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5. 1. 17:50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여하시 본래면목: 건달바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
불교닷컴 강병균 포항공대 교수
1. 무아-유아-무아-유아
중국 선불교의 실질적인 창시자인 육조 혜능은, 떠꺼머리 행자신분으로 한밤중에 스승인 오조 홍인으로부터 궁극적인 가르침과 인가를 받고, 깨달음의 징표로 물려받은 (인도로부터 달마대사를 통해 전해진 석가모니 부처님의) 의발(衣鉢 가사와 발우, 즉 옷과 밥그릇)을 들고, 질시하는 무리들을 피해서 새벽같이 도망가다, 두 달 반 만에 대유령 정상에서 사품장군 출신의 혜명에게 따라잡힌다.
이때 혜능이 그에게 던진 질문이 ‘불사선불사악 정여시 나개시 명상좌 본래면목?(不思善不思惡 正與時 那箇是 明上座 本來面目)’이다.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을 때 명상좌 그대의 본래면목은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우리가 선악 고저 장단 등의 36대법(對法)을 포함한 일체의 (분별적)사유를 중단했을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과학이 발달한 이래로 ‘이 세상은 보이는 모습 그대로가 본래면목인 것은 아님’이 밝혀졌다. 그전에는 인간은 ‘우리 눈에 비치는 사물의 모습’이 ‘사물의 변치 않는 모습’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칸트는 ‘물자체 ding-an-sich’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물체를 이루는 아원자의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는데 거기 어디 물자체가 있을 것인가? 게다가 사물의 이름은 사람이 부여한 것인데, 그 이름에 걸맞는 것이 존재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낭만주의일 뿐이다. 이름은 우리의 소망과 선입관과 사물·현상에 대한 허술한 인식과 이해를 간직한, 우리 마음의 투영이다. 거기 무엇이 존재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나 지각하는 대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이 ‘존재한다’라는 말까지도 정의하기가 녹녹치 않다. 아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인간이 보는 대로, 동물도 사물(삼라만상)을 같은 모습으로 보리라 생각했다. 즉 사물에는 보는 생물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고정불변한 모습이 있고, 보는 기능은 모든 생물에게 동일하고, 동물들은 모두 ‘동일한 고정불변의 모습’을 본다고 생각했다.
빨간 꽃은 나에게나 바둑이에게나 동일하게 빨간 꽃이고, 박쥐가 듣는 자연의 소리는 우리가 듣는 소리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듣는 성품’이라 표현했다.) 즉 ‘불변의 듣는 성품’으로 소리의 고정불변한 모습을, 즉 본래면목을 듣는다고 생각했다. (‘본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반성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들리는 모습 그대로도 아니다.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가청주파수는 넓은 전체 소리주파수 중 극히 일부이다. 박쥐나 돌고래는 인간이 듣지 못하는 초음파를 듣는다. 산부인과에서 태아를 볼 수 있는 초음파영상을 연상하면 된다. 즉 박쥐나 돌고래는 생체 초음파캠코더(ultrasonic bio-camcorder)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바둑이(개)는 거의 색을 보지 못한다. 색맹이다. 바둑이는 네 가지 색만 볼 수 있다: 파란색, 노란색, 흰색, 검은색. 나머지 색깔은 이 네 가지 색깔의 색조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오렌지색은 약간 진한 노란색으로 나타나고, 빨간 색은 검은색 또는 짙은 회색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바둑이에게 '빨간' 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설사 바둑이가 화가가 되더라도, 수묵화가라면 모를까, 인상파 화가는 절대 되지 못한다.
이와 같이 동물들은 각자, 서로 다른 감각의 세계에 살고 있다. 세상은 수많은 파장의 빛과 소리로 넘쳐난다. 가시광선은 그 파장들 중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동물들은 인간이 보지 못하는 것을 능히 본다.
