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공무도하가

2015. 1. 17. 10:3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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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공무도하가

 


님이여 그 물을 건너지 마오
님은 기어이 물을 건너시려네
님은 이미 물에 빠져 죽었으니
님이여 님이여 어이한다 말고...


이 노래는 고조선 시대에 물에 빠져 죽은 미친 늙은이(白首狂夫)의 아내가 지은 '공무도하가'입니다. 술에 취해 아내가 말리는데도 술병을 들고 물을 건너려다가 물에 빠져 죽는 늙은 남편을 보고 아내는 공후(箜篌)를 가지고 이 노래를 부른 후 몸을 물에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슬픈 옛이야기도 함께 전해 내려옵니다. 사연은 다르지만 어쩌면 남편을 먼저 보낸 부인의 마음은 같을지 모를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요즘 잔잔한 감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19살과 14살의 남녀(일설에는 9년 차이)가 만나 70년이 넘게 해로한 노부부의 이야기를 그린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본 사람마다 줄줄이 눈물을 흘리며 부부란 도대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그만큼 간절하고 애절한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아직 보지 못했지만, 두 분의 이야기는 이미 TV에서 방영된 적도 있고(2011년 KBS '인간극장'), 그 외에도 관련 동영상이 인터넷에 적지 아니 있기에 대강 무슨 내용인지 짐작은 갑니다. 해서, 오늘은 이 영화에 대해 잠깐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보고 감명을 받은 듯합니다. TV인터뷰를 보면 젊은 부부나 나이 드신 부부나 모두 얼굴에 눈물이 가득합니다.  영화배우 조재현씨는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이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 같다>고 말하고, 또 이광기씨는 <이런 사랑을 해야되는게 아닌가>하고 말합니다. 남매인지 연인인지 모르는 두 젊은 남녀는 각기 <할머니 모습을 보고 느낀 것도 많다, 진짜 사랑을 알게 된 것 같다>고 말하고, 장년의 아주머니 아저씨는  이구동성으로 <감명 받았다... 두 분이 살아가는 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럽고... 너무 아름답다... 험난한 세상에 숭고한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는 분이 있다는게 참 고맙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여학생은 <저희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너무 슬펐다>며 울고, 어떤 젊은 여성 역시  <보는 내내 눈물이 앞을 가렸다>며 말을 잇지 못하고, 어떤 중년의 아주머니는 펑펑 우는 얼굴로 <영원할 순 없지만, 저희 남편하고도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며 갑니다>라고 인터뷰에서 말합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렇게 사람을 눈물 바다로 만드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영화에 감동하는 것은, 이 영화가 부부의 삶, 그리고 부부의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를 진솔하게 보여주는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에 서로 미워하고 같이 살지 못하는 부부가 얼마나 많은데, 오히려 남보다 못한 부부가 얼마나 많은데 저 많은 세월 동안 어떻게 저렇게 한결같이 진실된 사랑을 할 수 있는지, 그런 할아버지 할머니가 실로 신기할(?) 정도로 감동적인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짓게 하는 것 같습니다.


겁이 많아 밤중엔 화장실도 못 가는 할머니. 그 할머니를 위해 화장실 가는 할머니를 함께 가서 볼 일을 보는 동안 무서움 타지 말라고 노래를 불러주는 할아버지. 그런 할아버지가 고마와 할아버지에게 꼭 고맙다고 말씀하시는 할머니 이제는 힘이 부쳐 행여나 나무해 오다 쓰러지실까봐 나무 하러 갈 때마다 할아버지를 따라가는 할머니. 이쁜 꽃이 있으면 따서 할머니 머리에 꼽으며 이쁘다고 웃으시는 할머니 할아버지 . 정성스레 저녁을 한 후 굳이 누워 쉬는 할아버지께 음식 간을 보게 하는 할머니. 하늘의 별을 따준다더니 왜 안 따 주느냐고 짐짓 항의하는 할머니께 아직 때가 안 되어 안 따준다고 발뺌하는 할아버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천애고아로 외롭게 자라다 동네 딸부자집에 6년 데릴 사위 노릇 끝에 얻게 된 할머니.


할머니는 처음엔 남편인 줄도 모르고 아재(아저씨)라 불렀다고 합니다. 가난하기만 하던 시절, 오직 넘친 것은 사랑뿐이었다며 인간극장의 나레이터는 말합니다. 일하고 땀을 뻘뻘 흘리고 오는 할아버지를 할머니는 반갑게 맞았다고 합니다. 당신을 좋아하니 당신도 모르게 정이 들었던 것 같다며, 남자하고 살아도 신랑인지 뭔지 알지도 못하고 그저 오빠 같고 당신을 좋아하니 할머니도 그만 푹 빠졌다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또 힘든 일을 하고 저녁에 돌아오면 할머니가 수고했다며 당신을 안아주시는데, 그러니 힘이 나고 일을 점점 더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장인 장모 입장에서는 데릴사위 하나는 정말 잘 들인 셈(?)입니다.


