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덕 큰스님] 반야바라밀의 본 뜻

2014. 8. 20. 18:0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728x90

img_47709_590624_4[5].jpg

 

반야바라밀의 본뜻

 

 

사리불 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반야바라밀은 일체법을 비춥니다. 삼계에 착(着)하지 아니합니다. 모든 어둠을 없이 합니다. 안온합니다(두려움과 고뇌를 끊음). 광명을 줍니다. 사도에 떨어진 중생을 바로 인도합니다. 일체 종지입니다(번뇌와 습기를 끊음). 모든 보살의 어머니입니다(제불법을 낳음). 불생불멸합니다. 생사를 멀리 여의겠습니다(생멸이 아님). 외로운 자의 보호자입니다(온갖 보배를 베풂). 힘이 구족합니다(파괴할 자가 없음). 능히 제법의 성품을 보입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공양하오리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땅히 세존을 공양하듯이 할지니라. 반야바라밀을 예경하기를 세존에게 예경하듯이 할지니라. 왜냐하면 세존은 반야바라밀과 다르지 아니하며, 반야바라밀은 세존과 다르지 아니하며, 세존이 곧 반야바라밀이요, 반야바라밀은 세존과 다르지 아니하며, 세존이 곧 반야바라밀이요, 반야바라밀이 곧 세존이니라.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 제불보살과 아라한 등 성자가 출생하며,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십선(十善) 내지 부처님의 십력(十力), 대자대비 일체 종지가 나기 때문이니라.”

 

 

반야바라밀은 어떤 것인가. 반야바라밀을 어떻게 얘기하고 어떻게 받들 것인가. 이것을 마하반야바라밀경 가운데 부처님과 사리불 존자와의 문답에서 추려보았습니다. 여기에는 13개를 추려놨습니다마는 『반야바라밀경』 「조명품」에는 14개가 나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대강 살펴본 바와 같이 사리불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부처님 반야바라밀은 참으로 희유합니다. 참으로 장합니다. 반야바라밀은 이러합니다. 이러합니다.”하고 당신의 감동을 막 터트려 나갑니다.

 


그 다음에 “부처님 이 반야바라밀을 어떻게 얘기하며, 어떻게 이 경을 공양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묻는 대목이 이 대목입니다. 사리불 존자가 반야바라밀 법문을 듣고는 자기가 깨달은 내용, 그 감동을 이렇게 설해놓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 어떤 것인가. 반야바라밀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는 데 있어 좋은 자료가 됩니다.

 

 

 


[반야바라밀은 일체를 비춘다]

 

아마 불광 형제들은 제가 즐겨 쓰는 용어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육조단경』에 육조 혜능 스님이 당신의 스승한테 『금강경』 법문을 듣고 반야바라밀을 깨달은 대목입니다. 거기서 “불이진성(不二眞性), 자기 자신이 참된 진리 성품과 둘이 아니더라. 참된 진리 성품을 내가 떠나지 않았더라.” 그것을 깨닫고 그 깨달은 감동을 토로합니다.

 


그 대목이 “어찌 나의 본자성이 본래로 청정함을 알았을까. 어찌 나의 본자성이 생멸이 없음을 알았을까. 어찌 나의 본자성이 본래로 구족함을 알았을까. 어찌 나의 본자성이 동요가 없음을 알았을까. 어찌 나의 본자성이 능히 만법을 냄을 알았을까. 나의 본자성에서부터 일체가 쏟아 나오고 본래로 청정하고 그런 것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이렇게 감동을 터뜨립니다. 그 다음 홍인 선사가 “그렇다. 나도 그렇다.” 하시며 법을 전해주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그것과 흡사한 대목이 나옵니다. 맨 먼저 “능히 일체법을 비춥니다.” 했습니다. 반야바라밀이 능히 일체법을 비춘다. 무슨 말인가. 반야바라밀은 청정한 까닭에 반야바라밀에는 한 물건도 없는 것입니다. 한 물건도 맺힌 것이 없기 때문에 일체가 전면 드러나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 이 법 가운데 일체가 다 드러나버립니다. 반야바라밀 이 법 가운데서는 전체 생명이 완전히 한꺼번에 확 드러나버립니다. 일체가 어떤 곳, 그늘진 곳, 가린 곳이 없습니다. 내 마음이 밝으면 내 마음 전체를 그대로 알고 나의 과거 미래를 한꺼번에 아는 것과 같이 아무튼 전체를 그냥 투시하는 것처럼 반야바라밀 이 진리 광명이 일체법을 다 비춥니다. 그 까닭은 참으로 청정하기 때문에, 한 물건도 낀 것이 없기 때문에, 일체 중생 일체 사물 할 것 없이 모두를 다 비춰버립니다.