▲ 귀엽기 그지없는 생체 초음파영상기 큰돌고래. |
냄새 역시 마찬가지이다. 개의 후각능력은 인간의 수십만 배이다. 개의 뇌 크기는 인간의 10분의 1이나, 후각세포 개수는 50배나 된다. 그러니 후각능력이 뛰어날 수밖에 없다. 축구장 크기의 공간에 장미꽃 냄새 분자 하나만 있어도 맡을 수 있다. 개는 인간이 느낄 수 없는 수없는 종류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개가 느끼는 세상은 광활한 냄새의 세계일 것이다. 우리가 가지가지 색깔의 총천연색(總天然色) 세상을 보듯이, 개는 온갖 냄새로 가득 찬 총천연향(總天然香) 세상을 맡을 것이다.
개들에게 미술관이 있다면 그림 대신에 향기그림과 향기조각이 있을 것이다. 캔버스 여기저기가 갖가지 향기로 구성된 그림. 각 부분이 향기로 구성된 조각품. 세계적인 유명브랜드 향수병들로 만든 조각품. 자연에서 맡을 수 없는 초현실적인 향기로 가득한 초현실주의 후각예술품. 예를 들어, ‘빛의 속도로 평행우주속으로 퍼지는 나노 번째 블랙홀 향(香)’이란 제목의 후각예술품.
인간은 다른 사람이나 동물의 감정을 시각을 통해 느끼나, 개는 냄새를 통해 느낀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림에서 표정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듯이, 개의 예술품은 냄새를 통해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 꽃 냄새를 맡는 개. |
이제 과학의 발달로 뇌와 의식의 비밀이 풀리고 있다. 종교인들이 민망할 정도로 그 비밀이 마구 파헤쳐지고 있다. 임사체험, 유체이탈, 황홀경, 비전, 그리고 신비적 합일 등이 인정사정없이 해체된다. 뇌의 특정부분을 전기적으로 자극함으로써 그런 체험을 만들어낼 수 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자극을 받으면 ‘신의 임재’나 ‘신과의 합일’을 느끼게 만드는 뇌부위도 있다는 보고도 있다. (그 부위는 ‘神點 God spot’이라 불리며 뇌 여러 곳에 존재한다. 특히 측두엽이 중요하다. 종교적인 엑스터시가 ‘측두엽간질 발작’이라는 수그러들지 않는 설이 있다. 간질환자였던 도스토예프스키는 간질 발작 중에 느끼는 환희는,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더없이 황홀하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youtube에 들어가면, 황홀감에 대한 기억으로 눈물을 흘리며 그리 증언하는 간질환자를 볼 수 있다. 멀쩡하고 순박하고 착하게 생긴 미국 젊은이이다. 꼭 한번 보시기 바란다).
그래서 수천 년 전의 주장을 답습(踏襲)하는 종교인들의 마음에는 짜증이 일어난다. 그들이 궁극의 진리로 받들어 모시는 종교경전은, 수천 년 전에 쓰이어진 교과서를 단 한 번도 개정하지 않고 초판 그대로 쓰는 격이다. (우주의 비밀을 배우는 학생들은 절대로 업데이트가 되지 않는 그 옛 교과서에 실린 진리가 모든 진리라고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세뇌를 당한다.) 교정했다면 수천 판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2,000th edition of the holy bible. 매년 개정판을 내면 경전장사 이문이 쏠쏠할 것이다. 속세에서는 교과서제조업체와 저자들이 그 짓을 해댄다. 불쌍한 학생들은 혹시 성적이 나빠질까 불안해서 개정판인 새 책을 안 살 수가 없다.
종교계도 이 점을 심각하게 검토해야 한다. 그러면 혐오제품 판매인 지옥공갈·협박장사를 하지 않고도 재정문제를 많이 해결할 수 있다. 구원받으려면 새 경전을 아니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드물지만 가끔 개정판을 내는 자들이 있는데, 그 내용이 형편없는 개악이라 오히려 사이비라 비난을 받는다. 통일교 모르몬교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개정판 성경은 각각 원리강론 모르몬경이라 불린다. 하지만 현실은, 문자로 기록이 되지 않아서 그렇지, 어느 종교나 신도들은 시공을 통해서 끝없이 개정판을 만들어낸다, 자기들 머릿속에. 당신은 학교에서 당신자녀를 구한말 교과서로 가르친다면, 학교를 어마어마한 크기의 망치로 두들겨 부수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동일한 일(구한말교과서로 가르치는 일)이 종교와 종교경전에 벌어진다.
