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봉 이야기/자비

2014. 5. 7. 16:3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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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봉 이야기



구품화(九品華) 석경옥|우바이, 불광사



7. 자비



어둠이 깔릴 무렵의 초겨울 산사(보현사)에 스산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법당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떨어진 낙엽들이 흩어져 계단 밑으로 구르고, 금방 눈이라도 내릴 듯한 을씨년스러운 날씨, 그 가운데로 바람이 잉잉거렸고, 눈이나 비가 한차례 오면 추위가 몰려올 것 같은 예감마저 들었다.



귀가 인사를 드리기 위해 큰스님께 갔더니 안에 계셔야 할 큰스님께서 장삼을 입으신 채 내 뒤를 따라서 바쁘게 걸어 들어오시는 것이었다.

“큰스님, 늦은 시간에 산책 다녀오십니까?”

“저 아래 큰길가 버스 정류장에 좀 갔다왔어요.”



나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다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여쭈었더니,

“구품화 보살님이 다른 일을 보고 있을 때, 어느 남루한 행색을 한 아낙네가 어린아이의 손을 이끌고 와서, 공양주 보살님께 오늘 저녁 이곳에 좀 머물 수 없겠느냐고 사정하자 공양주 보살님이 한마디로 안 된다고 하는 말을 내가 법당에 예불 올라가는 길에 얼핏 들었어요. 예불 올리고 내려와서 다시 찾으니 이미 그들은 그냥 발길을 돌려 떠나고 없었어요. 내가 그 말을 듣고 어찌나 가슴이 아파 오던지 그 아낙과 아이를 찾으러 곧바로 버스 정류장까지 뒤쫓아갔지만 그들은 이미 어디론가 총총히 사라진 뒤였어요.”



나뭇가지만 앙상한 배밭 사이로 찬바람만 싸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나도 큰스님말씀을 듣고 이리저리 한참 찾아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고 찾을 수 없는 허사가 되고 말았다.



지금 다시 생각하면 혹시나 그때 그 여인이 관음보살의 나툼이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큰스님은 방에 들어오시어 무척 힘드는지 숨을 연거푸 몰아쉬면서도 못내 안타까운 표정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자비를 맨날 노래하듯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하시고는 말을 맺지 못하셨다. 얼마쯤의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런 다음 큰스님은 천천히 낮은 목소리로 다시 말씀하셨다.



자비누구를 위한다거나 원하는 것을 구하기 위해서, 얻기 위해서 지불 받는 대가가 아니고, 또 양심상 선행을 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일으켜서 행하는 것이 자비라고 축소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자비는 마땅히 조건 없는 자연스런 자기 표현이며 실현이어야 해요.



지혜의 눈으로 볼 때 자비는 본성의 체온이지요. 제각각의 개체를 떠나 전체성인 하나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로 움직일 때(자비의 실천)만이 본성의 위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 불신력(佛神力)을 발휘하게 되고 위대한 창조를 실현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신앙으로 확립한 사람이어야 해요.



그렇기에 작은 나, 허상인 나를 버리고 대자유의 해탈자인 모두의 큰 생명인 하나로 살아갈 때, 그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 그 시대에, 그 공간에, 그 지옥에 진정한 하나된 나의 세계를 펼쳐 갈 때(자비의 실천) 그곳이 바로 불국토요 청정국토가 되는 거지요.”



큰스님의 말씀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줄곧 나는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절을 찾아왔던 그 아이와 엄마를 두리번거리며 찾고 있었던 것이다. 끝내 그들은 보이지 않았고 초겨울 길거리에는 분주히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바쁜 발걸음과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고 있었다.



광덕스님 시봉일기 8권-인천(人天)의 안목, 글-송암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