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을 찾아 이사하다

2014. 5. 21. 16:4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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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을 찾아 이사하다

 

 

진여성 김영숙(眞如性 金英淑)|우바이, 도피안사

 

 

 

먼 기억 하나.

네댓 살쯤의 꼬마 계집아이가 엄마 손에 이끌려 산꼭대기 비탈길을 미끄러지며 힘들게 올라가고 있다. 어린 꼬마는 늘 엄마를 따라 산꼭대기에 있는 절에 가곤 했는데, 그 절엔 돌로 된 굴이 있어서 꼬마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꼬마는 그 석굴이 참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굴 천장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고 안에 들어가면 여름 한낮에도 무척 시원했다. 꼬마는 난생 처음으로 거기서 두꺼비를 보았고, 어른들은 용이 하늘로 올라가서 생긴 굴이라고 하여 더욱 호기심을 끌었고 흥미진진했다.

 

 

꼬마는 조금 더 커서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도 방학이면 엄마 따라 굴이 있는 그 절에 가곤 했지만 그러나 벌써 컸다고 동굴도 별로 재미가 없었고 또 함께 놀 친구도 없었다. 마지못해 엄마랑 절까지 가기는 했지만 늘 심심해서 집에 가겠다고 엄마를 졸라대기 일쑤였다. 그럴 때는 어떻게 알았는지 그 절 스님께서 어느새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으며 꼬마를 마당 한쪽으로 데리고 가셨다. 거기 하얀 양은솥에서는 감자가 익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옥수수도 삶아 주시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개구리가 무서워서 기겁을 하면 한바탕 웃으면서 놀리시던 스님, 이미 다 자란 대학시절 어쩌다가 가뭄에 콩 나듯이 아주 가끔씩 그 절에 가면 스님은 여전히 웃어주었지만 짧은 머리는 하얗고 앞니 두 개만 남아서 뻥 뚫린 동굴을 간신히 면하고 있었다.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 엄마 손에 이끌려 산꼬대기 절에 따라다니던 그 꼬마는 이제 그때의 엄마가 되어서 마치 봄날 언덕에 아지랑이처럼 아스라이 떠오르는 그 시절을 가끔 회상해 보곤 한다.

 

 

이것이 내 어린 시절 불교에 대한 추억이다. 아니 불교와의 시작이었다. 돌아보면 나의 어머니는 막내딸인 나를 불자로 만들기 위해 그 후에도 줄기찬 노력을 계속하셨지만 나는 어머니가 절에 가자고 하면 멀리 도망쳤고 아니면 꾀병을 앓았다. 결국 어머니는 내가 불자가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이승의 끈을 놓아버렸지만 말이다.

 

 

돈 잘 버는 남편 만나 결혼한 나는 온갖 호의호식에 날 새는 줄 모르고 젊음의 오만에 빠져 제 잘난 맛에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오욕락의 늪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나를 강제로 끌어내다시피 건져주었다. 물론 그 당시는 친구의 성화에 못 이겨 억지 춘향이 노릇을 한 것에 불과하지만 지금 다시 돌아보면 결과적으로 그는 나를 구제했던 것이다.

 

 

평창동에서 온갖 사치와 오만에 푹 젖어 있던 나를 어느 날 만나자고 하더니, 자기가 다니고 있다는 불광사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불광사가 좋으니까 같이 다니자고 온갖 감언이설(?)로 꼬드겼고, 그래도 뜻대로 안되자 여고시절부터 해온 버릇대로 갖은 협박으로 나를 위협하기까지 했다.

 

 

사실 나는 그동안 원 없이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면서도 심드렁하던 차였다.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알 수 없는 허전함은 잘 먹고 잘 놀수록 오히려 깊어가기만 했다. 그래서 나의 깊은 내면에서는 새로운 출구를 찾고 있었다. 나 스스로 마음의 위안처를 찾고 있을 때, 마침 친구가 손짓해 불러준 것이다. 겉으로는 내가 잘난 체 하면서 버티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면의 마음은 오히려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했고 잡으려하고 있었을 때였으니, 그 친구와 나는 전생부터 불법의 오랜 동지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과거 생부터 불법을 먼저 만나 사람이 이끌어주기로 약속한 도반으로서 동지 말이다.