따라서 본래면목도 새롭게 볼 수밖에 없다. 인간의 변화 즉 진화와 더불어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밖에 없다. 뉴톤 역학이 상대성이론으로 재해석이 되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양자역학으로 재해석되듯이, 본래면목 역시 그래야 한다. 큰 틀조차 무너질 수 있으며, 큰 틀이 유지되는 경우에도 부족한 디테일이 채워져야 하고 불량한 디테일은 삭제되고 미개한 디테일은 리노베이트되어야 한다. (베다교는 불교에 의해서, 그리고 유대교는 기독교에 의해서 처참하게 부인되고 깨뜨려졌다.) 무상(無常)관에 의하면 우리 자아도 변화한다, 즉 진화한다. 그러므로 무아(無我)인 것이다. 오온(五蘊 몸과 마음, 육체와 정신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틀과 기능)이 물리세계의 법칙에 따라 진화한다면 즉 몸과 신경계와 뇌가 진화한다면, 자아 역시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 600만 년 전에 침팬지보다 미개한 상태였을 때는, 자아에 대해서는 고사하고 물질세계에 대한 의문조차 없었다. 지금 개나 침팬지를 비롯한 동물들을 보라. 우주에 대해서 무슨 호기심이 있으며, 자기의식을 들여다보는 메타의식(의식에 대한 의식. 의식을 의식대상으로 삼는 의식)이 있는가. ‘월월, 인간이 수시로 말을 걸어대는 저 이상한 막대기 같은 물건(스마트폰)은 무엇일까?’ 또는 ‘왈왈, 그 작동방식이나 원리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은 600만년 동안 열심히 새로운 자아를 만들었고, 그 만들어진(진화한) 자아에 대한 성찰이 태양계 역사상 최초로 폭발한 것이 부처님의 ‘무아사상(無我思想)’이다. 뭔가 지극히 견고한 것(알갱이)이 우리 내부를 꽉 채우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텅 비어있다, 즉 ‘공(空)’이라는 것이다(서양철학자 데카르트는 그 알갱이가 송과선에 있다고 주장했지만 낭설로 밝혀졌다). 그래서 불경은 공을 설명할 때 알갱이가 없는, 즉 까도 까도 결국 남는 것이 없는, 즉 빈공간만 남는 파초줄기를 들어 비유한다. 편하게는, 중국집 춘장 옆의 양파를 들어도 좋다.
▲ 속알머리 없는 양파 |
자기라는 의식이 없던 동물적인 상태에서 ‘자기라는 의식’이 생기고, 다시 ‘의식을 의식’하는 즉 ‘자기를 의식하는 의식’이 생겼으며, 부처님은 자기에 대한 반성의 결과로 ‘우리가 생각하듯이 자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의식이 없는 상태로서의 무아無我’에서 ‘의식이 있는 아我’로, 그리고 ‘의식이 있는 아我’에서 다시 ’의식이 있는 무아無我’로 발달한 것이다.) 현상적으로는, ‘없던’ 자아가 ‘생겼다’가 다시 ‘없어진’ 것이다. 그랬다가 힌두교의 영향으로 다시 ‘아가 있다’로 바뀌었다(무아無我 혁명이, 수억 인구의 강고强固한 힌두교 기득권세력의 반격으로, 결국 무산된 것이다.) 그것도 자그마치 우주크기의 아我인 ‘브라흐마(梵)’의 출현이다. 물론 불성, 여래장, 주인공이니 하는 말로 교묘히 변장·위장을 하고 나타났다. 그로부터(즉, 부처님의 초전설법으로부터) 1,000년 만에,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자고 외친 것이 혜능의 본래면목이다. 힌두교적인 유아론에 물든 불교에 내려친 삼천대천세계 크기의 초대형 망치질이었다.
