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이 간 길 그대로 가리라

2014. 3. 6. 09:5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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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 간 길 그대로 가리라

 

 

遇岩慧山 |부안 내소사 회주

 

 

 

1. 나의 선지식론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이어받는 일만이 출가자 이전에 ‘사람’으로서 할 일이라 여기고 입산한 지 어느덧 근 40년이 흐른 지금, 마음에 가장 큰 기쁨은 나의 스승이신 해안(海眼)스님을 만난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과문한 탓이겠으나, 그분처럼 자비롭고 고구정녕하게 후학을 지도하시는 분은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는 그분을 만나 출가할 마음을 내었고 그분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할 수 있었던 것에 출가자로서의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단지 스승 살아생전에 ‘이제, 되었다’라는 시원한 말씀을 듣지 못한 게 큰 회한으로 남아 있으나, 그분을 이 생에서 뵙고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기에 ‘성불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질 수 있었고 지금껏 그 생각엔 변함이 없고 또 자신감을 견지할 수 있었다.

 

 

불법에 귀의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는 선지식이다. 생사를 해탈할 수 있는 체득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선지식과의 만남에 있기 때문이다.

 

 

앎에는 두 가지가 있다. 지식으로 아는 것과 체득해서 아는 것이 그것이다. 지식으로 아는 것은 삼촌(三寸) 학설에 불과하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말해서 아는 것이 세 치, 곧 삼촌학설이다. 이는 상식으로 아는 것일 뿐 체득된 앎이 아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거의 이 상식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그 소용없는 앎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살아간다. 그래서 미숙할 수밖에 없고 시비가 그치지 않는다. 적어도 수행자라면 체득된 앎을 추구해야 한다. 체득해서 아는 것은 마치 차(茶)를 마셔보고 차 맛을 아는 것처럼 체험에 의해서 얻는 것이다. 그러기에 상식으로 아는 것과 체득해서 아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상식으로 아는 사람은 알고 있는 것을 곧바로 실천하며, 동요 없이 오직 한길로 매진한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추구해야 할 일은 부처님의 경지를 체득해서 아는 것이다.

 

 

팔만대장경을 다 외우고 있다 하더라도 생사에 임해서는 이를 헤어나지 못하나, 선지식을 만나 도를 체득했을 때는 생사에서 해탈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출가 수행자의 길에 있어 올바른 선지식을 만난다는 것은 큰 복이 아닐 수 없고, 그러기에 ‘바른 스승을 만나는 것은 수행의 전부다’란 말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은 영원한 것이다. 인생 또한 무한한 것. 그 끝없는 인생의 여정에서 방향 설정이 제대로 되어야 불제자의 최종 목적지인 ‘성불’에 이르지 않겠는가. 길을 아는 선지식을 만나야 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고 어떠한 역경을 만나더라도 주저하지 않고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2. 광덕스님의 따뜻했던 말씀

 

 

광덕 큰스님과 맺은 인연을 돌아보는 자리에서 선지식에 대한 서론이 길었던 것 같다. 광덕스님이야말로 이 시대를 선지식으로 살다간 진정한 출가자였다는 생각에 그리 되었다면 양해가 될지 모르겠다.

 

 

오래 전부터 송암스님의 간곡한 원고 청탁을 받으면서, ‘꼭 청탁에 응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막상 스님과의 인연을 추억하자니 마음이 편치 않다. 항상 마음속으로는 존경하며 가르침을 받고 싶은 선지식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나, 몇 번 뵈온 것 외에는 스님과 가까이 할 인연이 이뤄지지 않아 남길 만한 풍성한 얘기가 없기 때문이다.

 

 

인연이란 본디 우연히 생기거나 하루아침에 생기는 게 아니다. 스님과의 인연이 이 생에선 몇 번의 만남으로 그쳤지만, 아마도 수없이 걸어왔을 저 먼 생의 인연은 깊었으리라 생각된다.