 

 

 


[반야바라밀은 삼계에 착하지 아니한다]

 

둘째, 반야바라밀은 삼계에 착하지 아니합니다. 삼계가 무엇입니까? 삼계는 중생이 사는 마당입니다. 중생이 사는 세계, 지옥·아귀·축생·인간들은 다 욕계에 사는 것이고 천상의 일부도 욕계에 사는 것이고 그 다음 천상 사람들은 색계에 살고 그 다음에 보다 수행력이 높은 천상 사람들은 무색계천에 삽니다. 그러나 모두가 짓고 받고 짓고 받고… 그저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 중생세계입니다.

 


좋은 세계에 태어나든 거칠은 세계에 태어나든 이 유위법 내에 사는 것은 끊임없는 반복입니다.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생과 멸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좀 좋은 데 갔다 왔다 하더라도 그것도 끝이 있는 것입니다. 중생이 사는 세계를 욕계, 색계, 무색계라 해서 삼계라고 합니다. 삼계 가운데 천상도 있고 육도(六道)도 있고, 악도도 있는 것입니다마는 반야바라밀다는 삼계에 착(着)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다를 자각한 사람은 삼계가 상관없습니다. 그러니까 삼계에 지옥이 있든지 무엇이 있든지 그런 세계와 상관없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삼계라는 꿈에서 벗어난 대광명 천지 가운데서 자재한 사람입니다. 대자유인입니다.

 


반야바라밀은 삼계에 착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미혹을 끊고 삼계의 결박을 끊고 삼계의 감옥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삼계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탈퇴하려고 하면 반야바라밀을 닦아야 합니다.

 


세 번째 반야바라밀은 일체 모든 어둠을 멸합니다. 어둠이 뭡니까. 이 세상에 있어서 우리가 생활하는 데 있어서 어둠, 우리 환경에 나타나고 있는 어둠, 고난, 장애, 그것은 다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 가운데에 있는 번뇌, 정화되지 못한 부분이 번뇌입니다. 먼지 같은 것이며, 터럭 같은 것입니다. 하늘에 낀 구름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걸려 있기 때문에 그것은 밝은 햇빛을 가려서 어두운 부분을 가져옵니다. 이 어두운 부분, 이 장애, 이 결과는 우리 마음 가운데 가지고 있는 번뇌라고 하는 먼지 때가 원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멸해서 없어졌기 때문에 일체 어둠을 없애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야바라밀을 닦는 사람은 온 천지가 광명국토입니다. 어둠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야바라밀은 안온이고 편안함이다] 


네 번째 반야바라밀은 일체조도품 가운데 최상입니다. 조도품이라 하면 부처님의 도법을 닦아가는 차서(次序)인데 보통 37조도품이라 해서 서른일곱 개를 말합니다. 서른일곱 개라 하면 첫 번째가 사념처(四念處)이고, 두 번째가 사정근(四正勤), 세 번째가 사여의족(四如意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地), 팔정도(八正道), 이렇게 모두 합해서 서른일곱 가지를 닦는 것입니다마는 하여튼 닦아가는 방법으로는 반야바라밀이 최상이라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은 안온합니다. 바라밀 그 자체가 우리를 일체 두려움에서 벗어난, 일체 고뇌에서 벗어난 안온을 가져다 줍니다.

 


“고뇌 많은 사람들이여, 두려움 많은 사람들이여, 공포에 쌓인 세간에 사는 사람들이여, 반야바라밀을 염할지어다.”

 


반야바라밀은 참으로 안온을 줍니다. 반야바라밀 자체가 안온입니다. 말하자면 등불을 가져오면 등불 자체가 밝음인 것처럼 반야바라밀 자체가 안온이고 편안함입니다. 능히 두려움과 고뇌를 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이 능히 광명을 줍니다. 이것은 지혜광명입니다. 이 반야바라밀에서 지혜의 안목을 다 열어줍니다. 반야바라밀다는 삿된 길에 떨어진 중생을 올바르게 인도합니다. 반야바라밀을 통해서 방편이 구족해지기 때문입니다.