이렇게 회복된 무아론이, 사이비 불교인들에 의해서, 참나 진아 주인공 등으로 다시 변질되고 더럽혀지고 있다. 즉, 무아(無, BC 10만년, 언어출현 이전)유아(有, BC 1000, 그리스 만신교, 인도 베다교, 중국 하늘·조상숭배)무아(無, BC 500, 부처님 출현)유아(有, AD 100, 유아론적 불교 출현)무아(無, AD 660, 혜능출현)유아(有, 현재 만개상태)로 변천한 것이다. ‘현대과학이라는 새로운 눈’을 얻은 21세기 인간이 새로운 세상을 보기는커녕, 오히려 예전에 능히 보던 것을 못 보는 청맹과니가 되어버렸다. 당달봉사가 된 것이다.
2. 건달바와 정자
본래면목은 고정되어있지 않다. 새로운 눈으로 새 세상을, 즉 새 ‘몸과 마음’을 봐야 한다. 시공의 흐름을 따라 우리도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변화하고 진화해야 한다. 우리 심신이 진화한다는 그 사실에 순응해야한다.
▲ 난자(왼쪽). 둥그런 난자를 둘러싸고 있는 해바라기 꽃잎 같은 부분은 진입을 시도하는 정자들 이다. 난자 안의 둥그런 부분은 난황이다. 난자를 둘러싼 정자들. 전자현미경 사진 |
2,000년 전 일부 불교승려들은 건달바(일종의 영혼)가 여체(女體)에 들어와야 임신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21세기의 인간은 초등학생도 알고 있다, 수태 순간에 여체(난자)에 들어가는 것은 건달바가 아니라 정자라는 것을. 전자현미경으로 찍은 정자와 난자의 조우순간을 보라. 거대한 공같이 생긴 난자를, 몹시 길고 가느다란 꼬리를 단 조그만 올챙이 같이 생긴, 정자가 뚫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라. 이 어마어마한 순간에 왜 건달바라는 얼토당토않은 미개한 시대의 발명품이 끼어들어 ‘순수한 신비’를 때려부수고 오염시키고 살해하며 어지럽히는가.
과거에 서양인들은 사람모양으로 생긴 조그만 영혼(homunculus)이 정자 속에 들어가 웅크리고 앉아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림도 남아있다. 그런데 2억 개나 되는 그 수많은 정자 마다 각각 하나씩 영혼이 들어있다는 말인가? 아마 옛날 사람들은, 정액이 들어가야 임신이 된다는 것은 알았지만, 정자가 그렇게 많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아니면 영혼은 2억 개 정자 중에 특정한 하나에만 존재하고, 그 놈만이 난자에 도달한 것이다. 그렇다면, 2억 개 정자의 난자를 향한 달리기시합(다카르 경주)은 처음부터 조작된 경기이다. 나머지 정자들의 경주는 다 쓸모없는 들러리 경주이다. 설마 그들이 페이스메이커일 리는 없으리라. 아니면 뒤늦게 자궁에 진입한 다른 수컷의 정자들의 전진을 저지하는 역할을 하는 것일까?
초기기독교 교부 테르툴리아누스(AD 155?-230?)는 여성이 구강성교 중에 정액을 삼키면 식인행위(cannibalism)에 해당한다고 비난했다. 아마 이분도 정액 속에 들어있는 ‘사람모양으로 생긴 조그만 영혼(homunculus)의 존재’를 믿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살인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겠는가?
잠깐만! 이란성 쌍둥이는 영혼을 가진 정자가 2개나 된다는 말이 아닌가? 정말 괴이한 일이다. 영혼이론은 정말 문제가 많은 이론이다. 난자는 하나만 배출되어 있는데 영혼을 가진 정자는 2개라면 둘 사이에 영혼 터지는 싸움이 일어나겠다. 가만! 그 경우는 일란성쌍둥이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겠구나. 그러려면 둘은 2억 마리 형제들 사이에서 약속한 듯이 맨 앞으로 나와 사이좋게, 더 빠르지도 더 늦지도 않게 보조를 맞추어, 같이 행진을 해서 동시에 같은 난자에 진입해야 한다. 다른 난자에는 눈길도 주지 말아야한다. 난자는, 정자가 한 마리라도 난자 안으로 들어오면, 문을 걸어 잠가버리기 때문이다.
