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人天)의 안목, 보현보살이신 큰스님

2014. 3. 12. 20:0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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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人天)의 안목, 보현보살이신 큰스님

 

 

 

보현 이종린(普賢 李鐘麟) |홍익소아과의원 원장

 

그리운 큰스님 (1)

 

어둠은 어둠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이 글은 광덕 큰스님의 상좌 송암 스님께서 내신 '광덕 스님 시봉 일기' 제 8 권에 실린 글입니다. 오늘처럼 화창한 봄날 30 여 년 전, 이제 막 20 대에 접어 든 저에게 봄꽃처럼 맑고 환하게 저에게 오셨다 가신 큰스님을 기리며 썼던 글입니다. 온 산하에 가득한 봄꽃을 보니 큰스님 생각이 북받쳐 올라 싣습니다.            普賢 合掌

                              

 


          

          

 

제 인생의 봄날에 봄꽃처럼 화사하게 저에게 오셨던 스님.

보현행원을 외치시며 내 생명 다하도록 부처님께 내 모든 것을 공양 올리고자 하신 스님.

오늘처럼 화창한 봄날이면 환한 웃음 머금고 오시던

우리 '광(光)'자 '덕(德)'자 큰스님이 너무 보고 싶습니다.

 

저는 큰스님을 세 번 만났습니다.

첫 번째는 형상으로서의 만남,

두 번째는 보현행원을 통한 만남,

그리고 세 번째는 큰스님 열반을 통한 만남이 그것입니다.

 

큰스님을 형상으로 만나 뵌 것은 불과 서너 번에 지나지 않지만,

큰스님의 맑은 모습은 너무나 깊이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이제는 가고 아니 계신 광덕 큰스님!

큰스님께 공양 올리는 마음으로 저의 작은 그리움, 이렇게 돌아봅니다.

 

 

(1)첫 번 째 만남-어둠은 어둠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스님을 처음 만나 뵌 것은 제가 갓 대학에 입학하였을 때였습니다.

그 때가 아마 지금과 같은 화사한 꽃 피는 사월 봄날이었으니,

불교 학생회 첫 수련회 갔을 때 온 산에 꽃 냄새 가득한 법당 문을 활짝 열고 힘차게 들어오시던  스님이 기억납니다.

 

얼굴에 어두운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한없이 밝고 자비로우신 빛을 온 몸에 가득 담고 스님은 저에게 그렇게 오셨습니다.

잠깐 그렇게 뵈었던 스님은 그 해 초겨울, 대각사에서 다시 뵙게 됩니다. 유신 치하이던 당시, 호국 불교라는 우산 아래 고통 받는 민중의 아픔을 외면하던 불교계에 경종을 울리고자 서울대 불교 학생회 임원진들이 반정부 집회를 가지려는 것도 모르신 채,

 

이 날 스님은 "어둠은 어둠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등불을 밝힐 때 어둠은 저절로 사라진다" 라는 법문을 하셨습니다(이 말씀은 저의 평생의 좌우명이 됩니다).

 

그 후 학생들이 종로 거리에 나가려 할 때 그제서야 그 사실을 아시고

학생들이 다칠까봐 온 몸으로 막으시던 스님.

약하게 보이던 스님의 그 날의 또 다른 모습은 저에게 강한 인상으로 남았습니다. 다음 해 선배를 따라 스님 뵈러 종로 대각사에 한두 번 더 갔던가?

환하게 웃으시며 제 이름은 안 불러 주시면서(당연하시죠. 스님은 저를 모르시니까요)

제 옆에 있던 선배 이름을 부르며 잘 왔다고 하시며 환히 웃으시던 젊은 날의 큰스님!

그 웃음 환하시던 스님의 모습이 제가 이생에서 뵈었던 형상으로서의 스님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그 후 고뇌가 일 때마다 잠실로 옮기신 스님을 뵈러

그 당시만 해도 허허 벌판이던 불광사로 몇 번 더 찾아 갔으나,

병환 중이어서 만나 뵙기 어렵다는 시봉 스님의 말씀을 듣고

그 때마다 아픈 가슴을 안고 그냥 발 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제 선배님들 중에는 스님과 친한 분도 있었고

심지어 갈매리 보현사에서 스님을 모시고 학교를 다닌 분도 있었지만,

저는 그런 복을 짓지 못해 열반하실 때까지 다시는 스님을 뵙지 못하게 됩니다.

