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사 풋내기 기자와 발행인 고병완

2014. 3. 26. 20:2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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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사 풋내기 기자와 발행인 고병완

 

 

 

보리장 권경희(보리藏 權敬姬)| 소설가․심리상담가

 

 

 

 

 

큰스님은 불교 전반에 걸쳐 해박했다. 풋내기 기자인 나로서는 큰스님의 깊고 넓은 학식을 보는 것이 경이 그 자체였다. 방대한 불경의 어느 경전에 무슨 이야기가 나오고, 어떤 문구는 어느 경전에서 온 거라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원고는 주로 큰스님이 직접 쓰거나 구술하고, 큰스님을 시봉하며 법회에 봉사하고 있는 재가불자들이 그때그때 받아 적어서 내게 보내왔다.

 

 

그때도 큰스님을 방문하는 신도가 워낙 많아 거의 5분에 한 분씩 신도가 방문 했다. 그래서 불광출판부의 식구들도 큰스님 한번 뵙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오죽하면 큰스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고 있는 법회 봉사자들이 “큰스님을 안 찾아뵙는 게 큰스님께 효도하는 길이다”라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였다.

 

 

낮에 원고 구술할 시간조차 없을 때면 스님은 한가한 밤 시간에 카세트 녹음기에 원고 내용을 녹음하였다가 다음날 내게 전해 주셨다. 녹음한 내용을 풀어 쓰면 그것이 그대로 원고가 되었다. 문장을 고칠 것도, 자료를 따로 찾을 필요도 없었다. 말씀한 그대로가 완벽한 원고였다. 한번은 마감일이 되도록 큰스님 원고(녹음)가 안 되어서 직접 찾아뵙고 ‘독촉(?)’을 하였다.

 

 

그러자 큰스님은 그 자리에서 받아 적어라 하셨다.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는데, 그 역시 그대로 원고가 되었다. 큰스님은 가끔 원전을 찾느라 책을 뒤적이는 것 외에는 거의 거침없이 구술을 하였고. 그러면 원고 몇 꼭지가 바로 그 자리에서 나왔다.

 

 

어느 날, 큰스님이 준 녹음테이프를 집에 가지고 와서 풀다가 그만 다른 물건을 버리면서 함께 쓰레기통에 버리고 말았다. 서부 이촌동 시민 아파트에 살 때의 일이었다. 9층 아파트에서 쓰레기 투입구를 통해서 버리고 난 뒤 그날 저녁 테이프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는데, 트럭이 드나들 정도로 커다란 쓰레기통에 들어가 아무리 뒤져도 테이프를 찾을 수가 없었다. 별 수 없이 다음 날 큰스님께 이실직고 하였더니, 아무런 꾸지람 없이 같은 내용을 다시 녹음해 주었다.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너무나 죄송하여 아찔하기까지 하다.

 

 

큰스님은 매달 잡지 기획을 직접 했다. 나와 주간스님이 함께 기획안을 짜 올리면 큰스님이 살펴본 다음 고칠 것은 고치고 적당한 필자를 선정해 주었다. 큰스님은 잡지 발행인답게 기획에 걸맞은 글을 쓸 만한 필자에 대해서도 훤히 알고 있었다. 당시 ‘경전의 세계’를 연속해서 특집으로 내보내고 있었는데 어느 경은 누가 공부가 깊고, 어느 경은 누가 전문이라며 필자를 일일이 선택해 주었다. 중견 학자는 물론이고 신진 학자, 그리고 스님들 중에서도 누가 어느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을 큰스님은 소상히 알고 있었다.

 

 

나는 잡지 원고의 재교까지 보고 난 뒤 ‘오케이’를 놓기 전에 반드시 큰스님께 보여드렸다. 그러면 큰스님이 한 장씩 넘겨가며 하나하나 자세히 검토해 주었다.

“불교 한자는 보통 한자와 다른 게 많아.”

큰스님은 한글 교정은 내가 알아서 잘 했으려니 믿어주시고 당신은 한자 교정을 봐주었다. 그러면 어김없이 틀린 글자가 한두 자 나왔다. 주로 고승들의 이름에서 틀리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남천(南泉)스님의 한글 표기를 남‘전’으로 하는 것 등이었다.