 


지장보살은 모든 중생들의 지금의 행과 내생에 태어날 것과 일체를 다 안다고 그랬습니다. 지장보살이 어째서 그렇게 다 아는가. 지장경에 보면 깊고 세밀한 반야바라밀을 수행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습니다.

 

반야바라밀을 통해서 어두운 것, 장애물, 대상이 되는 것, 그 경계가 되는 것, 멀고 가까운 것 없이 싹 공해버렸습니다. 모두가 목전(目前)입니다. 모두가 눈 앞에 있는 것입니다. 멀고 가까운 것이 없습니다. 일념직하입니다. 한 생각 한 생각 바로 거기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를 아셔서 올바른 지혜방편을 써서 삿된 중생들을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삿된 것이냐. 염불을 하든지 참선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바로 깨달음을 들으려고 하면 삿된 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공부하다가 삿된 데 빠져버리면 삿된 것을 얻고 정법을 못 얻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 진리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무엇이 삿된 것인가를 가장 잘 알아야 공부길을 바르게 갑니다. 무작정 노력하고 용맹 정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비뚤어진 길로 가지 않는가 하는 지혜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일체 경계를 취하지 말라 ]


무엇이 삿된 것인가. 유경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야바라밀 수행하는 형제들은 반야바라밀은 본래 무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 같다 땅만하다 완전하다 뭐다 하는 이러한 말과 생각을 초월한 것입니다. 일체 경계가 다 끊어진 것, 청정한 한마음이라고 한다면 청정한 한마음에는 청정한 것뿐입니다.

 


허공에 한 물건이 없는 것처럼 맑고 맑아 허공이 맑은 것처럼 한 물건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끗한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올바른 것이고 진실한 것인데 거기다 조그마한 것, 무엇인가 있다고 인정해버리면 인정한 것으로 막혀버립니다.

 


대개 염불 수행하는 사람이거나 무슨 행을 하든지 일심으로 일념으로 오직 추구해서 나아갈 뿐이요, 경계를 취하거나 소리를 취하거나 아는 것을 취하거나 거기에서 멈춰버리면 거기서부터 삿되어져서 비뚤어져버립니다.

 


천수다라니를 외든지 관세음보살을 외든지 지장보살을 외든지 무슨 수행을 하든지 일심으로 욀 뿐이요, 무념으로 추구할 뿐이요, 앞으로 나아갈 뿐이요, 처음에 배웠을 때처럼 오직 우직스럽게 앞으로 갈 것뿐이요, 가다가다 마음이 맑아졌고 혹은 마음이 맑아져서 뭐가 보이고 무슨 소리가 들리고 내가 알지 못하던 것을 깨닫게 되는 것도 모두가 수행 중에 나타나는 경계입니다.

 


그것에 조금이라도 마음에 담아두거나 생각에 담아두어서 ‘아, 그렇구나. 좋다.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마음을 두고 생각을 파기 시작하면 사도에 떨어진 것입니다.

 


수행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일체 경계를 취하지 말라. 일체 보고 느끼는 것을 취하지 말라.” 수행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그것입니다.

 


일심에는 본래 형상이 없는 것입니다. 진리의 근원 그 뿌리에는 형상이 없는 것입니다. 진리의 근원, 그 뿌리에는 형상이 없는 것인데 근원뿌리에 거창한 사람이 있다든가, 권능한 자가 거기 떡 앉아서 “죄인들아, 여기 오너라. 네 죄를 사해주리라.” 이런 따위가 들어앉아 있다든가 하는 것은 귀신입니다. 그것은 귀신이요, 정말 무서운 위선 밑에 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본래 무상 무형인 까닭에 무한입니다. 그러니 무상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이 무한을 가는 것입니다. 그 곳이 내 생명의 본곳입니다.

 


거기서 완전히 자유라고 하는 자기 확립이 되는 것이고, 무한 절대라고 하는 자기 권능확립이 거기서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기 빛을 잊어버리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새로운 무엇에 빠져버리면 그것은 요망스러워지고 요사스러워져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형제들도 바라밀 수행을 하는 데 있어 경계에 떨어짐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수행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불광 형제들은 목표가 정말 바르고 그 목표를 향해서 닦아가는 수헹방식이 바르기 때문에 그때 그때 하나 하나 꽃이 피는 것입니다.