 

 

(2)두 번째 만남---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스님을 두 번째 뵙게 된 것은 행원을 통해서입니다.

큰스님이야 제 가슴에 진한 감동으로 남아 계셨던 분이고 '보현행원품'을 번역하신 것도 알고 있었지만, 저는 스님이 평생 행원을 당신 수행의 근간으로 하셨는지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행원을 통해 다시 부처님을 만나게 됩니다.

 

행원은 제가 이 때까지 만났던 어떤 수행보다 뛰어난 수행법이었습니다.

행원은 일체 중생을 부처님으로 만들며 부처님 같은 삶을 우리가 직접 살게 합니다.

섬기고 공양하는 보현행원을 통해,

우리는 부처님 무량 공덕의 바다에 들어가게 되며

깨달음은 소리 없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됩니다.

제게 있어서 행원은 이토록 뛰어난 수행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행원을 수행하면서 한 가지 의문을 지울 수 없었는데,

그것은 행원이 제가 생각하는 것만큼 뛰어난 수행이라면

선지식들께서 행원을 말씀하시지 않을 리가 없을 텐데,

제가 과문한 탓이긴 하겠지만

주위에 보현행원을 설하시는 선지식들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름 난 선지식들께서 행원을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당연할 것입니다.

즉 행원이 별로 뛰어난 수행법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보현행원은 예로부터 뛰어난 수행법의 하나로 알려져 왔고

저 역시 행원을 함으로써 그 공덕을 온 몸으로 체험하고 있던 터라,

행원을 말씀하지 않는 우리 불교계의 모습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뛰어난 수행법을 선지식들이 설하지 않을 리가 없는데,

정말 내가 잘못 알았나?

정말 나는 잘못된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느끼고 있는 환희는 단지 경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저는 이런 의문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의문을 확실히 풀어 주신 분이 바로 큰스님이십니다.

 

저는 어느 날, 우연히 큰스님의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라는 법문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저에게 마치 우레와 같은 큰 법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행원을 말씀하시는 분이 다름 아닌 우리 '광덕 큰스님'이라는 사실은

제게 늘 떠나지 않던 행원에 대한 의문을 한꺼번에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큰스님 같으신 분이 행원을 말씀하신다는 사실은

더 이상 행원을 의심할 필요가 없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 이후로 화두를 타파하지 못하더라도,

출가 고행을 하지 않더라도,

내 비록 번뇌 많고 어두운 범부 중생에 지나지 않지만

'보현행원으로 세간 속에서도 해탈을 이룰 수 있으며,

일체의 보현행을 모든 부처님께 공양함으로써 반드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치 않습니다.

 

 

누가 뭐라 하더라도 저는 보현행원으로 꼭 보리를 이룰 것입니다.

 

 

*註: 보현행원-불교에는 성불을 뒤로 미룬 체

일체 중생의 해탈을 위해 사시는 성자들(菩薩이라 부릅니다)이 많이 나옵니다.  

지혜를 상징하시는 분이 문수보살이시라면, 자비를 상징하는 분은 관세음 보살이십니다.

보현 보살은 부처님을 모시는 대표적인 두 분 보살님 중 한 분으로,

지혜와 자비의 실천을 상징합니다.

그러한 보현보살이 일상 생활에서 스스로 성불하며

또한 이웃과 더불어 함께 성불하는 법을 일러주신 것이 보현행원인데,

행마다 원을 가지고 하라는 뜻입니다.  

화엄경 보현행원품에는 그러한 행원의 구체적인 열 가지 사례가 실려 있습니다.

 

 

(3)세번째 만남-금정산이 당당하여 그의 소리 영원하리

 

 

마지막으로 스님을 뵈온 것은 불광사 보광당에서입니다. 스님의 열반을 알린 조간 신문은 저에게 청천벽력같은 소리였습니다.

 

 

 

황급히 불광사 보광당에 달려 갔을 때 한 눈에 들어 온 스님의 영정...

그 환한 모습은 제가 이십 여 년 전 봄날에 보았던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스님! 이제야 제가 왔습니다..."

스님은 제가 누군 줄 아실 리도 없고

저 또한 스님에게 있어서야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을 그런 사람이겠지만,

삼 배를 드리며 저는 그렇게 스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삼 배를 드리는 도중에 어찌나 눈물이 솟아 나오는지...