아무튼 영혼이론은 괴이한 이론이 아닐 수 없다. 이 이론의 결정적인 잘못은, (일부) 정자에는 영혼이 있다고 하면서도, 난자에는 영혼이 없다고 가정하는 데 있다. 여기서 심각한 두 개의 불합리한 점이 발생한다. 첫째로 여성차별주의적인 이론이며, 둘째로 여성도 태아 DNA의 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허점이 있다. 왜 2억 마리 들러리 정자들에도 DNA가 있다는 말인가? 2억 벌의 여분의 DNA라니, 이 무슨 (조물주의) 어리석은 설계란 말인가? 만약에 영혼이 정자를 타고 난자로 달려가다 정자가 고장이 나는 경우 갈아타려고 여러 마리 정자를 준비했다손 치더라도, 2억 마리는 너무 과하지 않은가? 몸집비율을 감안하더라도, 정자보다도 어마어마하게 더 먼 거리를 달리던 몽고기병들이 몽고초원에서 유럽의 비엔나까지 2주 만에 달려가는 데도 각자 4마리 정도의 말이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정자는 이동효율이 몽고기병의 5백만 분의 일이라니, 어마어마하게 비효율적인 정자다!
앞에서 소개한 정자로 에워싸인 난자 사진을 보라. 수많은 정자가 난자로 진입하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한두 마리만 영혼이 있다고 하는 것보다는, 모두 예외 없이 영혼이 있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난자가, 정자 한 마리가 난자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껍질을 단단하게 만들어 다른 정자들이 못 들어오게 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DNA를 가졌다고 해서 영혼이 있다면, 난자도 체세포도 모두 영혼이 있어야 한다. 한 사람 몸의 100조 개의 체세포에 존재하는 100억 명의 영혼! 한 영혼 안에 ‘바글바글’ 거주하는 100조 명의 영혼들! 정말 기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하루에도 수없이 세포가 탄생하고 죽으니, 그에 따라 세포들의 영혼들도 수없이 나타나고 사라진다. 더욱더 기괴한 현상이다.
이러 저리 아무리 따져 봐도 영혼이론은 허점투성이이다. 그냥 버리는 게 낫다. 그래도 계속 쓰고 싶으면, 고치는 것보다는 오히려 제대로 된 것을 새로 사는 것이 낫다. 불교제품을 사시라. 수태 시 영혼이 들어온다는 불교이론이 그나마 가장 우수하기 때문이다.
▲ 정자 속의 영혼(왼쪽). 그림 왼쪽의 정자머리에 들어가 있는 머리가 몹시 큰 '작은 사람(homunculus)'을 보라. 19세기의 판화. 연금술사 파우스트(Faust) 앞의 둥근 용기 속의 ‘작은 인간(homunculus)’을 보라. |
매우 놀랍게도 힌두교에 의하면 2억 개 모든 정자가 각기 영혼이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인사로서는 한때, 수십 년 전 뉴에이지 시대에, 미국에서 대단히 유행을 한 ‘하레 크리슈나 운동’의 교주 프라부파다(Srila Prabhupada)가 있다. 힌두교는 모든 것에 아트만(영혼)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경우 난자의 영혼과 정자의 영혼이 합쳐져서 (수정란이라는) 하나의 영혼을 만들어낸다. 이 이론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이 정자의 영혼유무에서, 윤회론을 주장하는 불교와 힌두교 두 종교가 근본적으로 갈라진다. 통상 불교는 정자에 영혼이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는 정자를, 스스로 움직이는 백혈구와 같은, 일종의 생물학적 기계(bio-machine)로 보는 경향이 있다. 모든 것에 영혼(아트만 我)이 있다는 힌두교와, 그 어디에도 영혼(아트만 我)이 없다는 불교. 두 종교는 극과 극이다!
