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를 찾으면 부처를 잃을 것이다

2014. 7. 23. 17:5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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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示衆)

14-41 부처를 찾으면 부처를 잃을 것이다

 

道流야 莫將佛爲究竟하라.

我見猶如厠孔이요 菩薩羅漢은 盡是枷鎖며

縛人底物이니 所以로 文殊仗劍하야 殺於瞿曇하며

鴦掘持刀하야 害於釋氏니라.

 

《해석》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부처를 최고의 경지라고 여기지 말라.

나에게는 그것이 마치 화장실의 변기와 같은 것이다.

보살과 나한은 모두 다 목에다 씌우는 칼과

발을 묶는 족쇄와 같이 사람을 결박하는 물건들이다.

그러므로 문수는 긴 칼을 비껴들고 부처님을 죽이려 했고,

앙굴리마라는 단도를 가지고 석가모니를 해치려 한 것이다.”

 

《강설》

강강(剛强)한 말세의 사람들에게는 역시 강강한 처방이 필요하다.

면역성이 강해지면 그만치 고단위 약을 써야 듣는다.

제발 부처니 보살이니 조사니 하는 성스러운 모습과 그 명칭에서 벗어나라.

부처란 무엇인가?

마치 화장실의 변기와 같은 것이다.

보살과 아라한은 또 무엇인가?

모두 죄인의 목에다 씌우는 칼과 발을 묶는 족쇄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 부처가 있는 곳에는 머물지 말고

부처가 없는 곳에는 급히 지나가라.

별로 좋은 물건이 아니다.

문수보살과 앙굴리마라가 할 일이 없어서 그와 같은 짓을 했겠는가?

모두가 경계에 집착하여 자신의 보물 창고를 잊어버린

불쌍한 사람들의 눈을 열어주기 위하여 노파심절로 한 일이다.

우리들의 마음에 일체 허상이 다 사라지기를 바라고 한 일이다.

이렇게 강강한 처방으로도 듣지 않는 병이라면

임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道流야 無佛可得이니

乃至三乘五性과 圓頓敎迹은 皆是一期藥病相治요 並無實法이니라.

設有라도 皆是相似表顯路布며 文字差排하야 且如是說이니라.

 

《해석》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부처란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다.

삼승과 오성과 원돈교의 자취마저도 모두다

그때그때의 병에 따라 약을 주는 것이지

고정된 실다운 법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말로 표현하는 길거리의 광고 게시판이다.

문자를 알맞게 배열해 놓은 것이다.

임시로 이와 같이 이야기 해 본 것일 뿐이다.”

 

《강설》

불교에는 입만 열면 부처님, 보살님, 성문, 연각, 아라한,

도인, 선지식, 큰스님,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등각, 묘각 등등 별의별 명칭을 다 말한다.

그리고 경전만 펼치면 그러한 명칭들이 있다.

그러나 부처니 보살이니 하는 말도 모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표현하는 말에 불과하다.

병에 따라 시설하는 약방문일 뿐이다.

혹은 길거리에 내걸린 광고문에 불과하다.

만일 실제로 있는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오직 사람이 있을 뿐이다.

사람 하나를 두고 별의별 이름을 다 붙인 것이다.

진정 부처를 좋아하는가?

부처란 다만 부처를 좋아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 외에는 달리 아무 것도 없다.

그 사람도 실은 부득이 해서 하는 말이다.

그렇게 알아야 한다.

그와 같은 명칭을 일컫는 그 사람마저 부득이해서 말 할 뿐인데

여타의 것이야 말해 무엇 하랴.

그래서 필자는 불교에서 굳이 사상을 말하라면

인불사상(人佛思想)이라고 하고 있다.

사람이 곧 부처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에게 하듯

사람에게 그렇게 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이다.

평화도 행복도 거기에 있다.

우리가 무엇을 보든

현재 이대로 부처가 아니라고 할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혹자는 보통 삶은 부처로서의 효용이 없다는 말을 하지만

그것은 모르는 말이다.

보통 사람 그대로가 완전무결한 부처인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라.

사람이 이렇게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부처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아프면 아파하고 기쁘면 기뻐하고 슬프면 슬퍼한다.

순간순간이 부처의 삶이다.

참으로 신묘하다.

불가사의하다.

매일 매일 천금을 드려서 잔치를 해야 할 일이다.

매일 매일 최고의 파티를 열어야 한다.

사람이 산다는 일이 이렇게 감동적일수가 없다.

 

道流야 有一般禿子하야

便向裏許著功하야 擬求出世之法하니 錯了也라

若人求佛하면 是人失佛이요 若人求道하면 是人失道요

若人求祖하면 是人失祖니라.

 

《해석》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어떤 머리 깍은 사람들이 있어서

곧 그러한 것에 공을 드려서 출세간법을 구하려고 한다.