그것은 다름 아닌 아쉬움과 통한의 눈물이었습니다.

 

 

내가 좀더 일찍 발심했더라면!

내가 좀더 일찍 행원을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후회가 제 가슴을 후려쳤던 것입니다. 그럴 것입니다.

제가 조금만 더 일찍 철이 들었더라면 큰스님께 행원을 공양 올릴 수도 있었고 큰스님의 깊고 크신 가르침을 직접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제가 어리석고 게으른 탓에 그냥 스님을 보내 드리고 말았습니다.

아니 스님을 놓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제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겨우 발심하고,

또 발심한 후에도 정진을 게을리 한 탓에 행원을 늦게 알아

큰스님께 공양 한 번 못 올리고 그냥 떠나 보내 드리고 말았으니

어찌 그 회환이 깊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인연은 부질없는 것이라, 한 번 헤어지면 다시 만나기 어려운 법.

언제 어느 회상에서 다시 스님을 만나 뵐 수 있으며,

언제 또 스님 모시고 가르침을 들을 수 있단 말입니까... 다행이 아직은 이른 때라, 오신 분들이 많지 않아 저는

큰스님께 청정수 한 잔은 올려 드릴 수 있었습니다.

정성을 다하여 한 잔의 청정수를 올리며,

다시는 못 만나 뵈올 '광(光)'자 '덕(德)'자 큰스님께 저의 작은 원을 공양 드렸습니다.

 

 

"큰스님! 금정산이 당당하여 그의 소리 영원하듯,

반드시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어

이 땅에 큰스님 못다 하신 행원의 노래, 꼭 울려 퍼지게 하겠습니다..."

 

 

그 때 올린 저의 원은 비록 작고 보잘 것 없으나,

내 생명 역시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똑같은 무량 공덕 생명!

 

내가 더 큰 보리심으로 더 큰 정진 이룰 때,

금정산이 울리도록 크고 당당하신 큰스님의 모습은

우리 앞에 다시 현현하게 될 것입니다.

 

*註1.내 생명 부처님 무량 공덕 생명

 

---큰스님께서는 늘, 내 모습이 비록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나의 생명 역시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이 무한한 능력, 축복, 은혜가 가득한,

부처님과  똑같은 그런 존재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마치 촛불이 비록 작고 미약하나

그 본질은 산하를 훨훨 태우는 저 거대한 산불과 조금도 다름없듯 말입니다.  

  

우리 생명의 본질이 무한한 능력, 무한한 축복, 무한한 생명을 가진 존재이므로,

이 사실을 믿고, 긍정하고, 그래서 찬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부처님과 똑같은 존재임을 알아,

스스로를 비하하며 아무렇게나 못난 중생으로 살아 갈 게 아니라,

우리도 부처님과 똑같이 그렇게 자비롭고 너그럽고 찬란하게 살아가자는 말씀입니다.

 

*註2. 금정산이 당당하여 그의 소리 영원하리!

-큰스님의 열반송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신 큰스님은 병(폐결핵) 치료하러 가셨다가

부산 동래 범어사에서 24 세 때 출가하셨는데, 범어사 뒷산 이름이 금정산입니다.

  

스님은 젊은 날 범어사에서 한창 공부하실 때 금정산을 자주 오르셨다고 합니다.

젊은 날 보셨던 그 푸르던 산이 열반을 앞두고 떠 오르셨나 봅니다.

  

덧붙인다면 여기서 금정산은, 다들 아시겠지만

우리의 본성, 본래 면목을 뜻하기도 합니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광덕 스님 열반송]     

 

울려서 法界를 振動하여 鐵圍山이 밝아지고      

잠잠해서 劫前 봄소식이 劫後에 찬란해라     

일찍이 形相으로 沒形相을떨쳤으니     

金井山이 당당하여 그의 소리 永遠하리

 

 

광덕스님 시봉일기 8권-인천(人天)의 안목, 글-송암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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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4

 
보문 14.02.26. 07:11
시봉일기의 8권의 제목이 "인천(人天)의 안목" 이길래 무슨 이유인가 했었는데 보현선생님의 글이였습니다.
이 글을 전문을 다 실으려고 하니 너무 길어서 다음 주에도 이어집니다.

