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는 소리가 없다 / 현장스님
2014. 7. 30. 17:03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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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바람 속에 빛나는 천봉산을 만나게 되겠지요.
가을비가 내리던 몇 해 전의 일입니다.
함께 차를 마시던 한 거사님이
느닷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빗소리가 너무나 좋습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쵸펠 스님이 바로 말했어요.
“비에는 소리가 없는데요?”
여러분은 이 말뜻을 아시겠습니까?
세상에 저 홀로 저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요.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운 비가 허공 가득 내린다 해도
바람 초목 대지 나아가 그것을 듣는 귀가 없다면
빗소리는 끝내 빗소리가 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 비에는 소리가 없는 것입니다.
빗소리는 빗물과 허공과 바람과 초목과
대지와 그것을 듣는 밝은 귀가 어우러져 피어나는
아슬아슬한 확률같은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연기緣起라고 말하지요.
‘나’는 저홀로 ‘나’가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건들을 씨앗으로 하는 한줄기 관계의 빛이다
이런 말씀 아닌가요.
이와 같은 나로 돌아가 참으로 나답게 살아보자
이것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일 것입니다.
부처님의 지난 삶에 대한 모음집인
「자타카」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옛날 한 바라문이 살고 있었는데 창조신을 기리는
축제를 맞아 기르던 염소를 죽여 제단에 올리고저 했습니다.
그래서 염소를 막 죽이려고 하는데 갑자기
염소가 정신없이 웃어대다가 다시 엉엉 우는 것이었어요.
깜짝 놀란 브라만은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염소가 말했습니다. “한 때 나도 당신처럼
바라문으로 염소를 죽여 제단에 올린 적이 있었소.
그 과보로 499번 염소로 태어나 499번의 죽임을 당해야 했소.
오늘이 그 오백번째 죽음이오.
기나긴 염소의 삶을 오늘로 끝내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기쁘오.
그래서 웃었소. 앞으로 오백 생을 염소로 태어나
오백 번 죽어야 할 당신을 생각하니 이 얼마나 슬프오.
그래서 울었소.”
그 말을 들은 바라문이
겁이 나서 염소를 죽이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나를 죽이지 않더라도
나의 악업이 나를 죽이게 될 것이오.’
하인을 시켜 아무도 염소를 죽이지 못하게 했지만
해질 무렵 하늘에
날벼락이 치더니 바위가 튀어 염소는 죽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나’를 이루어 내는 조건들이란
우리가 짓는 생각이나 행위의 질에 따라
바람따라 흐르는 흰구름처럼
매 순간 변해가는 것들입니다.
우리들의 행위나 생각이 저 연기나 관계로서의
삶의 장을 철저히 살려낼 수 있을 때,
우리는 삶의 본질적인 자유인
자유로부터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되겠지요.
부처님께서는 세상에
태어나실 때 사방으로 일곱걸음을 걸으셨지요.
이 이야기는 철저하게 나에 갇혀 사는 삶의 모습인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수라 하늘의 여섯 가지
자기중심적 삶의 틀을
깨트리셨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일곱이라는 숫자에는 바로 이런 뜻이 깃들어 있지요.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란
스스로 존재하는 ‘나’가 있다는 미망 속에
자기 복제를 계속하기 때문에 성립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덴마크에서 미아라는 예쁜 여학생이
부모님과 함께 대원사에 내려와 하루 쉬어 갔습니다.
미아는 한국 아이인데 부모님은 덴마크 분들이었습니다.
다섯 살 때 입양된 것입니다.
미아가 이제 어엿한 아가씨가 되자 그리던 고국과
낳아 주신 어머니를 뵈러 먼 길을 걸음한 것이었어요.
조국의 산하에 다시 안긴 미아는 무척 행복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모국어를 모르는 미아가
낳아주신 어머니를 만나면 무슨 말을 나눌 수 있을 지
이 일을 생각하면 왠지 마음이 짠해집니다.
‘그리운 것은 다 님이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그 그리움을 잃어버린 삶의 벌판이란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것이겠습니까?
