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렇게 소멸하는 겁니다와 한마음헌장

2014. 5. 28. 17:3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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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소멸하는 겁니다

 

 

애란자 최정희(愛蘭子 崔貞喜)|前「현대불교」편집국장

 

 

 

30년 전쯤의 일이거나 아니면 30년이 채 못 되었을 수도 있다. 그 무렵 나는 『반야심경』을 수시로 독송하면서 여러 권의 해설서를 찾아 읽고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대한불교」(지금의 「불교신문」)독자였던 나는 ‘서울 종로 봉익동 대각사에서 광덕스님이 학사 불교회원들에게 『반야심경』을 강의한다’는 기사를 챙겨 읽었다. 그 법회에서 나는 광덕스님을 처음 뵈었다. 스님이 큰스님인지 중진스님인지 그런 생각은 안중에도 없었고 다만 학처럼 기품 있고 맑은 스님이셨던 것으로만 기억하고 있다. 스님의 강의는 당시 내 수준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그날 법회에서 나는 손바닥만한(13×19cm) 소책자 한 권을 받아왔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스님과의 첫 인연을 떠올리면서 나는 서재에서 그 작은 책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얄팍하면서도 작은 책자는 『반야심경』관련 책들과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무척 반가웠다.

 

 

누렇게 변색된 흰 표지에는 ‘고운해(高運海 지음, 마하반야바라밀-한마음 헌장-불광문화사’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고운해, 광덕스님의 또 다른 법명인가 아니면 법호인가. 생소한 이름이 눈길이 갔다. 표지를 넘기니 속지는 더 누렇게 빛 바래 있었다. 첫 페이지에는 ‘반야바라밀다심경-대본심경의역’이란 제목 아래 심경을 간결하게 번역하여 실었다. 번역문은 4쪽에서 끝났다.

 

 

5쪽부터는 「마하반야바라밀-한마음 헌장-고운해(運海․光德)」란 제목을 걸고, ‘부처님은 말씀하신다’로 운을 여는 「한마음 헌장」이 시작된다. 25쪽에서 ‘나무마하반야바라밀’로 마무리할 때까지 ‘찬탄.생명.광명.청정.지혜.창조.영원.원만.조화.신비.희망.성취.환희.지복’, 이런 단어들이 부정을 거친 대긍정의 금강반야의 대해 속에서 파도를 타듯 춤을 추듯 무수히 넘실거린다.

26쪽은‘나무 후리다야(心要)-namo hrdaya.'

 

 

‘한마음, 한마음, 한마음이 무엇인가’

질문애 대한 답이 32쪽까지 환희의 노래로 이어진다.

 

 

32쪽 짜리 빛 바랜 소책자지만 거기 알알이 박힌 광덕 큰스님의 마하반야바라밀을 찬탄하는 장시(長時) ‘한마음 헌장’은 그대로 스님의 법신이며 스님의 진신사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근 30년 동안 스님의 사리를 모시고 있었으면서도 그 진가를 이제야 알아 책 위에 앉은 먼지를 털어 내고 사리로 빚어진 그 법어를 가슴에 다시 모시게 됐다.

 

 

‘한마음 헌장’에 대해 좀더 알고 싶어 『광덕스님의 생애와 불광운동』(김재영 집필)을 펴 보았다. ‘한마음 헌장’은 1963년 봉은사 시절 대학생 법회의 설법교재로 처음 작성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고 정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스님께서 ‘한마음 헌장’을 교재로 만들 목적으로 쓰신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경계가 열려 절로 읊으신 깨달음의 노래가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다시 『시봉일기』를 열어서 자세히 살펴보니 내 예감이 맞았다. 부산 온천장 금정사에서 어느 봄날 마루턱에 걸터앉아 홀연히 앞산을 건너다보는데 문득 대경(對境)이 모두 텅 비어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처멸(心行處滅)의 경지가 열렸다고 한다. 스님은 그때 무척 기뻐 한량없는 감흥에 빠져들었다고 술회하셨다고 한다.

 

 

 

“광덕 큰스님! 당신의 법신사리를 아직 제대로 이해 못하지만 잘 모시고 간직하여 한마음 밝히는 거울로 삼겠습니다.”