보현선생님께서 큰스님을 만난 인연과 보현행원을 공부하시게 된 인연에 관한 글입니다.
보현선생님께서 올리신 글을 제가 다시 편집하여 올립니다. 중간중간 註도 있어서 더 좋을 것 같아서요.
봐도봐도 신심이 생기며 조금이나마 나아가고 싶은 마음 솟습니다.
여러번 꼭 꼭~~~ 읽으시길 간절히 청하옵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청정수1 14.02.26. 07:28
내생명 부처님 무량공덕생명 보현행원으로 보리이루리. 보현행원으로 불국이루리. 다시 한번 읊어봅니다.
미처 몰랐습니다. 보현선생님과 광덕큰스님의 형상적 만남이 그리 짧은 줄.... 울림. 파동이 번져가듯 ..인연도 감동도 퍼져가나봅니다. 보현행원의 노래도 온누리 울리길 발원하며 ~ 우리를 이리 인연지어주시는 보현선생님께도 찬탄드립니다.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_()()()_
 
 
진호 14.02.26. 08:19
감사합니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생명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도사 14.02.26. 15:28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해반스 14.02.26. 17:09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하하호호 14.02.26. 19:05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惟蘭 14.02.27. 00:20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_()()()_  
 
밝은마음 14.02.27. 10:56
고맙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_()()()_ 
 
연무심 14.02.27. 12:01
광덕스님 시봉일기는 꼭 보시길 강추합니다.
몇년 전 너무 좋아 이책 저책 사서 보고 또 보고 했던 기억들이 오늘 이자리까지 이어졌나 봅니다.
공부도 투자를 해야 한답니다.
시간 , 정열, 돈...
마하반야바라밀...._()_
 
 
혜성화 14.02.27. 13:07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밍
 
 
이다은 14.02.27. 16:48
고맙습니다. 광덕스님 시봉일기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보현행원으로 보리이루리. 마하반야바라밀_()()()_

 

 

그리운 큰스님(4)-깨달음을 중생 속으로

 

 

큰스님의 불광 운동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지금이야 포교당이 많지만 그 당시만 해도 큰스님들께서 시중에 거주하시며 포교 활동을 펴는 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었습니다.

  

이런 사실 외에도 큰스님께서는 불광 운동을 통해 현대 불교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셨는데,

 

첫째는 재가(在家)불교를 '수행하는 불교'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마는 우리 불자들은 수행을 참 안 하는 것 같습니다. 그저 지식적인 접근 아니면 기복적인 마음으로 만나는 것이 대부분인데, 스님은 그런 불교, 그런 저희들을 '수행하는 불교, 수행하는 불자'로 만드신 것입니다. 목탁 치는 법을 가르치시고 기도하는 법을 일러 주시며 직접 수행하도록 하셨습니다.

 

 

저는 큰스님을 직접 모시기 못했던 불행한 불자 중의 한 사람이지만, '반야바라밀 염송'이라든가 '전법오서' 등을 보면 어떡하든 어린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행'을 통해 하나라도 더 전해 주시려 하셨던 큰스님의 따뜻하고 애틋한 마음이 가슴 아리도록 느껴집니다.  큰스님은 어린 저희들을 일깨우기 위해 참으로 부단한 노력을 하셨던 것입니다.

 

 

둘째는 회향(廻向)과 자비행을 통해 '깨달음을 중생 속으로'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개인적으로 보면 수행도 열심히 하시고 도(道)는 참으로 높은데 중생의 일에 무심한 분들이 종종 계십니다. 중생이 무슨 일을 하든, 중생의 마음 상태가 어떻든 그 분들은 알 수 없는 옛 선사들의 게송을 읊으시고 자신의 깨달음만 추구하며 열반을 노래하시는데, 저는 나날이 불교 신도 수가 줄어드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모습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법은 선택 받은 자, 근기가 출중한 몇몇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부처님 가르침이 필요한 사람들은 고통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평범한 중생들입니다. 사실이 그러할진대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개인적으로  아무리 높은 도를 이룬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안타까운 현실을 혜안(慧眼)으로 꿰뚫어 보시고 깨달음을 중생 곁으로 가져 오신 분이 바로 큰스님이십니다.