 

 

                                    월간 불광... 

 

 

 

마하반야바라밀! 그 의미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큰 지혜의 완성’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관심둘 것은 장차 완성한다든가 어떤 조건이 붙은 완성이 아니라 이미 완전하게 완성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무엇이 어떻다고 설명할 수 없는, 생각이나 마음을 초월한 무한 절대의 완성, 진리 본연의 완성을 뜻합니다.

 


경에 이르기를,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이 나온 곳’이라고 하여 불모(佛母)라고 합니다.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게 된 근거는 반야바라밀이라 하였으며 모든 부처님에 앞서 반야바라밀을 공경하고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길을 구하는 사람은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개인의 완성에 있어서나, 사회의 완성에 있어서나, 역사와 국토의 완성에 있어서도 무엇보다 반야바라밀을 구하라는 뜻이 됩니다.

 


반야바라밀은 근원적 진리이며 주체적 진리입니다.

 

 

우주와 시간이 벌어지기 이전의 원모습이며 시간과 역사가 벌어진 후에도 그 원모습이며, 무궁한 시간과 공간과 존재와 발전의 근원적 원모습이 반야바라밀이라는 말이 됩니다.

 

 

이 땅의 평화와 번영을 생각하고 부처님과 그 거룩한 진리를 알려면 반야바라밀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 반야바라밀이고, 우리의 참 모습이 반야바라밀이며, 일체 존재를 초월한 실존이 반야바라밀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참된 인간을 확립하고 진실한 자기를 회복한다는 것은 반야바라밀을 아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또 이 땅, 이 사회, 이 질서가 진리본연의 질서가 되어 인간 생명을 진리로 가꾸고자 하면 역시 반야바라밀에 의한 사회이어야 하겠고,그에 따른 운영이어야 한다는 말도 됩니다.

 

 

인간 개개인의 덕성과 지혜와 창조적 힘을 발휘하는 것도 반야바라밀의 활용에서 오게 됩니다.

 


이렇게 살펴보면 반야바라밀은 진리이며 실존이며 일체 생명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일체 생명이 삶의 보람을 누리고 발전과 평화를 이루자면 모름지기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야 합니다.

 


반야심경은 이 점을 가장 짧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둘러싼 감각적·육체적·물질적·자연적·정신적 일체 한계를 초극합니다.
일체 고난을 없이 하고 일체 장애와 두려움을 소탕합니다.
반야바라밀은 무상진리로 인도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반야바라밀은 문자 그대로 대지혜의 완성이며, 진리생명의 완성이며, 진리국토의 완성이라 할 것입니다.

 


-광덕 스님 『삶의 빛을 찾아서』 중에서

 

 

普賢 09.05.29. 10:52

큰스님의 '마하반야바라밀'은 바로 '보현행원'임을 아셔야 할 겁니다. 이 부분은 큰스님께서도 생전에 통철히 제자 분들에게 말씀을 못 드리고 가신 것 같은데, 제가 볼 때는 큰스님의 마하반야 염송은 끝없이 내 생명의 진리를 일깨우는 주문이요, 그것은 또한 일체를 섬기고 공경, 공양하는 보현의 마음을 잊었던 우리 가슴에서 꺼집어 내는 것입지요!
            
이 부분을 못 보시면, '큰스님은 반야를 강조하셨지만 보현행원은 강조하지 않으셨다!'는 착각을 하시게 됩니다.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_()_ 

 


 

    ♤. 오솔길 / 박고은
    

    첨부이미지

    꼭 누군가 올 듯만 싶어
    걸어보는 오솔길
    새소리 바위틈 솟는 샘물 소리
    문명에 절은 귀를 헹구고
    산들바람 감미론 밀어에
    둘레둘레 젖어드는 추억
    
    어느덧 산만한 그리움은 
    회향의 숲을 휘돌아
    흰 구름 뭉게뭉게
    산마루를 넘는다
     
    
    아침의 향기 / 이해인 
    아침마다
    소나무 향기에 잠이 깨고 
    창문을 열고 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도 
    솔잎처럼 예리한 지혜와 
    푸른 향기로 
    나의 사랑이 변함없기를 
    찬물에 세수하다 말고 
    비누 향기 속에 풀리는 
    나의 아침에게 인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온유하게 녹아서 
    누군가에게 향기를 묻히는 
    정다운 벗이기를 
    평화의 노래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