2,000년 전, 그때는 어느 누구도 정자와 난자의 개념이나 존재를 몰랐다. 그래서 건달바나 중음신(中陰身)이라는 개념이 생긴 것이다. 수태의 순간에 몸에 들어가는 영혼. 정보를 소지한 존재. 과거의 업과 과거에 대한 기억을 짊어지고 옮기는 존재. 피부색, 광대뼈유무, 파상모, 직모, 길고 짧은 하체와 사지, 크고 작은 골반, 째진 눈, 동그란 눈, 좁고 넓은 미간, 비굴함, 용감함, 너그러움, 총명함, 인자함, 도벽, 폭력성, 우울증, 조증, 언어능력, 음악성, 미술성, 통찰력, 공간감각, 산술능력, 추리력, 분석력, 논리적 사유력 등 각자의 육체적·정신적 특성과 성격을 담지해서 새 몸으로 옮겨주는 존재.
그런데 현대과학은, 다윈이 예측한 대로, 그런 존재를 발견했다. 유전자이다! 그 기하학적인 모양과 화학적 구조 및 작동방식도 밝혀졌다. 모양은 이중나선(double helix)이고, 구조는 네 종류의 DNA인 A, C, G, T(아데닌, 시토신, 구아닌, 티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작동방식은 자기 복제이다. 마침내, 그런 정보의 담지자가 발견되었으므로, 더 이상 건달바나 중음신이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정자는 정보를 가득 담은 생체 usb이다! 게다가 고객을 향해 스스로 움직여 정보를 배달하니 서비스만점이다. 주문을 받은 적도 없는 2억 마리의 올챙이들이, 고객의 필요사항(needs)을 미리 파악해서, 무한 경쟁을 벌인다. 교미 후 더 큰 암컷에게 잡아먹히는 사마귀처럼, 정자는 거대한 난자와 교미 후 유전정보를 전해주고는 난자 속에서 해체된다. 불쌍한 수컷들은 올챙이시절이건 개구리시절이건 죽도록 경쟁을 해야 하는 운명이다.
▲ 이중나선 DNA 그림(왼쪽). 노란색, 녹색, 붉은색, 똥색이 4종류의 DNA인 A, C, G, T를 나타낸다(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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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사람들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왜 그리되는지는 몰랐다. 식물의 각기 다른 모습은 유전자 때문이지 영혼 때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교에 의하면 식물은 식(識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동물은 의식이 있다. 뇌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대뇌 변연계에 손상이 오면 감정이 없어지며, 해마에 손상이 오면 기억을 하지 못한다. 변연계는 감정을 담당하고, 해마는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바꾸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식이나 정신적인 능력 역시 신체기관(뇌)의 작용이며 영혼의 작용이 아니다.
만약 영혼의 작용이라 고집한다면, 식충식물인 파리지옥(Venus flytrap)의 잎이나 통발(bladderwort)의 오무림 역시 '영혼의 작용'이라고 억지를 부려야한다. 생물계에 관한 한, 용수의 팔불중도(八不中道)는 진단은 옳았으나, 그 원인은 모른 것이다. 팔불중도를 성립시키는 근거는 다름 아닌 유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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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上記)한 두 식물은 (불교와 기독교에 의하면) 영혼이 없어도 지성적으로 작동하는 경이로운 생물의 예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겸손해야 한다. 위대한 스승 ‘자연’ 앞에서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언행(言行)을 삼가해야한다. 특히 뭐든지 다 안다고 교만하게 큰소리치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망하는 수가 있다. 뭐든지 다 아는 존재(신이나 초인)를 잘 안다고 큰소리쳐도 안 된다. 이런 말은, 코흘리개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 기죽이려고 하는 “우리 아버지와 형은 엄청나게 힘이 세고, 모르는 게 없다”는 말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유치한 말이기 때문이다.