 

 

그러나 친구를 따라 나서는 것에 문제가 있었다. 친구의 정성과 그동안의 우정과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따라나설까 했는데, 그만 하루하루 미루며 주저하게 되었다. 시댁 식구들이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차일피일 자꾸 망설이게 되었다. 아무래도 시댁의 문제이니 만큼 심사숙고해야 할 일 같았기에 말이다.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가정도 중요하지만 내 자신을 돌아보는 종교생활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래서 우선 남편에게 조심스레 의견을 비쳤다. 나는 눈치를 보아가며 조심스레 거론했는데 나의 염려와는 달리 남편은 수월하게 대답해 주었다. 남편의 입장은 본인이 좋으면 어디든지 다니라는 것이다. 그런 남편의 너그러움에 용기를 얻은 나는 마침내 친구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처음 불광사 지역모임에 찾아간 것이 반포에서 하는 법등가족 특별모임이었고, 그것을 시작으로 나는 까맣게 잊고 지내왔던 어린 시절 어머니 손에 끌려 다니던 절이 떠올랐고 나에게 잘해 주었던 스님도 생각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머니가 그렇게 간절하게 원하셨던 불자의 길로 마침내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반포 모임 때 그 집주인의 상냥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잊지 못한다. 그 보살님은 송파에 살다가 반포로 이사한 문수심 보살이었는데 그날의 친절이 나의 불자로의 길에 좋은 이정표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불광의 큰스님 신도가 되었고 또 불광사의 신앙 가족이 되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나의 초발심은 불이 붙었다. 마치 ‘늦게 배운 일에 날 새는 줄 모른다’는 말과 같이 종로 자하문 밖의 평창동에서 한강을 건너 잠실 불광사까지 매일매일 새벽기도를 다닐 정도였다. 내 친구들은 모두 송파에 살았기 때문에 불광사가 가까웠지만 나에게는 그야말로 머나먼 길이었다.

 

 

그렇지만 초발심의 불길 앞에는 길이 멀고 가까움을 하등의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나는 친구들이 소속된 법등에 가입하고 책임자인 마하보살의 지극한 안내와 인도를 받았다. 그런 주위의 관심 어린 노력 덕분에 비교적 빠른 시간에 정기적으로 매주 일요법회에 나가게 되었고 그때 큰스님을 뵙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처음에는 너무나 맑고 환하신 큰스님을 우러러 뵐 뿐 큰스님께서 하시는 설법의 말씀은 무슨 내용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여느 때는 친구들과 같이 법회에 나가서도 매번 앉아 졸기만 하다가 일어설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친구가 좋아 또 마음에 허전함을 채우려는 뜻으로 부지런히 다닌 결과, 날이 가고 달이 가게 되자 내 자신이 조금씩 달라져 감을 느끼게 되었다.

 

 

처음에는 큰스님 법문의 반은 이해를 못해 귓가를 스쳐 지나가고 반은 졸음 결에 지나갔는데도 어느 때부터인가 큰스님 말씀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세월의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큰스님의 자비심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미련하고 아둔한 내 귀가 그렇게 조금씩 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고개를 조금씩 끄덕이기 시작했고 『천수경』을 읽으면 예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말들이 쉽게 눈에 들어왔다. 재미가 붙었다. 그동안 세간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또 다른 재미가 거기 있었다. 그때서야 나는 더욱 신이 나서 불법에 빠져들었고 그로 인해 진정한 기쁨을 맛보기 시작했다. 참으로 기쁨이 무엇인지,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과거에 아무리 호의호식을 하고 기분이 알싸하게 호화판 생활을 누렸을 때도 이런 기쁨은 느낄 수 없었다.

 

 

사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불광사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다. 사실 그전에는 문 밖이었다. 마치 비유하자면 대문 밖에서 호기심으로 고개를 디밀던 철부지 아이가 주변을 살펴가며 한 발짝 한 발짝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아무튼 친구의 권유로 불광사에 가긴 했지만 이렇게 한동안의 곡절을 겪은 뒤에서야 불광이라는 새로운 집으로 성큼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의 큰스님 법문 중에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다.

