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봉 이야기 8. 화두- 구품화(九品華) 석경옥|우바이

2014. 5. 14. 07:0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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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봉 이야기



 

 

구품화(九品華) 석경옥|우바이, 불광사




 

8. 화두



 

큰스님을 친견하고자 하는 분들은 각 분야에 종사하는 다양한 직업을 가진 분들이다. 불교에 뜻을 두고 공부하시는 분 외에도 개신교, 천주교, 학자, 교육자, 사업가, 정치가 등등 그밖에도 많은 분들의 내방이 끊이지 않았다. 큰스님은 건강이 어느 정도만 허락되면 그 모든 분들을 예외 없이 따뜻하고 친절하게 맞이하셨다. 그러나 큰스님의 건강이 악화되면 부득이하게 내방객들에게 정중하게 양해를 구했고 충분한 설명을 드렸다. 물론 큰스님께서 모르게, 또 허락 없이 몰래 저질러지는 일이었다.






평소 큰스님은 불광사까지 찾아 주신 분들에 대한 예의와 도리를 갖추기 위해서라도 꼭 만나려고 하셨지만 건강의 악화를 막기 위해 부득이 큰스님께서 바라지 않는 일을 우리는 해야 했다. 무리한 만남으로 인해 큰스님께서 나중에 힘들어 하시는 것을 곁에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것보다 상좌스님들이나 내가 비록 염려를 듣는 일이 있어도 정중히 방문을 사절하는 것이 훨씬 좋다는 매우 실리적인 계산을 했던 것이다. 우리가 판단하기에 큰스님께서 그 많은 사람을 다 만나기에는 도저히 건강이 따라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날도 사무실에서 인터폰이 와서 받아보니 가끔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는 선방 스님이 큰스님을 친견하고 싶어한다는 내용이었다. 큰스님께 여쭙자 고개를 끄덕이시기에 올라오라고 전했다.



누구나 그러하듯 그날 찾아온 선방 스님도 큰스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는 순간 가슴에 뜨거운 느낌을 받는 것 같았다.



대부분의 사람들 얘기에 의하면 큰스님을 뵙는 순간, 무슨 말씀이 오고가기 전에 큰스님 모습에서 벌써 어떤 법문보다도 더 큰 감동을 느낀다고 했다. 큰스님의 온화하고 자애 어린 모습이 연꽃 같다는 사람, 부처님 같다는 사람, 부모님 같다는 사람, 청초하다고 하는 사람, 자비가 몸에서 주르르 흐른다는 사람 등등이 있는가 하면, 절하면서 자꾸만 눈물만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날 선방에서 해제하고 찾아온 젊은 스님도 인사 올린 다음,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무릎을 꿇고 앉아만 있었다. 아마 자기를 추스르는 것 같았다. 그러자 큰스님께서 먼저 말씀을 꺼내셨다.



“수좌는 공부 잘 하고 있냐?”

“예,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선방에서 몇 철을 보냈나?”

“이제 세 철 보냈습니다.”

“결제, 해제를 구분하려고 하다가는 금방 나이 먹고 늙어가는 거야.”

그러자 그 젊은 스님은 한참 머뭇거리다가,

“큰스님, 저어- 사실은 공부하는데 산란심이 자꾸 생겨서 화두를 한번 바꾸어 보려고 큰스님께 화두 하나 주십사 하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큰스님께서 곧 다음과 같이 일러주셨다.



“화두에 무슨 가격표가 있다고 바꾸려고 하나. 화두를 바꾼다고 공부가 달라지나?

조주스님의 ‘뜰 앞의 잣나무’나 약산유엄 선사의 ‘구름은 청천에 있고 물은 병에 있다’는 화두나 그 밖에 천칠백 공안이 있다고 하지만 문구마다 해석을 하려고 하고 분별을 하려고 하면 도는 십만 팔천 리나 멀리 도망가는 거야. 자네가 가지고 있는 도의 그릇에 도를 통째로 들이붓는 것이 화두야.



화두는 이론이나 상황, 방법을 뛰어넘은 한계 밖의 소식인 거야. 그렇기 때문에 화두를 대하매 내가 지금까지 얻어들어서 쌓아 놓았던 지식과 알음알이의 철갑옷을 철저히 벗어 던지고, 내 몸 안에 망념의 독소를 내포한 세포 하나하나까지 몰살시켜서 없어질 때, 화두는 진정한 나와 하나되어 주체적으로 파악이 되는 거야. 그렇게 되면 눈을 들어 보이는 것, 귀를 열어 들리는 것 모두가 화두 아닌 것이 하나도 없는 거야.”



그 순간 젊은 스님의 눈은 빛났고 예리한 광채를 뿜어냈으며 얼굴은 갑자기 굳은 의지와 용맹스러움으로 발갛게 홍조를 띄었다.



“큰스님, 법체 불편하신 데도 불구하시고 귀하신 시간에 귀하신 법문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제 눈이 활짝 열렸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고 그 젊은 스님이 일어서려 하자 큰스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그러나 화두를 받아서 제대로 공부가 되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혹은 여건상 선방에 가지 못하는 대부분의 대중들에게 나는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라고 하고 있어. 어쩌면 평생 화두를 붙잡고 씨름하다가 세월만 보내는 것보다는 좀 더 쉬운 방법일지도 몰라. ‘마하반야바라밀’을 일심으로 염해서 지혜를 깨달아서 보살행에 이르게 하는 길 말일세.”



“예, 큰스님 대단히 감사합니다.”


여러 번 이마를 땅에 대고 지극한 공경례의 인사를 올린 뒤 그 스님은 물러갔고 나는 그 젊은 스님 덕분에 많은 은혜를 입게 되었다.


광덕스님 시봉일기 8권-인천(人天)의 안목, 글-송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