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2. 26. 20:22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그때 그 시절
지인 김재일(至仁 金在一)|사찰생태연구소장
1. 30년 전 이야기
30년 전, 그 무렵 나는 경기도 용인군 시골의 어느 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있었다. 그해 봄, 학생들을 인솔하여 이웃 안성에 있는 칠장사로 소풍을 갔다. 마침 절에 와 있던 객스님 한 분과 잠깐 한담을 나누게 되었다. 불교에 대해 전혀 문회한이었던 나에게 들려준 객스님의 몇 마디 부처님 말씀(色卽是空 空卽是色)은 나에게는 평지풍파요 청전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말씀은 여름 가고 가을까지 나를 잠 못 들게 하였다.
그 무렵, 나는 학부형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10월 1일 ‘국군의 날’ 휴일이라서 하숙집 동료교사들과 사과밭에 놀러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약속을 어기고 몰래 집을 빠져나와 칠장사로 들어갔다. 나의 출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때 나이 스물하고 다섯, 벌써 30년 저쪽의 일이다.
2. 손가락 튕기기
행자를 1년 살고 나서 계를 받고, 한동안 서울 대각사에 머물렀다. 당시 대각사에는 대중들이 많았는데, 모두가 범어사 권속 스님들이거나 손위 사형스님들이어서 일거수 일투족이 조심스러웠다. 더욱이나 총무스님을 비롯하여 모든 대중이 큰방에서 같이 생활했기에 초심자인 나는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은사인 금하당 광덕대선사의 시봉을 드는 일은 적이 긴장된 일이었다.
그 무렵 내 바랑 안에는 칠장사 주지스님이 중노릇 잘 하라고 준 『사미율의』가 고이 들어 있었다. 큰절에서 지낸 경험이 일천했던 나는 정말 시봉 노릇 한번 잘 하려고 그 책을 달달 외다시피 했고,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내용 중에 “어른 방을 들어갈 때는 문 앞에서 손가락을 세 번 튕겨 소리를 낸 다음 방안에서 허락이 있은 연후에야 방문을 열어야 한다”는 대목이 있다.
한번은 사형스님의 심부름으로 은사스님 방으로 무엇을 가지러 갔다. 그런데, 방문 앞에서 손가락을 몇 번이나 튕겨도 안에선 도무지 기척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용기를 내어 또다시 튕겨보았지만, 여전히 기척이 없어서 스님께서 출타하신 줄 알고 문을 드르륵 열었더니 참선 중인 스님께서 적이 놀라셨다. 그러나, 스님은 나직하고 온화한 목소리로 타이르셨다. “앞으로는 노크를 하고 들어오너라”고 하셨다. 만약 다른 스님 같았으면 “속가의 상식도 모르는 막된 놈!”이라고 버럭 화를 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후, 살펴보니 다른 스님들은 ‘손가락 튕기기’가 아니라 노크를 하고 스님 방을 드나들고 있었다.
3. 『금강경』을 발치에 놔두다
또, 어느 날이었다. 스님의 부름을 받고 얼른 갔더니 스님께서 두툼한 책 한권을 건네주셨다. 백봉 김기추 거사가 쓴 『금강경 강송』이었다. 백봉거사님이 은사스님께 ‘惠存’으로 드린 책으로, 펴낸 지 며칠 되지 않는 ‘따끈따끈한’ 책이었다.
“백봉거사님은 부산에 살고 계시는데, 특히 『금강경』에 깊으신 분이다. 이번에 수정본을 찍어 나에게 보내준 것이다. 이 책은 본문을 구문별로 나누어 번역을 하고, 또 뒤에다 알기 쉽게 강송을 풀었어. 그리고, 강송 뒤에 그 깨달음을 시송(詩頌)으로 달아서 책의 품격을 높인 것이 아주 색다르다. 아직은 좀 이르겠지만, 공부가 깊어지면 큰 도움이 될 거야.”
삼배하고 책을 받으니 의발(衣鉢)을 받을 때만큼이나 감격스러웠다. 『금강경』은 의식집 말고는 출가 후 처음 받아든 경전이었다. 너무나 감격스러워 틈만 나면 매일같이 달달 외우고 다녔다. 내딴에는 애지중지 여긴답시고 잠을 잘 때도 머리맡에 두고 잤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예불을 하고 돌아오니 사형스님이 방바닥에 놓인 『금강경』을 보고는 호통을 치셨다.