 

불광 운동을 통해 깨달음은 먼 삼천 년 전의 일이 아니요 중생 속에서 생생히 현실로 살아 숨쉬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큰스님의 삶 자체가 반야행(般若行)입니다. 제법이 공한 것을 보신 분, 일체가 환(幻)이요 꿈이 아닌 것이 없는 것을 온 몸으로 똑똑히 보신 분만이 할 수 있는 지극한 반야행을 스님은 우리에게 그렇듯 밝게 보여 주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직접 나눠 주시고 가신 것입니다.

 

 

普賢 05.04.08. 11:34

광덕큰스님은 선사의 자리를 버리시고 중생곁으로 오신 분이죠. 40년전에 전법의 중요성을 간파하셨으니, 그리고 40년 전이면 서울에 전차가 다니고 아직도 한강에서 수영할 수 있을텐데, 그 시절에 저런 놀라운 말씀을 하셨으니 얼마나 왕따(?)당하셨을까요? 지금도 승가에선, 간화선 안하면 중 취급도 안하는데 그땐 오죽 했겠어요

 

 

 

그리운 큰스님(5)-큰스님은 왜 우리 곁에 머무르셨는가?

 

 

큰스님은 범어사 시절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생애를 저희들 곁에 머무르셨습니다. 스님 정도의 법랍(法臘, 승려가 된 햇수)과 법력이라면 유명 사찰에서 어른 스님으로 대접 받으며 아무런 불편 없이 지내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번뇌 중생을 만날 일도 별로 없으며 따라서 어리석은 중생으로 인하여 같이 가슴 아플 일도 없고, 그저 열심히 공부하시다가 오가는 납자(衲子, 수행하는 승려)들을 가르치시고 때때로 법회 날 대중을 상대로 꿈같은 법문을 설하시면, 스님의 수행은 깊어만 가고 명성은 온 세상을 뒤덮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셨더라도 하등의 허물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스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풀 냄새 가득한 깊은 산사를 등지고, 스님은 저잣거리로 내려 오셔서 저희들과 똑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시멘트 가득한 거리에서 그저 법주실(法主室)이라는 작은 공간에 의지하신 채, 저희들과 똑같이 아파하며 그렇게 지내시다 가셨습니다.  혹자는 스님이 산보다는 저잣거리를 더 좋아하셨기 때문에,  또는 포교 활동을 하시려면 어쩔 수 없어서 그러했던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기 쉬우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큰스님의 원력(願力)이 그렇게 우리 곁에 머무시게 하셨을 것입니다.

 

 

불교 수행을 하는 분들은, 아니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릴 것 없이 산을 그리워합니다. 일반적인 스님들 모습도 사실 깊은 산사에서 뵈올 때 그럴 듯하지, 도시에서는 좀 어울리지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두고 보더라도, 한시 바삐 이 속세를 떠나 깊은 산에서 공부를 실컷 하고 싶지 매일 이렇게 중생으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물며 큰스님이야 오죽 하셨겠습니까. 저는 큰스님께서 불편하신 몸에도 자주 불광사 주위의 석촌 호수를 거니셨다는 말씀이 참 아프게 가슴에 와 닿습니다. 

 

 

스님인들 어찌 삭막한 시멘트 거리가 좋았겠습니까? 스님인들 어찌 물소리 바람소리가 그립지 않으셨겠습니까?  스님인들 어찌 모든 것 버리고 깊은 산사에서 다른 큰스님들처럼 그렇게 공부하며 살고 싶지 않으셨겠습니까?

 

 

하지만 스님은 저희 곁을 떠나실 수가 없었습니다. 어리고 어린 저희들을 두고,

우리 스님같이 자비로우신 분이 어찌 산으로 가실 수 있었겠습니까!

 

 

스님은 그래서 산으로 갈래야 가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단 한 명의 중생이라도 성불하지 않은 이가 있고

고통 속에 가슴 아파하는 중생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 한,

스님은 오직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나 몰라라, 하고

산으로 가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비원(悲願)이 아마 스님으로 하여금

석촌 호숫가를 그렇게 거닐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제비꽃 05.04.08. 09:47

한번도 친견하지 못했던 스님이지만 글을 보니 절로 마음안에 그려지네요.._()_()_()_

普賢 05.04.08. 11:27

그렇죠 제비꽃님? 저도 큰스님 친견한 것은 불과 3-4번밖에 안 된답니다. 1975 년 늦봄-초여름 사이에 대각사에서 뵈온 게 끝이지요. 그 후로는 영영 큰스님 뵙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도 큰스님은 저에게 영원한 님으로 남아 계시지요...*^*^*_()_