 

 

그때는 인쇄 용어가 대부분 일본어였다. 나는 뜻도 모르면서 일본어를 따라 쓸 수밖에 없었다. ‘호부장’이니 ‘보카시’니 ‘구구리’니 하는 말 등이 기억난다. 스님 앞에서 그런 말을 쓰면 스님은 일본어로 글자를 써주면서 원어와 뜻을 알려 주었다.

 

 

어느 날 큰스님을 찾아뵙고 있는데 불광법회 재무 소임을 맡은 중년의 보살(신흥인쇄소 사장 하산거사 박충일 불자의 부인 대륜성 보살)이 출납장부를 갖고 왔다. 한 달을 넘기는 부분에 ‘이월’이라는 글자를 쓰면서 한자로 ‘이월(利月)’이라고 적어 놓은 것을 보고 큰스님이 빙그레 웃으면서 나지막이 일러 주었다.

“이월은 다음 달로 넘긴다는 뜻으로 ‘옮길 이(移)’자에 ‘넘을 월(越)’자를 써서 이월(移越)‘이라고 해야 해요.”

 

 

그 보살은 얼굴이 빨개져서 몸둘바를 몰라 하면서도 큰스님이 적어 준 글자를 장부에 베껴 적었다. 그때 나도 이월이란 글자를 처음 대하던 때라 사전을 찾아보지 않으면 그 보살처럼 틀릴 터였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글자를 몇 번이고 연습했다. 이렇게 잡지사 일로 대각사 뒤켠에 있는 큰스님 방을 찾아뵐 때마다 무엇이든 하나씩 얻어 배우고 나왔다.

 

 

한번은 다른 절에 있는 젊은 스님이 큰스님을 뵈러 왔다. 그 스님은 일부러 누덕누덕 여러 겹 기워 만든 승복을 입고 왔다. 그 모습을 본 큰스님이 낮으면서도 엄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무슨 옷을 그렇게 사치스럽게 입었어? 부처님의 분소의(糞掃衣)를 입으신 뜻을 몰라서 그런 옷을 입은 건가? 일부러 오리고 잘라서 기워 입은 옷은 금은보석으로 치장한 옷이나 마찬가지야.”

젊은 스님은 얼굴이 벌개져서 고개를 숙였다.

 

 

큰스님의 공양상은 말 그대로 조촐했다. 위 수술은 두 번이나 받은 때문인지 큰스님은 늘 소식(小食)을 하였다. 그래도 그렇지, 반 공기도 안 되는 밥에 나물 몇 가지가 전부였다. 큰스님은 그마저 맛나게 들지 못했다. 맨밥에 간장을 찍어서 잡숫는 모습을 여러 번 뵈었다. 저렇게 잡숫고 어떻게 살아나가시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법회 꾸려나가고 잡지 발간하고 신도들이 뵙겠다면 마다 않고 다 만나는 것을 보고 큰스님은 초인이다 싶었다.

 

 

큰스님이 맛난 음식을 별로 안 드시는 덕분에 혹 신도들이 큰스님을 위해 갖다 드린 귀한 먹을거리를 우리 출판사 식구들이 대신 먹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갈 때마다 큰스님은 뒷방에 먹을 거 많으니 사무실로 갖고 가서 나누어 먹으라고 했다. 꿀에 절인 인삼이나 잣이나 깨로 만든 강정 같은 것은 물론이요, 당시엔 구경도 못해 본 이름도 모를 열대지방 과일도 큰스님 덕분에 맛볼 수 있었다.

 

 

큰스님은 아이들을 좋아했다. 신도들이 어린이를 데려오면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며 아이들이 보배라는 말씀을 자주 했다. 그런 마음 때문인지 한 보육원과 인연을 맺어 법회에서 보육원 돕기 모금함을 마련해 놓고 매달 모금된 돈을 보육원에 전달해 주곤 했다.