 

 

나와 광덕스님의 인연은 마치 견우와 직녀 같은 인연이었다고 할까, 언젠가 스님께서 안성 도피안사에 계신다는 말을 전해 듣고 우정 찾아갔는데 계시지 않아 뵙지 못했다. 와병 중에 계실 때는 두 번 찾아뵙고 문병한 일이 있었으나, 뒤에 열반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무슨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다. 49재에도 가 뵙지 못하여 늘 죄지은 사람처럼 있다가, 일주기 때 송광사 방장스님이신 보성스님을 모시고 참석하여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었으니, 생각할수록 아쉽기만 하다.

 

 

스님께서 왕성하게 활동하실 때 나는 선방에 있었으므로 가까이에서 뵐 인연이 없었다. 그러다가 내가 조계사 주지로 있을 때, 스님께서 종회부의장을 하고 계셔서 간간히 뵐 수 있었다. 그때 스님을 뵈면서, ‘개혁적인 사상을 지니고 있되 과거를 돌아보고 또 미래를 설계하는, 여러모로 갖추어진 분이시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광덕스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언젠가 종로구 관내 기관장들이 모인 집회장에서 내가 법문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법문이 다 끝난 후 스님께서 나에게 해준 말씀이다. 집회가 끝나자 모두들 흩어져 돌아갔으나, 종회의장 자격으로 그 집회에 참석하신 스님께서 유독 남으셨다가 청중석에서 일어나 나에게로 다가오셨다.

그리곤 말씀 하셨다.

 

 

“수고하셨어요 참, 명연설이었고 훌륭한 법문이었습니다.”

평소 존경의 마음을 보내고 있던 선배 스님께서 그리 격려해 주시니 무한히 고마웠고 한편으론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감사하다고 말씀을 올리자, 스님께서 조심스럽게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아까 말씀하시며 칠판에 적었던 한자 하나가 틀렸더군요.”

 

 

그러시면서 스님께선 ‘혼연일체(渾然一體)’의 한자 중 혼연(渾然)의 ‘혼(渾)’자를 ‘휘(揮)’자로 잘못 썼던 사실을 일러주셨다.

 

 

나는 그때 스님의 섬세함과 후학을 아끼는 따뜻함을 절실히 느꼈다. 이미 지난 일이기도 하거니와 ‘실수로 그랬겠지’하고 지나면 그만인 일을, 그냥 돌아가시지 않고 남아 있다가 일부러 가르쳐 주시는 자상한 모습을 대하며 얼마나 고마웠는지, 참으로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 사소한 일로 보일 수도 있으나, 내겐 커다란 가르침으로 각인되어 있다. 삼십여 년 전의 일인데도 그 장면이 마치 한 폭의 수묵화처럼 생생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아마도 스님께선 후학들에게도, 아니 스님이 접했던 모든 사부대중에게 그리하셨을 것이다. 그렇듯 섬세함으로, 간곡함으로, 따뜻함으로 다가섰으리라 짐작된다.

 

 

보살의 대원으로 이 땅에 오셨고, 가난한 일생을 통하여 오직 선정을 벗으로 하고 대중교화와 후학 지도에만 혼신을 다하셨던 나의 스승 해안스님 또한, 한시도 제자는 물론 대중 곁을 떠나지 않고 일거수 일투족을 세심하게 관찰하셨다. 잠시라도 방심하는 기색이 보이면 금방 꿰뚫어 보시고 갑자기 질문을 던지거나 벽력같은 할을 하셔서 방심을 하지 못하게 하셨다. 스승의 마음과 눈길이 우리에게 늘 머물러 있었으니, 어찌 눈동자를 함부로 움직였겠는가. 어찌 감히 마음을 함부로 어지러이 했겠는가. 오로지 화두 참구에만 마음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스승이 제자는 물론 공부하려는 대중에게 그리도 고구정녕하게 마음을 온전히 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무릇 스승은, 선지식은 사부대중에게 그러해야 할 것이다. 외람된 표현이 될지 모르나, 내 스승이 그런 선지식이었고 광덕스님 또한 그런 선지식으로 살다 가신 분이라 생각된다. 이사(理事)에 능통했던 광덕 큰스님께선 우리 불교사에 길이 고승으로 남을 스승이요 선지식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