침팬지나 돌고래나 개가 인간과 같은 지능·사유·언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것은 유전자 때문이다. 영혼 때문이 아니다. 영혼은 존재한다 해도 영혼에는 그런 능력이 없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런 능력을 윤회를 통해 잃어버린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정신적인 능력을 개로 환생하면서 잃어버렸는데,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면 갑자기 그 능력이 회복되는가? 처음으로 인간으로 환생한 개라면, 개로 사는 동안에 새로 획득한 정신적인 고등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갑자기, 인간이 지닌 정신적인 고등능력이 생겨나는가? 만약 그게 아니라면, 영혼은 무한한 능력을 소유함에도 불구하고 개나 인간의 육신이 그 능력을 제한하고 가둬놓는 것인가? 육체는 정신(영혼)의 감옥이란 말인가? 개라는 육체에 갇힌 테르툴리아누스의 영혼! 필시, 그는 연기법에 무지한 무명업보(無明業報)로 지금까지 40번이나 줄곧 개로 태어나고 있으리라.
사물은 그대로이건만, 현미경의 배율에 따라 그리고 현미경의 종류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진다. 이 점에서 사물은 현미경이란 측정도구에 갇힌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물과 현상은 우리 인식능력·수단에 갇힌다. 아마 이런 식으로 영혼을 이해하는 것이리라: 본래 가진 무한한 능력을 회복하는 것뿐이라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아메바도 원생동물도 무한한 능력을 가진 영혼이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임은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이런 유(類)의 이론으로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칼 포퍼가 말했듯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자연현상과 사회현상을 보고 제기한 ‘어떻게 그런 현상이 가능하냐’는 물음에, ‘신이 했다, 즉 신이 그 현상이 일어나게 조처했다’는 답은 실제적으로 아무 답도 주지 못한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발달에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 농업기술혁명이나 과학기술개발이나 정치·경제제도발전이나 의학발전을 가져오지 못한다. 무슨 일이든 ‘신이 했다’하고 ‘무한한 신비(감)’에 빠져들면 그만이다. 그런 신비는 일종의 정신병(정신이상)에 지나지 않는다. 중학교에서 수학시험문제를 받은 중학생이 문제를 푸는 대신에 ‘심오한 수학과 그런 오묘한 수학시험문제’의 창조를 가능하게 한 신에 대한 깊고 깊은 신비감에 빠져있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그것도 시험시간 내내! 그런 학생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종교적 신비주의자들은 유치원입학부터 대학졸업까지 그리하는 이들이다. 심하면 죽을 때까지 그리한다. 외부세계를 의식하지 못하고 종교적 엑스터시에 빠져 산다. 위험에 처한 타조가 머리를 흙에 처박고, 위험을 못 느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과학의 발달로 그 존재가 밝혀졌다. 몸과 마음의 특징을 전달해 만들어 주는 존재가 마침내 만천하(滿天下)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난자와 정자라는 성세포에, 2m 길이로 접혀 들어앉아있는 이중나선 DNA이다. (2m라는 길이는 세포크기에 비해서 엄청나게 긴 길이이다. DNA의 길이는 세포지름의 백만 배 정도나 된다!)