 

 

어느 날 큰스님을 찾아뵈었더니 그 보육원 원장이 큰스님께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원장은 매우 공손한 자세로 큰스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큰스님 쪽을 향해서는 만면에 웃음을 짓던 그가 내 쪽을 고개를 돌리는 순간 갑자기 표정이 확 바뀌면서 그의 본 모습이 나타났다. 섬뜩했다. 그 얼굴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마치 짐승 같은 얼굴이었다. 순간 인면수심(人面獸心)이란 말이 퍼뜩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얼른 마음을 돌려 좋은 일 하고 사는 사람을 내가 괜히 나쁘게 본다 싶어서 속으로 자책을 했다. 그러나 몇 년 후 그 원장이 보육원 돈을 빼돌려 축재하고, 초등학생인 어린 보육원 소녀들을 성폭행해서 잡혀갔다는 신문 보도를 보고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던 수심(獸心)이 무의식적으로 밖으로 표출된 순간을 내가 포착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지성으로 보육원을 도와주었던 큰스님은 그 일로 충격을 받아 몸져누우셨다는 말을 훗날 전해 들었다. 그때 내가 원장한테서 받은 느낌을 진작 말씀드리고 조심하시라고 할 걸 그랬나 하고 후회가 되기도 하였으나, 사람 얼굴을 보고 느낀 ‘감’만 갖고 뭐라 말씀드린다는 것은 큰스님께 결례가 되는 것 같았고 또 지금 생각해도 그런 류의 이야기를 큰스님께는 드릴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큰스님은 참으로 순수하고 순진했다. 그래서 속이려 드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속고, 이용하려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이용을 당했던 게 아닌가 싶다.

 

 

큰스님 방 낮은 문갑 위에는 스승인 동산 대종사의 흑백 사진이 놓여 있었다. 큰스님은 자주 그 사진을 가리키며 “우리 스승님이셔” 하고 자랑을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큰스님 눈에는 그리움이 듬뿍 담기곤 했다.

 

 

한번은 큰스님 방에서 원고를 받아 적고 있는데, 동국대와 관련된 사람이 찾아왔다. 이번에 총장을 새로 선출하는데 그들이 밀고 있는 사람을 큰스님께서도 밀어달라는 청을 했다. 큰스님은 그때 동국학원 이사로서 총장 선출 권한이 있었다. 그 사람의 말을 듣는 큰스님의 표정이 근엄해졌다.

 

 

“이렇게 찾아올 필요 없어요. 내가 봐서 일 잘하겠다 싶은 사람을 뽑지, 찾아와서 부탁한다고 하여 그 사람을 뽑는 건 아니니깐……”

큰스님은 매몰찰 정도로 정면에 대고 말했다.

방문객은 “예, 알겠습니다”하고 연신 머리를 조아리고는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큰스님은 봉투를 내려다보며 정색을 하고 물었다.

“이거, 나한테 주는 거예요. 부처님께 드리는 거예요?”

“부처님께 바치는 겁니다.”

그러나 스님은 얼굴을 펴며 봉투를 방석 밑에 밀어 넣었다.

“알았어요. 그럼 우리 불광법당 짓는 데 쓰라고 법회에 전해 주겠어요.”

방문객이 돌아가고 나자 스님은 불광법회 재무를 맡은 사람을 불러 방석 밑에 넣었던 봉투를 그대로 전해 주며 법당 건립금으로 쓰라고 주었다. 봉투 속 금액이 얼마인지 확인도 하지 않았다. 당시 방문객이 봉투를 내미는 표정으로 봐서 꽤 많은 금액인 듯싶었으나,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내 추측일 뿐이다.

 

 

불광법회는 초기에 법회 장소가 따로 없어서 대각사 대웅전을 빌려서 법회를 가졌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낸 후 법당을 마련하기 위한 불사를 벌였다. 어느 절이나 건물 새로 짓는 불사를 많이 하지만, 불광법회는 그 형태가 독특했다. 회원들이 적금을 부어서 건립자금을 마련한 것이었다. 한 사람이 월 1만원에서 몇 만원 수준으로 모아 나갔다. 그때 돈으로 4억 원 정도를 모으기로 목표액을 정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큰돈을 몇 만원씩 적금을 부어 마련하자니 보통 정성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동참하는 회원도 많아야 했고 기간도 오래 걸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개 금융사기 사건이 터졌다. 그때만 해도 아무개는 독실한 불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네는 절에 시주도 많이 했는데, 큰돈을 시주 받은 여러 스님들도 함께 이름이 신문에 오르내렸다. 그런 기사를 본 큰스님이 우연히 말했다.