 

 

내 가슴에는 스님의 모습이 영상으로 찍혀 있는 장면이 있다. 1970년대 후반 갈매리 보현사로 김해난 사진기자와 함께 스님을 뵈러 갔다. 아마 인터뷰 아니면 원고 청탁을 하러 갔을 텐데, 지금 퇴색된 내 기억으로는 왜 스님을 뵈러 갔는지 모르겠다. 다만 멋진 돌계단이 끝나는 곳에서 스님께선 사색에 젖은 모습으로 포행을 하고 계셨다. 그 모습이 마치 한 장의 영화장면처럼 내 마음에 찍혀 있다.

 

 

또 한 장의 모습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불자들도 가슴에 담아두었을 것이다. ‘부처님 오신 날’ 제등행렬 때가 되면 불편하신 몸으로도 한치 흐트러짐 없이 연등을 들고 여의도에서 조계사까지 불광법회를 인도하시는 장면이다.

 

 

1978년, 소천스님께서 입적하셨을 때였다.

취재 때문에 스님을 뵈러 대각사에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스님께선 소천스님 입적과 관련하여 강화인지 어디인지에 알려야 할 일이 있는데 그 일을 맡아줄 사람이 없다고 걱정을 하셨다.

“스님, 제가 하겠습니다.” 내가 선뜻 나서서 그 일을 처리했는데 나는 그 일이 무슨 일이었는지 지금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 일이 있은 후 스님께선 나를 만날 때마다 “그때 고마웠다”고 하시면서 그 일을 상기하셨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도와드렸는지 잊은 채 나는 스님의 고마워하시는 눈빛과 스님 특유의 미소를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한두 번도 아니고 두고두고 만날 때마다 진정으로 고마워하시는 모습을 뵈면서 면구스럽기도 했지만, 스님은 그렇게 감사를 일려주는 교훈을 몸소 보여 주셨다.

 

 

 

어느 여름날이었다. 나는 스님께서 송암보육원에 가시는 승용차 편에 편승하는 행운을 갖게 됐다. 그 차에는 어떤 보살님도 한 분 타셨다. 보살님은 입양을 생각하고 계셨는지 스님께선 인연에 대한 법문을 아주 자상하게 해주셨다. 그날 나는 스님께 이런 질문을 했다.

 

 

“보육원의 원생들이 부모가 없거나 떨어져 살면서 외롭고 힘든 삶을 사는데 그것도 전생의 업이라면 그 업장을 어떻게 소멸해야 할까요?”

 

 

“저렇게 소멸하는 겁니다.”

 

 

스님의 간결한 그 답에 나는 머릿속이 확 트였다. ‘아, 그렇구나.’

지금도 광덕스님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바로 업장소멸에 관한 저 명쾌한 법문이다.

 

 

그날 보육원에 도착하니 아이들은 스님께 안기고 매달리고 기뻐 어쩔 줄 몰라했다. 스님께서도 법문하실 때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마치 자모관음처럼 아이들을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셨다.

 

 

 

그 후 나는 『한국불교전설 99』를 펴내면서 스님과의 그 인연으로 송암보육원에 작은 선물을 보내게 됐다. 내 어린 시절 크레파스 선물을 받고 즐거워하던 때를 떠올려, 원생 모두에게 크레파스와 문구류를 전했다.

 

 

「현대불교」편집국장 시절이다. 창간호를 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불광’20주년 기념법회가 있었다. 스님을 ‘수요 인터뷰’에 모시려고 하는데 건강이 여의치 않으셔서 쉽지 않았다. 국장인 내가 섭외에 나섰다. 승낙하셨다는 전갈이 왔다. 어려운 시간을 내주셨기에 감사 또 감사하는 마음으로 안성 불광원으로 갔다. 1994년 10월 말경, 당시 이준엽 차장과 박재환 사진기자가 동행했다.

 

 

그날 스님의 모습은 투명한 가을 햇살 같았다. 기운이 없으셔서 목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무엇인가 애써 들려주시려는 뜻이 역력했다. 인터뷰가 끝난 후 스님은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그날 이후 나는 스님을 더 이상 뵙지 못했다.

 

 

「현대불교」제 3호(1994년 11월 2일자)에 실린 그때의 대담기사 일부를 간추려 스님의 간곡한 가르침을 되셔겨 보려 한다.

 

 

 

 

경기도 안성군에 새로 마련한 불광원에서 잔잔한 목소리로 장시를 읊듯 반야의 실상을 풀어준 스님은 투명한 가을 햇살 그대로였다.