普賢 05.04.08. 11:29

저는 보현행원 공부를 하며 큰스님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는데, 정말 대단하신 분이라는 걸 날이 갈수록 실감합니다. 큰스님 일화가 궁금하면 도피안사에서 나온 큰스님 제자 송암스님의 [공덕스님 시봉일기 시리즈]가 있어요. 6 권 정도 나왔는데, 첫번째 1 권이 제일 일화가 많아요. 한번 읽어보시기 권합니다.普賢合掌

普賢 05.04.08. 11:30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만난 횟수가 중요하다거나 옆에 있는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아요. 만나거나 만나지 않거나, 님의 사랑은 점점 깊어만 간답니다. 이것도 병인지 모르나, 우리 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병이라면, 세세영영 앓아도 괜찮겠지요...*^*^*_( 

普賢 05.04.08. 11:31

우리도 큰스님을 사랑하지만, 큰스님은 저희들을 더없이 사랑하시니깐, 우리가 손해 보는 일은 절.대.없을거에욧!!!*^*^*_()_

 

 

 

 

 

 

그리운 큰스님(6)-금강경과 보현행원

 

  

큰스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 이후 큰스님을 찬탄하는 글을 많이 봅니다.

큰스님을 뵈온 분들의 느낌은 아마 한결같을 것입니다.

어찌 저리도 밝고 자비로우실까? 하는 것이 모든 분들의 공통된 느낌일 것입니다.

 

수행을 많이 하신 선지식이라 하더라도 출세간 일에는 밝으시지만

세간 일에는 상대적으로 어두운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큰스님은 출세간뿐 아니라 세간 일에도 밝고 막힘이 없으셔서 하나를 맡기면 열을 해결하고, 리더쉽도 있으셔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스님 가신 지 2 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일방적인 찬탄보다는 좀 더 다른 방향으로 스님을 기려야 할 것 같습니다. 즉, 무엇이 스님을 저리도 밝고 자비롭게 만들었으며 우리 또한 스님처럼 되려면 어떻게 수행해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리라 봅니다.

 

                                                                           

스님의 사상은 한 마디로 반야바라밀과 보현행원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보현행원은 스님을 말할 때 빼 놓을 수 없으며,

행원이야말로 스님을 저리도 밝고 자비롭게 만든 가장 근본적인 스님만의 독특한 수행이라 생각합니다.

 

 

보현행원은 본디 그렇게 밝은 법문입니다. 부처님 위신력이 곳곳에 넘칩니다. 부처님이 그대로 나에게 오시게 하는 수행이 바로 행원이요, 부처님에 대한 믿음, 부처님에 대한 그리움이 곳곳에 묻어나는 것이 행원의 소식입니다. 행원은 나에게 어둠을 사라지게 하며 절망을 벗어나게 하며 한없는 부처님의 밝은 기운이 온 누리 곳곳에 퍼져가게 합니다.

 

 

그리하여 나의 생명이 부처님 생명이요, 내 생명이 부처님 생명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무량 공덕으로 예나 지금이나 넘치고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내가 미혹할 때나 미혹을 벗어난 지금이나,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그 어느 때든 내 생명의 무량 공덕은 조금도 더하거나 덜함이 없이 그렇게 내 마음의 밤하늘을 비추고 있습니다. 스님이 늘 말씀하시던 '내 생명 부처님 무량 공덕 생명'도 아마 이런 행원의 소식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행원을 함에 있어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금강경'입니다.

그것은 행원에 금강경의 밝은 지혜가 더해지면 더할 나위 없는 광명이 현실에서 구현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말씀 드리면 혹시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행원은 어디까지나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므로 지혜의 완성에는 금강경이 필요한 것이구나, 하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제가 보기에는 바른 견처(正見)는 아닙니다.

부처님은 그 자체가 광명이라, 부처님을 닮고자 하는 그 어떤 수행도 광명 아님이 없습니다.

 

행원도 마찬가지입니다.

행원은 본래로 밝은 가르침입니다. 행원 그 자체가 태양처럼 아니 비치는 곳 없는 지극히 밝은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이에 금강경의 밝은 가르침이 더해지는 것은 부족한 무엇을 보충하는 차원이 아니라, 밝은 가르침에 환한 기운을 더해 주는 것입니다. 밝은 기운이 더 뻗어 나갈 수 있도록 금강경은 행원을 한층 더 밝혀 주는 것입니다. 금강경의 밝은 빛이 온 누리에 가득할 때, 행원은 그 밝음과 함께 더욱더 눈부시게 부처님 법계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큰스님께서 세간, 출세간을 막론하고 그리도 밝으셨던 것도 이에 기인합니다.

