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2. 20. 11:12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열정을 품은 한 마리 학
정법 박광서(正法 朴廣緖)|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1966년 7월,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여름방학을 하자마자 봉은사로 향했다. 방학 한 달을 봉은사에서 지내고 싶어서였다. 대학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으로서 웬일인가 의아해 할지도 모른다. 출가? 물론 고1 때 불교를 알고 나서부터 여러 번 심사숙고 해보던 숙제였지만 고3 때는 이미 출가를 일단 보류하고 대학에 진학하기로 맘먹고 있었다. 유학과정을 거쳐 박사과정까지 물리학을 깊이 있게 들여다 본 후에 출가를 다시 생각하기로 한 이상 고3 여름방학은 시험을 대비한 중요한 시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굳이 봉은사를 찾아 나선 것은 내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고등학교 다니면서 불교활동을 했던 룸비니 학생회의 법회에서 여러 번 광덕스님의 법문을 들었는데, 지적이면서도 자비로운 인상과 더불어 젊은 불자들의 사명감과 보살행을 강조하시던 모습이 항상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어서 스님 계신 곳 언저리에서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무엇보다 강했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봉은사는 뚝섬에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배 밭을 끼고 황톳길을 한참 걸어야 갈 수 있는 절이었으니 지금의 강남 지형으로는 감을 잡기조차 어렵다. 지금도 그렇지만 봉은사는 도심에 있는 다른 절과는 달리 주위의 넓은 경관과 시원스럽게 뻗은 나무들 때문에 탁 트인 느낌을 주었다. 다래헌(茶來軒)은 1970년대 초반 법정 스님께서 머무시던 집으로 별 볼품은 없었지만 내가 대학생 시절에 즐겨 찾아갔던 정겨운 곳이었는데, 지금은 봉은선원이 들어서서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어 무척 아쉽다.
절 바로 아래 동네, 사하촌에는 개가 문턱에서 졸고 있는 한가한 구멍가게도 있었고, 술을 파는 곳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이것 역시 수 년 전 아셈 때문에 사라졌다. 일주문을 나서서 논밭과 소나무 숲 사이를 20여 분 걷다 보면 왕릉이 나오는데 그것이 지금의 선릉이리라.
나는 광덕스님께 다짜고짜 한 달만 살게 해달라고 말씀드렸고, 스님께서도 조용히 바라보시더니 절 생활을 잘 해내겠느냐고 물으셨고, 내가 할 수 있다고 말씀드리니 별 이의 없이 받아 주셨다. 며칠 후 나는 그 당시 서울 시내의 한 달 하숙비에 해당하는 금액인 쌀 일곱 말 값을 마련하여 봉은사 생활을 시작했다. 주로 대웅전 왼쪽에 있는 운하당(雲霞堂)에서 기거를 했지만, 가끔은 심검당(尋劒堂)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나는 그저 절에 사는 게 좋았다. 졸음이 가시지도 않은 채 스님들 사이에 끼어 하는 새벽예불도, 조용하고 한가로운 경내를 산책하는 것도, 가끔 스님들로부터 듣는 절집 얘기도, 스님들과 함께 채소 다듬고 불 때는 일도, 채식공양도, 설거지도 모두 내겐 왠지 익은 일들이고 즐겁기만 했다. 마치 전생에 출가했던 인연이 있었던 것처럼.
광덕스님께서는 가끔 내게 지내기가 괜찮은지, 공부는 잘 되는지 물어보시곤 하면서 보살펴 주셨고, 어떤 때는 불교 얘기도 자상하게 들려주시면서 푸근한 미소로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주셨다.
그때 광덕스님께 친구 한 명을 데리고 와서 함께 지내도 좋으냐고 여쭈었는데, 그 학생도 나처럼 믿어도 되겠느냐고 물으시기에 속으론 불안했지만, 그렇다고 얼버무린 뒤 함께 절로 들어와 지내게 되었다. 그 친구 역시 고3이었는데, 신심 있는 불자도 아니었고 모범생은 더욱 아니었지만, 중학교 시절부터 친했던 친구이고 그 부모님과 누님께서 나와 여름 한 달이라도 같이 지내면, 그것도 절에서 지낼 수 있게 한다면 불량기가 조금은 빠지지 않을까 싶어 내게 신신당부한 결과이다.
나도 사람 하나 만들어 보려는 욕심에 여러 가지 궁리하면서 마음을 잡아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내 친구는 처음엔 뭔가 달라지기도 하고 어떻게든 차분히 공부하면서 지내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며칠을 못 가서 밤이 되면 아래 동네에 내려가 술을 한 잔 걸치고 들어오기도 하는 등 나를 몹시 당황하게 만들었다. 절에서 술까지 마시고 밤늦게 몰래 들어올 때마다 광덕스님께 면목이 없어서 혼자 애만 태우곤 했는데, 그래도 스님께서 아시는 것 같은 눈치였는데도 한번 약속한 것을 서로 신뢰해 보자고 생각하셨는지 아무 말씀 안하시고 끈기 있게 기다리셨던 것 같다. 결국 그 친구는 열흘도 못 넘기고 지루하다면서 스스로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지만,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스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고 한편 그 너그러움에 감사할 따름이다.