“아무개 보살이 얼마 전 우리한테도 찾아왔어. 불광법당 건립불사에 1억원을 내겠다고 하기에 내가 거절했지. 그것은 사람을 차별해서가 아니었어. 우리 불광은 어느 큰 사람의 많은 돈보다 모든 대중이 동참하여 절을 짓기로 부처님께 서원했거든”라고 하셨다.

 

 

그 말씀에 이어 큰스님은 부처님이 걸식을 할 때 부자나 가난한 집이나 가리지 말고 걸식을 가라고 했다는 말씀을 전해 주었다. 부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가난한 집에 가서 걸식하는 것을 꺼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스님들이 걸식을 하는 이유가 중생들에게 보시 공덕을 짓게 하기 위한 것인데, 가난한 집이라고 해서 가지 않으면 공덕을 지을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아니냐며 골고루 가도록 했다는 것이다. 큰스님은 법당건립 불사도 이런 마음으로 가능하면 여러 사람이 정성을 모으도록 권선의 인연을 활짝 열어 놓은 것이었다. 지금도 잠실 불광사 지하 법당 앞 벽면에는 그때 법당건립 불사에 동참했던 불자들의 이름이 빼곡이 적혀 있다. 큰스님의 뜻이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광덕스님 시봉일기 8권-인천(人天)의 안목, 글-송암지원

 

[광덕큰스님의 신세(?) 한탄]

 

 

 

 

  

 

 

도피안사의 송암스님이 발간한 광덕스님시봉일기(전10권) 8권에는 큰스님이 신세 한탄(?)을 하시는, 보기 힘든 대목이 나옵니다. 지극한 도반이셨던 일타큰스님의 상좌 설곡스님이 스승님의 방 청소를 하시다 우연히 스승님께 보낸 큰스님의 편지를 발견하신 것입니다. 거기엔 저를 너무나 아프게 하는 큰스님의 사연이 실려 있으니, 그 대목을 옮겨 봅니다.

 

"스님을 뵙고 서울에 돌아오고 보니, 스님께서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부럽게 느껴졌습니다. … 중략 …저는 이곳 서울이라는 도시에 갇혀서 마치 소모품처럼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시에 갇혀 마치 소모품처럼 살아가는 신세! 그것이 많은 분들이 칭송하는 우리 큰스님의 진짜(?) 모습이셨습니다.

 

많은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큰스님이 다른 스승님들처럼 산에 가시지 않고 도시에 계신 것은 중생을 사랑하셔서라고! 거기에 포교에 관심이 많으셨기에 산에 가시지 않고 중생들 옆에 머무신 것이라고! 그러면서 큰스님의 중생 사랑, 포교 의지를 찬탄하고 높이 평가들 하십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었으니, 우리 큰스님도 다른 도반 스님들처럼 깊은 산속에서 그렇게 공부하시고 싶으셨습니다. 다만 인연이 그렇지 못기에 할수없이(?) 저희들 옆에 계셨고, 남들이 보기엔 버젓한 대(大) 도량의 법주(法主)이셨지만 큰스님 스스로는 한없는 아쉬움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아쉬움이 절친한 도반이셨던 일타큰스님께 그런 편지를 쓰게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큰스님의 공부에 대한 열정은 다른 법문에서도 나타납니다. 큰스님은 언젠가 법문하시며, 당신이 사실은 서울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가시려고 몇 번이나 마음먹은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칭송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중생 옆에 있고 싶어 계신 것이 아니라, 기회만 나면 도망가려 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할 수 없이(?) 이렇게 도시 포교를 하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 그 말씀을 보았을 때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우리 큰스님이 정말 그런 말씀을?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찬찬히 다시 큰스님의 삶을 돌아보았을 때, 비로소 놀람보다는 눈물이 쏟아질 뻔했습니다. 큰스님의  아픈 마음이 너무도 제 가슴에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송암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말년의 큰스님은 아픈 몸으로 불광사 옆의 석촌 호수를 걷기를 그렇게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산에 가시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몸! 얼마나 산이 그리우셨으면 그 얼마 안 되는 호수 길을 그렇게 좋아라고 걷고 싶으셨을까! 그것도 걸음도 제대로 떼기 어려운 그 병든 몸으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숨막히는 도심 속에서 소모품처럼 사라져가시던 큰스님! 전법 흉내만 조금 내 본 분들도 사람을 깨우치고 밝게 만드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자신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인지, 아마 절실히 아실 것입니다. 저희들같은 어린 이들도 그러한데, 우리 큰스님에겐 얼마나 많은 분들이 큰스님을 귀챦게(?) 해 드렸겠습니까? 그저 법력이 높으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얼마나 많은 분들이 큰스님께 매달리며 울고 불고 하셨습니까! 죽겠다고 살려달라고, 얼마나 큰스님을 못살게(?) 해 드렸겠습니까!