“옆에서 괴롭히는 사람을 오히려 선생님으로 생각하세요.……”라고 하신 말씀은 지금도 잊지 않고 때때로 나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 되고 있다.

 

 

그로부터 불광의 교육도 받았으며, 옛말에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불광 찾아 친구 좋아 평창동에서 잠실 송파로 이사까지 했다. 오직 불광사를 다니기 위한 이사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잠실을 드나드는 것을 보고 남편이 나를 위해 결정해 주었다. 당시 마하보살이었던 명혜성 보살이나 법등가족이었던 불자들은 지금도 함께 기도를 다니고 인생살이를 서로 의지하면서 지낸다. 나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들을 그때 모두 만났던 것이다. 나는 불광의 큰스님께서 맺어주신 이 모든 인연에 깊이 감사하며 살고 있다.

 

 

큰스님께서 지금 내가 다니는 도피안사에 계실 때, 우리가 친견하고 인사를 드리면 먼저 ‘마하반야바라밀’하고 외쳐 주셨다. 그 모습은 마치 구름이 걷히면서 나타나는 밝은 햇빛이 한꺼번에 쫘악 퍼지는 것 같았다. 그대로 빛이셨다. 큰스님은 우리가 공양상을 들고 들어가면 ‘고맙습니다’하고 합장을 하시던 겸손한 어른이셨다. 그런 광경을 대하노라면 기쁘고 행복했다. 참으로 행복한 법연이었고 위대한 인격과의 만남이었다.

 

 

역시 큰스님의 회하에서 잊을 수 없는 가장 극적인 일은 세종문화회관에서 ‘보현행원송’을 발표했을 때였다.

아, 그날의 감동을 어찌 잊으랴. 이 역시 큰스님의 대원해에서 비롯된 법연의 영광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날 무대에서 넘치는 감동으로 온몸을 떨며 인사말씀 하시던 큰스님의 목소리! 그 큰스님과 한 무대에 서서 ‘보현행원송’을 공연했다는 것은 개인적인 영광이라는 말에 앞서 우리 불광, 보현행자들이 진리의 성(法城)에 입성하는 개선행진곡이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큰스님께서 일생동안 노쇠하고 병약한 몸을 근근히 추슬러가며 우리들을 위해 주옥같은 글을 남기셨고, 법회 때마다 고구정녕히 설법해 주셨다. 그 은혜는 강산도 오히려 가볍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고인의 말씀에 효의 으뜸은 부모의 뜻을 받드는 일이라 했듯이, 다행히도 도피안사 주지 송암스님께서 큰스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려고 밤낮으로 노심초사다. 그런 주지스님의 가시적인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시봉일기’ 작업이다. 천일기도를 입재하고 산문 출입을 끊은 채 묵묵히 ‘시봉일기’ 삼매 속에서 정진하는 것을 바라보노라면 우리 신도들도 느끼는 점이 많고 배우는 점이 사뭇 많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 스님이나 신도의 간절한 기도는 오직 큰스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시는 것이다. 구국구세의 대비원력으로 어서 이 땅에 오시는 것, 그것이 한 가지 소원이다.

 

 

광덕스님 시봉일기 7권 사부대중의 구세송 중에서- 글 송암지원, 도피안사

 

고요한 연못

 

 

모라자는 것은 소리를 내지만

 가득 찬 것은 조용하다.


어리석은 자는 반쯤 채운 물항아리와 같이
철렁거리며 쉬 흔들리지만,
지혜로운 이는 물이 가득 찬

연못과 같이 평화롭고 고요하다.


- 숫타니파타 -

 


물의 교훈을 배워라.
울퉁불퉁한 계곡과 협곡 속에서
시냇물과 폭포는 큰 소리를 내지만,

거대한 강은 조용히 흐른다.


빈 병은 소리가 요란하지만
꽉 찬 병은 마구 흔들어도 소리를 내지 않는다.


바보는 덜그럭 거리는 냄비와 같고,
현자는 고요하고 깊은 연못과 같다.

- 숫타니파타 -


 


가득 찬 것은 소리를 내지 않듯,

내면의 뜰이 꽉 찬 사람은 침묵한다.
부족한 사람일수록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애를 쓰고 말을 많이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애써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고
다만 행동으로 보여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