금강경의 밝은 지혜 위에 행원의 눈부신 가르침이 현실에서 살아 숨쉬기 때문에

출세간뿐 아니라 세간 살림도 어두워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큰스님을 뵈려는 이는 반드시 금강경과 행원을 공부하여야 합니다. 큰스님께서 젊은 날 금강경을 만나고, 다시 행원으로 지혜를 밝히신 것은 바로 이런 오묘한 인연의 결과라 할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큰스님께서는 평생을 반야바라밀 염송과 행원을 저희들에게 설하신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이제 글을 맺을 때가 되었습니다. 저는 스님을 생각할 때마다 스님께서 남기신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란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룬다는 말은 앞서도 말씀 드렸듯 제가 행원 수행에 깊은 회의가 일었을 때 큰 가르침을 주었던 게송입니다. 이 게송은 스님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이렇게 간결하고 감동적인 말로 번역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큰스님께서 가고 없으신 지금, 저희들이 해야 할 일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우리도 큰스님처럼, 내 생명이 부처님과 똑같은 생명임을 믿으며 끝없는 정진으로 기어코 보리를 이루는 일입니다. 스님이 그토록 좋아하시고 온 생명을 다 바쳐 이룩하시려고 했던 행원의 노래가 이 땅에 울려 퍼지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다함없는  행원의 노래가 온 사바 세계에 울려퍼지는 날,

우렁찬 금정산의 그 소리와 함께 큰스님께서도

환한 미소와 끝없는 자비로 다시 우리 앞에 현현하실 것입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보현보살마하살

 

 

광덕스님 시봉일기 8권-인천(人天)의 안목, 글-송암지원

 

    만남과 마주침의 차이 진정한 만남은 상호간의 눈뜸이다. 영혼의 진동이 없으면 그건 만남이 아니라 한때의 마주침이다. 그런 만남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끝없이 가꾸고 다스려야 한다. 좋은 친구를 만나려면 먼저 나 자신이 좋은 친구감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친구란 내 부름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 법정의《오두막 편지》중에서 -
    (오늘의 꽃) 측백나무꽃 측백나무 [側柏─ Thuja orientalis] 측백나무(側柏나무)는 구과식물의 하나로 Platycladus의 유일한 종으로 중국 북부가 원산지로, 한국, 일본, 인도, 이란 등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도 자생합니다. 우리님들 측백나무 꽃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저희집에 있는 황금측백나무 꽃이랍니다. 저렇게 생긴 꽃이 지면 꽃모양과 비슷한 모양의 둥그렇고 뿔이달린 모양의 열매가 맺힌답니다. 측백나무 꽃말이 '견고한 우정'이라고 하네요. 오늘의 주제와 맞는 측백나무 꽃을 오늘의 꽃으로 정했답니다. -측백나무의 전설- 측백나무는 예부터 신선이 되는 나무로 알려져 귀하게 대접받던 나무다. 사당이나 묘지, 절간, 정원 등에 즐겨 심었는데 특히 중국 사람한테 사랑 받았다. 측백나무 잎이나 열매를 먹고 신선이 되었다거나 몇 백 년을 살았다는 얘기가 많이 전해진다. 옛날 진나라 궁녀가 산으로 도망쳐서 선인이 가르쳐 주는 대로 소나무와 측백나무 잎만 먹고 살았더니 추위와 더위를 모르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온몸에 털이 난 채로 2백년 이상을 살았다고 한다. 또 적송자라는 사람이 측백나무 씨를 먹었는데 빠졌던 이가 다시 나왔다고 했으며, 백엽 선인은 측백나무 잎과 열매를 8년 동안 먹었더니 몸이 불덩이처럼 되고 종기가 온몸에 돋았다가 깨끗이 나았는데 그 뒤로 몸이 가벼워지고 얼굴에서 빛이 나며 결국 신선이 되어 우화등선했다고 했다. 측백나무에는 무덤 속의 시신에 생기는 벌레를 죽이는 힘이 있다. 인연 / 이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