많은 분들이 '사랑'을 인간 도덕 가치의 최우선으로 삼고,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사랑을 입에 달고 삽니다. 그리고 때로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잘못된 행위마저 무마하려 합니다. 가령 <사랑의 매>라며 일방적인 폭력을 정당화하기도 하고, 사랑했기 때문이라며 스토킹을 하고 헤어진 이성 친구를 해치기까지 합니다. 폭력이 사랑이고 분노가 사랑인 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랑이란 말은 우리 주위에 넘치지만, 정작 사랑이 무엇인지는 우리 모두  잘 모르는 듯합니다. 그런데 할머니 할아버지는 사랑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확연히 보여주십니다.


우선 두 분에게 보이는 것은 <감사>입니다. 할머니는 당신을 좋아해 주는 할아버지가 고맙고, 할아버지는 또 당신에게 힘을 주는 할머니가 감사합니다. 손주만 9명, 증손주까지는 10명이나 낳았다며 이제는 외롭지 않았다는 할아버지. 그러나 할머니께 소리를 못 지른다고 하십니다. 그 생각을 하면 말입니다. 그런 감사가 부부 사이에는 그렇게 넘칩니다.


또 두 분 사이에는 비난이 없습니다. 물론 할머니가 가끔 할아버지께 야단도 치고 투정(?) 비슷한 말씀도 하시지만 거기엔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그저 사랑하는 부부 사이에 나누는 사랑 놀음인 것입니다. 거기에 더 기가 막히는(?) 것은 할아버지의 대응입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뭐라 하든 다 받아들이며 무조건 할머니를 칭찬하십니다. 무조건 할머니 이쁘다 하시고 무조건 고맙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영상 내내 할아버지가 화를 내시거나 조금이라도 험한 말씀을 하시는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웃으시고 언제나 할머니를 격려하고 칭찬하십니다.


셋째는 <지극한 섬김>입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지극히 섬기시고 할머니 또한 할아버지를 지극히 섬기십니다. 농담도 잘하고 장난도 잘 치시는 할아버지. 병원에 갔다가 대기 중에 할머니 아픈 팔에 입을 대고 호~를 해주시고, 바느질하느라 힘들다며 노래를 시키는 할머니 요청에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없이  할아버지는 노래를 불러주시기도 합니다. 할머니가 무슨 말, 무슨 요구를 해도 언제나 싱글벙글, 할머니의 뜻을 따라줍니다. 그런 할아버지를 할머니는 머리도 빗겨주시고 손수건을 잘라 만든 마후라를 목에 걸어주십니다. 어느 가을날 마당의 낙엽을 같이 쓸다 장난기가 발동한 할아버지가 낙엽을 할머니께 뿌리자 할머니는 정색을 하고 화를 내십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바로 고개를 숙이며 "잘못했어요, 안 그럴께요"라며 사과를 합니다. 잘못(?)이 있을 땐 그렇게 사과를 바로 함으로써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섬깁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에 넘치는 사랑의 모습은 이런 것들입니다. 별다른 게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우리들로 하여금 두 분의 사랑을 확인ㅎ게 합니다.  영상 내내 두 분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감사하고 칭찬하고 섬기는 그것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알고 싶어하던 사랑의 구체적 모습이 <감사, 찬탄, 섬김>인 것입니다.


따라서 할아버지 할머니는 사랑한다는 말씀은 서로 안 하지만(물론 손으로 하트 모양은 만들었음), 감사와 찬탄, 섬김으로써 사랑을 이미 구체적으로 현실화시키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근간에는 <공경>이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알고 싶었던 사랑의 구체적 모습, 그것은 서로를 공경하며 감사, 찬탄, 섬기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또 별나고 엄청나며 요란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그런 곳이 아니라, 그렇게 쉽고 그렇게 작고 순박한 곳에서부터 우리에게 옵니다.


그렇게 살아오기 70여년. 인간극장에도 사연이 소개되고 독립영화 감독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는 동안, 할아버지는 그만 세상을 떠나십니다. 그리고 떠나간 할아버지를 할머니는 그리워합니다. 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 날, 산소를 찾은 할머니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에게 <내 보고 싶더래도 참아야 돼. 낸도 할아버지 보고 싶어도 참는 거야.>라며 두어 걸음 뗀 뒤 무덤을 돌아보고 또 두어 걸음, 또 두어 걸음… 그러시다가 끝내 눈밭에 주저앉으시고 울음을 터뜨립니다. 애써 울음을 참으시며 <허으으…. 할아버지, 어여 데리러 와요. 손목 잡고 하얀 저고리 파란 바지 파란 치마 입고 저기 재 너머 같이 가요...할아버지하고 손을 마주 잡고 가면 얼마나 좋겠소>고 나직히 독백도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사랑했더라도 이별은 피할 수 없는 법(會者定離)! 그것이 우주의 법칙인데 이를 어이하겠습니까. 아무리 사랑했다 하더라도 사랑을 저 세상까지 가져갈 수는 없는 것. 그래서 할머니는 헤어짐이 그렇게 슬프기만 합니다. 이후 방영된 방송에서 다음 생에도 할아버지와 부부가 되고 싶으시냐는 질문에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당신에게 그렇게 잘해주신 할아버지를 두고 어느 다른 사람을 생각하겠냐고... 그렇게 할머니는 이승에서의 이별을 다음 생에서의 만남으로 기약합니다.