봉은사에 한 달 가량 있으면서 안 봤으면 좋았을 일을 겪기도 했다. 그것은 봉은사 총무스님과 취객과의 싸움이었다. 매미소리만 경내에 가득한 나른한 주중 어느 날 오후, 갑자기 절 마당에서 큰 소리가 나기에 나가보았더니 두 부부 포함 네댓 명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그 중 한 명은 대낮인데도 얼굴이 벌겋도록 술을 마신 상태로 아예 선불당 마루에 큰 대자로 벌렁 누워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게 아닌가. 젊은 스님 한두 분이 이러시면 안 된다면서 달래기도 해보았지만, 막무가내라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오가는 얘기로 대충 짐작해 보니 친구 부부끼리 뚝섬을 건너 봉은사로 놀러왔고, 아마 일주문 안으로 들어와서 술자리를 펴고 준비해 온 고기 안주에 술을 마시며 시끄럽게 떠들어댔던 모양이다. 젊은 스님이 말렸지만 듣지 않았고, 나중엔 사찰의 실무책임자격인 총무스님이 나서서 경내에서 이러면 안 되니 돌아들 가시라고 해도 오히려 점점 큰 소리로 중이 사람 무시한다느니, 하면서 되지도 않은 떼를 쓰다가 서로 좋지 않은 말이 오간 것 같고, 드디어는 선불당까지 와서 마루에 벌렁 누워버린 것이다. 물론 같이 온 일행 중 말리는 이도 있었지만, 또 어떤 이는 스님네가 자비롭게 봐주지 않고 성질을 돋군다는 말로 더 부채질까지 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여러 번 일어나 가라고 하는 총무스님의 말에 “중이 사람을 내쫓아? 내가 누군지 알아? KCIA도 몰라. KCIA?" 하면서 더욱 화를 북돋우는 게 아닌가. 여기가 어딘데 함부로 눕느냐고 목소리를 높이던 총무스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누워 있는 취객의 어깨를 발로 살짝 걷어찼는가 보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중이 사람을 찬다? 내가 그냥 갈 줄 아느냐. 어디 또 한번 차보시지?” 하더니 스님의 가사장삼을 붙잡고 마루에서 끌어내려 밀고 밀리면서 마당까지 내려와 옥신각신하였다. 참 난감하다 싶었는데, 그 순간 총무스님은 선불당 마당을 가로질러 건너편에 있는 조그만 창고에서 삽을 하나 들고 나오더니 그 취객의 팔뚝을 내리치는 게 아닌가. 취객의 팔에선 피가 낭자하고 모두가 놀라서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그 총무스님은 방에 들어가더니 승복을 벗고 신사복으로 갈아입은 뒤 빵모자까지 쓰고 금방 사라졌다. 모든 게 순식간의 일이었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사찰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다 해도 분명 일주문을 들어왔으면 경내인데, 일반인이 절 안에서 고기안주로 술을 마시면서 떠들어대다니, 선불당이면 19세기 불교 건축양식이 잘 보존된 서울시 유형문화재인데 그 유명한 건물 마루에 취한 채 누워 고래고래 소릴 지르다니, 그리고 당시만 해도 군사독재시절이라 중앙정보부라면 모두가 숨죽이던 시대라고는 하지만 스님께 KCIA 운운하면서 윽박지르다니……. 모든 게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사찰과 스님에 대한 생각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 어쩌면 지금보다 더 많았던 시절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더 놀랐던 것은 그 총무스님의 실체이다. 도대체 스님이라는 분이 아무리 싸움이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삽으로 사람을 칠 수 있는가. 며칠 있는 동안 내가 본 그 총무스님은 키도 나보다 작은 체구였고 말이 거의 없던 조용한 스님이셨는데, 어디서 그런 포악한 행도잉 나올 수 있었는지, 어떻게 그렇게 당황한 기색도 없이 날렵하게 옷을 갈아입고 내뺄 수 있었는지…….