“경전을 발치에다 함부로 놔두다니, 지인스님, 정신 나갔어? 이 책이 소설책인 줄 알아? 도대체 행자를 어떻게 살았어?!”
머리에 이고 다닌다는 그 소중한 경전을 대중들이 드나드는 방바닥에다 함부로 놓아 두었으니, 절집에서 퇴출당하고도 남는 과오가 아닐 수 없었다.
4. 옴 살바 못자 모지 오징어 사바하
당시 대각사 총무스님은 지금 목동 법안정사에 회주로 계시는 효경 큰스님이었다. 대중생활에서 자상하고 솔선수범에는 남이 흉내내지 못할 전형적인 수행자다. 아마 명절날이었을 것이다. 밤이 으슥했는데, 함께 살고 있던 사무장이 마른 오징어를 몇 마리 갖고 들어와서 눈치를 보며 슬며시 내놓았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오늘 저녁 잠자면 눈썹이 하얗게 된대요. 이것 드시면서 잠 쫓으세요.” 대중들은 사무장의 재치어린 농담과 표정에 별 탓하지 않고 둘러앉아 심심풀이 밤참으로 오징어를 뜯으며 한담을 나누었다. 스님들이 육식과 다를 바 없는 오징어를 뜯고 있는 것이 초심자인 내 눈에는 너무나 파격적이었다.
나는 오징어 조각을 받아들고, 이걸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햄릿의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가 남들이 먹는 것 보니 구미가 당겨서 얼떨결에 질겅질겅 딸 씹었다.
그런데, 먹고 나니 영 속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안절부절하고 있는데, “자네는 오징어로 먹었냐? 난 상추쌈으로 먹었는디”하고 옆에 있던 사형스님이 말했다.
그날 밤, 몰래 대웅전으로 올라가 홀로 참회를 하였다.
옴 살바 못자 모시 오징어 사바하.
5. 뭘 안다구 함부로
그 무렵 은사스님께서는 종회 부의장 소임을 맡고 계셨다. 경산 큰스님이 총무원장(?)으로 계셨을 때였다. 당시 종회는 동국대학교에서 있었고, 종회가 열릴 때마다 시봉으로 따라다녔다. 은사스님은 어디서나 온화하고 합리적이셨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안건이 무엇이었는지, 물고 물리는 지루한 토론이 계속되었다. 지금은 기억에 없지만, 당시 내가 지켜보기로는‘ 매우 답답한 논쟁’이었다. 그래서 무심중에 “저 스님들 왜 저래?”하고 투덜댔다.
그러자, 동행했던 사형스님이,
“지인스님, 잠자코 있어요 뭘 안다구 함부로……”하고 나무랐다.
그 후부터는 종회에 따라가면 그저 고개만 푹 떨구고 쥐죽은듯이 있었다. 장님 3년, 벙어리 3년, 귀먹어리 3년은 비단 시집살이에만 해당되는 규범이 아니었다.
6. 쯔쯧, 우째 저런고
그 무렵 은사스님께서는 대각사 말고 경기도 남양주 보현사에서도 자주 머무르셨다. 시봉차 따라가서 보현사에서도 한 철을 살았다. 그 무렵 대학생 불자들이 정기적으로 보현사를 찾아와 스님의 법문을 듣고 가곤 했다. 나도 가끔 스님의 수발을 들며 대학생들의 끝자락에 앉아 스님의 법문을 듣곤 했다. 대각사에 있을 때는 잡다한 일을 하느라 단 한번도 스님의 법문을 듣지 못했다. 그런 나로서는 너무나 소중하고 감격스러운 자리였다.