그것은 잘못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를 구한다면 그 사람은 부처를 잃을 것이고,

만약 도를 구한다면 도를 잃을 것이며,

만약 조사를 구하다면 조사를 잃을 것이다.”

 

《강설》

자신이 부처인데 다시 부처를 구한다면 이미 있는 부처를 잃게 된다.

자신이 그대로 도인데 다시 도를 구한다면 이미 있는 도를 잃게 된다.

자신이 조사인데 다시 조사를 구한다면 이미 있는 조사를 잃게 된다.

물로써 물을 씻으려는 것이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쓰려는 일이다.

오히려 멀어질 뿐이다.

공연히 쓸데없는 문자에 이끌려 긁어 부스럼을 내고 있다.

머리 위에 다시 머리를 하나 더 올려놓는 일이다.

 

《문수경전연구회 강좌》

14-41 부처를 찾으면 부처를 잃을 것이다

 

道流(도류)야 莫將佛爲究竟(막장불위구경)하라

我見猶如厠孔(아견유여측공)이요

菩薩羅漢(보살나한)은 盡是枷鎖(진시가쇄)며 縛人底物(박인저물)이니

所以(소이)로 文殊仗劍(문수장검)하야 殺於瞿曇(살어구담)하며

鴦掘持刀(앙굴지도)하야 害於釋氏(해어석씨)니라.

道流(도류)야 無佛可得(무불가득)이니

乃至三乘五性(내지삼승오성)과 圓頓教迹(원돈교적)은

皆是一期藥病相治(개시일기약병상치)요 並無實法(병무실법)이니라.

設有(설유)라도 皆是相似表顯路布(개시상사표현노포)며

文字差排(문자차배)하야 且如是説(차여시설)이니라.

道流(도류)야 有一般禿子(유일반독자)하야

便向裏許著功(변향리허착공)하야

擬求出世之法(의구출세지법)하니 錯了也(착요야)라.

若人求佛(약인구불)하면 是人失佛(시인실불)이요

若人求道(약인구도)하면 是人失道(시인실도)요

若人求祖(약인구조)하면 是人失祖(시인실조)니라.

‘道流(도류)야 莫將佛爲究竟(막장불위구경)하라’,

 

 

우리 불교에는 부처면 제일이죠.

부처를 제일로 삼지 마라 이 말이여.

내가 보기에 부처, 부처, 하는 그 부처는,

‘我見猶如厠孔(아견유여측공)이요’, 똥통과 같다.

‘菩薩羅漢(보살나한)은 盡是枷鎖(진시가쇄)여’,

보살이니 나한이니 하는 건 그 다음이죠.

그건 마치 죄인 목에 거는 올가미나 목에 씌우는 칼과 같은 것이다.

‘縛人底物(박인저물)이야’, 전부 사람을 구속하는 물건이라.

‘所以(소이)로 文殊仗劍(문수장검)하야 殺於瞿曇(살어구담)하며’,

그래서 문수보살이 칼을 집고는 구담을 죽인 사실이 있고

‘鴦掘持刀(앙굴지도)하야’, 鴦掘(앙굴)은 持刀(집도)하고,

다 예이나 까닭은 다 다르지만 임제스님은 이것을 가지고

석가모니를 부정하는 입장으로 해설을 하고 있습니다.

석가모니까지도 부정한다, 부처까지도 부정한다 이 말이여.

또 부정할 만한 그런 건덕지가 우리에겐 다 있어.

 

견문각지하는 이 사실 이건 어느 부처하고도 안 바꾸는 거지.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입장으로 문수가 칼을 집고는

구담, 석가모니를 죽인 사실과

앙굴마라가 칼을 잡고는 석씨[석가모니]를 해치려고 하는(害於釋氏(해어석씨)),

어떤 외도에게 꼬임에 넘어가 가지고 아흔 아홉 명을 죽이고

마지막에 석가모니 죽이려고 한 그런 이야기죠.

대보적경에 부처님 제자들이

계율 때문에 계는 못 지키고 죄의식은 자꾸 깊어가고

괴로워하거나 타락하거나 그렇게 되니까

문수가 칼을 쥐고는 석가모니를 죽이려고 덤볐다고 하는 사실.

꼭 여기서 임제스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그 뜻과

그 경전의 그 뜻이 딱 맞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석가모니를 부정할 때는 부정한 이러한 사실도 있다 이 말이여.

그렇지만 하늘처럼 우리가 떠받들 때는 또 떠받들어야 되고 그런 거죠.

거기에 걸리지 아니하고 중도적인 안목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덮어놓고 매달리기만 해서도 안 되는 것이고

그렇다고 너무 부정하고 나서도 안 되는 거죠.

