어갔고 또 열심히 정진했다. 새벽기도를 끝내고 법우들과 함께 새벽 거리를 지나 즐거운 기분으로 집에 돌아오는 것도 좋았고, 또 가끔이긴 해도 석촌호수를 거니는 상쾌함도 좋았다.

 

 

큰스님 절에서 하는 기도, 자식의 진학을 위한 기도, 여러 신도들과 함께 하는 기도이니 신심이 저절로 우러났다. 나는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달려가 아침 일을 끝내고 다시 불광사에 달려와 사시기도를 했다. 참으로 많은 시간을 불광사 보광당에서 무릎 꿇고 보냈다. 무릎이 닳아 히끄무레할 정도로 절을 했고, 큰스님께서 항상 강조하신 ‘본래 우리 생명은 밝고 맑은 것인데 수십 생을 살면서 묻은 먼지 때문에 장애가 있으니 기도로서 닦아 맑아지게 하여 깨끗한 본 모습을 찾아야 장애가 사라진다’는 마하반야바라밀 법문이 내 머리 속에 박혔다. 돌아보면 그 시절 나는 참으로 열심히 기도했다.

 

 

그러나 다 좋았던 것만은 아니다. 집에서 아이들 뒷바라지하랴, 새벽같이 일어나서 기도하랴, 또 불광사 가서 기도하랴, 정말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실정이었다. 그러다 보면 때로는 지친 몸을 이끌고 기도를 힘들게 할 때도 있었다. 어느 날 내가 불광사 보광명당에서 기도를 하고 나니 그날따라 더 힘이 들었다.

 

 

사실 매일 하는 기도지만 어느 때는 더 힘들 때가 있고 또 어떤 때는 날아갈 것처럼 몸이 가벼울 때도 있는데, 그날은 너무나 힘이 들어 계단 한 칸 오르기도 어려웠다. 간신히 난간 손잡이를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고 있었는데 마침 점심공양을 끝내신 큰스님께서 2층 마니당(摩尼堂, 불광사 스님들 처소)으로 올라가시다가 힘들어하는 나를 보시곤 걸음을 멈추고 기다려 주셨다.

 

 

나는 큰스님께 인사를 하려고 기를 쓰고 힘을 내어 1층까지 올라갔다. 내가 올라가자 큰스님께서는 먼저 합장하시고 아주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나에게 절을 하셨다. 나는 당황하여 엉겁결에 절을 올렸지만 내 절은 큰스님 절에 미치지 못하는 허리 굽힘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큰스님께서 나에게 얼마나 공경하게 절을 하시는지 마치 부처님께 예배하시는 것 같았다. 아무런 말씀도 없는 그 조용한 모습이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계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수많은 법문보다 더 진한 감동을 받았고 동시에 한없는 연민과 자애의 면모를 보게 되었다. 평소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대하라’는 큰스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간은 잠깐이었지만 한참이나 된 것 같았다. 불광사 문을 나서는 순간 가슴이 뭉클하더니 알 수 없는 눈물이 주르르 쏟아졌다. 왜 그렇게 눈물이 흘러내리는지…….

 

 

‘큰스님께서 힘들어하는 신도의 마음을 읽으시는구나. 큰스님은 나에게 항상 어려운 분이시고, 그리고 때묻은 내 마음을 들킬까 싶어 피하기만 했는데 큰스님께서는 어느 때나 나를 지켜봐 주시는구나! 감사합니다. 큰스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차안에서도 연속적으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불타는 삼계의 고통을 벗어나려면 불교를 믿어라. 4대로 이루어진 이 몸은 언젠가 지.수.화.풍으로 돌아간다’는 어머니 절의 스님이 주신 책 내용에 마음이 이끌려 불자가 되었지만 자식의 인연이 무엇이기에 이렇게도 질긴지, 그리고 힘이 드는지 아무리 놓으려고 애써도 놓아지지 않는다.

 

 

어느 때, 강남구 임원들과 함께 큰스님을 친견한 적이 있다.

“기도(불사를 비롯해 일상행활까지) 하느라고 무척 힘드시지요. 부처님께 기도하고 수행하는 것은 노는 입에 염불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 남아 소일하는 것도 아니지요. 어느 때나 힘들여서 정성 기울여서 기도해야 합니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부디 꾸준히 정진하세요.”

 

 

웬만한 큰스님께는 느껴보지 못했던 한량없는 자비를 간직하고 계셨던 나의 스승이자 부처님이신 불광의 큰스님, 난생 처음 나를 부처님으로 대접해 주신 이 세상의 은인이신 큰스님. 나는 지금도 그날 큰스님으로부터 과분한 대접(절)을 받고 흘렸던 눈물을 잊을 수 없다.

 

 

큰스님께서 도솔산에 계실 때 법등가족들과 친견 차 갔더니만 도솔산에는 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날따라 비내리는 도솔산 경관이 무척 좋았다. 아니 비가 내려서 좋다라고 하기보다 큰스님이 계셔서 좋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그때의 감회가 있어서 여기에 옮겨본다. 어줍잖은 내 글솜씨가 부끄럽긴 해도 다시 끄집어내어 큰스님께 읽어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비 내리는 도솔산

 

 

 

연꽃 봉우리마다

비구름 감겨서 하늘로 갔다가

다시 물방울 되어 돌아오누나.