 

-‘불광’ 20주년은 바로 한국불교의 새로운 신행운동과 전법사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스님께서 감회가 남다르시겠습니다.

 

△  20년 동안의 바라밀 운동이 순수했는지 자신에게 되묻고 지금은 여법한지 되돌아보게 되더군요. 우리의 행동과 삶 속에서 바라밀이 항상 꿈틀거릴 수 있도록 오늘의 젊은 세대에게 전해주고 싶습니다.

 

-스님과 ‘불광’을 생각하면 으레 빛을 연상하게 되는데요, 바라밀 운동을 좀 구체적으로 풀어 주시지요.

 

부처님께서는 인간의 참모습, 존재의 참모습, 모든 존재와 생명의 근원적 실재를 우리에게 열어 보이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무한의 지혜와 덕성과 위덕이 갖추어져 있음을 경전은 일러주고 있습니다. 곧 인간은 부처님이라는 가르침이죠. 반야바라밀 운동이란 이러한 존재의 실상을 확인하고 실천하자는 신행운동입니다. 바라밀은 빛이고 행이고 생명인데 우리는 그 본래 소식을 잊고 있습니다.

 

 

-반야바라밀을 보고 존재의 실상을 확인하려면 공부를 해야 할 텐데요.

 

 

불법의 줄기를 이은 선각자들이 계시니까 그들이 삶과 가르침을 거울삼아 일상생활을 하다보면 자기 자신 속에서 보여지는 것이지 공부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밀은 새로이 밖에서 가져다 이루는 것이 아니라 구름 가신 하늘에서 태양이 빛나듯, 꽃송이가 나뭇가지에 맺듯 있는 그 자리에서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행은 역사성․ 사회성과 직결됩니다. 행이 없다는 것은 곧 역사의식 결여를 의미하죠. 역사의식․ 사회의식이 없는 종교는 그 사회를 번영으로 이끌 능동적이며 창조적인 힘이 없는 것입니다. 현실을 진리에로 개혁할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야심경』은 마하반야바라밀을 설명하므로써 최상의 선한 행을 완성시키는 최고의 요전입니다.

 

 

-스님께서 손수 작사하신 대곡 ‘보현행원송’이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될 때 정말 거룩하고 장엄했습니다. 특히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를 객석과 무대가 함께 대합창을 할 때는 눈물이 날 정도였으니까요. 절 짓고 종 만드는 불사 이상의 의미를 지닌 대작불사를 하였습니다.

 

반야의 구체상은 보현행원입니다. 보현행원은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는 결정적인 행이예요. 가정의 평화, 사회의 번영, 국토의 안녕, 그리고 성불하는 대도인 것입니다. 보현행원을 통해서 제불여래가 출현하고 불국토가 열려갑니다. 보현행원의 행을 통해 반야바라밀이 용출합니다.

 

 

-성수대교 참사도 그렇고 우리 사회가 황금만능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그 치유책과 불자들의 역할은…….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반야바라밀의 밝음과 푸르름, 덕성으로 자기의 존재 실상을 긍정할 때 우리를 바꾸고 사회도 바꿀 수 있습니다. 중생을 이롭게 하며 성불로 가는 보살이 그 역할을 해야겠죠.

 

 

1년 뒤 1995년 11월, 「현대불교」는 ‘지상법석’에 스님의 법어 자료를 중심으로 정리하여 실었다. ‘남을 칭찬하는 말 한마디 진리공덕의 문여는 열쇠.’ 나는 큰 제목을 이렇게 달았다. 스님의 법어는 믿음, 행원실천, 참회, 가족과 이웃의 화목, 바라밀공덕 등을 역설하셨다. 스님 가신 뒤 다시 읽는 그 법문이 가슴속에 사무치고 새롭기만하다. 순수불교, 생활불교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지난해(2000년) 가을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신문사 일을 쉬고 있을 때였다. 꿈속에서 생전에 본 일이 없는 저 세상사람들을 만나고 사진도 찍고 세미나 장인지 어딘지로 가고 있는데, 후배 임연태 기자가 말렸다.

 “국장님, 지금 가셔도 소용없습니다. 광덕스님께서 50번째 마지막 입장을 하셨습니다.”

 나는 그 길로 발길 돌렸다.

내 꿈 이야기를 듣던 한도반이 우스개 소리로 대개로 내게 말했다.

“법력이 높으시군요. 광덕스님 가신 곳에 가려고 했으니.”