 

그 울부짖음, 그 하소연, 그 고통을 하나도 남김없이 들으셔야 했던 큰스님. 그리고 종종 만나는, 당신이 해결해 주실 수 없는 중생들의 아픔에 당신의 한계를 탓하며 얼마나 많이  애타게 공부에의 서원을 발하셨을지, 뵙지 않아도 모셔 보지 않아도 큰스님의 삶을 보면 능히 알 수 있는 일. 그러니 그렇게 산으로 한사코 가시고 싶어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모든 것을 깨우치시어 저 어린 중생 곁으로 완전한 각자(覺者), 부처님처럼 정말 그렇게 다시 오시고 싶었을 것입니다. 울 필요도 없고 가슴 아플 필요도 없는 그런 완전한 사람, 완전한 각자로 말입니다. 그러니 깊은 산에서 마음껏 공부 잘 하시는 도반이 얼마나 부러우셨겠습니까! 그러니 그런 편지를 일타큰스님께 쓰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소모품처럼 하루하루 살아간다... 감히 말씀드리기도 부끄럽지만, 제 심정과 똑같은(?) 심정을 우리 큰스님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소모품>의 뜻을 잘 모르시는 분도 계실 것 같아 부연 말씀드립니다. 많은 분들이 스승님을 찾아오지만, 대개는 발심(發心)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 분들은 대부분 당신이 필요할 땐 스승님이고, 당신이 필요없을 때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당신이 아쉽고 필요할 땐 온갖 정성 다하고 울고불고 하지만, 일이 해결되고 나면 그걸로 끝입니다. 모든 스승님들은 우리가 고난을 물론 고난을 이겨낸 후 밝은 공부하기를 바라시는데, 그걸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스승님은 우리들에게 <일회용 소모품>에 불과(?)합니다. 필요할 때 한 번 쓰고 버리는, 그런 일회용 말입니다. 그런 일회용 속에 스승님들의 에너지는 날로 소진됩니다. 그리고 결국 병을 얻고 저희 곁을 떠나 버리시고 맙지요...

 

**또 하나의 소모성은, 종단 관계자를 포함한 주위 많은 분들이, 큰스님을 이용(?)하고 그냥 버리는(?) 일입니다. 큰스님이 능력이 뛰어나고 수행이 깊은 것을 이용하는 것이지요. 게다가 큰스님은 워낙 순수하셔서 당신의 호불호나 이익을 따지지 않고 공만의 입장에서 모든 일을 수행하시고 처리하시는데, 그걸 이용하는 것입지요. 이런 사례들은 큰스님 시봉일기나 그밖의 큰스님 관계 기사들을 읽어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큰스님은 어찌 보면 철저히 이용(?)당하신 면도 있어요. 그저 말없고 착하고 일 잘하니, 갖다(?) 쓰신(?) 것이지요. 그러니 당신은 공부할 시간이 없던 겁니다.

 

그런 일은 나중에 제자들도 마찬가지. 출가 제자나 재가 제자나, 그저 당신 공부나 당신 고뇌에 큰스님 이용(?)할 줄만 알았지, 공부 열심히 하고 자비의 삶을 살아 부처님과 스승님에게 은혜 갚을 생각은 못한 분들이 제가 보기에 대단히 많습니다. 그러니 <소모성>이지요. 당신의 공부도 포기하시고, 오직 일체중생들을 위한 삶을 사신 우리 큰스님. 그 깊은 마음을, 누가 알고 계실꼬...