그러나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 총무스님은 보통 스님이 아니었던 것 같다. 태권도 몇 단에 합기도 몇 단 되는 유명한 조직폭력배 중간 보스였다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러니까 5.16 군사정변 후 사회정화를 기치로 깡패소탕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많은 조직폭력배들이 산 속으로 들어왔고 일부는 머리를 깎고 출가자 노릇을 하면서 숨어 살았다. 몇 년 지나 분위기가 누그러지면서 대부분 속세로 돌아갔지만, 일부는 출가생활이 익숙해져 그대로 절에 남아 있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런 이력의 스님들 중 일부는 정말 세속의 인연이 덧없다, 불교의 가르침이나 수행생활이 더 멋있게 사는 길이라고 받아들인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또 일부는 세상으로 나가봐야 살기가 더 힘들뿐더러 절 생활 해보니 모두들 와서 절하고 공경하지, 용돈 주지, 뭐 이렇게 한 평생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눌러 앉은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 극소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폭력의 전력을 활용하여 교단을 어지럽히는 무리가 생겨났으니, 사찰에 일만 생기면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풍토가 생겼고 심지어는 돈 많이 들어오는 절을 접수하는 데 직접 관여하는 배후세력이 되기도 했으니, 그 후유증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로 현재도 뿌리가 완전히 뽑히지 않고 늘 불교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지 않은가 싶다. 과연 불교계의 이 업은 언제 끝나려는지…….
그 총무스님은 평소 말이 적고 편안한 느낌을 주던 스님이었던 것으로 보아 그런 대로 전자의 정상적인 스님의 모습이었다고 기억한다. 하긴 머리 깎은 지 5년이 넘었으니 이제 차분히 절 생활이 몸에 뱄음직도 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어떤 경계에 다다르면 역시 業과 習을 떨치지 못하는 것일까? 지금도 그때 총무스님을 생각하면 업력이 무섭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아무튼 그날 저녁에 서울 시내에서 돌아오신 광덕스님의 반응이 몹시 궁금했다. 화를 내실까, 한숨을 쉬실까, 아니면 모른 체 하실까? 역시 큰스님답게 내색은 안 하시는 것 같았지만, 속으로는 여러 가지 착잡한 마음이시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불교인 모두의 업보가 두렵고 마음이 아프신 것이다. 그럴수록 더 열심히 바르게 사시면서 불교의 진수를 널리 펴야겠다고 다짐하셨을 게다. 그것만이 우리의 공업을 지우고 새로 태어나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하셨고, 그러기에 나머지 일생을 중생교화에 진력하실 수 있지 않았을까.
봉은사에서의 인연 이후 대학시절에도 가끔 종로에 있는 대각사에서 법문을 들을 기회가 있었지만, 그 후 다시 뵙게 된 것은 1980년대 후반 송파 불광사에서였다. 외국에서의 9년 생활을 포함하여 실로 20여년이나 뵙지 못해서 혹시 기억하지 못하시지 않을까 했는데, 스님께서 나를 알아보시고 불자 교수로서 해야 할 일이 많다 하시며 좋은 일을 꾸준히 해가라고 역시 자상하게 격려해 주셨다.
그동안 내 기대보다 훨씬 큰 불사를 일구시고 많은 불자들의 공경을 받고 계셔서 반갑기도 했지만, 건강이 많이 약해지신 모습을 뵈니 마음이 저려왔고, 도심포교의 문을 활짝 여신 큰스님의 뜻을 과연 누가 그 뒤를 이어 더욱 융성하게 해갈 지 걱정되기도 했다. 그 후 나도 재가불교운동을 한답시고 애를 써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광덕스님 같은 큰 어른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것 때문에 언제든지 찾아뵙고 좋은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곤 했는데, 이제 막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생전에 더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그러나 어쩌랴, 큰스님의 원력을 이어가는 것은 우리 불자 모두의 몫으로 남겨진 것을. 오늘도 보현행원의 사표이신 광덕스님의 그림자라도 닮아가도록 하는 것 외에 무슨 다른 길이 있으랴.
내가 불교를 접하고부터 광덕 큰스님을 가까이서 뵐 수 있었던 것은 나로서는 큰 행운이자 복이 아닐 수 없다. 학생 시절부터 나의 서원이 우리 불교가 이 사회를 보듬고 이끌어 가는 종교로 새롭게 우뚝 서는 것이었고 지금도 그 원력이 꺼지지 않는 것은, 광덕스님의 중생에 대한 자비심과 불교의 미래에 대한 확신과 끝없는 애정, 그리고 싫증도 지칠 줄도 모르는 보현행에 대한 신뢰와 공경이 깊은 밑거름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광덕스님은 한때 출가를 생각했던 내게 출가를 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신 모델이셨다. 지적이면서도 푸근하셨고 조용하면서도 열정적인 구도자요 포교사로서 많은 불자들에게 꺼지지 않는 큰 등불이셨다.
지금도 우리 불자들의 마음속에 열정을 품은 한 마리의 학으로 살아 계시는 광덕스님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시 추슬러 본다.
2002년 9월 1일
광덕스님 시봉일기 8권-인천(人天)의 안목, 글-송암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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