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參禪)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청화큰스님

2014. 7. 9. 17:4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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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參禪)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청화큰스님

 

참선(參禪)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우리 마음이 좋다 궂다, 밉다 이쁘다, 이와 같이 흩어지면 우리 마음도 괴롭습니다. 우리 마음이 복잡해 보십시요. 산란스러우면 결국은 마음이 괴롭고 동시에 몸도 아프단 말입니다. 마음이 가지런히 하나로 딱 모아지면 마치 잠자는 잔잔한 파도(波濤) 모양으로 됩니다.

 

아! 그전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원교대사(원교大師)에게 - 원교대사는 국사의 법우(法友)인데 - 자기 법우한테 한 말이 있단 말입니다. ‘그대 마음을 산심(散心)에서 정심(定心)으로 돌이켜라!’ 그대 마음을 산심에서 정심으로 돌이켜서 마치 잔푸른 파도 모양으로 잔잔한 마음을 만들어라. 그러면 만상(萬象)의 진(眞)모습은 참모습은 거기에 비춰올 것이다. 이와 같이 말씀했단 말입니다. 그 분 뿐만 아니라, 어떤 누구나 도인(道人)들은 보통 그와 비슷한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 마음이 산란스러우면 마음이 내내야 흩어져서 산심(散心)아닙니까. 안정(安定)된 고요한 그때는 이제 선정(禪定)에 들어간 정심(定心)입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는 산심 정심 두가지가 있습니다.우리가 분별시비(分別是非)하는 흩어진 마음이 산심인 것이고, 우리 마음이 그런 어지러움을 거두어서 하나로 딱 모아지는 마음, 이 마음이 정심입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면 그때는 눈도 밝아지고 머리도 시원합니다. 사실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익혀지고 익혀지면 결국은 부처님한테 걸음걸음 다가간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우리 근본을 보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든 안 믿든 간에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본래종자(本來種子)가 불성(佛性)입니다. 그리고 잘나나 못나나 사람이나 개나 돼지나 다 근본 종자는 불성입니다. 근본 종자는 불성이기 때문에 우리가 종당(終當)에 가는 길도 불성까지 가버려야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고향(故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고향은 내내야 불성인 것입니다. 따라서 불성까지 못 가면 결국은 몇만 생(生)을 그때는 우리가 헤맨단 말입니다.

 

그래서 법화경(法華經)에 보면 우리 인간을 가리켜서 면전궁자(面前窮子)라, 마치 갈 길도 모르고 자기 집도 없이 그저 항시 비렁뱅이로 헤매는 그런 거지와 같단 말입니다. 고대광실(高臺廣室) 높은 집이 있고 제아무리 지위(地位)가 높다 하더라도 근본을 모르는 사람은 앞서 비렁뱅이와 똑 같습니다. 어디로 갈 곳을 모른단 말입니다. 그런 것을 몰라버리면 결국 죽어지면 자기 업장(業障)에 그때는 구속(拘束)되어서 자기 지은 대로 자기 몸을 받고 만단 말입니다.

 

기세경(起世經)이란, 일어날기(起)자 일어날세(世)자 기세경이란 경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지면은 염라대왕(閻羅大王)이 아주 자비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그 죽어서 온 영혼(靈魂)한테 ‘그대가 내가 보낸 세 사람의 천사(天使)를 보았는가? ’ 이렇게 묻는단 말입니다. 그때 염라대왕이 하는 말은 ‘내가 보낸 천사는 다름이 아니라 그대의 노병사(老病死), 그대의 늙음과 병과 죽음, 이와 같은 세 사람의 천사를 못 보았는가?’

 

우리 사람들이 한번 태어나면 병 안 들고,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연륜(年輪)을 그냥 먹는 것이 되서는 안됩니다. 주름살이 하나 늘어나면 하나 늘은 만큼 성숙해야 합니다. 있는 것은 반드시 멸하는 것이고,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이라, 모두가 다 무상(無常)한 것인데 우리는 가히 늙어갈 때 아파올 때 우리가 반성(反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경각심(警覺心)을 일으키므로 그것이 결국은 우리의 귀중한 스승이란 말입니다. 우리의 천사(天使)입니다. 우리한테 인생을 바로 가라. 인생의 근본을 찾아라. 이와 같이 우리를 경각(警覺)시키는 천사가 이것이 이제 죽음이요 이것이 이제 늙음이요 병인데 그걸 못 본단 말입니다.

 



 
순간 기생은 그 선비에게 일어나 큰 절을 삼배 올렸다.
절 삼배는 산자에겐 한번, 죽은 자에겐 두번
세번은 첫 정절을 바치는 남자에게 하는 여인의 법도이자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하례다.