‘道流(도류)야 無佛可得(무불가득)이니’,

부처 가히 얻을 것이 없음이니

‘乃至三乘五性(내지삼승오성)과 圓頓教迹(원돈교적)’,

원교, 돈교의 자취는,

‘皆是一期藥病相治(개시일기약병상치)요’,

한 때의 병에 따른 약으로서 다스리는 그런 경우와 같은 것이다.

 

‘並無實法(병무실법)이니라’, 아울러 모든 실다운 법이,

고정불변한 실다운 법이 없는 것이다.

‘設有(설유)’, 설사 삼승이니 오성이니라는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皆是相似表顯路布(개시상사표현노포)여’,

다 표현하고자 하는 현수막, 노포,

길거리에 현수막 쳐 가지고 광고문 같이 걸어놓은 것과 같은 거여.

‘文字差排(문자차배)하야’, 문자로서 주욱 나열해 놓은 거여.

‘且如是説(차여시설)이니라’, 문자로 차별해서 나열해가지고

이와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야.

너무 교학을 많이 하고 거기에 젖어 있다 보면

그것이 사실인 양으로 그렇게 착각하는 수가 있거든요.

 

‘道流(도류)야 有一般禿子(유일반독자)하야’,

머리 깎은 사람이 있어서, 교학자를 두고 하는 소리요.

‘便向裏許著功(변향이허착공)하야’,

그 속에 삼승이니 오성이니 원교니 돈교니 온갖 그런 복잡 다단한 교리,

그 속에서 공을 들여 가지고서,

‘擬求出世之法(의구출세지법)하니’, 출세의,

세상을 벗어나는 그런 법을 구하려고 하니

‘錯了也(착요야)라’, 다 그르쳐버린 것이다.

‘若人求佛(약인구불)하면’,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를 구할 것 같으면

‘是人(시인)은 失佛(실불)이요’, 이 사람은 부처를 잃을 것이고

‘若人求道(약인구도)’, 만약 어떤 사람이 도를 구할 것 같으면

‘是人失道(시인실도)’, 이 사람은 도를 잃을 것이요,

‘若人求祖(약인구조)’, 만약 어떤 사람이 조사를 구하면

‘是人失祖(시인실조)’, 조사를 잃을 것이다.

정말 아주 시원한 법문입니다. 

 

- 무비스님 강설

 

꿀 먹으니 달지? / 김동길

아까운 목숨들을 하늘나라에 보낸 후 애통한
마음만큼 원인 제공자에 대한 분노도 컸다.
정부도 구원파도 해운조합도, 누구 하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조사위니 청문회니 온갖 정치적 난전을
벌이는 여의도 정치판에서 사건의 핵심인
유병언을 잡아 족치라고 외치는 자는 눈을
씻고도 볼 수 없다. 오직 정부, 박근혜만
죄인처럼 몰아부친다.

정치권은 유병언에 대해 왜 말이 없는가?
구원파가 이상덕이 유병언과 밥 먹었다고
흘린 후 더 조용하지 않은가?

까불면 이렇게 이름 슬슬 흘려서

 매장 시키겠다는 공갈에 겁먹었나?

그러고 보니 유병언이 수입한 천만 원짜리
골프채 500개를 어느 놈이 갖고 있는 지가
젤 궁금하다. 골프채 받아 챙기고 국물
얻어먹은 놈은 유병언이 입이 무서워서
찍소리 안하고 숨죽이고 있을거다. 꿀먹은
벙어리가 된 것이다.

그렇게 정의감에 불타는 국회의원 중 한
놈도 유병언이 족치자고 촉구하는 자는
없다. 좌우 언론도 검찰의 무능만 조져댄다.
오직 박근혜 한 사람만 유병언이 빨리 잡아
넣어야 한다고 길길이 뛴다. 유병언이 한테
빚진 것 없는 이가 박근혜 하나 뿐인가?

정치권은 유병언과 구원파에 언제까지
침묵하고 있을 것인가? 전두환 법과 같은
유병언 법을 제정해 부정한 재산을 환수하고
유족에 보상할 생각은 없는가?

아무도 여기에 대해 거론하는 자가 없는
여의도...사기꾼, 공범들만 들끓고 있다는
비난을 자초하고 있는 거 아닌가?

유병언 법이 발의, 제정되지 않으면 유권자는

정치권이 유병언 꿀낚시에 입이 꿰인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골프채 500개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골프채의 행방을 밝혀서 유병언의 비호
세력을 일망타진하는 게 세월호를 침몰시킨
적폐 척결의 첫 과제다.
오호! 통제라...!

썩어빠진 국회의원부터 청문회 해야 한다!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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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널리 퍼뜨려 ᆢ

여의도 도적들이 석고대죄 하도록 해야 하겠읍니다.
국민의 힘으로ᆢ

 

- 받은 글

 

 

 
Mystic Heart (헤아릴 수 없는 당신의 마음) - Ash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