 

 

3. 스승이 간 길 그대로 가리라

 

 

불조의 혜명을 잇기 위해서 출가한 수행자의 생명은 수행에 있다. ‘화두참구’라는 수행을 통해 잡념을 없애야 영원한 생명인 불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불조의 혜명을 잇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부처님의 진리를 화두참구해서 견성하는 것이다. 화두참구 수행에는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 마음이 있으니, 신심과 분심과 의심이 그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인간으로 태어나 각고의 노력을 다해서 정각을 이루시었듯, 나도 그렇게 부처님처럼 노력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확고부동한 신념을 가져야 한다. 정각을 이루신 부처님에 대한 믿음과 부처님처럼 성불할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하룻밤에도 만 번 태어나고 만 번 죽는 게 인간이다. 왜 우리는 석가모니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하룻밤에도 만생만사해야 하는가.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억울하지 않는가. 부처님은 확철대오해서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 사자후하셨는데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나는 왜 그러지 못하는가 하는 억울한 마음, 즉 분심을 내야 한다.

 

 

그리고 다음은 의심이다. 화두에 대한 철저하고도 간절한 의심이다. 문제는 신념이다. 반드시 노력하면 된다는 확고한 신념,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중생고를 탈피하지 못한다는 믿음이 확고해야 한다.

 

 

그러나 신념이 생길 수 있는 정신적 기반이 있어야 하는데, 그 기반의 형성은 선지식을 만나는 것에 있다. 그래서 선지식과의 만남이 수행의 전부라고 하는 것이다.

 

 

송암스님이 『광덕스님 시봉일기』에서 “나는 이제 더 알 것이 없다. 스승이 가르쳐준 대로 살기만 하면 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선지식은 그와 같은 존재이다. 후학에게 확고부동한 신념을 심어 주고 실천방법을 일러주는 분인 것이다. 그러므로 견성하기 위해서는 진리에 어둡지 않은, 전체를 보는 안목이 훤한 선지식이 일러준대로 따라가면 된다.

 

 

나의 스승께선, 평소 “아무리 못난 놈이라도 칠 일이면 깨칠 수 있다. 내 경험에 의해 장담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씀을 믿고 재가자 신분으로 ‘21일 특별정진’에 참가했다가 21일 동안 깨치지 못한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해서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았다. 그것이 엊그제 같은데 삼십대에 머물렀던 세월이, 어언 오늘 칠십에 이르렀다. 생각할수록 원통하고 분하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느긋하다. 송암스님의 고백처럼 스승이 일러준 대로, 그분이 갔던 길로 가면 되는 것이다. 이제 곧, 불사에 매달렸던 그간의 분주함에서 벗어나 명실공히 운수납자로 돌아가 대중과 함께 정진할 것이다. 스승 밑에서 ‘공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매진했던 저 초발심 시절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하여 불조의 혜명을 잇고자 확철대오하리라 다짐하고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남은 세월, 정진하다 죽으면 여한이 없으리라. 이 모두가 이 생에서 선지식을 만날 수 있었던 청복(淸福)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광덕스님 시봉일기 8권-인천(人天)의 안목, 글-송암지원

 

아무래도 나는 / 이해인     

 

 

    

누구를
사랑한다 하면서도

결국은 이렇듯
나 자신만을 챙겼음을
다시 알았을 때 나는 참 외롭다.

많은 이유로
아프고 괴로워하는
많은 사람들 곁을

몸으로 뿐 아니라
마음으로 비켜가는
나 자신을 다시 발견했을 때,
나는 참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