 

잘 살아도 한 세상 못 살아도 한 세상, 삶은 그렇게 가는 것. 아무리 길어도 끝날 때는 모두 허망합니다. 그 긴 세월이 끝날 때 보니 한 순간인 것입니다. 그러니 신라의 의상스님은 <한 생각이 무량한 세월이요, 무량한 세월이 한 생각>이라고 말씀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허망할 시간을 무얼 그리 미워하고 원망하고 싸우고 다툴 것인지... 이래도 지나가고 저래도 지나갈 시간이라면 이왕이면 미움보다 사랑을 채우면 좋을텐데, 왜 우리는 그렇게 지금도 사랑보다는 미워하고 서로를 행복하게 하기보다는 아프게 하노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지... 70년이 훨씬 넘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애틋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런 어리석음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공경, 칭찬, 섬김-이것을 불교에서는 <보현행원(普賢行願)>이라 합니다. 즉, 보현행원의 내용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따라서 보현행원을 하게 되면 사랑이 넘치게 됩니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밖엔 모르고 사랑이 가슴 속에 샘 솟듯 솟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이 솟는 곳엔 언제나 생명성이 넘칩니다. 생명의 바탕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이 있는 곳엔 절망이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절망을 희망으로 바꿉니다. 사랑하는 분들은 절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사랑이 있는 한 이 세상의 어둠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사랑은 모든 어둠을 빛으로 밝음으로 바꿉니다.

 

*불교에서는 이승에서 한번 헤어지면 다음 생에 다시 만나기는 지극히 어렵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짓는 업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졸업 후 친구들 만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을 미루어 보면 크게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짓는 인연이 다르기 때문인데, 특히 이생에서와 같은 관계로 만나기는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다음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 이 관계에서 더더욱 서로 사랑하고 더더욱 서로 공경하고 더욱더 서로 모셔야 할 것입니다. 


      가슴은 현재에 살고 머리는 과거에 산다 사회의 구조 전체는 가슴과 반대된다. 그것은 머리를 가르치고, 머리를 단련하고, 머리를 교육시킨다. 가슴은 위험한 것이기 때문에 사회는 가슴을 무시하고 묵살한다. 머리는 하나의 기계이다. 기계들은 절대로 반항하지 않는다. 반항할 수 없다. 그것들은 단순히 명령을 따른다. 순종적인 것, 그것이 바로 기계의 좋은 점이다. 그래서 국가, 교회, 부모들, 모두가 머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머리는 모두에게 편리하다. 가슴은 현재상태, 기존의 질서, 기득권에 대해 불편함을 일으킨다. 머리는 논리를 통해 작용한다. 머리는 납득시킬 수 있다. 머리는 기독교인, 힌두교인, 이슬람교인이 될 수 있다. 머리는 공산주의자, 파시스트, 사회주의자로 만들어질 수 있으면 된다. 교묘한 전략만 있으면 된다. 컴퓨터에 입력시킨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되풀이된다. 머리는 단 한 가지도 새로운 것은 내놓을 수 없다. 머리는 절대로 독창적일 수 없다. 가슴은 사랑을 통해 살고, 사랑은 조건 지워질 수가 없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반란이다. 사랑이 그대를 어디로 이끌어갈지 결코 알 수 없다. 사랑은 예측 불가능하다. 그것은 임의적이다. 사랑은 절대로 옛것을 반복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현재 순간에 반응한다. 가슴은 현재에 살고, 머리는 과거에 산다. 따라서 머리는 항상 전통적이고 상투적이다. 그리고 가슴은 항상 혁명적이고 반항적이다. 그러나 그대는 논리가 아니라 가슴을 통해서만이, 사랑을 통해서만이 승리할 수 있다. 그리하여 기적이 일어난다. 그대가 군중 심리에 반항하고 점점 더 독립적이 될 때 문득 그대는 자신이 전체와 하나가 되고 있음을, 우주와 하나가 되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한다. 【오쇼 라즈니쉬의 법구경 중에서】
            때로는 쉬어가라 인생에서 온몸이 산산이 부서질 만큼 깊은 바닥이란 많지 않다. 잠시 쉬어라. 다시 밧줄을 잡고 밖으로 나갈 만큼 기운을 차릴 때까지 충분히 밖으로 나갈 힘을 모았다고 생각하거든, 그때 다시 밧줄을 잡고 오르기 시작하라. 포기란 항상 비겁한 것은 아니다. 실낱같이 부여잡은 목표가 너무 벅차거든, 자신 있게 줄을 놓아라. 대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펼쳐라. - 김난도의 < 아프니까 청춘이다 >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