한번은 ‘깨달음’을 주제로 한 법문이 있었다. 법문을 마친 다음에 질문시간이 있었는데, 내가 맨 먼저 손을 번쩍 들었다. 질문의 내용은 칠장사 대웅전 불사 백일기도 때 체험한 기도삼매에 대한 것이었다. 나로서는 몸과 정신이 분리되는 난생 처음의 묘한 체험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것 질문이 아니라 은근한 ‘자랑’ 같은 것이었다. 스님은 묵묵부답으로 빙그레 웃으시더니 “다음 사람!”하고 다른 학생의 질문을 받으셨다. 아마 스님께서 속으로 “쯔쯧, 우째 저런고!”하셨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7. 배은망덕한 놈
그리고, 그 무렵 은사스님께서는 종단 안팎으로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셨다. 특히 불광회를 조직하고 월간 「불광」을 창간하는 일은 스승과 상좌 모두에게 큰 불사였다. 그래서 창간호 「불광」을 내느라고 몇몇 사형스님과 함께 교정도 보고 신흥인쇄사도 드나들었다. 중학교 국어교사 출신에다 소설로 등단해 글줄께나 긁었던 나로서는 「불광」간행에 적임자(?)였다.
그러나 왠지 내키지 않았다. 초발심자로서 글 쓰고 책 만드는 일에 붙잡히다 보면 출가의 큰 뜻을 이룰 수 없겠다는 나름대로의 얄팍한 계산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창간호가 세상에 나오던 날, 은사스님과 사형스님들에게 한마디 의논도 없이 바랑을 메고 대각사를 훌쩍 떠나버렸다.
그렇게 나간 ‘천하에 배은망덕한 놈’은 땡초가 되어 다시는 은사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광덕스님 시봉일기 8권-인천(人天)의 안목, 글-송암지원
♣ 지인 김재일 거사님의 생전 모습을 볼 수 있는 글이라 주소를 옮겨옵니다.
http://blog.daum.net/sun7113k/16332950
♣ 다음 글은 지원스님께서 쓰신 글을 옮겨 옵니다.
지인거사 김재일 불자의 면모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면 나의 예배하고 공경함도 다 하려니와 중생계 내지 중생의 번뇌가 다함이 없으므로 나의 예배하고 공경함도 다함이 없어 생각생각 상속하여 끊임이 없되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일에 지치거나 싫어하는 생각이 없느니라.
- 화엄경 보현행원품 -
나는 출가 초기에 선사(先師: 광덕스님)로부터 보현행원품을 배워듣고 하루에 몇 번씩 소리 높여 읽었다. 그것이 기도였고 수행이었다. 나 뿐 아니라 같이 살았던 상좌들은 다함께 행원품을 배우고 익혔다. 위의 경문은 보현행원품 십종행원마다 나오는 핵심 언어이고 주요 골자이다.
보현행원이 끝이 없는 것은 내 생명이 끝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생명의 참 모습을 일러주고 있고 보여주고 있다. 보살행의 까닭과 당위성을 이 구절에서 느끼게 해 주었고 환희를 안겨 주었다. 마치 잃어버렸던 보물을 다시 되찾은 것과 같았다.
더욱이나 우리를 가르쳤던 선사께서도 그와 같이 보현행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선사 말년에 육신과 정신이 힘들었을 때도 결코 평상심을 잃지 않았던 면모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지난 2011년 5월 15일 입적한 사찰생태연구소 김재일 회장도 그와 같았다. 그는 한 때 출가를 하여 나와 동문으로 법명이 지인(至仁)이다. 지인거사는 환속하여 재가불자로서 불사의 의무를 다했다. 그는 줄곧 보현행을 펼쳤으면서도 폐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것은 과거생 어느 때 지은 업장을 금생에 몸으로 다 녹이려는 것이었다. 그는 병원에서 결정적인 통보를 받고도 흔들리지 않았다. 으연히 해야 할 일들을 해나갔다. 자신의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병 없는 사람같이 살았다. 아니, 병은 남의 일처럼 살았고, 오히려 전보다 더욱 분발하여 보현행을 지어갔다.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의미 깊고 벅찬 불사들을 지어갔다. 아무리 힘들어도 누굴 탓하거나 도움을 바라지 않았다. 종단적인 규모의 큰 불사를 묵묵히 감내 하면서 그는 어떤 편에도 서지 않았고 어떤 정치적인 색깔도 띄지 않았다. 시종 청정무구의 인간관계로 일관했고 언제나 보현행자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보현행원품을 배운 참된 보현행자들은 순수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보현행은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재가불자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선사의 가풍을 고스란히 이어 받았다. 마치 출가자들에게 모범이라도 보이려는 듯이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살았다. 만약 그에게 그런 신앙이 없었다면 그의 삶을 통해 보여준 무진보현만행(無盡普賢萬行)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삶은 이 시대의 등불이고 사표다.