 

저야 사람이 삐딱하여 일찌감치 그런 걸 알았지만, 그래서 요즘은 그런 소모성이 되는 걸 제 딴엔 잽싸게 피하지만, 우리 큰스님이야 어디 그러신가...평생을 말씀도 못하시고 그렇게 사셨으니...그저 제 중생이 스스로 눈을 떠 스스로 허물을 보기를 원하셨으니...그리고 오직 공경하고 섬기다만 가셨으니...일타큰스님께 보낸 편지 아니였으면, 저 역시 까맣게 몰랐을 일입니다...

 

***외람되고 송구스런 말씀이지만, 저를 보고 저 양반은 서원이 깊고 전법 의지가 강하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가끔 계십니다. 저를 귀엽게 보고 하시는 말씀이겠지만, 그러나 저의 솔직한 마음은 사실 그런 것은 저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그런 말씀을 들을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제 속마음은 사실 전법이고 서원이고 그런 것 전혀 없습니다. 저 역시 다른 분들처럼 저 혼자 공부만 실컷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요. 다만 힘들어하는 이웃을 외면하고 차마 뿌리치기가 쉽지 않아 그런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세상에 제일 즐겁고 신나는 게 부처님 공부하는 것이지요. 그 좋은 공부를, 왜 이웃 때문에 접고 싶겠습니까? 저는 그런 마음 조금도 없습니다.

 

굉장히 경솔한 발언일지 몰라도, 우리 큰스님도 저와 비슷한 심정이 아니셨을까 짐작합니다.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의 아마 대부분의 스승님들 역시 그러하실 것입니다. 중생제도의 대서원으로 사바로 온다? 저는 그건 당사자가 아닌 분들이 너무 과대평가하신 걸로 봅니다.

 

정말 부처님 가르침을 만나면, 세상에 할 일은 이것밖에 없구나!하는 생각이 사무치게 솟습니다. 정말 평생을 이 공부에만 파묻혀 실컷 이 공부만 하다가 한 세상 뜨고 싶다는 바램이 솟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못하느냐? 마음이 약해서 그렇습니다. 부모 처자 버리고 우는 모습 내버려두고 먹고 살기 힘든 이 험한 세상에 그렇게 버려두고 혼자 즐거운 공부하겠다고 나서기에는 차마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기에 오늘도 이렇게 붙들려 하염없는 번뇌만 더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출자자들, 아니면 재가에 계시면서도 생업을 전문 수행으로 하시는 분들은, 일반 재가자들을 조금도 업순 여기실 필요가 없어요! 일반인들이 못나서 그렇게 사는 게 아니라, 그 분들처럼 모든 걸 버리고 공부할 수 있는 복을 짓지도 못하고 독하지도 못해서 어쩔 수 없이 불교 공부도 못하고 그렇게 하루하루 번뇌 속에 사는 겁니다. 그러니 참 딱한 분들이지요. 그러므로 나 홀로 이 즐거운 공부한다고 신날 게 아니라, 그러지 못한 분들을 위해 미안한 마음도 가지고 대분발심도 내셔야 할 겁니다.

 

이 세상에 부처님 법 만나면 사바세계에 매달려 중생 노릇하고 싶은 분은 아마 한 분도 아니 계실 겁니다. 그러니 다른 분을 보고 저 분은 전법과 서원이 깊은 분이구나 하고 외계인처럼 보시거나 당신은 그렇지 못하니 그런 일은 서원 깊은 분들 몫이거니...그러니 나는 내 공부나 해야지...하시며 책임 회피(?) 마셨으면. 고달프기는 그 분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그 분들의 자비심이 그렇게 못하게 할 뿐이지요. 우리 큰스님의 한탄에서, 저는 그런 것을 배웁니다. 마하반야바라밀!