그러므로 (만약 건달바가 존재한다면) 건달바는 둘이다!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육체적인 특징이 유전자에 의해서 즉 난자와 정자 양쪽의 유전자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정신적인 특성 역시 난자와 정자 양쪽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아야 한다. 백번 양보해서 인간에게 영혼, 즉 건달바가, 즉 중음신이 있다고 인정해도 새로 태어나는 아이의 영혼, 즉 건달바는 ‘부의 영혼’과 ‘모의 영혼’의 합이다! 즉 수태 시(時) 두 개의 건달바가 합체를 해서, 하나의 건달바를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유전자의 기능의 확인에 있어서, 일란성 쌍둥이의 예가 결정적이다. 이들은 육체적으로 같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성격 취향 생각까지 매우 유사하다. 출생 시 헤어져서 각기 다른 가정에서 양육되다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난 경우에도 동일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그들은, 오랫동안의 공간적·물리적인 격리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비슷한 성격과 취향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배우자나 직업이나 인생경로까지 비슷한 경우도 있다. 이 경우, 건달바나 영혼이나 중음신 이론이 성립하려면, 아주 비슷한 업을 가진 놈들이 복수로 수태 시 수정란으로 들어와야 한다. 다분히 억지스럽다는 점을 부인하기 힘들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문화유전자도 있으므로 일란성 쌍둥이가 정확히 같은 존재인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생체유전자도 그 발현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이 점에서,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유전자 결정론’은 참이 아니다. 즉, 생명은 필연과 우연의 협주이다. 다른 말로 하면, 생명은 유전자와 (시공간적인) 환경의 협주이다. 정보와 환경의 어우러짐이다. 불교적 표현으로는 생명은 정보와 환경의 연기(緣起)이다.
그런데 이 유전자는 돌연변이한다. 그래서 공가중(空假中) 삼제(三諦 세 가지 진리)가 성립한다. 유전자의 존재는 가(假)이고, 유전자의 변이는 공(空)이며, 생명체의 진화는 중(中)이다. 부연설명하자면 이렇다. 무언가 있으므로 ‘가(假)’이며, 그 무언가가 고정불변한 상태로 유지되지 않으므로 ‘공(空)’이며, 결국 진화라는 ‘가도 아니고 공도 아닌 생명의 존재양태’는 ‘중(中)’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유전자의 발현과 진화는, 앞서 언급했듯이 독자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연기적으로 이루어지므로, 생명과 환경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즉 불일불이(不一不二)이다.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나와 우주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장자의 거대한 세계관을 상징하는 붕새는, 바로 이 점에서 호소력이 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유전자가 거의 일치하며, 우주와 동일한 화학물질로 구성되어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구이자 우주이다.)
바로 이 공가중 삼제(空假中 三諦), 불일불이(不一不二), 오온즉시공 공즉시오온(五蘊卽是空 空卽是五蘊)이 우리의 본래면목이다. 중도연기적인 본래면목이다. 따로 진아, 참나, 주인공과 같은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본래면목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으로 적나라(赤裸裸)하게 목격한 ‘생명과 사물과 현상’의 비어있는 모습에 인간의 우뇌는 어마어마한 공포를 느낀다. 이때 ‘반야지혜’라는 좌뇌는 우리로 하여금 공포를 벗어나게 한다. 공포(客 객관)와 ‘공포를 느끼는 마음(主 주관)’과 ‘공포의 일어남, 즉 공포를 느낌’은 연기적인 현상이지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일어나게 함으로써, 즉 ‘공포는 본래 없는 것’이라는 인식전환이 일어나게 함으로써.
이 점은 반야심경에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윈리전도몽상 구경열반(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罣碍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함으로써 마음에 걸리는 장애가 없으며, 장애가 없는 고로 공포심이 없으며, 전도된 몽상을 멀리 여의고 구경열반에 들어간다.
1,350여 년 전에 혜능은 외쳤다. 본래무일물 하처야진애(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본래 한물건도 없는데 어디 때가 끼겠는가? 그렇다! 45억년 광대한 진화의 여로에 무슨 본래면목이 있어서 번뇌가 끼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아메바나 지렁이도 정신적인 번뇌가 있다고 인정해야한다. 그러므로 우리(생명체)의 본래면목은 중도연기일 뿐이다(本來面目 中道緣起 空假中 是三無差別). 기세간의 본래면목 역시 중도연기이다.
▲ 다윈이 탄 비글호 그림(왼쪽) 비글호 항로(AD 1831-1836) |
▲ 진화의 계통수(系統樹 evolutionary tree). 우상(右上)에 다윈이 인간을 대표해 앉아있다. 다윈 바로 왼쪽에는 침팬지가 앉아있다. 다윈은 문명동물이라 의자에 앉아있고, 미개한 침팬지는 그냥 바닥에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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