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4. 2. 20:16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역사적 배경
중국불교의 역사는 대략 1900여 년을 헤아린다. 이 기간 동안 불교는 중국문화와의 접촉및 융합으로 실로 놀랄 만한 변화를 일으켜 왔다. 그것은 불교의 제2의 개교라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즉, 불교가 인도적인 성격을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역사 위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런 중국불교가 갖는 특징 속에는 이들 민족의 자질과 다양한 불교적 역사경험이 포함되어 있다. 무려 1천여 년에 걸친 오랜 경전의 번역과 방대한 한문대장경의 완성, 이들 삼장에 대한 연구와 중국적 판단에 근거한 종파불교의 형성, 도교 및 유교와 같은 고유사상과 불교와의 융합, 조사의 별전을 더 중시하는 선종의 풍미 와 같은 현상 등이 생겼다.
한나라(기원전 206년경 설립~ 기원후 220년)가 중국을 통일하고 거의 전 지역을 통치하면서 동시에 실크로드 주변의 왕국들에 섭정을 실시하고 있을 때,
인도에서는 월지족이 북인도와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중앙아시아 서부의 광할한 지역에 대해 지배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중앙아시아는 이렇게 양쪽의 지배와 문화적 영향에 노줄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북로, 남로 두 갈래의 실크로드를 따라 생긴 소왕국들은 중국과 인도의 문화가 뒤섞여 잇었다.
불교는 인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전수 되었는데, 그 주역들은 상인들과 그에 합류한 승려, 불교경전에 정통한 재가 신도들이었다.
중앙아시아 전역에서는 커다란 장애 없이 불교가 널리 퍼져 나갔는데. 이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지역적으로 외국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또 나라들이 작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가 중국 서쪽으로 들어오면서 양상은 크게 달라졌다.
중국의 한나라 문명은 수 세기를 거치면서 형성해 온 매우 명확히 규정된 정치적, 사회적 이념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한나라의 지식층들은 문화적 동질감과 우월감을 교육받아왔고 정치와 사회에 있어서 총제적 질서라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해탈이랄는 불교의 교의가 스며들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그 교의가 이방인에게서 비롯된 경우라면, 더욱더 스며들기가 어려웠다.
이렇게 사회와 정치가 사상적으로 결합된 중국전통과 불교 사이의 긴장은 중국불교사 전체에 있어서 지속적이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220년 한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최소 150년 동안 불교는 큰 영향력을 갖지 못하다가 , 중국이 다시 분열되고 이방인 왕조에의 해 통치되자 그 교세가 발전하고 성장을 이루었던것도 중국전통과 불교 사이 긴장관계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중국이 분열되어 있을 동안 불교가 힘을 얻게 되기는 했으나, 중국의 전통적인 정치 이념과 도덕원리들은 지식층의 대다수에 의해 여전히 고수 되고 있었다.
유교의 이상세계는 매우 뿌리가 깊다.
인간 세상은 천상과 지상이 공존하는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한다고 보고, 하늘의 명령에 의해 임명된 통치자는 우주의 평형상태를 유치할 책임이 있고, 그 권위는 막강하였다. 그래서 통치를 위해 필요하다면 개인생활도 포용한다.
유교에서는 이상적 사회에 두 계층이 있는데, 생산을 담당하는 다수의 인민과, 이들을 온정으로 대하면서도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다스리는 관료인 지식층이다. 지식층들은 그들이 지닌 가치(안정, 계층사이 질서, 인간관계의 조화)들을 도덕 교육에 의해, 또는 필요시 강압에 의해서라도 가르쳐야한다고 보았다.
또한 중국의 전통적인 세계관은 유신론적인 성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매우 실용적이 세속적이어서 , 종교의 교의도 그 형이상학적 내용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효력정도에 따라 평가되었다.
이런 중국의 종교관, 세계관 때문에 불교의 윤회, 업, 해탈, 제행무상 등의 관념들은 쉽게 승인받을 수 없었다.
한편 제도적인 특면에서도 불교와 유교는 긴장이 두드러졌다.
유교에서는 인간으로서의 첫째 의무가 효도와 가문의 대를 있는 것이라고 보고 또 생산적인 노동을 중요시 여겼다. 심지어 거지나 부랑자를 사회적 기생충리라고 보았다.
그런데 불교는 사원생활을 이상으로 삼고 가정생활과 관련된 것들을 거부하므로 이 또한 유교와 상충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인의 고유 이념과 불교 사이의 이러한 긴장은 지속되었고 여기서 불교는 정해진 한계내에서만 역할을 하도록 허락되었다. 불교는 중국문화의 보조물러서 당국에 의해 인정받았다. 즉 왕좌와 국가와 사회를 주술적으로 보호하는 가치로서 인정받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그러한 긴장은 과격한 박해의 양상으로 표면화되기도 했다.
수나라와 당나라 초기에 불교가 절정에 이르렀던 당시에도, 중국은 타이나 미얀마처럼 '불교국'이 되지 않았다. 불교는 중국인에게 있어서 중심이 되는 전통의 그늘 속에서 발전해야만 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중국문명은 불교의 영향에 쉽게 동화되는 측면도 있었다.
그리하여 이 과정에서 불교적 요소들이 중국의 전통 관념와 제도에 접목되고 융합되었다.
3세기 이후 불교는 남쪽의 해상 통로를 거쳐서도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그러나 이 통로는 북쪽의 실크로드를 통한 유입에 비교하면 미미 하였다.
이러한 지리적 상황으로 중국 불교의 전형적인 지역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즉 북중국을 장악한 비한족 출신의 통치자들은 쉽게 불교로 개종하였고, 또한 불교경전에 대한 번역도 북방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같은시기 한족이 지배하는 남반부는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영향이 간접적으로 미쳐 훨씬 더 중국화된 불교가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고유의 종교적 철학적 전통에 근거하여 불교를 해석하는데에 보다 더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중국불교의 또 다른 특징은 인도불교의 다양한 부파와 대승운동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유식학, 밀교 등이 모두 들어와 중국불교 속으로 흡수되었다.
또한 중국불교는 인도의 한 지역이 아니라 다양한 지역에서 전래되었는데 이로인해 중국북교 내의 다양성도 심화되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교판으로 조화하고 통합하고자 시도하였다.
교판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시기와 수준'으로 구별하여 정리하는 체계를 말한다.
이러한 학구적인 연구 방식과 함께, 모든 불전의 전통을 근존적으로 뛰어넘어 곧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선종은 중국 불교의 가장 큰 성과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普賢 09.08.14.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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