 
그 날밤 선비와 기생은 만리 장성을 쌓았다.
그리고 보름이 지난후 선비는 기생에게 문창호지에
시한수를 적어놓고 홀연히 길을 떠나 버렸다.

 
물은 고이면 강이 되지 못하고
바람이 불지 않으면 꽃은 피지 아니한다.
내가 가는 곳이 집이요 하늘은 이불이며
목마르면 이슬 마시고 배 고프면 초목근피가 있는데
이 보다 더 좋은 세상이 어디 있느냐?

 
이후 기생은 그를 잊지 못하고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워하며
비단가죽 신발을 만들며 세월을 보냈다.
풍운아인 선비의 발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은 애틋한 사랑에
손마디가 부풀도록 가죽 신발을 손수 다 지은 기생은
마침내 가산을 정리하고 그 선비를 찾아 팔도를 헤매 다녔다.

 
정처없이 팔도를 떠돌며 선비의 행방을 물색하던중
어느날 선비가 절에 머물고 있다는 풍문을 듣고
찾아가 극적으로 재회 했다.
기생은 선비와 꿈같은 재회의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는 선비를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 했다.


꿈같은 재회의 첫밤을 보낸 다음날 
해가 중천에 올라도 움직일 기색이 없는 선비에게 
 
기생이 물었다.
낭군님 해가 중천인데 왜 기침하시지 않으시온지요?
그러자 선비는 두눈을 감은체
이 절간엔 인심이 야박한 중놈들만 살아
오장이 뒤틀려 그런다고 했다.

기생은 선비의 말을 즉시 알아 들었다.
급히 마을로 단걸음에 내려가
거나한 술상을 봐 절간으로 부리나케 돌아왔는데
하룻밤 정포를 풀었던 선비의 방앞 툇마루엔
선비 대신 지난밤 고이 바쳤던 비단 가죽신만
    가지련히 놓여 있었다.
 
수년을 찾아 해맨 끝에 재회한 선비가
홀연히 떠나버린 것을 알고 기생은 망연자실 했지만
이내 선비의 고고한 심증을 깨달았다.
선비의 사랑은 소유해도
선비의 몸은 소유 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친 기생은
선비의 깊고 높은 큰 사랑을 받았다는 것으로
스스로 위로하며 평생을 선비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이 기생이 유명한 평양기생 황진이다.
황진이는 평양기생으로 잘못알고 있는데
사실은 개성기생이고 개성여인들은 미색이 뛰어나고
재주가 특출 했다고 한다.
황진이가 그토록 사랑한 남자는
저서 화담집의 조선 성종 때 철학자 서경덕이다.

  
황진이를 만났을때 서경덕이 푼 황진이의 글 뜻은
點一二口는 글자대로,
點一二口 이고 글자를 모두 합치면
말씀 (言) 자가 되고
牛頭不出 이란  소머리에 뿔이 없다는 뜻으로
牛 에서 머리를 떼어 버리면 (午) 자가 되는 것이다.
이 두글자를 합치면 허락할 (許)자다.

 
결국 황진이는 서경덕에게 자신을 바친다는 뜻을
이렇게 사행시로 전한것이다.
이 글자를 해역 할수 있는 능력이라면
자신을 송두리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한
황진이의 기발한 사랑찾기가 절묘해서
이 적적한
가을밤에 한줄 적었다.



夜思何(야사하) / 황진이 詩


蕭寥月夜思何事(소요월야사하사)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굴 생각하세요?
寢宵轉輾夢似樣(침소전전몽사양)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 꾸시나요?

 

問君有時錄忘言(문군유시녹망언)
붓을 들면 때로는 내 얘기도 쓰시나요?
此世緣分果信良(차세연분과신량)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悠悠憶君疑未盡(유유억군의미진)
그대 생각 하다보면 모든게 궁금해요.
日日念我幾許量(일일염아기허량)
하루중에서 내 생각 얼만큼 많이 하나요?

 

忙中要顧煩或喜(망중요고번혹희)
바쁠 때 나를 돌아보라 하면 괴롭나요? 반갑나요?
喧喧如雀情如常(훤훤여작정여상)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정겨운가요?



悠悠憶君疑未盡(유유억군의미진)
그대 생각 하다보면 모든게 궁금해요.
日日念我幾許量(일일염아기허량)
하루중에서 내 생각 얼만큼 많이 하나요?
忙中要顧煩或喜(망중요고번혹희)
바쁠 때 나를 돌아보라 하면 괴롭나요? 반갑나요?
喧喧如雀情如常(훤훤여작정여상)
참새처럼 떠들어도 
 

 貧한 그 사람께!!!
悠悠憶君疑未盡(유유억군의미진)
그대 생각 하다보면 모든게 궁금해요.
日日念我幾許量(일일염아기허량)
하루중에서 내 생각 얼만큼 많이 하나요?
받은 메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