폐암이라는 육신의 장애가 그의 보현행을 어쩌지 못했고 죽음마저도 그가 가는 길을 막지 못했다. 그의 마지막 날, 가족에게 오늘을 넘기기가 어렵다고 말하곤 열흘 동안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한 바싹 마르고 기운 없는 입으로 염불을 했다. 마지막 숨이 멈춰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의 죽음은 죽음이 아닌 염불이었다.
난 그의 영정 앞에서 기도했다. 그는 생전에 지은 보현행으로 그의 앞길을 위한 기도는 필요 없다고 본다. 그렇지만 난 그의 속환사바를 발원하여 염불했고, 그가 잠시 머물 저승의 중생들을 위해 기도했다. 난 염불을 마치며 송행일구(送行一句)로 그의 스승인 선사가 남긴 사세송을 읊었다.
《울려서 법계를 진동하여 철위산이 밝아지고, 잠잠해서 겁전 봄소식이 겁후에 찬란해라. 일찍이 형상으로 몰형상을 떨쳤으니, 금정산이 당당하여 그의 소리 영원하리.》
“지인거사이시여, 속환사바 재명대사 하소서. 보현행자로―”
송암지원|문서포교사, 안성 도피안사 주지
<불교신문>2555년 5월 25일 ‘내 마음의 경구’
사람은 누구나
인정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을 많이 해 본 사람일수록
내 마음대로 살아 간다면
어느 누구에게도
좋은 영향은 끼치지 못 할것입니다.
단 한번 주어진 인생,
자신도 행복하고 이웃에게도 행복을
전달하는 전도자가 될 수 있겠지요
살맛을 잃은 자에게
힘과 용기를
불평과 시기심이
가득한 자에게는
우리에게 주신 선한 마음,
예쁜 마음이 심겨 질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많은 무리속에서도
은은한 향기가 묻어 나는 삶,
어두움속에서 빛을 발하는
작은 등불이 되고 싶습니다.
꽃보다 더 예쁜꽃은
꽃보다 더 예쁜 꽃은
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당신의 순수한 눈입니다.
꽃보다 더 예쁜 꽃은
두서없이 늘어놓는 내 푸념을
끝까지 들어주는
당신의 예쁜 귀입니다.
꽃보다 더 예쁜 꽃은
홀로 외로워하는 내게 다가와
노래를 불러주는
당신의 고운 목소리입니다.
꽃보다 더 예쁜 꽃은
떨어진 내 꿈들을 희망으로
보듬어주는
당신의 깨끗한 손입니다.
꽃보다 더 예쁜 꽃은
비바람에 쓰러질까
늘 바람막아 주는
당신의 다정한 발걸음입니다.
꽃보다 더 예쁜 꽃은
지친 내 몸을 조용히 일으켜 감싸주는
당신의 포근한 가슴입니다
꽃은 순간적 향기로 유혹을 하지만
꽃보다 더 예쁜 사랑향기는
감동으로 못다 핀 영혼까지 눈물짓게 합니다.
---담아온글 __
안녕 하세요 그리움님들 ~` 상쾌한 아침입니다. 아침에 창문틈으로 비취는 봄의 햇살이 마음까지 환하게 만드는 화요일입니다.. 계절은 여인네들 옷차림에서 먼저 온다했던가요~~ 그리고 보면 벌써 두툼한 외투보다는 화사한 봄옷으로 갈입은 이들이 많은듯 합니다~` 아파트 울타리에 봉우리진 개나리 꽃망울이 나의 마음을 훔쳐 보듯 설레임 이 전해 지는건 왜일까요... 화사한 봄날처럼 곱고 아름다운 화요일 되시기를 오늘 하루도 많이 웃고 행복 한 시간 되세요~~ 흐르는곡/ 니가 그리운날엔 / 박상민언제나 따뜻한 마음으로 베려와 사랑을 아끼지 않으시는
께 감사 마음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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