저는 알뜰히 미아를 길러 주고 지금도 늘 큰 사랑의 품으로
안아 주는 미아의 양부모님들께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논어」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부모 없는 어린 아이를 내 아이처럼 거두어 키울 수 있는 이는
백리 안의 사람들을 다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내 아이와 남의 아이가 다르지 않다는,
그러니까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매 순간 행복한 통합을 이루어 내는 사람은
이렇듯 따뜻하고 숭고한 힘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두 가지에 크게 집착해서 살아갑니다.
첫째는 가족이며 둘째는 현세입니다.
자기 가족만 중요하고
남의 가족의 소중함은 깊이 생각하지 못합니다.
현세의 삶만 알지 전생과 내세의 삶은 생각할 줄 모릅니다.
티벳 사람들은 두 가지 집착에서 많이 벗어나 있습니다.
전생에 많은 가족들이 있었음을 알기 때문에
오늘 만나는 모든 이웃들이 내 어머니며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며 친절과 자비심을 키워갑니다.
내 아이뿐만 아니라 남의 아이의 모습이 바르게 보이려면
‘나’라는 땅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보아야 합니다.
논어 말씀에도
‘군자’는 자기 자식을 너무 살갑게 대하지 않는다.
곧 ‘君子之遠其子之’라 했지요.
‘나’라는 땅에서 한 걸음 물러나 보면
제대로 보이는 것이 어디 자식뿐이겠습니까.
중국 강소성 양자강 강가에 금산사라는 아름다운 절이 있지요.
청나라 건융황제가 이 절을 참배하고 나서 양자강을 바라보며
한 노스님과 차를 마시며 대담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황제가 물었습니다.
“이 절에서 몇 해나 사셨습니까?”
“몇 십년이 지났습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저 강 위를 오가는 배를 몇 척이나 보았습니까?”
“오직 두 척을 보았을 뿐입니다.”
“어떤 배였습니까?”
“이익과 명예 오직 이 두 척의 배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배를 타고
삶이라는 거친 강을 흘러가고 있습니까.
종교란 행복한 삶의 길입니다.
진정한 행복의 길을 모르는 이를
요즘 말버릇에 따르면 종맹宗盲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앞날의 종맹은 성경이나 불경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저 관계로서의 삶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입니다.
미아를 길러준 미아의 양부모님은
미아 말고 다른 아이를 갖지 않았습니다.
혼인해서 함께 산 지 스무 해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나는 함께 차를 마시며
그 분들께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장님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혼인한 지 서른 해가 되던 날
이 두 장님 부부는 기적처럼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부부는 처음으로 마주 바라보았습니다.
남편이 말했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러자 아내도 남편에게 인사했습니다.
“그 동안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비로소 인사를 나누게 된 부부는 너무도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당신들도 혼인한 지 서른 해가 되면
이와 같은 인사를 나누게 되기를 빕니다.”
누구에게나 세 가지 ‘나’가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생각하는 나입니다.
둘째는 남이 생각하는 나입니다.
셋째는 나도 모르는 나입니다.
우리는 보통 내가 생각하는 나 또는 남이 생각하는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웃음을 웃을 때도 그렇고 옷을 입을 때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나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
나도 모르는 나에 눈 먼 봉사인 것입니다.
나도 모르는 나 그것은
관계로 목숨을 삼는 나인 것입니다.
관계로 목숨을 삼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나나 남이 생각하는 나로
목숨을 삼을 때
우리 삶은 말할 수 없이 힘겨워지는 법입니다.
‘매미’같이
“큰 태풍도 한갓 부평초 풀끝에서 일어난다”는
장자의 말씀처럼 삶의 온갖 괴로움도
이 부평초 같은 나를 세우는 순간 생겨나는 것이지요.
나이 오십이 되어서야
사십구년을 잘못 살았음을 알았다는 말이 있지요.
우리가 혼인해서 아들 딸 낳고 이 일 저 일 두루 겪으며
한 평생을 꿈결처럼 보내기 일쑤입니다.
부평초 같은 ‘나’에 속아 사는 삶은
한 삼십년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이 자리에 계신 여러 불자님들은 혼인 삼십주년을 맞으면
나도 모르던 그 나에 눈이 크게 열려 오나 가나
나에 묶여 사는 노예살이에서 모두 풀려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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