 

 

 

이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매일 세수하고 목욕하고 양치질하고 멋을 내어 보는 이 몸뚱이를 '나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육신을 위해 돈..시간..열정..정성을 쏟아 붇습니다. 이뻐져라.. 멋져라.. 섹시해져라.. 날씬해져라.. 병들지마라.. 늙지마라.. 제발 제발 죽지마라. 하지만 이 몸은 내 의지와 내 간절한 바램과는 전혀 다르게 살찌고..야위고.. 병이 들락거리고.. 노쇠화되고 암에 노출되고 기억이 점점 상실되고.. 언젠가는 죽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내가 내 것인가.. 자녀가 내 것인가.. 친구들이 내 것인가.. 내 몸뚱이도 내 것이 아닐진대.. 누구를 내 것이라 하고, 어느것을 내 것이라 하련가. 모든 것은 인연으로 만나고 흩어지는 구름인 것을. 미워도 내 인연.. 고와도 내 인연.. 이 세상에는 누구나 짊어지고 있는 여덟가지의 큰 고통이 있다고 합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과 애별리고(愛別離苦) 내가 좋아하는 것들.. 사랑하는 사람 등과 헤어지는 아픔 원증회고(怨憎會苦) 내가 싫어하는 것들.. 원수같은 사람 등과 만나지는 아픔 구불득고(求不得苦) 내가 원하거나 갖고자 하는 것 등이 채워지지 않는 아픔 오음성고(五陰盛苦) 육체적인 오욕락(식욕.수면욕.성욕.명예욕)이 지배하는 아픔 등의 네 가지를 합하여 팔고(八苦)라고 합니다. 이런 것은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겪어야 하는 짐수레와 같은 것.. 옛날 성인께서 주신 정답이 생각납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몸이나 생명이나 형체 있는 모든 것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꿈같고 환상같고 물거품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갯불과 같은 것이니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이를 잘 관찰하여 사는 지혜가 필요하다." 세상 살면서 나는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껴 안아서 내 체온으로 다 녹이자. 누가 해도 할 일이라면 내가 하겠다 스스로 나서서 기쁘게 일하자. 언제해도 할 일이라면 미적거리지 말고 지금 당장에 하자. 오늘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정성을 다 쏟자. 운다고 모든 일이 풀린다면, 하루종일 울겠습니다.

짜증 부려 일이 해결된다면, 하루종일 얼굴 찌프리겠습니다. 싸워서 모든일 잘 풀린다면, 누구와도 미친듯 싸우겠습니다. 그러나...이 세상 일은 풀려가는 순서가 있고 순리가 있습니다, 내가 조금 양보한 그 자리 내가 조금 배려한 그 자리 내가 조금 덜어논 그 그릇 내가 조금 낮춰논 눈 높이 내가 조금 덜챙긴 그 공간 이런 여유와 촉촉한 인심이 나보다 조금 불우한 이웃은 물론, 다른 생명체들의 희망공간'이 됩니다. 이 세상에는 70억 명 이라는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살아가지만 우리 인간들의 수 백억배가 넘는 또다른 많은 생명체가 함께 살고 있으므로 이 공간을 더럽힐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 공간을 파괴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만생명이 함께 살아야 하는 공생(共生)의 공간이기에. 이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으니 내 눈에 펼쳐지는 모든 현상이 고맙고 감사할 뿐입니다. 나를 맞아준 아내가 고맙습니다. 나를 아빠로 선택한 아들과 딸에게 고마운 마음이 간절합니다. 부모님과 조상님께 감사하고, 직장에 감사하고. 먹거리에 감사하고.. 이웃에게 고맙고, 나와 인연 맺은 모든 사람들이 눈물겹도록 고맙습니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고맙고, 창공을 나는 날짐승이 고맙고.. 빽빽한 숲들이 고맙고.. 비내림이 고맙고.. 눈내림이 고맙습니다.

이 세상은 고마움과 감사함의 연속 일 뿐... 내 것 하나 없어도 등 따시게 잘 수 있고... 배 부르게 먹을수 있고.. 여기저기 여행 다닐수 있고, 자연에 안겨 포근함을 느낄수 있으니 나는 행복한 사람.. 복받은 사람.. 은혜와 사랑을 흠뻑 뒤집어 쓴 사람.. 내 머리 조아려 낮게 임하리라 - 좋은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