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의 세계, 비분석의 세계]

2015. 1. 24. 17:3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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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의 세계, 비분석의 세계]


세계는 분석의 세계와 비분석의 세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분석의 세계는 지식(知識)의 세계요, 비분석의 세계는 지혜(智慧)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분석할수록 아는 것은 많아지고 분석을 많이 한 사람들을 전문가, 지성인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분석할수록 분석 없는 세계와는 점점 멀어집니다. 따라서 분석을 많이 한 분들은 한 분야의 전문적 지식은 많아질지 몰라도 지혜를 증장시키지는 못합니다. 이런 이유로 아는 것은 많은데 인간적으로는 그다지 뛰어나지 못한 분들이 지식인, 지성인들 사이에 많은 것입니다.


비분석의 세계는 이와 반대입니다. 세상을 분석하지 않을수록 세상의 물리 세계와는 멀어집니다. 소위 아는 것이 적은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깊어집니다. 이런 이유로 예전에 일자무식의 시골 농사꾼, 뱃사공 등이 소위 문자는 몰라도 세상을 보는 지혜는 깊은 분들이 적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혜는 분석으로 오지 않습니다. 분석을 쉴 때 지혜가 옵니다.


우리가 전문가들의 강의를 들으면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번떡이는 날카로운 지식에 또한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러나 전문가의 강의일수록 아는 것은 많아질지 몰라도 강의 후 마음은 별로 편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지식의 한계입니다.


한편, 마음공부를 많이 한 분들의 말씀을 들으면 알아지는 건 별로 없는 반면 마음은 이상하게 편안해집니다. 분석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의실을 나올 때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과학책을 읽을 때는 재미도 있고 알아지는 것도 많지만 무언가 답답해지지만 종교책을 읽으면 그렇지 않은 것도 이런 연유입니다. 세상을 오래 사신 분, 고생을 많이 하신 분들의 말씀도 그러합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문학이 중요해지는 이유도 대동소이합니다. 물질의 세계가 풍부해질수록 우리는 분석 없는 세계, 마음의 세계에 대한 갈망이 커집니다. 문화에 대한 갈망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많은 돈을 지불하고 음악회를 가고 노래를 듣고 연극을 감상하는 이유도 이런 데 있습니다. 음악을 들을 때면 분석 위주의 우리 사고가 쉬게 됩니다. 또 영화나 연극을 볼 때도 그저 바라만 볼 뿐 생각은 대체적으로 쉽니다. 그래서 분석의 세계에서 잠시나마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인문학은 분석 위주의 서양 학문이기에 이런 치유 효과가 강하지는 못하지만 과학이 발달할수록 인문학의 중요성이 커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분석의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생각을 쉬지 못합니다. 간혹 명상이나 참선한다고 앉으면 생각이 끊이지 않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이런 분석하는 습관을 다스리는 데 있습니다. 이른바 선가(禪家)에서 생각을 쉬어라(莫存知解)고 가르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수수께끼같은 화두(話頭)를 주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분석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문제가 주어질 때, 우리는 생각을 쉬게 됩니다.


*노자의 도덕경은 비분석의 세계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분석하지 않고 바라본 세계가 도덕경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가 무위입니다. 그러나 도덕경의 한계는 그런 세계로 가는 방법에 대한 제시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불교는 비분석의 세계로 가는 방법이 숱하게 제시됩니다.

 

*보현행원은 생각을 저절로 쉬게 하는 수행법입니다. 그러니 뛰어납니다.마음에 오로지 섬기고 모시겟다는 생각이 간절하면, 다른 생각이 뚫고 들어올 틈이 없어요. 그래서 사마타가 저절로 되는 겁니다. 실지로 보현행원을 하면 자기도 모르게 화두를 들어도 잡념이 크게 안 일게 됩니다. 앉으면 그냥 화두가 들려요. 평소에 원을 세우고 사무치게 행원을 실천하려고 맹세한 덕분이지요!

 

*화엄경의 경문이 책을 펼치면 누구나 멍해 지는 건, 바로 생각의 소멸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화엄경을 읽으면 아무 생각이 안 나거든요? 그냥 멍~해집니다. 도대체 무슨 소릴 하고 있는지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니 생각이 일어날 틈을 안 주지요. 그렇게 화엄은 불화엄의 세계로 들어가게 합니다. 그런데 다들 이걸 모르시지요. 심지어 화엄학자, 화엄승들마저도... 그리고는 화엄이 낫다, 참선이 낫다, 관법이다 아니다, 등등을 따지고 계십니다.

 

그렇게 멍~해 지는 가운데, 보현의 서원이 일어납니다. 일체중생을 구하고, 이 세상을 장엄불국토로 기여코 만들겠다는 보현의 서원이, 그 아무 생각 일어나지 않는 가운데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니 반야요 화엄인 것이지요. 空과 不空을 모두 아우르는 겁니다. 공도 아니고 불공도 아닌 것! 이게 또한 중도입지요...

 

멍~한 가운데 불보살이 온 우주에서 구름처럼 모이고, 화엄성중의 장엄한 노래가 울려퍼지는 것이 화엄경입니다. 아무 생각 안 나는, 생각 이전의 세계로 돌아온 우리에게 보이는 건 모두가 부처요 모두가 부처 세계인 대긍정 대화합 대조화 대 번영의 세계이지요. 그걸 화엄이라 부르고요. 그리고 그렇게 화엄성중의 찬탄이 이어지는 가운데 보현이 일어나고 선재가 법계에 들어가는 구도행이 시작되지요. 화엄은 그렇게 시작되고 전개되는 겁니다.

 

보조스님이 이런 화엄의 구조, 원리를 알고 그러셨는지는 저도 모르게지만, 어쨌든 보조스님의 간화선은 화엄선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스님의 화엄선이 어떤 건지 학자들도 몰라요.

 

*보현행원은 당장 일상에서 이익을 주며 수행의 세계로 이끌어줘요. 그러니 얼마나 뛰어난 가르침입니까.

 

 

 

 

행복메세지

-행복을 만드는 기도문(1)

 

법우님들

오는 음력 128일은

(양력 127)

부처님께서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하신 날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계시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고

부처님의 거룩한 제자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삼귀의를 기도합시다.

 

<삼귀의(三歸依)>

모든 중생을

어리석음과 번뇌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덕행(德行)과 지혜로

이끄시는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겠습니다.

 

모든 중생을

집착과 탐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참 자유와 풍요로

이끄시는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하며 따르겠습니다.

 

모든 중생을

마음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화합과 평안으로

이끄시는

부처님의 거룩한 제자들

청정화합(淸淨和合)

승가를 믿고 의지하며

살겠습니다.

-삼귀의 불교 기도문-

 

법우님들

매일 이 기도문을

암송하시면

법우님과 가족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부처님 가르침 되새겨

행복한 하루 만들어 갑시다.

감사합니다.

 

 

 

 

 

나무붓다야

나무달마야

나무승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