『광덕스님 시봉일기』를 보면서 스님의 법력이 얼마나 거룩한지 그저 감탄할 뿐이다.

“스님의 걸음걸음을 거울삼아 ‘마하반야바라밀’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하여 ‘한마음 헌장’의 그 환희가 용솟음치는 그날을 저도 맛보고 싶습니다.”

나무대행보현보살마하살, 나무반야바라밀.

 

광덕스님 시봉일기 7권 사부대중의 구세송 중에서- 글 송암지원, 도피안사

 

 

 

 

한마음 헌장- 광덕 큰스님| 광덕큰스님과 보현행원
 
//

 

'한마음 헌장'은 광덕큰스님께서 수행 중 깨달음을 노래한 게송입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 인연으로

세간에 나셨으니

그는 중생으로 하여금

불지견(佛知見)을 열어 청정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

불지견을 보이고

불지견을 깨닫게 하고

불지견에 들게 함이니

일체 여래의

무량 무수한 교화방편도

중생으로 하여금 오직 이 불지견을 보여

불지견을 깨쳐서 불지견에 들게 할 뿐이니라.

 

또 말씀하신다.

과거 현재 미래 모든 부처님이

그 마음 청정하심 따라

불국토 이루신다.

 

...

 

또 말씀하신다.

일체 유위법은

꿈이며, 환(幻)이며, 물거품이며, 그림자며,

잠깐이고 이슬이고 번개이니

마땅히 이러히 여길지니라

 

...

 

또 말씀하신다.

마땅히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마땅히 머문 바 없이 마음을 낼지니라.

 

...

 

또 말씀하신다.

무릇 있는 바 모든 현상,

그 모두는 실(實) 없는 것

만약 모든 상에 상없으면

곧 여래를 보리라.

 

...

 

마음 , 마음, 마음,

한마음

한마음은

마음이 아니다,

관념이 아니다,

생각이 아니다,

하나이거나 둘이거나 수가 아니다.

유도 아니며 무도 아니며

유무 초월의 유이거나  무도 아니다.

일체 초절(超絶)의  진무(眞無)도 아니다.

현재도 아니며 과거도 아니며 미래도 아니다.

시간이거나 공간이거나

시공의 범주에 잡히는 것이 아니다.

형상, 비유, 언설, 무엇으로도 말할 수 없고

생각으로 촌탁(村度)할 수도 없다.

 

인식은 시간 공간의 인식범주에서 형성되는 것,

한마음은 시간 공간의 범주 밖의 것이므로

인식형식으로 잡을 수 없다.

 

지관과 사유는 염(念)의 논리적 전개의 형식.

한마음은 염이 아니므로 염의 단순 또는 복합적 반복으로나

논리 비논리의 전개로 어름대지 못하니

그는 사유나 직관으로 이를 수 없다.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저들도 아니고 모두도 아니다.

그는 물질이 아니다.

얻을 수도 없고 잃을 수도 없다.

무상도 아니다.

무아도 아니다.

고苦도 공도 부정 (不淨)도 아니다.

법칙도 아니다.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다.

잡을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고

대할 수도 없고 떠날 수도 없다.

죽는 자가 아니다

숨은 자가 아니다.

 

한마음은 한마음이다.

한마음일 뿐이다

한마음만 있다.

있는 것은 한마음이다.

 

영원과 자재와 광명과 창조와 무한과 환희

대해의 파도처럼... 끝없이 너울치고 역동한다.

 

 

아침해 바다를 솟아 오른 찬란,

억겁의 암흑이 찰나에 무너지고

광명 찬란, 광명 찬란, 광명만이 눈부시게 부셔지는 광명만의 세계...

이것이 한마음이다,

 

모든 것이 완전하게 모든 것이 원만하게  모든 것이 조화있게

이미 이루어졌고 구족하다.

대성취가 자족하다.

대성취 원만구족,

이것이 한마음이다.

 

한마음이 스스로를 인정하는 대로

대성취 원만자족성은 인정하는 만큼 한정되고

한정은  한마음 무한성의 구상적 표동을 촉발한다.

이것이 창조다. 이것이 성취다.

 

한마음의 자기율동은 대해의 파도처럼...

무한히 자기를 실현하고 표현하고

찰나의 쉼없이 창조는 펼쳐진다. 

이래서 성취, 성취,

환희, 환희가,

한마음의 모습이다. 한마음의 표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