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무한 (無限)

2015. 12. 19. 18:15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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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무한

- 불교는 무한세계를 한묶음으로 인식 -
- 자유로운 사유 무한넘어 완결에 접근 -

대부분의 경우 인간은 자신의 주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다. 생활이 단순한 시절에는 기껏해야 이것, 저것, … 정도가 관심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아프리카나 아마존의 오지의 원시사회에서는 지금도 하나, 둘, 많다 정도의 수만을 갖고 살고 있다. 3이상의 수에 대해서는 그저 많다고 할 뿐이다. 이 사실은 어린이의 수 세계를 관찰하면 쉽게 알 수 있다.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는 하나, 둘, 그리고 많다, 무지무지하게 많다… 정도로 수를 표시한다. 이 단계에서 한 걸음 발전한 인간은 1, 2, 3, … 백, 천, 만, …으로 수를 확장해 나갔다. 상당한 수준의 문명 사회가 되어도 만, 억 정도면 충분했다. 이때 어느 천재가 스스로 물었다. 도대체 수는 얼마나 커질 것인가? 분명히 얼마든지 수는 커 갈 수 있다. ‘얼마든지’라는 뜻은 무엇인가? 조금 똑똑한 사람이 대답한다. 그것은 ‘무한’이다. 무한이란 무엇인가? 지금도 전문적인 수학자, 철학자가 아니면 대부분은 그저 ‘무한이면 되지 그 이상 쓸 데 없이 골치 아프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해서 그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마치 어린이가
1, 2, 3, 많다. 무지무지하게 많다…
라고 하는 것, 또는 원시 사회에서
1, 2, 많다, 많다, …
라고 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름이 없는 일이다.

1, 2, … 무한이라는 것과
1, 2, 3, … 만, 억 …, 무한이라는 것 사이에 후자에게는 좀더 많은 수가 등장할 뿐이고 결국에는 무한으로 낙찰되는데 이들 3자 사이에는 근본적으로는 별다름이 없는 것이다.

다만 많다, 또는 무지 많다는 말을 무한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1, 2, 3, … 무한으로 커져 간다는 것과
1, 2, 3, …을 한 덩어리로 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불교적인 수 체계는 아승기(阿僧祇), 나유타(那由他), 불가사의(不可思議) 무량수(無量數)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무량수는 크기는 하지만 1부터 시작되는 수의 연장선에 있는 유한의 수이며 무한으로 뻗어 가는 한 단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들을 한 묶음으로 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1, 2, 3 …, n으로 그친다면 아무리 n이 큰 수일지라도 유한이다.

1, 2, 3, …은 무한으로 확대되어 간다는 동적인, 말하자면 무한이 될 가능성 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1, 2, 3, …이 한 덩어리가 되었다고 할 때는 완성된 무한이다. 조금 혼동하기 쉬움으로 좀더 자세하게 이들 두 무한의 차이를 생각해 보자.

(1) 1, 2, 3, …… → 무한으로 커 가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한편
(2) {1, 2, 3, ……}을 끝까지 포함하는 한 덩어리를 생각하는 것을 완성(완결) 무한이라고 한다.

현실적으로 보거나 듣지 못한 사실도 머리 속에서는 생각할 수 있으며 적극적으로 그 존재를 확립할 수 있다. 이때 순수 사유의 철학적 세계가 전개된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유한의 시간 위에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 유한의 인간이 어떻게 계속 무한으로까지 수를 셈할 수 있는가? 또는 완성된 무한은 어떻게 인식하는가?라는 철학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불교적인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인간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부처가 되는 인간은 단순한 생물적인 존재가 아니나 인간은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의 대상에는 무한도 포함시킬 수 있다. 자유로이 사유 세계를 넘나들고 유한의 올가미를 벗어날 수 있는 경지가 ‘무애(無碍)’이다.

불교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유한 세계의 극점에까지 생각하고 다시 그곳에서 무한 세계를 넘어간다. 이성을 지렛대 삼아 상식적인 세계를 벗어나서 비약을 한다.

가령 <법화경>에는 지용(地涌)의 보살 수는 5만 항하사(恒河沙)로 돌출했다. 또한 각 하나의 보살에는 5만 항하사의 시종이 이어져 있다. 이 논리를 계속 전개해 가면 한 사람의 시종에 또 5만 항하사 만큼의 그 아래 종자(從者)가 있고, 또 그 아래…라는 식으로 분출되는 수의 가능성은 무한으로 뻗어 가고 있다.

여기서 이들 거대한 무한 세계 모두를 한 묶음으로 인식, 파악하는 이성(부처의 지혜)의 존재를 알수 있다. 이와 같이 해서 불교적인 지혜는 가능한 무한 세계를 넘어 완결된 무한에 접근하는 것이다. 불교적 사유에서는 늘 이 문제를 다루며 그 가능성을 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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