흙에 안기고 풀잎, 나뭇잎에 안기는 소리

아, 너무나 다정해라.

 

 

 

나는 오늘 비로소 도솔산 숨소리를 듣게 되었고

자연의 온갖 형상이 바로 나 자신임도 알게 되었다.

잎사귀마다 빗방울 안기는 소리

아니, 부처님의 법문인 것을…….

산하대지 삼라만상 죽지 않았음을 전하는

감로의 소식, 생명의 합창.

 

 

 

알고 보니 하늘로 올라간 것은

비구름이 아니고 한 마리

두 마리…… 무수한 용들, 온갖 조화 부리는

커다란 용이었구나. 도솔산을 지키는 호법용.

 

 

 

이제 내 나이도 올해로 꼬옥 환갑이다. 나이 든 노둔으로 인생을 생각해 보고 큰스님을 회상해 보고 부처님을 생각해 보니 뭔가 알 수 없는 한가닥 절절함이 가슴에서 묻어 나오고 있다. 조금 철이 들었지 때문일까?

 

 

천만의 말씀인 것 같다. 오히려 나이 들수록 더 오그라드는 내 자신을 느낀다. 매사에 자신도 없고, 부처님께 대한 신심도 떨어지고 어쩌든지 몸이나 편할 궁리만 찾고 피붙이에 매달리는 애착의 골만 깊어간다. 이렇게 점점 속물이 되어가고 있는 내 곁에 큰스님이 계셨다면, 다시한번 나에게 절해 주시면 나는 큰 힘을 얻고 큰스님 앞에서 두 다리 쭉 뻗고 엉엉 소리 내어 울 텐데…….

 

 

돌아보면 우리 큰스님은 반듯한 인격을 갖추신 분이셨고, 괴롭고 고단한 사람들은 진정으로 도와주고 싶어 하셨던 바다와 같은 자비를 간직한 분이셨다. 후생에도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 간절하여 무조건 따르고 싶은 분이다.

 

 

나는 얼마 전 어머니를 멀리 보내고 다시 만날 수 없는 그리움에 눈물 지을 때가 많았다. 정말 삶이 힘들 때, 그 전엔 전혀 생각도 못했던 일, 인간으로 살다가 죽어서 또다시 태어나는 윤회의 고통과 아픔을 이제는 되풀이하기 싫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기도 했다.

 

 

이제 나도 황혼에 접어든 인생이 아닌가. 지난 일을 생각해 보면 다시 되풀이 하고 싶지 않은 과거, 속죄하고 싶은 과거 인연들, 그리고 남은 인생 반듯하게 살고 싶은 마음, 간절할 뿐이다.

 

 

“아아, 큰스님 어서 사바로 오십시오. 이곳 보현대도량으로 오십시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광덕스님 시봉일기 7권 사부대중의 구세송 중에서- 글 송암지원, 도피안사

 

 

 


     마음에서 조용히 웃을 수 있는 미소를
    소중한 것은, 행복이라는 것은
    꽃 한 송이 물 한 모금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우리는 오직 눈으로 감각을 통해서만 
    찾으려 하기 때문에 정작 찾지 못합니다.
    사랑의 눈으로, 마음의 눈으로
    소중한 것을 찾을 줄 알아서 
    작은 꽃 한 송이에서 
    상큼한 행복을 들추어 내고,
    물 한 모금에서 감동의 눈물을 찾을 줄 아는 
    순수한 마음을 간직함으로써
    작은 일에도 감동 할 줄 알고,
    사소한 물건에서도 감사를 느끼는맑은 마음을 
    단 하루라도 간직하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도 이토록 
    아름다울 수있구나! 하는 느낌이 
    1분이라도 내게 머물러서 
    마음으로 조용히 웃을 수 있는
     그런 순수한 미소를
    잠시라도 가져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삶의 향기 그윽한 곳에서
    
    그윽한 삶의 향기 소중한 인연으로
    언제나 흐르는 강물처럼 변함없는 모습으로,
    따뜻한 마음으로, 맑고 순수한 인연으로,
    마음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하며
    찌든 삶의 여정에 지치고 힘이 들 때
    배려하고 위하는 마음으로 사랑과
    정이 넘치는 우리들의 이야기로 우리 마음에
    남겨지길 나는 소망하고 바랍니다.
    언제나 좋은 생각 푸른 마음으로
    아픈 삶을 함께 하고 글이나 댓글로 
    배려하고 위로 받으면서,
    맑고 향기로운 삶의 향내음 가득
    내 마음 깊이 남겨지길 소망합니다.
    둘이 아닌 하나의 마음으로
    우리 모두 가꾸면서 변치 않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따뜻한 정(情) 나누면서 그윽한
    삶의 향기 우리 삶의 휴식처에서 언제나 함께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삶의 인연으로,
    영원히 남겨지길 소망합니다.!!..
    -   좋은 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